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주인공 납시오!
“으으아아아…….”
할 일이 많은 날이다.
이벨리아는 테사가 깨우러 오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오늘도 우리 아가씨 깨우려면 전쟁을 치르겠구나,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온 테사는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은 인형(人形)을 보고 커튼 밖 하늘을 한번 바라봤다.
“뭐 해, 테사…….”
“아가씨께서 먼저 일어나 계시길래 해가 서쪽에서 떴나 확인 좀 해보았지요.”
이벨리아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 모습이 어릴 적과 똑 닮아서 테사의 입가에는 깊은 볼우물이 패었다.
“긴장되셔서 일찍 일어나셨나요, 아가씨?”
“긴장은 무슨. 오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일이라니요? 오늘 아가씨의 일은 얌전히 단장 받기, 루페트르 후작님 발을 쪼개지 말기, 연회장 뒤엎지 말기, 단 세 가지인걸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성년식 날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지? 테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약속했거든. 성년이 되는 날에 나 닮은 꽃 하나 가져다주기로.”
누구에게인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테사는 바로 알아들었다.
“참석자들 몰려오면 나가기 귀찮을 테니까. 꽃 먼저 찾아두려고.”
“……안식처에도 다녀오실 생각이세요?”
“그건 이따 연회 직전에. 예쁘게 치장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
테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셨구나. 그런 약속을 하셨었구나.
굳이 ‘성년이 되는 날’을 강조하신 건 우리 아가씨 그 수라장에서 무사히 살아남으시라는 마음이었겠구나.
눈 감는 그 순간까지 부디 아가씨만은 성년이 되는 오늘까지 안온하길 바랐을 비비안님.
8년은 흘러 빛바랬을 그 염원을 모든 격랑 헤치면서도 그대로 쥐고 걸어온 아가씨.
테사가 먹먹해진 음성으로 답했다.
“……참으로 좋아하시겠네요.”
“언제 이렇게 컸나 깜짝 놀랄걸?”
“아주 대견하다고 하실 거예요.”
“비비안이 살려준 목숨이니까.”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울고 그리워했다. 빈자리를 쫓고 잔상을 훑으면서. 이제 남은 잔재의 풍랑은 격렬하기보단 고요했다.
이벨리아는 잠옷을 입은 그대로 발코니를 열고 뛰어내렸다.
허공에서 불어온 봄바람이 푸른빛 독수리의 형상을 띠고선 자연스레 발밑을 받쳤다.
“꽃 찾으러 갈 거야.”
[온실?]
“아니. 정원.”
굳이 꼽자면, 온실에서 바람 막아 예쁘게 자란 화초보다는 정원에서 풍파 견디며 자란 꽃이 나랑 더 닮았으니까.
정원에 내려선 이벨리아는 울타리를 넘어 화단 안으로 들어갔다.
발과 잠옷이 흙으로 더럽혀지는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찾았다!”
희뿌옇게 물안개 낀 새벽.
이벨리아는 가장 자신을 닮은 꽃 하나의 뿌리를 곱게 캐서 방으로 돌아왔다.
***
달달달달.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다리가 파들파들 떨린다.
흘끗 바라본 테사가 이벨리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빗겨주며 말했다.
“아가씨. 아까는 긴장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허세였어. 원래 허세 하면 이브잖아.”
“몸을 그리 떠시면 손톱을 다듬을 수가 없어요.”
“합, 숨 참아볼게. 근데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참석자분들께서 속속 들어오고 계시거든요.”
“벌써? 다들 할 일도 없대? 생계가 만만하대?”
연회 시작 시각이 오후 6시인데, 오전 11시밖에 안 된 지금 벌써 들어오고 있다고?
나비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날갯짓하는 것만 같은 이 소리가 다 참석자들이란 말이야?
후다닥 달려간 이벨리아가 냅다 발코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동시에 저 멀리 어느 영애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앳된 영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금방이라도 사이렌처럼 외칠 모양새다. 저기 수배범이 있어요!
영애의 입이 열리기 전. 이벨리아는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신속히 주저앉아 난간 사이로 몸을 감춘 다음 쪼그린 걸음으로 발코니 문을 닫고 들어왔다.
“……테사. 우리 집이 점령당했어.”
“아무리 귀족분들이라고 하더라도 공작저에 발 들일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나 나가면 아무래도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은데.”
