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너, 내 파트너가 되어라!
토끼야. 내 친애하는 토끼야.
네 뒤에 애들 표정 좀 봐라. 응?
네가 나의 왕이니 실질적으로 이 동부의 왕이나 다름없다는 추상적인 선언과 이 동부의 왕은 너라며 상징인 관을 씌워주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아마 반발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마계의 왕으로 세운다는데. 그간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잔디나 언니 악마를 비롯해 다른 악마와 마족들 역시 마뜩잖게 여길 터다.
‘괜히 불편하게 만들고 있어.’
이벨리아가 이건 아가레스의 독단적인 의사일 뿐 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걸 표현할 요량으로 악마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입을 떡 벌린 마르바스와 로노베, 그리고 침잠한 눈으로 바라보는 바르바토스가 보인다. 그 뒤에 도열한 몇몇 악마와 마족들의 표정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 화가 날 만도 하지.’
십분 이해한 이벨리아가 손을 내저으려던 찰나였다.
마르바스와 로노베가 가장 먼저. 그 다음으로 바르바토스가. 연이어 시중을 들던 악마들과 마족들이. 마치 물결이 퍼져 나가듯 천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뭐, 뭐야……?’
그리고.
“왕을 뵙습니다.”
“왕을 뵙습니다.”
호기 넘치는 기합을 수반한 인사는 아니었다.
외려 무겁고 정적이어서 지극히 정중하게 들리는 인사.
그러나 수십의 목소리가 합하여지니 이 공간을 울리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당황한 이벨리아가 발을 뒤로 물렸다.
‘고작 이깟 왕관 얹어줬다고 내게 왕의 예우를 차려?’
이 자존감 높은 악마들이 그럴 리가!
‘혹시 토끼가 협박을 했나?’
시선 돌려 바라보니 아가레스는 난 모른다는 식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살짝 고개 들어 이벨리아의 멍한 표정을 본 바르바토스가 대신하여 답했다.
“주군의 명은 내겐 곧 신의 뜻. 신께서 새로운 왕을 내리셨으니 내가 따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결국 주군을 따르는 거라면 누구를 향해 머리를 숙이는지가 뭐 중요하겠어.”
“인간 왕을 모시는 건 처음이네.”
마르바스와 로노베 역시 부복한 채로 답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이벨리아가 다시금 왕관에 손을 얹었다.
‘알겠다.’
너희들은 아가레스의 명이라면 뭐든 따르는 거구나. 온전히 너희의 주군을 믿고 의지하기에 다른 왕을 섬기라는 명조차 달가운 거로구나.
새삼 기꺼웠다. 세상에 발붙이지 못하고 부유하며 살아온 아가레스에게도 그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수하들이 있다는 것이.
그 광경을 함께 바라보던 대악마가 말했다.
“언제든 와. 이 동부는 이제 네 것이니까.”
“…….”
“넌 어떤 의무도 질 필요 없어.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 네가 없을 땐 우리가 잘 관리하고 있을게.”
우리라는 단어에 휘하 악마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진 것은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아가레스는 그저 이벨리아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곧 이 마계 전역을 네 것으로 만들 거야. 네가 발 디딜 때마다 모두가 꿇어 예를 갖추도록.”
“그, 그럴 것까지야…….”
“내가 주고 싶어서.”
그리 말하는 금안은 어딘지 환희에 차 보이기도, 또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가만히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손을 뻗어 아가레스의 머리를 쓸었다.
너는 내 흔적을 여기에도 남겨두려 하는구나. 비밀기지처럼. 이바스 저택처럼. 내 흔적이 남아야 비로소 네가 이곳을 사랑하게 될 테니까.
“아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좋아?”
“좋아.”
“내가 이곳에 있으면 마계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
“네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이라도 난 감히 미워할 수가 없어.”
“……그럼 전부 내 것으로 만들어 줘.”
내 손과 발이 닿은 것들이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깟 왕. 내가 하지 뭐.”
우리 토끼는 내 옆에서 아양 떨며 행복하게 살아.
타고나길 지배자의 성품을 갖고 태어난 이는 예고 없이 왕관을 쓰게 되더라도 이질감 없이 적응한다. 이벨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가레스의 자리에 앉은 이벨리아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왕 우리 토끼 행복하게 해주기로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해야지. 내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서 네가 이 세상을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도록.
