## 249화: 이브의 술버릇
삽시간에 이샤트의 옷자락 끄트머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벨리아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눈치도 없는 참석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었다.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네.’
지루함을 참고 일일이 인사를 받아주던 이벨리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 명의 무리를 발견하자마자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꼴뚜기와 두 데퐁트라……. 테사가 제발 연회장만은 엎지 말라고 했는데.’
에드윈의 팔에 손을 올리고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온 세레스가 간소한 예를 차려 얕게 묵례했다.
아직 정식 황태자비는 아니었기에 따지자면 제법 무례한 태도였으나 이벨리아는 굳이 이를 꼬집어 지적하진 않았다.
‘똥한테 진흙 묻었다고 해봤자 뭐가 달라지나.’
세레스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에 꽂으며 여상하게 웃었다.
“드디어 성년이 되셨군요, 공녀님.”
“축하라면 받지.”
“물론 경하 드려야 할 일이지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연회 아니겠습니까.”
묘하게 ‘단 한 번뿐인’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이벨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던 찰나였다.
곁에 서 있던 리카드, 이젠 정식으로 데퐁트 후작위를 승계 받은 그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이벨리아의 시선을 끌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몸을 일으키시지요. 후작께서 제게 보이는 예로는 과한 것 같은데.”
“공녀님께 보이는 예로 모자란 것은 있어도 과한 것이 있겠습니까. 새로이 데퐁트의 가주 직을 이어받고도 제대로 인사 한번 드리지 못한 불찰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용서고 뭐고 할 게 있겠습니까, 우리 사이에.”
뼈가 있는 말이었다.
우리 사이에 부고 소식 아니면 굳이 알릴 필요 있겠냐는 날 선 말.
그 진의를 짐작하면서도 리카드는 예의 바르게 웃어 보였다.
“그렇지요. 우리 사이에…… 참으로 길고 긴 인연이었지요.”
“악연 아닐까 싶은데.”
“저 역시 아르티나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가 옳았다고 생각진 않습니다.”
“……?”
갑자기 자기 아버지를 날름 팔아버리네?
“하여 감히 선언컨대, 제가 이끌 데퐁트는 과거와는 다를 것입니다.”
이렇게 뱀 허물 벗듯 스르르 새 인간이 되시겠다?
“초대 가주님의 기조를 충실히 따라, 황가에 충성하며 신권의 대표인 아르티나를 굳건히 보필하는 우방이 될 생각입니다.”
리카드가 결연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선뜻 믿기 어려우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추후 행동으로 보여드리지요.”
“흐음…….”
잠시 뜸을 들인 이벨리아가 맑게 웃었다.
“그것참, 반가운 말씀이로군요.”
“이 불민한 가주의 진심을 믿어주시는 겁니까, 공녀님.”
“우리가 반목했던 것도 전부 옛날 일이죠. 새 가주를 믿지 못할 이유도 없고.”
“……공녀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르티나와 데퐁트가 힘을 합한다면 에르카디아는 전례 없는 번영을 이룩하겠지요.”
이벨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리카드는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마주 잡았다.
언뜻 용서와 화합이나 다름없는 모양새.
제법 오랜 기간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온갖 인간 군상을 다뤄온 리카드는 속으로 조소했다.
‘공녀, 공녀, 다들 앵무새처럼 짹짹대더니만.’
별거 없잖아?
‘역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것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이렇게 잘 속아 넘어가서야 원. 긴장했던 내가 바보 같군.’
그리고 리카드의 말끔한 면상을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생각했다.
‘얘는 내가 자기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짜?’
……에이, 설마.
그렇게 멍청할 리는 없지.
‘이건 이중으로 판 함정이다. 내 연기를 믿는 척을 해서 날 방심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야. 제법인걸, 이 자식.’
그간 마왕이나 선대 데퐁트 후작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모사꾼들만 상대하던 이벨리아는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 중에 멍청이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
파라반트의 마스터는 한참 이벨리아를 바라보다가 어렵사리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아교라도 발라둔 것처럼 시선이 붙박인 탓에 떼어내는 것이 실로 고역이었다.
화려한 연회장을 주욱 둘러보자, 저쪽 한구석에 물의 정령왕과 황태자, 그리고 붉은 머리 청년이 함께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마스터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여긴 간택 받지 못한 자들의 모임인가? 그렇다면 나도 좀 끼워주지.”
“간택 받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도 근본이란 게 있다.”
“아, 나는 천출이니 끼워줄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 외엔 다 근본이 없지. 물 덩어리와 족보 잃은 털 뭉치도 포함.”
“이 제국 황태자 전하께서는 인성이 파탄 났군.”