“일리 있는 추측이셔요. 당돌한 영애님들은 이미 도련님들을 찾는다고 난리랍니다.”
“오라버니들을? 왜?”
“도련님들 혼인 전까진 본인들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이런. 안됐네.”
큰 오라버니의 연인은 용이 인증한 비공식 대마법사 렐리안이고, 작은 오라버니의 연인은 다른 수식어 따위 필요 없는 바람의 정령왕이다.
눈이 저 하늘 꼭대기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라버니들에게 어설프게 들이대는 영애들은 그저 귀찮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게 뻔했다.
이벨리아가 상처받을 영애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고개를 젓던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온 로노베가 만면에 뿌듯한 미소를 짓고 노래하듯 이벨리아를 불렀다.
“밥풀 폐하. 밥풀 폐하.”
“응?”
“드레스 말이야. 가봉 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어.”
“그새 뭘 더 바꿨어?”
“나랑 앙버터가 힘 좀 썼거든! 짜잔!”
짜잔, 소리에 맞춰 앙제스가 들이민 드레스는…….
“……어우, 눈부셔.”
얘들아. 여기 들어간 보석이 다 얼마냐.
이 드레스랑 추돌사고라도 나면 손해배상금으로 가산이 탈탈 털리게 생겼다. 참석자들이 무서워서 내 곁에 다가오지도 못하겠네.
“설마 우리 토끼 턱시도도 이거에 맞춰서 변형했어?”
“당연하지, 밥풀 폐하의 파트너인데!”
“……토끼가 이 화려한 걸 보고도 참았어?”
그 질문에 로노베가 붉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이런, 넌 아마 모를 거야, 밥풀 폐하.”
네 데뷔탕트를 위해서라면 주군께선 화려한 턱시도가 아니라 풀로 엮은 초라한 옷이라도 기꺼이 입으시리라는 것을.
그렇게 모두가 달라붙어 이벨리아를 목욕시키고, 머리칼을 다듬고, 향유를 바르며 무려 다섯 시간을 꼬박 보낸 직후였다.
앙제스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필생의 역작을 이벨리아에게 입혔다.
묘한 침묵 속.
평소보다 더욱 풍성하고 화려한 드레스가 어색하여 이벨리아가 자신의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찰나.
앙제스의 감상평이 얼어붙어 있던 공기를 깨트렸다.
“……이 앙제스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곧이어 입을 틀어막고 있던 로노베도 중얼거렸다.
“밥풀 폐하. 폐하라면 내가 마계 제일의 몽마 자리 내어준다…….”
“아무리 우리 아가씨지만 정말…….”
“루페르트 후작 각하 부럽다…….”
그 과도하리만치 격앙된 반응에 이벨리아가 천천히 고개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허리께까지 찰랑거리는 머리칼은 평소보다 더욱 윤기가 흘렀다.
심지어 평소엔 즐겨 하지 않던 옅은 화장 덕분에 얼굴도 더욱 생기가 넘쳐 보였다.
게다가 로노베와 앙제스가 협심하여 만든 드레스는 금빛 원단에 짙은 푸른색 포인트가 들어가 적당히 밝으면서도 위엄을 살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어떠세요, 아가씨? 마음에 드시지요?”
이벨리아가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어디 마음에 들다 뿐이냐.
“오늘 내가 땅에 침을 칵 퉤 뱉어도 모두가 손뼉을 쳐 줄 거야.”
그 격한 표현에도 모두가 동조하며 끄덕이던 그때.
묵직한 노크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아빠!”
“아가. 준비는 어떻게…….”
따뜻하게 웃으며 들어오던 휴고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여보, 왜 가만히 서서…….”
난데없이 멈춰버린 남편의 등을 팍 밀어버리고 얼굴을 내민 엘리시아 역시 마찬가지.
심상치 않은 부모님의 반응에 빼꼼 고개를 내민 아르칸과 세드릭, 엔리르도 다를 바 없었다.
잠시 말을 잃었던 세 형제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아무 데도 못 내보낸다. 다들 문 막아.”
“와. 이거 사내놈들 어떡하지? 오늘 족쳐버려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닐 것 같은데?”
“……누나, 누나 맞으세요? 내 은인 맞으세요? 아니세요? 맞으세요? 아니세요?”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바라보고 계시는 부모님과 재잘재잘 칭찬을 늘어놓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에 모두 다시 한번 턱을 떨어뜨리던 찰나.
