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바야흐로 데뷔탕트
루페르트 후작가.
대악마가 이끄는 전례 없는 가문.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문이었건만, 그 평판은 날이 갈수록 하늘을 뚫고 치솟는 중이었다.
후작 본인이 무려 제3악마를 손수 처치하였다는 것과 아르티나의 영지 토벌전에 참전하였다는 것에 더불어, 데뷔탕트 준비 기간 내내 퍼 나르는 물자로 인해 이젠 명성이 아르티나의 턱밑까지 가닿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쌓이기 시작한 물자를 보며 제국민들이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루페르트 후작가는 대체 재산이 얼마나 있길래…….”
“가주가 인간이 아니라 대악마 아닌가. 그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그러니 오죽하겠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한 달 내내 저 정도의 구휼미와 물품들을 물 퍼주듯 퍼줄 수가 있지?”
“이래서야 꼭 아르티나와 루페르트가 누가 더 많이 베푸나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은데.”
“우리야 좋긴 하다만.”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방금 받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근데 악마들이 다 후작 각하 같다면 2차 인마전쟁은 안 일어나는 것 아닌가?”
“어디 다 후작 각하 같겠는가. 동부에 산다는 악마들이야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대다수 악마는 다 1차 전쟁 때 봤던 것들 같겠지!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들!”
“하여간 동부에 사는 악마들은 다 후작 각하처럼 천성 바르고 품위가 있는가 보군.”
“뭐. 그 주인에 그 수하 아니겠나!”
그리고 마침 그때.
색색의 원단을 가득 들고 근처를 지나던 로노베의 콧대와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로노베가 마치 뻐기듯 헛기침을 하며 몰려 있는 제국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흠. 흠. 그러게 말이야. 동부의 악마들은 다들 그렇게 점잖고 현명하고 그런 것 같지?”
“……?”
“아까 너희가 했던 말이 딱 맞아. 동부의 악마들은 다른 것들하곤 차원이 달라.”
“……누구?”
“아, 어떻게 아냐고? 내가 바로 동부의 악마거든! 그것도 아주 고위의!”
“…….”
“호호호! 이 제국에도 영 빠가사리들만 있는 건 아니었네! 기특한 것들!”
제국민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뭐야. 이 미친 여자는.
고위 악마? 일평생 살면서 그림자 한 번 보기 힘든 고위 악마가 무슨 시장 바닥에서 옷감을 들고 돌아다녀.
“난 이만 가볼게! 악마는 바쁘거든!”
제국민들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로노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루에 곡식을 퍼담던 한 여인이 혀를 찼다.
“쯧쯧. 용모는 아리따운 것이 어쩌다 회까닥 돌아버려서는.”
***
그렇게 온 제국이 축제 분위기로 들썩이던 와중.
어느덧 이벨리아의 데뷔탕트가 2주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우여곡절 끝에 대동단결에 성공한 엘리시아, 로노베, 앙제스, 그리고 렐리안은 최종 가봉 전 임시로 제작된 드레스와 턱시도를 보고 나란히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정말 아름답군.”
“흐흠. 내 실력이 빛을 발했지!”
“바느질은 거의 제가 다 했지요.”
로노베와 앙제스는 자신이 이 환상적인 옷에 지분이 있다며 너도나도 말을 얹었다.
그 사이에서 렐리안은 몽롱해진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걸 공녀님과 루페르트 후작님이 나란히 입고 입장하시면…….”
미쳤다. 미쳤어.
게임 끝이다.
감히 저 하늘에 뜬 태양도 두 분보다 빛나진 못할 터다.
“어떡하죠. 저 너무 기대되는데.”
“나도.”
“저도요.”
“우리 딸을 바라보는 사내놈들 눈알을 다 때려줘야 하는데.”
“아마 주군께서 먼저 때리실 거다.”
옷도 완벽하고, 이걸 입을 주인공과 그 파트너도 완벽하다.
네 팔불출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자리했다.
***
그리고 며칠 뒤, 이벨리아의 데뷔탕트가 고작 1주 남은 시점.
바르바토스는 두 손에 올려진 빳빳한 종이를 어색하다는 듯 응시했다.
“……이게?”
“초대장인가 본데.”
마르바스가 두 눈을 비비며 답했다.
그러자 잠시 마계에 돌아와 있던 로노베 역시 당황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밥풀 폐하 돌았나? 우리를 초대해?”
“그러게. 악마를?”
“그 경사에?”
“심지어 인간들의 연회에?”
“이러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땅콩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을 텐데?”
핑퐁처럼 줄줄이 말을 쏟아내는 두 악마 사이에서 로노베가 초대장 안쪽을 펴 살랑 흔들었다.
“여기 쓰여 있네.”
“뭐라고?”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오래. 왕의 데뷔탕트에 부하들이 오지 않으면 쓰냐고.”
“……좁쌀만 한 땅콩 주제에 당돌하긴.”
“왕 답군.”
가만히 초대장 앞면을 쓸던 마르바스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난 사실 조금 기쁘다. 이러면 이상한 거냐?”
