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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48화 (248/323)

##  248화: 우리, 조금 더 가까이

참석자들을 위한 테이블 좌석이 지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공녀와 루페르트 후작의 입장을 저 먼 테이블 끝에서 지켜보고자 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귀족들은 모두 연회장 입구로, 그것이 여의치 않은 이들은 하다못해 레드카펫의 근처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참석자들과 오케스트라 모두 기대로 가득 찬 침묵을 고수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 끼이이익.

금빛 용이 음각된 연회장 문이 마치 애간장을 태우듯 서서히 틈을 벌리고.

그 사이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화려한 드레스보다 더욱 찬란한 금발.

파트너의 팔에 손을 올린 이벨리아가 올곧게 앞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아가레스는 친우의 속도에 맞춰 평소보다 좁은 보폭으로 발을 뗐다.

악마의 시선은 나아갈 길을 향해 있지도, 하물며 참석자들을 향해 있지도 않았다.

오로지 옆. 그의 파트너. 이벨리아를 향해 붙박이듯 고정되어 있었다.

“…….”

“…….”

레드카펫 위를 거니는 둘을 보며 참석자들은 호흡조차 고요히 죽였다.

허튼 숨소리가 행여라도 둘의 묘한 분위기를 흐트러뜨릴까 봐.

저건 그저 잘 어울린다는 말로 표현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 연인도 아닌 그저 친우라 들었건만, 정의할 수 있는 모든 관계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둘에게서 느껴졌다.

모두가 이벨리아와 아가레스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마뜩잖게 흘기는 이는 단 셋이었다.

이벨리아의 행복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세레스. 이벨리아를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로 여기는 리카드.

마지막으로 이벨리아가 어머니를 광인(狂人)으로 만들었다 생각하는 에드윈.

‘저것만 없었다면! 저것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문을 몰락시킨 악귀 같은 것. 위선 떠는 가증스러운 것!’

‘어머니. 제가 황제가 되는 날, 가장 먼저 저것을 제 앞에 꿇려 죽느니만 못한 치욕을 줄 것입니다.’

마침 서로 연관이 있어 인근에 뭉쳐 앉은 그들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굳이 그들이 손쓸 필요도 없이 아르티나는 조만간 날개 잘린 새처럼 처참히 추락할 테니까.

한편, 오늘만큼은 그 열렬한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이벨리아는 행여라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입을 앙다물고 신중히 걸음을 옮기는 친우를 보며 아가레스가 픽 웃음 지었다.

“이브. 손과 발이 함께 내뻗어지고 있는데.”

“……노력 중이야.”

꼭 귀여운 장난감 병정 같아. 아가레스는 그 말만큼은 삼켰다.

이벨리아가 인상을 살포시 찌푸리며 투덜댔다.

“레드카펫이 뭐 이렇게 길어? 이럴 줄 알았다면 연회장을 아주 짤막한 거로 할걸.”

걸음걸음마다 수많은 인파가 주목하니 괜히 민망하다.

“나중에 내가 혼약식을 치르게 된다면 그땐 버진로드를 짧게 만들라고 명해야겠어.”

“새겨두지.”

“…….”

“……!”

“……네가 왜 새겨둬?”

“……말이 헛나왔어.”

“……그렇다기엔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네 착각이다.”

“…….”

“난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 토끼야. 네가 매번 그리 불렀잖아.”

이벨리아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요즘엔 토끼보단 능구렁이가 떠오른단 말이지…….’

***

좌중의 시선을 화살처럼 받으며 걸은 이벨리아는 연회장 가장 끄트머리, 단상 위에 올라섰다.

이벨리아가 너른 연회장을 천천히 훑었다. 지긋지긋하게 많은 이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다.

누군가는 호의로, 누군가는 적의로. 또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짜증 나게도 익숙하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나. 얼마나 많은 것 앞에 섰었나.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했었나.

‘엘라임 소환 연회 때 실수를 남발했던 어수룩한 내가 아니라고.’

크게 숨을 들이쉰 이벨리아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귀한 걸음 해주어 모두 고맙습니다.”

