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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43화 (243/323)

##  243화: 부럽다, 악마 자식

이후로도 렐리안은 탁자를 탕탕 내리치며 자고로 남자란 자기 여자를 하늘로 알고 떠받들어야 하며 일단 황가는 무조건 탈락이라는 식의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 중간중간에 은발 독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는데, 아마 이건 루이를 가리키는 표현인 듯했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진정한 렐리안이 보랏빛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이벨리아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여하간 이브. 잘 선택했어요.”

“어어…….”

“그럼 루페르트 후작님과 옷도 맞춰 입어야 하는데, 알고 있지요?”

“응. 그거 언니 악마가 만들어 준대. 그러려고 우리 집에 왔는데 지금 저기 잡혀서 저러고 있는 거야.”

“그래요? 그럼 이럴 때가 아니네요.”

우아한 손짓으로 창문을 연 렐리안이 아래로 휙 뛰어내렸다.

“렐리안!”

기겁한 이벨리아가 외치며 아래를 바라보니, 중력을 거스르는 마법 정도는 눈 감고도 시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렐리안이 둥둥 떠서 웃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무슨 이야기!”

“이브의 연회 준비에 관한 이야기요!”

봄바람에 날리는 보랏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렐리안은 연무장 방향으로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렐리안은 흙먼지 이는 연무장 한가운데 떠서 광범위한 빙계 마법을 펼쳤다. 그것도 기가 막히게 무기만을 노려서.

「열두 번째 달의 눈은 들의 바위를 떠나지 못하니.」

4계급 빙계 마법.

빙운(氷雲).

차디찬 안개가 연무장을 덮고, 모든 날붙이가 일순 쩌적 소리를 내며 얼어붙었다.

그 사이. 가운데 탁 떨어진 렐리안.

보랏빛 머리의 주인을 알아본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거둬들였다.

저분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우리 아가씨께 아주 혼쭐이 날 것이 뻔했으니까.

기사들에게 짧게 묵례한 렐리안은 로노베 앞으로 다가가 고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악마님.”

“넌 뭐야.”

“당신께 인간계의 지위란 별로 중요하지 않을 테니 생략할게요. 저는 공녀님의 가장 친한 친구랍니다. 일전 소풍 때 한번 뵈었었는데, 혹 기억하시는지요?”

고개를 기울인 로노베가 사슬을 한 번 휘둘러 감싸고 있던 얼음을 깨뜨렸다.

예전에 이런 보라색 머리를 봤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긴 했으나, 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은 없다.

“밥풀 폐하의 가장 친한 친구? 그건 우리 주군이거든? 딱 말해. 너 주군의 경쟁자냐?”

사슬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훙훙 허공을 휘저었다. 렐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아니요. 공녀님과 루페르트 후작님을 진정으로 응원하고 있답니다.”

“그럼 아군이네.”

허공에서 제멋대로 뻗치던 사슬이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로노베가 렐리안의 손을 마주 잡고 살짝 흔들었다.

“공녀님의 데뷔탕트를 도와주신다고 들었어요.”

“그럴 목적으로 왔지. 저것들에게 잡혀서 이러고 있었지만.”

“제가 구해드릴게요. 대신 저도 의견을 좀 얹어도 될까요?”

“의견? 무슨 의견?”

“공녀님과 후작님의 옷에 대해서요.”

“흐음…….”

로노베가 렐리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뭐. 옷 입은 꼴이 나쁘진 않네.’

적어도 패션 감각이 경악스러운 밥풀 폐하나 옆 제국 황태녀 꼬맹이보단 낫다.

“밥풀 폐하의 배경색은 이미 정했어. 금색으로.”

“좋네요. 포인트는 짙은 푸른색이 어떨까요?”

“……배합을 좀 아네.”

“공녀님과 후작 각하께선 모두 얼굴이 화려하신 편이니, 옷이 그렇게 요란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눈에 띌 거예요.”

“너 감각이 좀 있구나?”

좋아. 당분간 동맹이다.

“초대장부터 연회장까지.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공작부인하고 마담 앙제스하고 함께 진행하시면 될 거예요.”

“우리 밥풀 폐하와 주군의 연회에 티끌만 한 흠도 있어선 안 돼.”

“물론이지요. 제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연회가 되어야 해요.”

“통하는군. 보라 인간.”

“그러게요, 아름다운 악마님.”

“……너 아주 마음에 들어.”

“저 역시.”

“너 이름이 뭐라고?”

“렐리안이라고 불러주세요.”

“좋아. 릴리안.”

“렐리안이요.”

“그거나 저거나.”