“파탄 난 인성으로 그대 모가지를 잘라버리기 전에 입 조심하지.”
“전하야말로. 내가 마음먹고 정보를 틀어쥐면 퍽 곤란하실 텐데 말이야.”
두 인간의 말씨름에, 위대한 용은 다리를 꼬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찮은 인간들이 옥신각신하는 꼴이란. 내 본체 이빨 하나보다도 작은 것들이.”
“네 본체라 해봤자 봉제 인형 수준 아닌가. 눈에 잘 보이지도 않게 작아서 밟고 다니기 딱 좋은.”
“아니거든? 나 이제 입 쩌억 벌리면 너희 같은 것들 100개도 먹어버릴 수 있거든?”
“말도 안 되는 허세는.”
“진짜거든? 용한테 잡아먹힌 황태자로 역사서에 남아볼래?”
이를 바라보던 엘라임이 같잖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군.”
경쟁자들을 바라보는 눈에 멸시가 가득 담겼다.
“그대들은 내 계약자의 감정에 호소하며 징징대는 떨거지들일 뿐이다. 근본 없기로 따지자면 형체 없는 관계나 운운하는 그대들이 근본 없는 것이지.”
“난 이브의 소꿉친구다.”
“난 누나의 동생이야!”
“난 계약자라고.”
으르렁대던 셋의 시선이 일제히 파라반트 마스터에게로 향했다.
넌 뭐냐?
저는 그냥…… 마스턴데요.
할 말이 없어진 마스터가 지나가는 하인이 든 쟁반에서 위스키 잔 네 개를 집어 엘라임과 루드비히, 엔리르에게 각각 건넸다.
“자. 자.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지. 저 악마가 얄미운 것은 다들 매한가지 아니겠나.”
가열하게 근본 따지던 셋은 본능적으로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가.
“그러니 한잔 쭉 들이켜면서 친목을 다져보자고.”
타악. 마시지 않은 술잔을 내던지듯 내려두고 홀연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홀로 독주를 털어 넣은 마스터가 입가를 훔치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다들 사교성은 엿 바꿔 먹었나. 쯧쯧.”
***
한편, 여전히 참석자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아가레스가 까주는 새우를 냠냠 잘도 받아먹던 이벨리아는 연회장 천장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을 깜박였다.
‘뭐야, 저거.’
허공에 난데없이 생긴 익숙한 생김새의 저것은…….
‘균열?’
생긴 것을 보면 균열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여태껏 보아왔던 것보다 심히 작은 미니 균열이다.
곧이어 균열 부근에서 짙은 마기가 일렁였다. 과거 1급 균열에서 느꼈던 것보다도 더욱 어둡고 깊은 마기.
이를 단번에 알아챈 것은 정령왕들과 악마들, 엔리르, 이벨리아, 그리고 휴고, 루드비히, 아르칸 정도였다.
통상의 균열과 달라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호들갑을 떨어봤자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할 뿐이다.
재빨리 시선을 마주친 실력자들은 다른 이들이 알 수 없는 한도에서 전투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저 일렁이다가 사라지면 다행이련만.’
‘만에 하나 균열이 팽창할 수도 있어.’
그렇게 아는 이들만이 긴장하여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와중.
- 스스스슥.
균열을 찢고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작다. 빛이 난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꽃다발? 아니, 보석?’
엄밀히 말하자면, 보석으로 세공한 꽃이 한 아름 묶인 꽃다발이 균열에서 바닥으로 수직 하강했다.
기가 막히게 이벨리아의 지척으로 떨어졌으나, 아가레스도 이벨리아도 굳이 잡지 않았기에 보석 꽃다발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그대로 대리석 바닥에 충돌했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뚫고 연회장을 울리는 쨍한 소리에 일순 시선 돌린 귀족들이 이내 감탄했다.
“어머, 보석으로 만든 꽃다발이네요!”
“누가 공녀님께 드리는 걸까요?”
“허공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깜짝 선물인가 봐요!”
주변 참석자들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이벨리아는 그저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몸을 낮춰 꽃다발을 집어 들어 건넸다.
“볼래, 이브?”
“응.”
꽃다발 위에는 투박한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이벨리아가 카드를 뒤집었다. 동시에 헛웃음이 터졌다.
“하.”
카드에는 거칠 것 없이 끝을 길게 뺀 필체로 적혀 있었다.
「그대의 본막에 축복을. 호적수를 만난다는 건 얼마나 기꺼운 일인지. - 바알」
와그작 카드를 구겨버린 이벨리아가 꽃다발을 뒤로 휙 내던졌다.
“바알치 주제에 축복은 개애뿔.”
마왕의 축복은 저주 아니냐고.
네 축하는 안 사요, 안 사!
