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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44화 (244/323)

##  244화: 대악마는 춤을 출 줄 몰라

파라반트의 마스터는 결코 쪽지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긴 편지를 고이 접어 서랍 가장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세로로 짙은 상처가 난 왼쪽 눈 아래, 입매는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었다.

“친절하긴.”

파트너를 정할 때는 이리저리 재는 게 당연하다.

함께 식사하고, 거닐고, 평소보단 조금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끝에 곁을 맡겨도 되겠다 싶은 이에게 청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례적으로 긴 이 편지에는 미안하다는 감정이 구구절절하게 들어차 있었다.

혹여 모를 상처라도 주고 싶지 않아 하는 다정한 마음이.

창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그가 북쪽의 하늘을 바라봤다. 파라반트 길드 기준으로 공작저가 있는 방향.

두 건물 다 이 수도의 상징이나 다름없게 거대했기에, 마스터의 방에서는 공작저의 끄트머리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창틀에 기댄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마치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말을 걸듯.

“애초에 언감생심 기대도 하지 않았어, 공녀님.”

연심을 품는다는 것과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

연정은 땅이 하늘을 향해 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땅과 하늘이 맞닿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 대륙 가장 거대한 길드의 마스터는 어리석지 않았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그런 분홍빛의 아기자기한 꿈을 꾸기엔 그가 건너온 사선이 지독하게 현실적이었으니까.

“네 선택이니 어련히 현명할까.”

뒤끝 없이 시원한 말과는 달리, 이른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는 손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독주 여러 병을 거나하게 비워내고 나서야 침대에 털썩 몸을 눕힌 마스터는 꼭꼭 숨겨뒀던 본심을 아스라이 내뱉었다.

“……더럽게 부럽네. 악마 자식.”

***

한편 황궁 가장 깊은 곳, 황태자의 방.

루드비히가 쓰게 웃음을 흘렸다. 책상에 앉은 정찰용 매, 라르고가 평소답지 않은 주인의 모습에 검은 눈을 깜박이며 작게 울었다.

‘내가 아니구나.’

길고 정성스럽게 쓰인 편지에선 그에 대한 친우로서의 감정 그 이상의 것은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선산(先山)에서 마음을 밝힌 뒤로부터 줄곧 각오해왔던 일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막상 마주하니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차디찼다.

‘너는 그 악마에게도 이 정도 감정만 내비칠까.’

이벨리아의 감정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친밀감인지, 혹은 그보다 색채 짙은 감정인지조차.

다만 확실한 것은, 어쨌든 그는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

“…….”

가슴이 아려오는 와중에도 글자 하나하나 눌러 적었을 네가 아른거린다. 갓 스물을 넘은 이 제국의 소지존은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네게 향하는 나의 연모는 파트너 자리 하나 갖지 못했다고 빛바랠 정도로 얕지 않다.

“……네 에스코트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널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아니니까.”

네게 더 안온한 제국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네게 더 든든한 친우가 되어주기 위해서.

언젠가 네가 편히 몸을 숨길 방파제가 되어주기 위해서. 나는 이 새벽에도 해야 하는 일이 한가득이다.

루드비히가 마음을 다잡고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쓸던 찰나였다.

- 똑똑.

창가에서 희미하고 작은 노크가 들려왔다.

이 새벽에 자신의 발코니 문을 두드릴 이는 몇 없다.

한밤중의 방문객이 누구인지 짐작한 루드비히가 창을 열었다. 날렵한 검은 그림자가 훌쩍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창문 막 열지 마시라니까요, 전하.”

“이 밤에 내 발코니 문을 두드릴 이가 너 외에 더 있겠느냐.”

“가령 암살자라든가요.”

“내가 소드마스터란 경지를 도박으로 딴 건 아니다.”

“그래도 방심은 좋지 않습니다. 검 한 번 잘못 맞으면 골로 가는 건 저나 전하나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잔소리 하나는 네가 공녀 못지않구나.”

“무엇이든 간에 공녀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그림자가 복면을 위로 벗었다. 교교한 달빛에 주홍빛 머리칼이 선명히 비쳤다. 카밀라가 품속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내 루드비히에게 건넸다.

“이번에 얻은 정보입니다.”

“제법이군.”

카밀라가 옅게 웃었다. 자작 영애 신분으로 투전판까지 손수 돌며 정보 수집과 소문 조성 등의 일을 해왔던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일전에 에드윈과 세레스의 혼인을 방해하고자 루드비히를 도와 에드윈의 궁에 미색 빼어난 시녀들을 대거 들여보낸 이후, 카밀라는 이벨리아의 허락하에 루드비히 전속 기밀 첩보부에 들어가 있었다.

“지속적으로 증가해온 실종자들은 아무래도 연금술의 재료로 사용된 듯하더군요. 실종자가 다발적으로 발생한 지역에서 항상 연금술사들의 꼬리가 밟힙니다. 몇 번 더 돌아봐야 할 것 같긴 합니다만.”