공간을 자연스레 휘어잡는 청명한 목소리. 귀족들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성년이 되는 날. 삶은 서막을 내리고 본막을 시작한다고 하죠.”

턱을 살짝 든 채로, 이벨리아가 웃었다.

“나의 서막은 저잣거리에도 흔히 퍼져 있으니 각설하고, 본막에 대한 각오나 짧게 밝히겠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알고 있으리라는 오만함. 그러나 감히 그 누구도 아니라 부정할 수 없다.

“정의롭진 않아도 최소한 나태하진 않게. 의무를 바라보며 살진 않아도 최소한 저버리진 않게.”

진의를 파헤치고자 맹렬히 머리 굴리는 귀족들을 오시하며 이벨리아가 선언했다.

“내가 나아갈 길은 내가 걸어온 길과 일절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에르카디아 제국의 모자람 없는 자부심이 되도록.”

겸양 따위 없는 거만한 인사말.

잠시의 침묵 끝에-.

- 와아아아아!

높게는 황제부터 낮게는 한미한 가문의 귀족들까지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층고 높은 연회장이 울리도록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이벨리아는 가만히 서서 참석자들을 바라봤다.

미우나 고우나 이곳은 나의 제국.

내게 보내는 이 환호성은 내가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

원한다면 눈을 감고 귀를 막을 수 있음에도, 이벨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서막과 본막을 넘어 언젠가 저 종막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발자취 하나라도 허투루 새기기엔 지켜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

이내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연회장 중심부의 플로어로 에스코트했다.

조금 전까지 당차게 포부를 밝히던 이벨리아는 플로어가 가까워질수록 팔을 달달 떨어댔다.

드넓은 무대 위. 단둘.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허리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드레스 안쪽까지 파고드는 뜨거운 온기에 이벨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구두 앞코가 서로 마주칠 정도로 바짝 붙은 채, 아가레스가 낮게 속삭였다.

“편히 몸을 맡겨, 이브. 춤 배워왔으니까.”

“토, 토, 토끼도 마음 편히 먹어. 나도 테사한테서 춤을 배우긴 했거든.”

둘 다 배워왔으니 뭐라도 어떻게든 되겠지.

‘허리를 가볍게 잡고. 손도 조심스럽게 포개고. 음악에 맞춰서…….’

‘토끼 발 쪼개지 말 것. 토끼 발 쪼개지 말 것. 토끼 발…….’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

눈치도 없는 오케스트라는 그저 기쁨에 겨워 왈츠곡을 대뜸 내던져버렸다.

이벨리아와 아가레스는 그간 배웠던 대로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으나.

‘……토끼야. 이거 맞아?’

‘……어딘가 조금…….’

바라보던 참석자들도 고개를 기울였다.

등장과 연설까지 흠잡을 곳 하나 없이 해내신 두 분의 춤이 어딘가 미묘하다.

동작은 맞긴 한데, 굳이 꼽자면…….

“통나무……?”

“아, 그렇군! 통나무가 움직이는 느낌이야!”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다른 귀족 하나가 냉큼 동의했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춤이란 건 본디 둘 중 하나만 잘 춰도 그다지 문제없이 내비치는 법인데.

두 분의 춤이 저리 뻣뻣한 것은 둘 다 춤을 속성 날림치기로 배웠기 때문일 터다.

완벽한 줄만 알았던 공녀님의 예상 밖 빈틈. 귀족들의 얼굴에 친근한 미소가 피어났다.

“허허. 공녀님께서 모든 방면에서 다재다능하다 소문이 자자하시더니만. 춤은 영 익숙지 않으신가 봅니다.”

“이제야 공녀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구나, 싶습니다!”

다들 마음 모아 옹호하는 분위기 속. 세레스와 데퐁트 가문에 줄을 댄 부인 하나가 겁 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춤은 귀족의 기본 소양인데…….”

흡사 깎아내리는 듯한 말에 귀족들이 날 선 눈빛으로 요망한 조동아리를 흘겼다.

“기본 소양은 무슨! 공녀님께서 기본 따지시게 생겼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본디 천외천에 계신 분께선 기본 같은 건 없어도 되는 법입니다!”