***
어느덧 달이 휘영청 떠오른 연회의 막바지였다.
오늘 단 하루 공작저에서 머물 기회를 얻은 참석자들은 흥이 올라 거나하게 술을 마셔댔다.
“크으. 이 샴페인 죽이는구먼!”
“이 보드카는 또 어떻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참석자들을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다들 저걸 아주 맛있다며 먹네.’
스윽. 시선을 돌려보니 아빠와 엄마는 서로를 바라보느라 삼매경에 빠져 계시고, 오라버니들은 연인들과 밀어를 속삭이느라 정신이 없다.
‘좋아. 나도 이젠 어엿한 어른이니까.’
저거 한 잔쯤은 마셔도 돼. 그게 어른의 특권이야.
호기심이 차오른 이벨리아가 지나가는 하인의 쟁반으로 손을 뻗었다.
실수였다면, 성인이 되기 전까진 술을 입에도 대본 적 없는 이벨리아로서는 어느 것이 초심자에게 알맞은 술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게 색이 예쁘네.’
색이 예쁜 게 맛도 있겠지.
본디 무엇을 먹는 일에 있어선 망설임 따위 없는 이벨리아가 술잔을 냅다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근처에 모여 있던 아가레스와 루드비히, 엘라임과 악마들이 동시에 외쳤다.
“안 돼!”
“이브!”
황급히 불러보았으나 이미 이벨리아는 분홍빛의 예쁜 액체를 그대로 들이켜버린 뒤였다.
그것도 단번에. 바닥까지. 머리 위에 털어도 나오는 것 하나 없을 정도로.
이벨리아가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쥐며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케에엑!”
“바보야! 그건 샴페인이 아니라 보드카라고!”
“도, 독이다, 독이야……! 이브 죽어……!”
“이 사고뭉치가!”
엘라임이 휘청이는 이벨리아의 등을 받친 채로 맑은 물을 입에 흘려 넣었다.
이벨리아는 타는 듯한 목의 통증이 없어질 때까지 엘라임의 소매를 붙잡고 꿀꺽꿀꺽 물을 마셔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벨리아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빈 술잔을 바라봤다.
“으으…… 저게 뭐야…… 저 끔찍한 암살 도구 뭐야…….”
루드비히가 걱정을 가득 담고 이벨리아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이건 백 프로 취한다.’
보드카란 본디 한겨울 전쟁하는 병사들이 몸을 달구기 위해 마시는 것.
술고래가 마셔도 취할 정도로 도수 높은 술이니 난생처음 입에 댄 이벨리아가 멀쩡할 리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이벨리아는 다소곳하게 앉아 커다란 눈을 슴벅일 뿐이었다. 심지어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로노베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벨리아의 팔을 살짝 쓰다듬었다.
“밥풀 폐하. 괜찮아?”
“응!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응! 나 아무렇지도 않아!”
오. 뭐지. 이 제국 새로운 말술의 탄생인가?
마르바스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이 정도면 나랑 대작해도 되겠는데?
아가레스 역시 심히 의외라는 듯 이벨리아의 손등을 쓸었다.
“이브.”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토끼 아니야?”
“괜찮은 거 맞지?”
“응! 나 아주 말짱해!”
이벨리아가 방실방실 웃으며 플로어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옆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토끼 아니야?”
“……?”
“토끼야, 이 새우 먹을래? 몸통은 내가 먹고 꼬리만 남았는데.”
“…….”
아가레스가 새우 꼬리를 받아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토끼 아니야?”
“……취했군.”
“토끼야, 이 주스 마실래? 주스는 내가 마시고 얼음만 남았는데.”
“…….”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토끼 아니야?”
이벨리아는 같은 말을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반복하면서,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것도 하등 쓸데없는 것들만.
푸딩 없는 푸딩 그릇을 든 루드비히, 새우 없는 새우 꼬리를 든 아가레스, 보드카 없는 보드카 잔을 든 엘라임, 크림 없는 크림빵을 든 로노베, 그리고 아무것도 받지 못한 마르바스는 일제히 생각했다.
‘참으로 괴상한 술버릇이로군.’
한참을 친구들에게 소매 넣기 하던 이벨리아는 잠이 쏟아지는지 눈을 비비고 길게 하품했다.
그러더니 새우 꼬리를 든 아가레스의 곁에 슬금슬금 다가와 머리를 툭 기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네 토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토끼잖아……?”
새근. 새근.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서 제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친우가 취해서 뱉은 말이 아가레스에겐 삼라만상 모든 의미를 담고 거대한 중력처럼 내려앉았다.
혹여 단잠에 방해가 될까 감히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아가레스는 그저 낮게 속삭였다.
“잘 자.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