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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38화 (238/323)

##  238화: 마계에 땅콩 강림

마계 동부의 성.

최상층 집무실은 검은빛 띠는 목재로 이뤄져 있어 묵직하고 고고했다. 그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빼닮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벽면을 장식한 용 형상의 뼛조각들은 집무실의 분위기와 그다지 잘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방의 주인은 이를 치울 생각이 일절 없는 듯했다.

볕이 잘 드는 창가. 아가레스는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에 서명을 써넣다 말고 깃펜을 휙 집어 던졌다.

‘데뷔탕트가 고작 한 달 남았는데.’

길고 수려한 손가락이 못마땅하다는 듯 목제 책상을 탁탁 내리쳤다.

‘혹시 이브가 나 모르게 이미 파트너를 정한 건가?’

함께 가자는 말이 없으니 불안하기 그지없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가레스는 흡사 분리불안에 걸린 강아지처럼 방 안을 연신 서성댔다.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군.”

단단히 결심하고 나서려던 발이 멈칫했다.

“자꾸 물어보면 집착하는 것 같을 텐데.”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자니 속이 타서 미쳐버릴 것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속이 답답해진 아가레스가 벌컥 창을 열었다.

물안개 낀 새벽. 제대로 가꾸지 않는 화원에 홀로 핀 보랏빛 라일락이 눈에 박혀든다.

언뜻 익숙한 색이다.

……뭐였더라.

“……아. 그 보라색 인간.”

본디 관심 없는 이들과의 대화 따위 딱히 기억하지 않는 아가레스는 천천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 보라색 인간이 뭐라고 했던 것도 같은데.

“도와준다고 했던가.”

그 인간. 이브와는 나 다음으로 친한 사이이니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능글대는 표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별수 없지.”

아가레스는 대충 쌓아두었던 보석 주머니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러고선 여태 어두운 하늘을 갈라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동안 빤히 올려다보다가, 해가 빼꼼 고개를 내밀자마자 창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

흐아암, 길게 기지개를 켜며 렐리안이 물었다.

“누가 찾아오셨다고?”

“루, 루, 루페르트 후작님께서…….”

쭈욱 몸을 늘리던 렐리안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자리했다.

“흐응.”

그래. 아마 속이 제법 타실 테지.

하녀를 불러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단장한 렐리안이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하인이 내준 차를 이미 다 비워버린 아가레스가 언짢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오래도 걸리는군.”

그러나 영민한 렐리안은 악마의 투덜거림을 한 번에 잠재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각하. 공녀님께서 이른 아침엔 그리 서두르는 게 아니라고 가르쳐주셔서요.”

“그 가르침이 맞다.”

예상대로 이 악마님께는 공녀님을 들이밀면 만사형통이다. 생긋 웃은 렐리안이 아가레스의 맞은편에 우아하게 앉았다.

“그래서, 이 이른 아침부터 서두르신 연유가?”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시라는 듯, 렐리안이 맑은 눈을 깜박였다.

아가레스가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말했다.

“이브의 데뷔탕트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한 달 정도 남았지요. 물밑에서 오가는 편지와 청탁이 난리라더군요.”

“그건 알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의도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렐리안은 부러 의뭉스럽게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가레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브의 파트너가 정해졌는지.”

“공녀님께 직접 묻지 않으시고요?”

“미움받기 싫다.”

렐리안이 빙글 웃었다. 이 앙큼한 후작님 같으니라고.

공녀님의 파트너가 정해졌는지 궁금해서 이른 새벽부터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해가 뜨자마자 호다닥 달려왔을 것이 빤히 보였다.

‘이럴 때는 조금 들었다 놓는 것이 올바른 큐피드의 자세지.’

렐리안이 태연히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이브가 황태자 전하와 데이트를 하고 왔을 때 아주 기뻐 보이기도 했고…….”

악마의 표정이 당근 잃은 토끼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아, 잘 생각해보니 각하와 데이트를 하고 나서 가장 기뻐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말엔 세상 모든 당근을 발아래 둔 토끼처럼 눈이 반짝인다.

렐리안이 속으로 웃었다. 투명하시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렐리안이 코를 찡긋했다.

“각하. 감히 조언 하나 해드려도 될까요?”

아가레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만드는 거랍니다.”

“당연한 소릴.”

“당연한 걸 알고 계시면서 왜 공녀님께 한 번 더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으셔요?”