누군가 발코니 문을 쾅 열어젖혔다.
이리저리 날다가 발코니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엔리르가 머리를 꽁 부딪혀 바닥에 툭 떨어져 내렸다.
엔리르를 미처 보지 못하고 꾸욱 밟으며 들어온 것은 잔디와 모지리.
“땅콩 폐하! 너 어쩌자고 우리까지 초대했어?”
“싫으면 초대장 내놓든가.”
“아니 누가 싫대? 싫은 건 아닌데…… 뭐야, 당신 뉘쇼.”
“나다. 네 왕.”
“우리 왕은 못난이인데.”
“두들겨 맞아서 못난이가 되어볼래?”
“……그 사나운 성질머리 보니까 우리 왕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불경한 잔디를 응징하기 위해 이벨리아가 손을 들어 올리던 것과 동시였다.
발코니로 따스한 바람이 몰아치더니 이내 마르바스의 뒤통수를 퍽 내리쳐버렸다.
오. 잘 익은 수박 깨지는 소리.
“악! 뭐야!”
“나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악마야.”
방 안을 유유하게 휘돌던 바람이 이내 장신의 여인 형상을 띠었다.
“우리 병아리에게 못난이가 뭐 어쩌고 저째? 이 씹다 만 풀때기 같은 게!”
“씨, 씹다 만 풀때기이?”
페르세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이프리트와 트로이도 나란히 덧붙였다.
“우리 병아리 방에 악마가 하나도 둘도 아닌 셋씩이나. 군침이 싹 도는군.”
“이런. 엘라임의 계약자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나 때는 말이야, 저런 잡스러운 악마들은 감히 눈을 뜨고 날 바라보지도 못했어!”
정령과 악마. 이 세계 최고의 상극인 두 종족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이들이 서로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본디 정령 쪽이 정갈하고 경건한 느낌을, 악마 쪽이 퇴폐적이고 막 나가는 느낌을 줘야 맞건만. 웃통 벗고 껄렁껄렁 다리를 떠는 추프리트 때문에 어느 진영이 악마고 어느 진영이 정령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벨리아가 쯧쯧 혀를 차던 그때. 바로 뒤에 청량한 물기둥이 솟더니 그 속에서 걸어 나온 엘라임이 마치 보호하듯 이벨리아를 감싸고 속삭였다.
“나의 계약자. 뭐 저런 삿된 것들까지 다 초대를 하셨습니까.”
“아직 엘라임에게 말은 못 했지만 사실…….”
“어디, 정령왕이 손수 퇴마 의식이라도 벌여드릴까요?”
칼 춤 한 번 춰도 좋을 듯싶은데.
서늘하게 웃는 엘라임에게 이벨리아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있잖아, 엘라임. 내가 사실 쟤들의 수괴야.’
그렇게 정령왕들과 악마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던 와중.
-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더욱 힘 있게. 그러나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간격으로.
‘왔다!’
이벨리아가 소리 높여 답했다.
“들어와!”
밖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짐작한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오늘 하루. 주인공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유일한 자.
- 끼이익.
느리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문이 열리고,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턱시도를 갖춰 입은 아가레스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벨리아와 아가레스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리고 악마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미쳤군.’
에스코트하라고? 이브를?
감히 손대기도 아까운 저 이브를?
내가 감히.
세상 모든 저주를 모아 받은 이 더러운 손으로 저 밝은 빛에 손을 대도…….
“뭐 해, 아스.”
“……?”
“네 왕을 에스코트해야지.”
“…….”
대악마의 심장이 속절없이 떨렸다.
아아. 내가 네게 동부의 관을 씌워줌으로써 너와 나를 정의하는 관계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 기껍기만 하다.
그가 경건하리만치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이벨리아의 지척으로 다가왔다.
이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에스코트하러 온 파트너라기보다는 왕을 모시러 온 충신의 모습으로.
이벨리아가 자연히 오른손을 뻗었다. 그보다 배로 커다란 악마의 손이 이벨리아의 손을 받치고 입술을 내렸다.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꺼냈다 해도 믿을 정도로 뜨겁고 낮은 음성이 손등에 불길처럼 내려앉았다.
“……모시러 왔습니다. 나의 폐하.”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높아진 시야로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왕이 말했다.