이벨리아의 완벽한 데뷔탕트라는 목적 아래, 고위 악마와 고위 귀족 사이의 역사적인 동맹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

한편 연무장 위에 떠서 악마와 기사들의 전투를 키득대며 바라보던 엔리르는 말랑한 앞발로 입을 틀어막았다.

“누나랑 악마 놈이 옷을 맞춰……?”

데뷔탕트 준비를 위해서……?

이게 무슨 불상사야!

용이 먹던 쿠키 통을 툭 떨어뜨렸다. 가벼운 돌로 만들어진 쿠키 통이 어린 기사의 머리 위에 날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이, 엔리르는 쌩하니 날아 이벨리아 방의 발코니를 훌쩍 넘어 들어갔다.

속도가 워낙 빨라 언뜻 보면 그저 붉은 탁구공 하나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엔리르는 책상에 앉아 뭔가 적고 있는 이벨리아 앞에 끼익 멈춰 서고선 물었다.

“누나! 누나! 데뷔탕트 파트너 정했어?”

“응.”

“그게 혹시 악마 놈이야?”

금으로 장식된 깃펜을 놀리던 이벨리아가 깔끔한 마침표를 찍고는 답했다.

“응. 같이 가기로 했어.”

“가, 같이 간다는 말이…… 파트너라는 소리야?”

“응. 그런 의미에서 엔리르 네게도 편지를 쓰려고 했었는데. 이왕 왔으니까 말로 전할게.”

이벨리아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책상 위로 툭 떨어져 내린 엔리르의 몸통을 잡고 살살 쓰다듬었다.

“뭐, 너야 어차피 굳이 나랑 함께 가고 싶은 건 아니었을 테지만, 어쨌든 그날 나랑 놀아줘서 고마웠어. 내 데뷔탕트엔 소중한 동생으로서 자리를 빛내줘.”

“……파, 파트너…….”

“……?”

“그, 그럼 악마랑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춤도 추고…….”

엔리르의 몸이 심상치 않게 떨렸다. 몸 주변에서 뭔가 눈에 띄게 일렁거렸다. 이벨리아가 왜 이러냐는 듯 불렀다.

“엔리르?”

“싫어어. 누나가 악마랑 뽀뽀하는 거 싫어어…….”

“왜, 왜,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누, 누가 뽀뽀한대?”

“왜, 왜, 왜 수상쩍게 말을 더듬어?”

용의 동그란 눈에 눈물이 동글동글 고였다. 누나가 다른 것들하고 파트너 하는 게 싫어서 나도 누나의 파트너가 되고 싶었는데.

“기어코 그 악마 자식이 누나의 파트너 자리까지…….”

끝을 모르는 용의 상상력이 극을 향해 치달았다.

기어코 엔리르의 머릿속엔 이벨리아가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악마와 함께 걷는 장면까지 스쳐 지나갔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몸부림까지 치던 작은 용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엔리르? 괜찮아? 너 몸이…….”

“……!”

강제로 존재력을 폭주시켜 성룡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아니하였기에 감정에 따라 급격히 요동치는 힘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아, 안 돼! 변한다!

불길함을 느낀 엔리르는 곧바로 책상을 박차고 연무장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연무장에선 공작저를 모두 감싸고도 남을 거대한 광휘가 일었다.

- 구구구구구궁.

곧이어 지반이 내려앉듯 거대한 소리가 들리고.

“…….”

“…….”

빛무리가 내려앉은 곳에선 시뻘건 용 한 마리가 부끄러운 듯 앞발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여전히 손에 검을 쥐고 있던 아르티나 기사단이 외쳤다.

“……미친! 용이다!”

“그 여우가 다 커버렸다더니 이렇게 컸네!”

“와, 이거 팔면 얼마야?”

“꼬리만 팔아도 평생 먹고살겠다!”

“회를 쳐보자!”

“비늘을 뜯어보자!”

용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사냥꾼들 사이에 낀 엔리르가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연무장 입구. 태양 같은 금발을 휘날리며 달려온 이벨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엔리르가 앞발 사이에서 얼굴을 빼꼼 들고 말했다.

“누나.”

마치 여우의 형상일 때처럼 좌우로 움직이는 꼬리가 연무장의 집기를 있는 대로 부수고 있었다.

“응애. 나 귀여운 아가 용.”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이벨리아가 연무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 우리 가문 최단신…… 이제 빼도 박도 못 하게 나야……?”

***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거대한 용이 되어버린 엔리르 외의 다른 데이트 상대자들에게 정성스러운 편지를 적어 보냈다.

내용은 전부 비슷했다.

함께 하루를 보내줘서 진심으로 감사했고, 데뷔탕트 파트너를 정했으며, 그대들은 나의 둘도 없는 계약자로서, 마스터로서, 친우로서, 내가 새로운 걸음을 딛는 자리에 참석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곳. 물의 영역.

