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동부의 새로운 왕
로노베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 자리에 있는 악마와 마족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정했는데 왜 우리 주군께서는 모르고 계신 거야.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주군이 아닌 다른 파트너를 고른 거 아니야?’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쫘악 올라온다.
눈을 질끈 감은 로노베가 다시 한번 물었다.
“누구야! 그 재앙의 씨앗이!”
톡 찌르면 펑 터져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
홀로 유유자적한 이벨리아가 가볍게 앞으로 걸으며 노래하듯 답했다.
“비밀인데!”
그러자 후다닥 달려간 로노베가 이벨리아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잠깐만. 이게 지금 비밀로 할 그런 게 아니거든!”
“그럼 내가 정한 파트너한테 멋있게 신청하기도 전에 이런 곳에서 공개해야 해?”
이브는 다 계획이 있다고!
그 말에 로노베가 한 자락 희망을 붙잡듯 물었다.
“그, 그럼 아직 파트너한테 같이 가자고 말 안 한 거 맞지?”
“응. 아직. 곧 말할 거야.”
그럼 아직 주군이 아닌 건 아니란 소리다. 긴장이 풀린 몽마가 털썩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밥풀.”
“내가 뭘?”
“됐어. 눈치도 지지리 없는 밥풀아.”
“……?”
둘러보니 악마들과 마족들이 모두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들 저래?
황천길 입구에서 겨우 되돌아온 마르바스는 넋이 빠져 계신 주군을 일별하곤 땅콩 곁으로 가서 속삭였다.
“땅콩아. 땅콩아. 망할 땅콩아.”
“왜. 풀때기야.”
“우리 땅콩은 똑똑하지?”
“그럼!”
“네 선택에 나를 비롯한 동부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거 잊지 말고.”
“……?”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 주군을 한번 봐봐.”
마르바스가 이벨리아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빙글 돌려 아가레스를 향해 세웠다.
“데뷔탕트 날 함께 하기에 주군보다 나은 파트너는 없어. 훤칠하시지, 강하시지, 적어도 네겐 다정하시지…….”
주절주절 흘러나오는 주군 찬양. 뚝 끊어버리며 이벨리아가 무심히 내뱉었다.
“알아. 그래서 잘 정했다니까?”
“그러니까 우리 주군을 파트너로…… 아니, 잠깐.”
그래서 잘 정했다니까?
‘그래서’ 잘 정했다고?
가만히 서서 그 대답의 의미를 곱씹던 마르바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르바스는 다시 나풀나풀 걸어가는 이벨리아의 뒤에 바짝 따라붙으며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땅콩! 맞지? 응? 내가 생각한 게 맞지?”
“쉬잇.”
“어어, 그치, 그치. 쉬잇.”
“너 말이 짧아졌다?”
“에이, 착각이십니다! 땅콩 전하! 땅콩 폐하! 땅콩 만만세!”
마르바스가 간신처럼 두 손을 비볐다.
땅콩이 이걸 주군께 말씀드리기만 하면 한동안 동부에 꽃이 필 터다.
마르바스는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 이벨리아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곱게 포갰다.
땅콩 폐하, 가능하면 주군께 빨리 좀 말씀드려주십시오!
***
옆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단정한 발소리가 사라졌다.
이벨리아는 저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가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스. 안 오고 뭐 해?”
“…….”
네가 방금 내 심장을 바닥에 내리쳤잖아.
울컥 올라오는 투정을 억누르며, 아가레스는 자신의 구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가늘고 여린 손이 자신을 향해 내밀어져 있다. 악마는 생각했다.
이것이 내게 네 옆자리를 허하는 손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타는 속도 모르고, 마냥 해맑은 그의 주인께선 활짝 마주 웃으신다.
“가자! 네 집무실 구경시켜준다며!”
“……응.”
그에 또 속절없이 깨닫는다. 굳이 어떤 목적 없더라도 나는 네 손길이라면 그저 좋다는 것을.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손을 잡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 동시에 이벨리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히익. 너, 너, 저 뼈……!”
그러자 아가레스가 뿌듯하다는 듯 답했다.
“네가 사냥제 날에 줬던 거.”
“그걸 저기 저렇게 걸어뒀어?”
“네가 이바스 저택에 걸어두는 건 안 된다고 해서.”
그렇다고 여기다가 걸어두란 소리는 아니었지! 이 멋들어진 집무실에 마물 뼈 장식이 웬 말이야!
이벨리아가 로노베와 마르바스를 돌아봤다.
‘왜 안 말렸어, 이 간신들아!’
그러자 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어머, 이 밥풀 좀 봐. 주군께서 자비로우신 건 너 한정이라고.’
‘말렸다간 우리 뼈가 저기 걸릴 판이었다.’
실로 안목 낮은 기괴한 인테리어. 흡족하게 그것을 바라보는 이는 방 주인 단 하나였다. 심지어 사룡종의 뼈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서 그걸 얼마나 아끼는지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장기 임무에서 복귀한 이후 주군의 집무실에 들른 적 없는 바르바토스는 저 뼈를 누가 어떤 연유로 주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겁 없이 입 밖으로 나와버린 본심.