“기다렸어. 내 악마.”
내 악마. 소유의 의미가 진득하게 붙은 호칭. 그 족쇄가 달가운 악마가 옅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레스와 턱시도를 맞춰 입고 나란히 선 둘은 태양과 달처럼, 혹은 별과 밤처럼 지독히도 잘 어울렸다.
하여 차마 아르칸과 세드릭마저도 날 선 말을 던질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가 친애하는 가족들과 악마들, 그리고 정령왕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난 입장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다들 연회장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
이벨리아는 이른 새벽 미리 가져다 두었던 꽃 한 송이를 쥐고 악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토끼는 나와 함께 가자. 오늘은 네가 날 에스코트해야 하니까.”
그 말에 아가레스는 심히 우월감에 젖은 얼굴로 인간들과 정령왕들을 향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저 새끼 내가 반드시 죽인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험한 말도 끄덕이며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아가레스는 지금 행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
아르티나는 가문을 위해 희생한 전사자들을 극진히 예우한다.
심지어 가주 일가를 지키려다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더더욱.
하여 비비안의 관은 아르티나 공작저 안, 전사자들의 유해를 따로 모아두는 ‘안식처’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벨리아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곳에 수시로 드나드신다는 것을. 직접 청소를 하고, 꽃을 갈아두고, 말없이 바라보다 나오신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들어선 망자들의 안식처는 본 저택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단정하고 깨끗했다.
수없이 많은 유해를 바라보며 이벨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교적 가까운 곳. 한때 이벨리아의 유모이자, 친구이자, 언니가 되어 주었던 이름이 보인다.
이벨리아는 먼지 한 톨 없는 비석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비비안.”
한동안 부른 적 없던 이름. 그러나 한시도 잊지 못한 이름.
“나 왔어.”
이벨리아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성년이 되는 날 그대의 무덤 앞에 날 닮은 꽃 한 송이 놓아주기로 했었지.”
그대가 잡아주던 그때보다 훨씬 커진 손으로, 직접 정원을 뒤져서 찾아왔어.
크고 화려한 붉은 꽃이 비석 앞에 놓였다.
아마릴리스(amaryllis).
꽃말은 자부심과 자랑.
“어때, 비비안.”
이벨리아가 물었다.
“그대의 사랑을 자랑삼아 살아온 나는…… 이젠 그대의 충분한 자랑이 되는가.”
안식처엔 바람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엷게 떨린 아마릴리스의 꽃잎을, 눈을 감은 이벨리아는 미처 보지 못했다.
***
이벨리아는 아르티나의 상징이었고.
비비안은 아르티나를 지키다 죽어간 숱한 이들의 상징이었다.
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무겁게 걷는 친우의 뒤.
아가레스는 비비안의 비석 앞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왕을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극진한 예우로.
***
이벨리아의 성년식과 데뷔탕트를 위한 연회장은 실로 화려했다.
연회의 주인공을 상징하는 황금색과 푸른색이 연회장 곳곳을 물들이고 있었고, 아르티나 가문을 의미하는 황금 용이 깃발과 조각으로 사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대귀족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기에, 귀족들과 그 자제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연신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심지어 저쪽에는 황가가, 그 근처에는 아르티나 일가가, 또 그 옆에는 그 유명한 카시스 가문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을 듣자 하니 왼편에 앉은 저분들은 루페르트 후작 각하 휘하의 악마들이요, 그 정반대에 앉은 분들은 고서에서나 보던 정령왕님들이라지 않은가!
어딜 가서도 보기 힘든 참석자들의 면면에 귀족들이 수군댔다.
“종족 대화합…….”
“아니, 저분들 눈을 좀 보게. 화합이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연회에 인간과 악마, 정령들까지…….”
첩보원답게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던 카밀라가 픽 웃었다.
여기 용도 있는 걸 알면 다들 아주 뒤집어지겠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부드러운 선율과 기대에 찬 참석자들의 웅성임이 점점 소리를 키워가던 때였다.
- 쿵. 쿵. 쿵.
연회장의 문을 지키던 기사가 웬만한 아이 팔뚝만큼 두꺼운 창으로 바닥을 여러 번 내리찍었다.
웅장한 소리에 참석자들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됐다.
흐읍. 숨을 들이켠 기사가 이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아르티나 공녀님과 루페르트 후작 각하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