“……나도 사실 조금.”
“……약간 고맙긴 하네.”
악마들의 얼굴에 연한 미소가 번졌다.
성년식과 데뷔탕트는 단연 혼약식 다음으로 중요한 연회다.
그런 연회에 괜히 구설에 휘말리기 싫어 눈 딱 감고 모른 척했더라도 아쉬워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손수 초대장까지 보내주다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
“창고를 털자!”
“죄다 털어서 뿌리자.”
“땅콩을 위해 마계 동부에서 뿌린다고 하는 거야.”
“그럼 다들 밥풀 폐하를 우러러보겠군.”
세 고위 악마는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 쓸 곳도 없이 모아뒀던 보물고를 개방할 때가 왔다!
동부의 저력에 뒤집어지게 놀라봐라, 인간들아!
***
세 악마가 마계에서 보물고를 탈탈 털어대던 시각.
이벨리아는 비밀기지 오두막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으으, 차라리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한 달이 꼭 일 년처럼 느리게도 흐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이브는 이브로다.”
시를 읊으며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데, 경칩이 낡은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환한 은발이 역광을 받으며 들어섰다.
루드비히는 잠시 걸음을 멈췄고, 이벨리아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
“…….”
왠지 어색하다.
이벨리아가 반쯤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가만히 눈만 끔벅이고 있자, 낮게 웃은 루드비히가 가까이 다가와 이벨리아의 어깨를 눌러 눕혔다.
이벨리아의 오른쪽 옆에 손을 짚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루드비히가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설레게.”
“…….”
가슴 앞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드러누운 이벨리아가 도르륵 눈을 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파트너로 선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해야 하나?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을 건네야 하나?
선산에서의 고백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기에 무슨 말을 해야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어색한 것은 자신 혼자만인 것 같았다.
루드비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소파에 기댔으니까.
“이브.”
“응?”
“그렇게 어색하다는 티를 있는 대로 내고 있으면 나 속상해.”
“……으응?”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도 좋아. 파트너로 그 악마를 선택했어도 괜찮아. 그래도 우리가 친구가 아닌 건 아니잖아.”
모로 고개를 튼 루드비히가 짐짓 울상을 지었다.
“아니면 나와 친구였던 시절은 이제 네겐 아무런 가치가 없어?”
그 말에 이벨리아가 루드비히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쳤다.
퍽.
“아야!”
“아야는 무슨 아야! 소드마스터 주제에 내 조막만 한 손에 아픈 척하지 마!”
“……조막만 하다기엔…….”
“뭐.”
“아닙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루드비히의 태도에 긴장이 풀린 이벨리아가 자신이 방금 내리친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루드비히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눈을 감았다.
“루이. 너는 나한테 참 소중한 친구야.”
“알아. 그거 믿고 내가 황궁에서 버텨왔잖아.”
“우리 관계가 어디로 흘러가든 그건 변함없어.”
“알아. 그거 믿고 앞으로도 나는 버틸 테니까.”
“내가 버팀목이 되어주겠다는 말도 언제까지나 유효해.”
“…….”
“그러니까 혼자 버티지 마. 모처럼 이렇게 믿음직한 친구가 있으니 마음껏 써먹으라구.”
그 다정한 말에 루드비히가 울컥 치받는 감정을 내리삼키던 찰나였다.
-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아가레스가 비밀기지 오두막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매우 다급해 보이는 걸음으로.
“토끼! 우리 오두막 이제 오래돼서 그렇게 문 열면 문 떨어져!”
“……네가 문을 소중히 여길 줄도 알다니. 조심하지.”
단번에 사과한 아가레스는 이벨리아가 누운 소파에 등을 기댄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루드비히 역시 마찬가지. 두 사내의 눈이 묘한 경쟁심을 담고 마주쳤다.
이벨리아만 눈치채지 못한 그 팽팽한 분위기 속.
벽에 걸린 시계를 일별한 이벨리아가 숨을 들이마시며 벌떡 일어섰다.
“맞다!”
퍽. 아까 맞은 뒤통수를 한 번 더 팔꿈치에 치인 루드비히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나 이만 가봐야 해! 드레스 가봉한다고 했어!”
늦으면 잔소리에 또 온종일 시달려야 할 거야.
“둘이 사이좋게 놀다가 가! 오두막 부수지 말고!”
해사하게 손을 흔든 이벨리아가 뛰쳐나가자 오두막에는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날 것 같은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루드비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겠군.”
딱히 부러움을 숨기지 않은 담백한 말투였다. 아가레스 역시 에두르지 않고 답했다.
“내겐 세상 위에 있는 분께서 손을 내밀어 주셨으니 그보다 더한 것을 가진 가졌지.”
“솔직히 말하자면, 질투 난다.”
“질투에서 끝났다면 다행이로군.”
“엄밀히는 이 자리에서 그대를 죽여 없애고 이브의 파트너 자리를 차지하고 싶지.”
진심이라는 것을 표하기라도 하듯 루드비히의 손이 일순 움찔거렸다. 그러자 아가레스의 마기도 옅게 기세를 퍼뜨렸다.