“무슨 저런 급도 안되는 마물의 뼈로 집무실을 장식해두셨습니까, 주군.”
마르바스가 바르바토스의 등을 퍽 내리쳤다. 눈치 챙겨.
“원하신다면 차라리 제 뼈를 빼서 드리겠습니다. 저건 영…….”
로노베가 눈치 없는 악마의 팔을 꼬집었다. 닥쳐, 새끼야. 다 죽일 일 있어?
그러나 구명줄을 자기 손으로 싹둑 잘라버린 악마는 꼬집힌 팔을 쥐며 담담히 말했다.
“왜 꼬집나. 너도 주군께서 저딴 것을 집무실에 걸어둔다고 하셨으면 말렸어야지.”
“……이런. 오늘 내 지위가 하나 오르겠네.”
로노베가 이마를 짚었다. 난 할 만큼 했어.
둘러보니 지금 이곳에서 바르바토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는 건 주군의 분노가 닿을 일 없는 밥풀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고개 돌린 주군의 눈에서 금빛 안광이 심상치 않게 번뜩였다.
“……저딴 것?”
“예. 지고하신 주군의 집무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불순물입니다.”
“……불순물이라.”
“예, 주군.”
바위의 환생이나 다름없다는 평답게, 무뚝뚝한 바르바토스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평소엔 아가레스가 나쁘지 않게 평했던 장점이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단점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불순물……. 그게 내 집무실에 하나 더 있는 듯한데.”
“어디입니까. 제가 바로 치우겠습니다.”
“너.”
“예?”
“너. 불순물.”
“……주, 주군.”
“내가 직접 치우지.”
검 보랏빛 마기가 손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크기는 그리 거대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압축된 마기가 얼마나 농도 짙은 것인지 악마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당황한 바르바토스가 마르바스와 로노베를 번갈아 바라보았으나, 둘 다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기껏 던져준 동아줄을 걷어찬 놈을 구원해줄 의리 따윈 없다.
“어어, 주, 주, 주군!”
바르바토스가 하얗게 질려 뒷걸음치던 그때.
“맞는 말인데, 뭐.”
청량한 목소리가 물방울처럼 똑 떨어졌다. 동시에 손 위에서 소용돌이치던 마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브.”
“저거. 여기다 걸어두니까 영 별로야.”
“하지만 네가 준 건데…….”
“아스 집무실이 칙칙해지잖아.”
“…….”
악마가 삽시간에 시무룩해졌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네가 직접 잡아서 내게 선물로 준 건데.
동부를 남 줘버리더라도 이건 못 준다.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로 아가레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상대는 악마 조련엔 도가 튼 인간. 이벨리아가 살살 웃으며 달랬다.
“치우는 게 싫으면 다른 곳에다가 걸어둘까?”
“가장 잘 보이는 데 두고 싶어.”
“그보단 선물을 소중히 모아두는 선물 방이 따로 있는 게 나을지도 몰라.”
“선물 방?”
환영처럼 토끼의 귀가 쫑긋하는 것이 보인다.
“응. 내가 자주 선물을 주면 그걸 다 여기 모아둘 수는 없잖아.”
“……자주 줄 거야?”
“당연하지. 방이 가득 차도록 줄 거야.”
“…….”
뭐야. 좋은데.
홀랑 넘어간 순진한 토끼 한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씩 웃은 이벨리아가 바르바토스를 바라봤다.
“아마 저 악마도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걸 거야. 이 뼈가 형편없다는 게 아니라, 더 어울리는 장소를 찾는 게 어떨까 싶은 마음. 그치?”
이쯤 되니 아무리 눈치를 밥 말아 먹은 바르바토스라도 알 수 있었다. 이 동아줄을 걷어차면 곧바로 좌천이라는 것을. 바르바토스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가레스가 언짢다는 듯 말했다.
“그런 의미였다면 제대로 말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주군. 딱 보아하니 저 인간이…….”
표정이 안 좋으시다.
“딱 보아하니 저 땅콩께서…….”
표정이 풀리셨다.
“땅콩께서 주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알겠더군요.”
이젠 숫제 충신을 보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계시다.
아. 바르바토스는 이제 뼈저리게 이해했다. 이 땅콩에게 잘 보이는 것이 곧 새로운 서열의 상위권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던 로노베의 조언을.
‘저 땅콩은 진정 황금 땅콩이다.’
제대로 잡으면 그야말로 대박.
황금 땅콩이 뒤를 돌아보았다. 생긋 웃는 모습이 마치 ‘내가 네 목숨 살렸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제법 고마운 건 사실이나, 뼛속까지 고위 악마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바르바토스는 슬며시 시선을 돌려버렸다. 고작 이 정도로 다른 이들처럼 어화둥둥 우리 땅콩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한편 고위 악마의 자부심 따위 진작 내다 버린 마르바스와 로노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손뼉을 쳤다. 그들이 그토록 치우고자 노력했던 기괴한 뼛조각이 땅콩의 말 한마디에 속 시원히 해결되었다.