“고생했다. 한 달 후면 공녀의 데뷔탕트이니 참석한 이후에 다녀오도록.”

“간단히 한 번 돌아보고 공녀님의 데뷔탕트 전까지 돌아오겠습니다.”

“그대가 참석하지 못하면 공녀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그대를 너무 부려먹는다고 한 소리 들은 참이거든.”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에게서 온 편지를 슬쩍 들어 보였다. 짧은 단발을 낮게 대충 묶으며 카밀라가 픽 웃었다.

“제가 원했는걸요. 훗날 영광된 자리에 오르시고 나서 이 한미한 자작가를 잊지만 않아 주신다면, 지금보다 더욱 굴리셔도 그저 기꺼울 따름입니다.”

“……그대는 참 특이해. 귀족 같지가 않아.”

“제게 귀족답다는 건 딸린 식솔들을 제대로 책임진다는 의미거든요. 저는 제 나름대로 제대로 된 귀족이 되고자 노력하는 중이랍니다.”

다시 복면을 쓴 카밀라가 발코니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새를 못 참고 또 깃펜을 쥐고 계셨다.

“전하. 밤이 늦었습니다. 옥체 보전하셔요.”

루드비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밀라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훌쩍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열린 창으로 아직은 조금 찬 밤바람이 달빛을 몰고 흘러들어왔다.

굳이 창을 닫지 않은 루드비히는 카밀라가 가져온 정보를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같은 마음을 바라고 네게 속내를 내비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내가 앉은 이 자리에서 너의 안녕을 위해 분투할 뿐.

내게 황제답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

며칠 뒤.

굳이 휴고와 독대하는 자리를 만든 황제는 어색한 침묵에 찻잔을 매만졌다.

1차 인마전쟁을 겪을 때만 하더라도 둘도 없는 전우이자 친우였는데.

이후 30년 가까이 아슬아슬한 정치판 속을 걸으면서 둘의 관계도 세월만큼 미묘하게 비틀어진 것이 느껴졌다.

휴고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황제가 넌지시 물었다.

“공작.”

“말씀하시지요.”

“다름이 아니라 공녀의 성년식 장소 말일세.”

“공작저에서 할 예정입니다.”

“……과거엔 내 연회장을 빌려달라 하지 않았었나.”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16년 전 이벨리아의 첫 생일 즈음. 휴고는 황제에게 추후 이벨리아의 데뷔탕트 역시 황제궁 연회장에서 치르게 해달라고 청했었다.

황제는 당시의 약조대로 연회장을 빌려주고 싶은 눈치였으나, 휴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벨리아가 황실에서 데뷔탕트를 치른다고 하면 자연히 황가와의 혼약을 앞둔 것이 아니냐는 억측이 나돌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쉽다는 듯 찻잔을 매만지던 황제가 미약한 기대감을 담고 다시 물었다.

“혹시 공녀의 파트너는 정해졌다고 하던가?”

“예.”

“……누구라던가?”

“루페르트 후작입니다.”

“……그렇군.”

뭐라고 말을 이으려던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친우의 눈에…… 언뜻 다행이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기에.

황제는 그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

이벨리아의 데뷔탕트에 관심이 많은 것은 비단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높게는 귀족들부터 낮게는 길거리 거지들까지, 사람이 둘만 모여도 누구 하나 빠짐없이 그 이야기를 해댔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제국 유일한 공녀의 데뷔탕트는 자신들과 관련 없는 별나라 이야기만은 아니었으니까.

굴지의 공작가에서 작정하고 준비하기라도 한 듯, 제국 내 귀족들과 그 식솔들은 거의 모두 초대장을 받았기에 그 이야기만으로도 저 한적한 지방 영지까지 떠들썩했다.

“초대장 받으셨어요?”

“그럼요, 저희 아버지께 왔더라고요! 세상에, 초대장마저도 뭐 그렇게 기품이 넘치는지!”

“그보단 적힌 기간 보셨나요? 무려 이틀이래요! 이틀!”

“그럼 이틀 동안 공작저에서 머물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나 봐요!”

“세상에……!”

평생 가도 발 한 번 들이기 힘든 공작저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 있다니!

귀족들과 귀부인들은 수도 중앙의 귀족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값비싼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었고, 영애들과 영식들은 꿈결처럼 다가올 금빛 인연을 기대하며 볼을 감싸 쥐었다.

한편 귀족들뿐만 아니라 제국민들도 마치 제 일인 듯 데뷔탕트를 입에 올렸는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구휼미가 그 원인이었다.

“이 구휼미는 아르티나 공작가에서 베푸시는 건가?”

“공작가에서 베푸신 건 저쪽이고! 이쪽은 루페르트 후작가에서 베푸신 걸세!”