“악마들의 서열은 힘으로 정해진다고 들었는데.”
“꼭 힘만으로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맞아.”
“지금은 아스가 날 왕으로 세우니 너희도 날 따르는 거겠지?”
“……뭐, 그건 그렇지?”
악마들이 왜 묻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왕관을 쓴 이벨리아가 해사하게 웃었다.
“조만간 진정으로 날 따르게 될 거야.”
***
이벨리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늘 밥이다.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물어뜯을 고양이처럼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갔으며, 맛있는 것을 입에 넣어주면 즉각 순한 강아지처럼 눈을 깜박이곤 했으니까.
이를 잘 알고 있는 아가레스는 마계 내에서 제법 이름 날리고 있는 악마 하나를 잡아 왔더랬다. 이바스 저택에 머물며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악마와는 또 다른 악마.
무려 마왕의 직속 숙수로 있기에 잡아 오는 것이 녹록지 않았으나, 그건 아가레스가 알 바 아니었다. 납치 같은 일은 어차피 바르바토스 선에서 처리되니까.
그는 그저 겨울나기 전의 다람쥐처럼 빵빵하게 볼을 채우고 우물대는 친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심히 기꺼웠다.
“맛있어, 이브?”
“응! 최고야!”
끝도 없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 질린다는 표정으로 마르바스가 말했다.
“예전에 내 타파스를 뺏어 먹으려 할 때부터 알아봤지, 땅콩 전하.”
“그때 풀 쪼가리랑 바꾸자고 하니까 안 바꿔줬잖아!”
“그걸 누가 바꿔! 바보냐?”
“바본 줄 알았지. 근데 안 바꿔주길래 아아 머릿속까지 사자인 멍청이는 아니구나, 생각했어.”
“이걸 그냥 확!”
“저걸 그냥 냠!”
“하여간 한마디도 안 져!”
“풀때기한테 지느니 죽고 말지.”
“너 왕이 되었다고 내가 널 못 죽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악마는 힘에 따른 서열 사회라고!”
그 말에 이벨리아가 드레스 소매를 팍팍 걷어 올렸다.
“덤벼.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처맞아보자.”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땅콩만 한 게.”
“기사단.”
“그 빌어먹을 것들. 하여간 땅콩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면 다 그놈들이야.”
“우리 애들 욕하지 마라.”
“난 너희 애들 아니냐? 왕이 이렇게 차별이 심해서 쓰겠어?”
“흥. 난 폭군이야. 귀염 받고 싶으면 잘하라고.”
당당히 선언한 이벨리아가 아가레스 몫의 타파스 한 조각을 뺏어 입에 와앙 넣었다.
“예전에 이바스 저택에서 먹은 것도 맛있긴 했는데 이번 음식이 더 맛있어. 요리사 바뀌었어?”
그 말에 아가레스가 바르바토스를 향해 흘끗 눈짓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바르바토스가 답했다.
“예, 주군. 제대로 잡아두겠습니다.”
“잡아둬? 아스 전속 요리사가 아니야?”
“곧 네 전속이 될 거다.”
“잠깐. 그럼 지금은 어디서 데려온 건데?”
“마왕성.”
“누가?”
“바르바토스가.”
“그럼 마왕은 뭐 먹어?”
“알 게 뭐야. 풀뿌리라도 캐 먹겠지.”
야. 아무리 그래도 남의 밥엔 손대는 거 아니지. 너 아주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구나?
보물을 빼앗겨도 밥을 빼앗기는 건 못 참는 이벨리아는 은근 뿌듯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세우는 바르바토스를 향해 떨떠름하게 웃었다.
“남의 집 밥줄을 막 빼 오고. 정말 인성이 글러 먹었네.”
“크흠. 고맙군.”
“……그으래. 아스가 아주 대단한 수하를 뒀어.”
“칭찬 고맙다.”
어떡해. 저 악마 칭찬을 들어본 적 없어서 욕인지 칭찬인지 구분도 못 하나 봐. 이벨리아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입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벨리아의 생각대로 생전 제대로 된 칭찬을 받아본 적 없던 바르바토스는 마냥 쑥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저 땅콩은 나름대로 좋은 인간인 것이 분명하다고.