‘과연 땅콩.’
‘대단한 밥풀.’
두 악마의 경탄 어린 시선을 익숙하다는 듯 받아낸 이벨리아는 스스럼없이 집무실 가장 안쪽 아가레스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악마의 기준에 맞춰둔 의자와 책상은 이벨리아에겐 턱없이 크기만 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봐도 영 폼이 살지 않자, 이벨리아는 아예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 다리를 책상 위로 올렸다.
“근데, 모자란 악마.”
“내가 뭐가 어디가 모자라!”
“풀때기 부른 거 아닌데. 찔렸어?”
“……약간.”
바락 소리 지른 마르바스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바르바토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날 부른 건가, 설마.”
“응. 너. 너 높은 악마야?”
“……높다.”
“얼마나? 풀때기만큼?”
“그것보단 조금 아래.”
“언니 악마보단?”
“그보단 훨씬 위.”
“그렇구나. 그럼 꽤 높은데 왜 처음 보지?”
감히 주군의 책상에 발을 올리고 까닥까닥하며 묻는 것이 누가 보면 저것이 마계의 왕인 줄 알겠다. 바르바토스가 뿌득 이를 갈며 답했다.
“알 것 없다.”
그러자 아무런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꼭…… 주군을 보는 것만 같다. 바르바토스는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레 답했다.
“……장기 기밀 임무.”
“그렇구나. 무슨 기밀인데?”
“그건 말할 수…….”
“마왕 진영 감시하라고 보냈었어.”
주군. 기밀이라고 하셨잖아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부 소속 어떤 악마가 마왕에게 줄을 대는지, 그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있는 건 누구인지, 뭐 그런 것들.”
바람처럼 가볍게도 유출되는 기밀에 바르바토스가 경악했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이고 바르바토스를 응시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하러 갔던 악마네.”
“……크흠.”
“아스에게 굉장히 믿음직한 부하인가 보구나?”
“……알아주니 고맙군.”
바르바토스의 입꼬리 옆 볼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이 인간, 아주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
그가 황금 땅콩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내렸다.
이제 보니까 저 건방진 태도도 나름 자신감의 표현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렇게 새로운 악마의 호감을 눈곱만큼 얻은 이벨리아는 아가레스의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 창밖을 내려다봤다.
인간계의 건물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양식의 것들, 비슷하지만 또 오묘하게 다른 색채들, 하늘을 날아다니는 다채로운 새들까지.
“정말 아름답다…….”
“마계 동부가 전부 보이지.”
“이런 곳에서 일하면 할 맛 나겠는데. 왜 그렇게 일을 안 해서 수하들 힘들게 해?”
“일은 어디서 해도 할 맛 안 나.”
난 그냥 네 옆에만 있고 싶어.
친우에 눈이 먼 탕왕(湯王)은 쌓인 서류 더미를 대강 옆으로 밀어버렸다.
“스읍. 그거 그렇게 밀면 풀때기가 다 치워야 하잖아. 제대로 둬.”
“…….”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서류 더미가 원위치를 되찾는다.
이쯤 되니 주군의 제멋대로인 일 처리 덕에 고충을 겪은 적이 한두 번 아니었던 수하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로노베가 은근슬쩍 물었다.
“땅콩. 너 마계에 자주 놀러 올래?”
잠시 눈을 깜박이던 이벨리아가 답했다.
“으음, 놀러 오는 것도 좋지만 아예 여기 별장 같은 거 지어놓고 지내도 좋겠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맛있는 것도 많고 악마들도 다 착하고. 인간계는 너무 복잡해.”
그 말에 악마들은 생각했다. 이 땅콩이 여기 장기적으로 눌러앉는 것도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턱.
이벨리아의 머리 위에 뭔가 얹어졌다.
“……?”
제법 무거운 무언가. 손을 위로 뻗어 만지작거리니 뾰족뾰족 울퉁불퉁하다.
아가레스의 방엔 거울 따윈 없다. 하여 이벨리아는 본능적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밖은 여전히 밝기에 안이 그대로 비쳐 보이지는 않았으나, 언뜻 비치는 실루엣이…….
야, 이거 설마…….
“잘 어울린다.”
아니. 이게 어울리면 안 되지.
“너 가져.”
아니. 이걸 이렇게 냅다 주는 것도 안 되지.
당황한 이벨리아가 창틀에 손을 짚고 소리쳤다.
“잠깐, 이 미친 토끼야! 이걸 왜 내 머리에 씌워!”
“그 왕관은 이 동부를 뜻해.”
“봐, 엄청 귀한 거네!”
이벨리아가 왕관을 벗으려 손을 올리자, 아가레스가 손목을 살짝 잡아 만류했다.
다른 한 손이 이벨리아가 기대고 있는 창틀을 짚자, 부지불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진다.
“준다는 건 이깟 왕관이 아니야.”
“……?”
“너 해.”
“뭐, 뭘 해?”
동부의 지배자가 느리게 입매를 올렸다.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