“공녀님께서 춤은 앞으로 귀족의 기본 소양이 아니다, 한 말씀만 하시면 자작부인도 그 경박한 발 안 놀리실 거 아닙니까? 예?”

“아, 아니…….”

“반대로 생각해 보라고요, 자작부인. 공녀님께서 여태 춤을 충분히 익히지 못하셨던 이유가 뭐겠어요?”

“……네?”

“자작부인같이 기회만 틈타 함부로 혓바닥 놀리는 분들까지도 굳이 지켜주시겠다고 무예에 힘쓰셨기 때문 아니겠냐구요!”

“……죄송합니다.”

한 마디 잘못 내뱉었다가 열 마디로 두들겨 맞았다.

흔적도 남지 않게 가루가 되어버린 자작부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실언임을 인정했다.

그 꼴을 보고 차마 육성으로 내뱉진 못했지만, 자작부인과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부 귀족들은 속으로 조소했다.

‘흥.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지.’

‘심지어 파트너마저도 춤을 제대로 못 배워왔다니!’

‘창피하겠는걸!’

그들은 민망함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을 이벨리아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무대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웃고 있어?’

‘저런 엉망인 춤을 추면서?’

후작뿐만이 아니었다. 공녀 본인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 불안정한 춤을 추면서. 자칫 비웃음거리가 될 것을 알고 있을 터임에도.

심지어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뚫고 얕게 키득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아마 그들은 모를 터였다. 둘이 지금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조금 어색하게 이벨리아의 손을 이끌며 아가레스가 무안한 듯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더 배워왔어야 했는데.”

“귀족들은 평생 춤을 배워. 고작 한 달 남짓 배운 우리가 이 정도면 잘 추는 거야.”

“그래도 저들이 우리를 보고…….”

“비웃으라지, 뭐.”

뭐 어때. 나도 지금 웃고 있는걸.

“이런 쓸데없는 것까지 잘할 필요 없어. 이미 우리는 많은 걸 잘 해왔으니까.”

“…….”

“춤은 연회 후에 비밀기지에서 더 연습하자. 다음번엔 조금 더 잘할 수 있게.”

“다음번?”

“우리가 춤을 출 기회가 오늘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또 있을까?”

“분명히. 네가 자유로워지는 날에도 같이 춤추자.”

선율이 아가레스의 기분을 나타내듯 위로 솟구쳤다.

든든한 팔에 들려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이벨리아가 햇살처럼 웃었다.

악마가 경배하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지척에 뜬 태양에 눈이 멀어버린 건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가레스는 음률의 흐름보다 두어 박자 늦게 이벨리아를 내려두었다.

톡.

착지한 이벨리아가 춤을 시작하던 그때보다 조금 가까이, 악마의 품에 안겨든 것은 둘만 어렴풋이 눈치챈 변화였다.

***

주인공들의 춤이 끝난 이후 참석자들의 순서.

관례상 지위가 높은 이들부터 우선하여 플로어에 나올 수 있었다.

황제는 황후와 황비를 모두 잃었으니 고사했고, 외사랑 하는 이와 춤을 출 수 없는 루드비히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이곳에서 가장 지위 높은 이는 황자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황족은 황족이었으니까.

에드윈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약혼녀 세레스를 바라봤다.

‘에이. 어쩔 수 없지 뭐.’

여기 아리따운 영애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손만 뻗으면 다들 좋다며 달려들 텐데. 공식적인 약혼녀가 있는 바람에 대놓고 한눈팔기가 쉽지 않다.

‘황제만 되어 봐라. 비를 잔뜩 들여 황궁에 꽉 채워버릴 테다.’

상상만 해도 좋다. 치마폭에 싸여 평생을 살다 죽는 건 에드윈의 꿈이었다.

골치 아픈 국정이야 신하들이 보라지. 황제의 심신을 평안히 하기 위해 있는 것이 바로 신하들 아니겠는가!

분홍빛 미래를 상상하며 에드윈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세레스에게 손을 내뻗었다.

세레스는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약혼자의 손을 잡았다.

‘이것 봐. 내 위치를 이보다 잘 표현하는 게 어디 있겠어!’