“이브가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만나본다고 했으니까. 두 번이라는 얘기는 없었다.”

“그렇게 고분고분 말 잘 들으시는 것도 좋긴 한데, 마음을 얻을 땐 적극성이 조금 더 필요한 법이에요.”

“……어떻게?”

아가레스가 손에 쥐고 왔던 보석 주머니를 렐리안 쪽으로 슬쩍 내밀었다. 나름의 성의 표시다.

세상을 오시하면서도 공녀님만 관련되면 제법 귀여워지는 악마. 옅게 웃으며 렐리안이 답했다.

“공녀님의 말을 어기는 게 껄끄러우시다면, 굳이 데이트라고 명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저 적당한 미끼만 던지면 의외로 단순한 우리 공녀님께선 좋다고 따라나서실 테니까요.”

“미끼라…….”

아주 좋은 미끼가 하나 있긴 하지. 아가레스가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이른 아침부터 보람찬 큐피드 역할을 한 렐리안이 뿌듯하게 웃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요, 저는 각하를 응원한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또 찾아오지.”

“네, 가끔 찾아오세요.”

“……자주.”

***

아가레스의 행동력은 가히 대단했다.

바로 그날 오후, 비밀기지.

악마는 쿠션 위에 누워 포도 한 송이를 똑똑 떼먹고 있는 친우에게 냅다 물었다.

“이브. 마계 안 궁금해?”

그러자 포도송이를 입에 와앙 넣고 우르르 턴 이벨리아가 답했다.

“웅웅해!”

“궁금해?”

“응!”

“가볼래?”

“지짜?”

발딱 일어선 이벨리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몇 년 전에도 장난처럼 요구했던 거였다. 마계에 데려가 달라는 것.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인간도 가본 적,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갔다가 목숨 부지해서 돌아온 적 없는 곳이니까.

이벨리아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아가레스는 보라색 인간의 조언에 따라 조금 생색을 내보기로 했다.

“네가 원하는 곳은 모두 둘러볼 수 있도록 준비해 둘게.”

“최고야! 이건 책으로 엮어서 기행록으로 남겨야 해!”

“마계 기행록의 첫 저자는 이벨리아 아르티나가 되겠군.”

“미쳤다! 언제 가면 돼? 지금 당장? 아니면 내일?”

생각보다 훨씬 과한 반응에 외려 당황한 건 아가레스였다.

바짝 달라붙을 듯 다가오는 이벨리아를 피해 두 걸음 뒤로 물러난 대악마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준비는 좀 해야 하니까.”

“아, 그렇지! 토끼의 영역을 방문하는 건데 내가 너무 예의가 없었다. 그럼 이틀? 사흘?”

그것도 지나치게 짧긴 하다만.

친우가 와준다면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한가득하긴 하나, 그럼에도 아가레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좋아!”

준비야 뭐. 오늘부터 휘하 악마들을 밤낮없이 달달 볶으면 그만이다.

잔디가 들었다면 뒷목 잡고 넘어갈 생각을 태연하게도 하면서,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에 앉은 악마는 자신 위의 유일한 존재에게 그저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마계 내에서도 가장 비옥하기로 소문난 동부.

그 광활한 영토의 주인을 모시고 있는 대악마 마르바스는 이젠 검보다 손에 익은 걸레를 들고 발을 쿵쿵 구르고 있었다.

“그 땅콩이 하다 하다 이제 마계에까지 발을 들이다니!”

잔뜩 화가 난 얼굴과는 달리 창틀을 닦는 손에 게으름은 없었다.

“인간 주제에! 한 입 거리 밥풀 주제에!”

뽀득뽀득 닦아 광이 나는 창문에 어설프게 바닥을 닦는 마족들이 비쳐 보인다. 마르바스가 야차와 같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걸레를 내팽개쳤다.

“이 자식들이! 제대로 못 닦아? 우리 땅콩은 먼지를 싫어한단 말이다!”

“예, 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쯧쯧, 하여튼 제대로 하는 것들이 없어. 걸레질 한번 안 하고 곱게 자란 것들 같으니라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마르바스가 이번엔 창문을 벌컥 열고 저 아래 정원을 가꾸고 있는 마족들에게 빽 소리쳤다.

“거기 옆에 애벌레 지나가잖아! 한 마리도 남김없이 잡으라고!”