게다가.
“잘했다. 바르바토스.”
인간의 칭찬을 받으니 주군의 칭찬이 덤으로 따라붙는다!
역시 황금 땅콩. 잡으면 최소 주군의 총애.
이벨리아를 바라보는 바르바토스의 눈이 숫제 새로운 신을 영접하는 그것으로 바뀌었다.
그가 복숭아로 만든 주스를 이벨리아 앞에 탁 내려두었다.
“이거. 맛있다.”
“고맙지만 난 오렌지 주스를 좋아해.”
“그럼 여기.”
“옳지. 고마워.”
또 칭찬인가. 바르바토스의 볼이 엷게 경련했다.
이벨리아가 활짝 웃으며 잔을 받아들고 입에 가져다 대려던 찰나. 손에 들려 있던 잔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응?”
휑하니 비어버린 손을 내려다보던 이벨리아가 잔이 딸려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벌컥벌컥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는 토끼가 보인다.
“……토끼야. 목이 많이 말랐어?”
탁. 부서져라 내려놓은 잔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악마가 손등으로 붉은 입술을 스쳐 닦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은 조금 찌푸린 채로.
“더럽게 시군.”
“…….”
“……목이 말랐어. 많이.”
“……내 주스…….”
“내가 다 먹어버렸으니 내가 다시 줄게. 잠시만.”
아가레스는 바르바토스가 들고 있던 커다란 오렌지 주스 병을 매몰차게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입을 대고 마셨던 잔에 다시 주스를 채워 이벨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 여기.”
“어어, 고, 고마워.”
이벨리아 곁에 서 있던 바르바토스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군을 피해 다섯 걸음 물러났다.
고작 몇 시간 새에 제법 눈치가 빨라진 바르바토스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땅콩 폐하에겐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되, 적정 거리 이상 다가가선 곤란하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주변을 둘러보니, 마르바스와 로노베가 장족의 발전이라는 듯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한편 아가레스가 건넨 오렌지 주스를 쭈욱 들이켠 이벨리아는 마치 거나하게 술을 마신 것처럼 캬아 소리를 냈다.
“풀때기! 풀때기는 어디 있느냐!”
“아까부터 여기 있었잖아.”
“이 맛있는 것을 어서 더 내오거라!”
“……여기서 더 먹는다고?”
“당연한 걸 왜 물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너 코끼리냐?”
“아, 그 거대한 동물은 나도 하르벤타에서 보고 왔지!”
“걔보다 네가 많이 먹을 것 같은데.”
“걔는 바나나만 먹는대. 영 허당이야. 고기 내와, 고기!”
“고기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바르바토스는 유례없이 떠들썩한 식탁을 바라봤다.
비어 있거나, 혹은 주군께서 홀로 고요히 식사하시던 곳.
고작 저 땅콩 하나가 자리하였을 뿐인데 고성과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참으로 생경하다. 본 적 없는 광경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때, 곁으로 다가온 로노베가 속삭였다.
“참 이상하지?”
“…….”
“저 작은 밥풀이 거대한 태양을 몰고 온 느낌이야.”
바르바토스가 로노베를 바라봤다.
몽마 특유의 당당함은 간데없고,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여전히 주군과 밥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로노베가 말했다.
“저 밥풀과 연을 맺고 나서…… 주군께서 참 자주 웃으시더라.”
“…….”
“영역이고 세상이고, 심지어 당신 자신까지도.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히 여기지 않던 분이, 하나하나 돌아보시더라.”
몽마의 눈은 반쯤 연정을, 반쯤 충심을 담고 주군을 향해 있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안 물러나겠어. 저 밥풀로 인해 주군께서 살고자 하시는데.”
비로소 생을 귀하게 여기시는데. 이제야 세계에 발을 붙이시는데.
“그러니까 바르바토스. 부탁 하나 하자.”
“……뭐.”
“밥풀, 지금은 크게 마음에 들진 않을 거 잘 알아.”
“…….”
“그래도 밥풀이 원한다면, 진짜 이 세계의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줘. 그게 주군을 기쁘게 하는 길이니까.”
그거면 됐잖아. 우리에겐.