나는 지금 이 드넓은 에르카디아에서 제일가는 여인이다.

‘공작부인조차도 감히 나보다 먼저 이 플로어에 발 딛진 못해.’

실질적인 위세를 따지자면 비교도 할 수 없으나, 형식적인 지위를 따지자면 공작보단 황자가 위였고, 그 황자가 손을 내민 파트너는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우쭐한 마음에 푹 절여진 세레스는 어깨를 있는 대로 펴고 플로어로 올랐다.

이후 휴고와 엘리시아를 비롯한 귀족들이 차례로 플로어로 올라와 선율을 즐기자, 이벨리아는 곧장 아가레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토끼야. 아래로 탈출하자.”

“좋지. 새우 가져다줄까?”

“새우 받고 소고기도. 잔뜩.”

삐걱삐걱 춤을 추는 바람에 온몸이 결린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지러 가는 아가레스에게 손을 흔들어준 채, 이벨리아가 지정석에 늘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공녀.”

귓가에 난데없는 미성이 박혀 들었다.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

이벨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도 없게 모호한 이가 얼굴을 반쯤 가린 가면 아래로 호방하게 입매를 올리고 있다.

생김새도 머리카락 색도 익숙지 않은 낯선 이. 그러나 자신을 공녀라 부르며 말을 낮출 인간은 세상에 몇 없다.

이벨리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타박했다.

“너 이샤트야, 아드니엘이야?”

“나는 이샤니엘이다.”

“이샤트겠지. 아드니엘은 혼자 이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어!”

“쉬이. 쉬이. 조용. 몰래 왔다. 들키면 큰일 나.”

“몰래는 무슨 몰래! 하르벤타의 폐하께 안 들켰을 거라고 생각해?”

“아드니엘을 나로 위장해두고 왔다. 그 녀석이 지금 내 목소리와 손짓을 흉내 내고 있지.”

“그게 안 들켰을 것 같냐고.”

“들켜도 뭐 어쩌겠나. 나는 이미 여기 있는 것을. 아드니엘 자식이나 두들겨 맞겠지.”

“……너어는 진짜.”

이샤트가 가면을 단단히 고쳐 쓰며 웃었다.

“나. 황위 계승을 앞두고 있거든.”

“……!”

“하여 지금이 아니면 당분간 공녀를 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마도구 훔쳐 남장까지 하고 나왔다. 좀 봐줘.”

“…….”

한 제국의 지존이 이리 멋대로 돌아다닌다는 게 영 걱정스러워 타박하긴 했다만, 황태녀의 신분으로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감격스러운 마음에 이벨리아가 이샤트의 손을 부여잡았다.

“이샤트. 나랑 춤이라도 출래?”

“사양하지. 공녀가 루페르트 후작의 발을 부서뜨릴 듯 밟는 거 다 봤다.”

“……봤냐. 그러면 여기 와서 앉아!”

“안타깝지만 그것도 사양해야겠어. 내가 지금 주인공 곁에 있어서 좋을 게 없거든.”

“그러면 이대로 그냥 가게?”

“그게 좋겠지.”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이러고 그냥 간다고?”

이샤트가 가녀리면서도 참으로 든든한 친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얼굴 보고 축하를 건넸으니 됐다. 하르벤타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사절이 부족함 없는 선물을 가지고 올 테니 내가 빈손인 건 너그러이 양해 바라고.”

그럼 난 이만.

왜소하지 않은 체구로 남장을 한 이샤트는 군중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괜히 아쉬워 이벨리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대책 없는 황태…… 황태야!”

황태녀에서 황태로. 제국의 지존에서 한낱 말린 물고기로 한순간에 격하되었지만 이샤트는 그저 킥킥 웃으며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연회장을 나서며 이샤트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인파에 쌓인 친우의 금빛 머리칼이 언뜻 보인다.

‘속도 없이. 보니까 또 이리 좋네.’

나의 유일한 친우. 내 불길을 품어줄 단 하나의 바다.

“그대는 늘 꽃밭 속을 걷길.”

나 역시 너의 꽃 한 송이가 되길 주저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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