엘라임은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는 글씨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쓸었다. 행여 번지기라도 할까 봐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조금 씁쓸하긴 하군.’

전생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기에 너와 내가 유별나게 특별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네 전생의 일로 네게 하릴없는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만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네 지지대가 되어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그의 계약자 곁을 지키는 이들이라면 모두 같은 마음일 터다.

‘내 하잘것없는 욕심보다야 네 행복이 우선이지.’

그렇게 엘라임이 아쉬운 마음을 밀어 넣으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때였다.

물의 영역에 난데없는 돌풍이 몰아치더니, 바람 한가운데에서 얼굴이 잔뜩 상기된 페르세스가 나타났다.

“야! 엘라임! 이것 좀 봐라!”

팔을 높게 들고 팔랑팔랑 흔드는 것은 편지지. 엘라임이 받은 것보단 조금 투박하고 짧은 것이다.

찰나의 순간 이를 간파한 엘라임이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물었다.

“내 계약자가 보냈나.”

“응! 너도 받았네? 뭐래? 아니, 나보다 훨씬 길잖아!”

“……파트너 정했다고.”

“에엥, 너로?”

“아니. 악마 놈.”

성큼성큼 다가온 페르세스가 엘라임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음. 너 아쉽겠다.”

“……아니라면 거짓이지.”

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 해온 페르세스는 알 수 있었다. 엘라임의 기분이 지금 그리 나쁘진 않다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보이네? 정령계를 온통 얼려버리면서 난리를 칠 줄 알았더니.”

“은애하는 이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너 진심이었냐.”

“네 생각보다 꽤 오래전부터.”

“……미친. 그냥 계약자를 아끼는 마음인 줄 알았더니.”

“그보다는 조금 더 깊다.”

단조롭게 흘러나오는 답에 경악한 페르세스가 물었다.

“근데 괜찮아? 파트너 안 해도?”

“알다시피 나의 계약자는 전생에서부터 그리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잖나.”

“그래서 네가 이번 생을 줬잖아.”

“인간의 삶이 늘 그렇듯, 그럼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고.”

“그건 우리 병아리 책임감이 워낙 뛰어나서 그렇지!”

“그러니까. 그런데 페르세스.”

“응?”

“내 계약자가 유일하게 기대는 이가 있어.”

“나?”

“아니.”

“그럼? 나 아니면 없을 텐데?”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 그 악마 말이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그 악마가 어떻게 그 정도의 자리를 차지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라면 차라리 그 자식인 게 다행이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 말에 페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 그 녀석이면 나쁘진 않아.”

“그래서 너도 그 녀석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소설 쓰고 그랬었지.”

“……닥치고. 여하간 그 녀석 예전에도 자기 존재들 지키겠다고 신물까지 부수면서 난리 쳤었잖아.”

“그랬었지.”

“자기 영역 안의 것이라면 끔찍하게 아끼는 녀석이니 믿음직스럽긴 해.”

말과는 달리 페르세스의 몸 주변에는 심상치 않은 강풍이 몰아쳤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순순히 우리 병아리를 넘겨준다는 건 아니야.”

“뭘 어쩌려고.”

“얄미우니까 제대로 때려줘야지. 너도 가세해, 엘라임.”

“……좋다.”

애초에 내 것인 적 없으니 빼앗겼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내가 품고 싶었던 것을 앗아갔으니 작은 응징 정도는 가해야 속이 시원할 터.

투지를 불태우던 엘라임이 물었다.

“아. 그래서 너도 내 계약자의 데뷔탕트에 초대를 받았다고?”

“응!”

“함께 가면 되겠군.”

그 말에 페르세스가 과장되게 입을 가렸다.

“어머- 엘라임, 미안!”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나는 세드릭이 함께 가자고 파트너 신청을 해서. 짝이 생겨버렸네?”

“…….”

“안됐지만 넌 추프리트랑 트로이랑 셋이 나란히 손잡고 가렴!”

“……빌어먹을.”

“아니면 내 계약자 빌려줄까? 손에 나무뿌리 꼭 잡고 갈래? 아하하하핫-!”

파트너가 정해진 페르세스는 한껏 어깨를 펴고 콧대를 높인 채로 깔깔 웃으며 물의 영역을 빠져나갔다.

망연자실 홀로 남은 엘라임의 어깨 위로 일레스트의 말랑한 앞발이 턱 얹어졌다.

조물조물 어깨를 주무르며, 갈기 풍성한 늑대가 위로를 건넸다.

[왕이시여. 본디 짝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으로서…….]

“넌 늘 없었잖아.”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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