그때. 공교롭게 스쳐 지나간 바람이 오두막의 문을 덜컹 흔들었다.
맥 빠진다는 듯, 루드비히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대와 내가 여기서 싸우면 저 문이 부서지겠지.”
“그러면 이브가 가만있지 않을 테고.”
아가레스 역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답했다.
경칩이 달랑거리는 오두막 문을 주먹으로 쾅 내리쳐 제자리에 박아 넣으며, 루드비히가 말했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평온한 말투로.
“악마. 나는 이브를 연모한다.”
“알고 있다.”
“이브에게도 내 마음을 전했지.”
“……!”
“오랜 외사랑이야. 쉬이 접힐 리 없는.”
“…….”
“이왕 마음을 밝힌 김에 앞으로는 더 적극적으로 나가볼까 하고. 그래도 다정한 이브는 날 완전히 밀어내진 않을 테니까.”
“……내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
“선전포고.”
루드비히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홍안에 씁쓸한 빛이 언뜻 떠올랐다가 환영처럼 사라졌다.
“이브의 데뷔탕트. 잘 부탁한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이 말이라도 해야 내가 덜 비참하잖나.”
흡사 연적에게 패배한 듯한 말과는 달리, 루드비히는 호전적인 표정으로 씩 웃고 있었다.
***
이벨리아의 데뷔탕트 이틀 전.
수도는 전례 없는 인파로 북적였다.
인파 하나하나가 곧 돈인 상인들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실 데뷔탕트를 위해 공작저에 출입할 수 있는 기간은 데뷔탕트 당일과 그다음 날뿐이었으나, 오랜만의 대형 이벤트에 설렌 귀족들은 며칠 이르게 수도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오늘 막 수도로 들어온 분홍빛 머리 영애가 두 손을 모아 쥐고 자신의 부모님에게 재잘거렸다.
“아버지. 어머니. 공녀님과 루페르트 후작님은 밖으로 안 나오실까요?”
“그렇게 높으신 분들은 이런 곳까진 오지 않으신단다.”
“공녀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실지 궁금해요! 혹시 그림 같은 거라도 구할 수 없을까요? 미리 뵙고 싶은데!”
“높으신 분들의 초상화는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지. 이틀만 참으려무나.”
돈 냄새를 맡고 귀를 쫑긋 세우던 상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이고, 아무래도 수도에는 꽤 오래 방문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크흠. 그렇네.”
“영애께서 공녀님의 초상화를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신데…….”
“워낙 선망의 대상이 아니시겠는가. 구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으니 개의치 말게.”
“아니, 아닙니다, 나으리.”
상인이 손으로 거리의 상점을 가리켰다.
따라서 시선을 돌린 어린 영애가 작은 손으로 두 볼을 움켜쥐었다.
“아버지! 공녀님 천지예요! 사방에 공녀님 그림이 있어요!”
“응?”
비단 공녀님의 초상화뿐만이 아니었다.
「공녀님께서 사용하시는 깃펜! 이것만 있으면 당신도 제국 제일의 전략가!」
「공녀님께서 애용하시는 장갑! 이것만 있으면 당신도 1초 공녀님!」
「공녀님께서 즐겨 쓰시는 입욕제! 이것만 있으면 내 몸에서도 공녀님의 향이?」
판매하는 모든 물건 앞에 ‘공녀님’이 마치 수식어처럼 달라붙어 있다.
“아, 아니, 정말 그렇네……?”
사실 이건 자신의 인기를 잘 알고 있는 이벨리아가 미리 허가를 받은 일부 물건에 한해 자신의 이름을 달고 판매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결과였다.
대신 상인들은 그 수익금 중 일부를 필히 기부해야만 했으니, 이벨리아와 제국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기랄까.
그러나 이 뒷사정을 알 리가 없는 남작은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내가 모르는 새에 공녀님께서 황위를 차지하기라도 하셨나?’
무슨 초대 황제 폐하의 초상화보다 공녀님 초상화가 더 많아?
당최 영문을 파악할 시간도 없이, 남작의 딸은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 저거 사주세요! 공녀님께서 즐겨 드시는 초콜릿!”
“…….”
“아버지! 저것도요! 공녀님께서 쓰시는 욕실 슬리퍼!”
“…….”
“어서요! 다른 영애들이 불나방처럼 밀려 들어가고 있다고요!”
어서 와. 이벨리아의 상술은 처음이지?
다단계 뺨치는 매콤한 불 맛 상술에 순진한 귀족들은 아낌없이 주머니를 열어댔다.
***
오늘따라 선명한 새소리가 깊이 잠든 이벨리아의 귀를 파고들었다.
닫아둔 커튼 사이로 따뜻하지만 따갑진 않은 5월의 햇살이 비집고 흘렀다.
이불에 얼굴을 묻은 이벨리아가 중얼거렸다.
“우웅…… 비비안 무덤에 놓을 꽃 먼저 찾으러 가야지…….”
바야흐로 성년식과 데뷔탕트 당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