“뜬금없이 루페르트 후작가에서?”

“뜬금없긴! 공녀님과 후작 각하 사이를 아직도 모른단 말이야?”

그제야 사내가 자루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아이고, 그렇네! 공녀님과 후작 각하께서 둘도 없는 친우라 하셨지!”

“예끼, 이 사람아. 어디 두 분 사이가 그냥 친우겠나!”

“응? 그럼 뭐 다른 게 더 있는가?”

“루페르트 후작가에서 베푸신 양을 보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인 저것들을 좀 보란 말이야! 세상 누가 그저 친우가 성년이 되는 데 가문 기둥을 뽑아 경사를 기린단 말인가?”

“자네 말은 그럼…….”

“크흠흠.”

신나서 떠들던 사내가 뒤늦게 말을 아꼈다.

“여하간 두 가문에서 받은 구휼미만 하더라도 올 한 해를 거뜬히 나겠어!”

“당분간 장사 접어도 되겠는걸!”

“그렇지 않아도 허리가 아팠는데 이참에 며칠 쉴 생각일세!”

두 손 가득 곡식과 물품을 안고 돌아가는 제국민들의 얼굴에는 싱글벙글한 웃음이 자리해 있었다.

***

그리고 현재 제국 내 가장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있는 루페르트 후작, 아가레스는 읽고 있던 인간 세계 데뷔탕트에 관한 책을 탁 덮으며 커다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건 생각을 못 했군.”

소위 ‘후궁 경쟁’에서 살아남아 폐하의 데뷔탕트 파트너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 하나 있었다.

책을 보니, 성년식에선 연회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과 그 파트너가 가장 먼저 춤을 춘다고 한다. 한 곡을 온전히.

문제는 대악마의 고고한 인생에 음악에 맞춰 춤을 춰 본 사실 따위는 없다는 점이었다.

한동안 고뇌에 빠져 있던 아가레스는 어쩔 수 없이 인간계의 문화에 가장 정통한 수하 로노베를 호출했다.

곧이어 진한 분홍빛 마기가 일렁이더니, 무슨 일인지 잔뜩 흥분하여 얼굴이 벌게진 로노베가 거칠게 걸어 나왔다.

“주군. 저 지금 바빠요! 앙제스인지 앙버터인지 그 인간이 드레스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려고 한다고요! 인간 세상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라고 해서 믿었더니 아주 형편없지 뭐예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밥풀 폐하와 주군의 의상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춤.”

“네?”

“춤.”

“춤이요?”

난데없이 춤이 웬 말이신가요. 가만히 서서 눈을 깜박이던 로노베가 이내 다급히 숨을 들이켜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허억, 주군! 설마……!”

“난 춤을 출 줄 모른다.”

“아니, 대체 그 긴 시간 동안 뭘 하시고……!”

“…….”

“아니지, 그러실 수도 있지요. 춤도 함께 출 짝이 있어야 추는 거니까요. 가만, 그럼 이를 어쩐다…….”

본의 아니게 팩트로 주군을 두들겨 팬 로노베가 턱을 쓸며 반짝 눈을 빛냈다.

“주군,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아니.”

“그렇지 않으면 배우실 곳이 마땅치 않으실 텐데요?”

“춤이란 건 부득이한 접촉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들었다.”

“다소 그렇긴 하지요?”

“그러니 네가 마르바스에게 가르쳐라.”

“예?”

“난 내 파트너 외에 다른 이성과 접촉하고 싶은 마음 없다.”

잠시 생각하던 로노베의 동공이 좌우로 거세게 흔들렸다.

“주군.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주군 말씀대로라면, 제가 마르바스에게 가르치고 주군께서는 마르바스에게 배우셔야 하는데요?”

“어쩔 수 없지.”

“……차라리 제가 나을 것 같은데. 후회하지 마셔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아가레스가 그만 나가보라는 취지로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며칠 뒤.

“주군! 둘, 둘, 셋! 여기서 턴을 하셔야 합니다! 턴!”

“…….”

“이러셔서 땅콩 폐하와 춤을 추시겠습니까? 예? 다시 한번 터언-! 백조처럼 우아하게, 흑표범처럼 절도 있게, 터언-! 터언-!”

“…….”

“스텝은 가볍게 떼셔야 합니다! 깃털처럼, 공기처럼, 나는 새다, 주군은 새다, 생각하시고 사뿐! 사뿐! 그렇게 발을 놀리시면 땅콩 폐하가 밟혀서 짜부라집니다!”

“…….”

“허리는 조금 더 부드럽게 잡으셔야 합니다! 땅콩 폐하 허리를 똑 부러뜨릴 일 있으십니까?”

“…….”

“어어?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오십니다? 아야! 아야! 으악!”

마르바스의 허리에 손을 얹고 사교용 춤을 배우던 아가레스는 자신의 손목을 분지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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