바르바토스는 주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늘 생에 초연한 무감한 표정으로 만물을 내려다보던 그의 신이, 장식용 풀 쪼가리를 던지는 인간을 보며 웃고 계신다.
‘태양을 몰고 왔다라…….’
로노베의 표현이 구구절절 맞았다.
저 인간은 홀로 밤을 걷던 주군의 하늘에 뜬 단 하나의 태양이었다.
주군의 밤을 걷어냈다는 것.
바르바토스가 받들어 모실 이유는 그거면 충분했다.
***
디저트로 나온 파이까지 양 볼에 빵빵하게 담은 이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나는 아가레스의 어깨를 잡아 다시 눌러 앉히고, 이벨리아는 마치 대형견을 다루듯 코앞에서 검지를 좌우로 까닥까닥 흔들었다.
“아스는 잠시 집무실에 가서 기다려.”
“왜? 어디 가?”
“난 잠깐 언니 악마랑 할 얘기가 있어.”
“……나는?”
“원래 여자들끼리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법이야. 잠깐 풀때기랑 모지리랑 놀고 있어.”
그 말에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의 어깨가 동시에 축 처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노베의 팔을 끌어 1층으로 내려온 이벨리아가 말했다.
“언니 악마. 도와줘.”
“또 뭘! 데뷔탕트 날에 꾸며주는 거로는 부족해?”
“그것의 일환이야. 아스한테 파트너 신청할 거야.”
툴툴대던 로노베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몽마가 이벨리아의 어깨를 와락 붙잡고 짤짤 흔들었다.
“진짜? 오늘? 여기서? 정말?”
“응. 응. 응. 응.”
“잘 생각했다, 우리 밥풀! 네가 진정 사내 보는 눈이 있구나?”
탁탁. 로노베가 이벨리아의 어깨를 내리쳤다. 악마의 힘을 이기지 못한 한낱 연약한 인간이 휘청였다.
“그래서, 뭘 도와줄까? 뭐라고 말할지 적어줄까? 아니면 예쁘게 단장을 해줄까?”
“뭐라고 말할지는 이미 다 생각해 뒀어. 그리고 아스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예쁘다고 할 테니까 단장도 필요 없고.”
“그럼? 내가 뭘 하면 돼?”
“그래도 명색이 파트너 신청인데 꽃다발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가자! 정원을 죄 베어내자!”
“잠깐, 죄 베어낼 필요는 없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로노베의 뒤로 이벨리아가 재빨리 발을 놀렸으나.
- 쉬이익.
이미 로노베의 사슬에 벤 꽃들이 허공을 나풀나풀 수놓고 있었다.
“……스케일 보소.”
뛰어난 손놀림으로 꽃을 잡아챈 로노베가 예쁘게 다듬어 묶은 다음 이벨리아의 품에 안겨주었다.
“자! 여기! 이제 얼른 주군께 가자!”
“잠시만. 진정하고 좀 기다려 봐.”
이벨리아가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친애하는 악마가 거절할 리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심장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데이트가 모두 끝난 이후 여러 밤 침대에서 뒤척이며 이미 정해두고도 아직 말하지 못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다들 데뷔탕트와 성년식 파트너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곤 하니, 혹시 너와 나도 이번 일을 계기로 이 미묘한 경계를 넘어 다른 장으로 가진 않을까 해서.
그리고 그게…… 다른 누군가에게는 조금 미안해서.
그래도 어영부영 애매하게 시간 끌 생각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 걸려 있는 일에는 뭐든 확실한 게 좋은 거니까.
이벨리아는 로노베가 만들어준 꽃다발을 품에 꽉 움켜쥐었다.
“흐읍. 좋아. 가자.”
품에 안기도 힘들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 족적마다 꽃내음이 진하게 아로새겨졌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장하게 걸은 이벨리아가 집무실 문을 쾅 열어젖혔다.
문 여는 버릇 못 고치냐고 한 소리 하려던 마르바스는 난데없는 꽃다발을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늘 삭막했던 집무실 안. 처음으로 봄이 빈틈없이 들어찼다.
크게 뜨인 금안을 올곧게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선포하듯 말했다.
“너, 내 데뷔탕트 파트너가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