“이, 이것까지 전부 말씀이십니까?”

“그럼 띄엄띄엄 잡으려고 했어? 우리 땅콩이 벌레 보고 기절하면 책임질 거야? 엉?”

“전부 잡겠습니다!”

“오냐, 오냐. 에잉, 땅콩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이쯤 되니 성을 단장하던 마족들은 속으로 구시렁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땅콩인지 밥풀인지가 오는 게 좋으시다는 거야, 싫으시다는 거야.

혼란에 빠진 마족들이 서로 은근슬쩍 눈을 마주치던 찰나.

먼지떨이를 탈탈 흔들면서 요염하게 걸어가던 로노베가 지나가던 마족의 머리를 휙 내리쳤다.

“어머, 이 빌어먹을 마족 새끼가 디저트를 그딴 식으로 플레이팅 해서 날라?”

“예, 예?”

“후졌잖아!”

“죄, 죄송합니다! 후져서 죄송합니다!”

“미라처럼 바짝 말라서 뒈지고 싶어? 어어, 잠깐. 너도 이리 좀 와봐. 이걸 우리 밥풀 접시로 쓰려고?”

“예……!”

“네 눈은 옹이구멍이야? 색 구별을 못 해? 우리 밥풀은 노란색이야. 노란색 밥풀한테 이 접시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어휴, 하여튼. 미적 감각 없는 것들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해.”

그리고 이 혼돈의 현장.

장기 기밀 임무에서 방금 막 귀환한 8위 악마 바르바토스는 목석같은 눈을 찌푸렸다.

‘대체 밥풀은 뭐고 땅콩은 뭐야.’

그게 당최 뭔데 대악마에 고위악마가 저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냔 말이다.

거암(巨巖)처럼 과묵한 성격의 바르바토스는 노란 꽃을 한 아름 들고 바삐 뛰어가는 마족을 잡아 물었다.

“이봐. 성이 왜 이렇게 분주한 거지?”

“곧 땅콩께서 강림하시기에 그렇습니다, 바르바토스님.”

“……가봐라.”

도움이 안 되는군.

바르바토스는 이번엔 악마 하나를 붙잡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아, 바르바토스님. 곧 밥풀께서 현현하시기에 이렇습니다.”

강림. 현현.

쓰는 단어가 꼭 신의 뒤에 붙는 것들 아니던가. 웬만해선 악마의 입에서 나올 일 없는 단어들. 황당해진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내가 자리를 비운 새에 땅콩교나 밥풀교가 들어서기라도 했나.”

“그다지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바르바토스님.”

“……뭐?”

“주군께서 심히 아끼시는 밥풀 땅콩이셔서요.”

바르바토스의 머릿속에 위대하신 주군께서 작고 흰 밥풀 하나를 검지에 올려두시고 쓰다듬는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불경한 생각. 불경한 생각.

느리게 고개를 저은 바르바토스는 고위 악마이긴 하나 자신보단 서열이 낮은 로노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품위 없이 그 먼지떨이는 뭐냐, 로노베.”

“어머, 돌아왔네? 근데 네 머리가 탈탈 털리고 싶지 않으면 저리 좀 비켜줄래?”

“못 본 새 제법 건방져졌군. 내가 없는 새에 내 위의 서열로 올라가기라도 했나?”

여실히 비꼬는 말투였으나 로노베는 당당히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봐. 꼬장꼬장한 바르바토스.”

“뭐?”

“적어도 이 동부에서, 당신이 알던 서열은 이제 없어.”

“……그게 무슨.”

“땅콩의 총애가 곧 주군의 총애거든. 주군의 총애를 받으면 그깟 서열 따위 다 무슨 상관일까.”

“땅콩의 총애?”

땅콩. 바르바토스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외쳐대는 땅콩을 입속에서 되뇌었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알겠다.

땅콩과 밥풀은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

땅콩, 즉 밥풀은 상당히 강력하다.

땅콩, 즉 밥풀은 주군의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아찔하다.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비운 새에 동부가 간악한 것에게 점령당한 듯하다. 심각해진 표정으로 바르바토스가 물었다.

“로노베. 혹시 그 땅콩이 마왕이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물론 마왕 뺨칠 정도로 애가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마왕은 아니야!”

“그럼 어떤 악마냐.”

“악마는 무슨 악마.”

로노베의 얼굴에 자신은 모르는 자랑스러움이 가득 들어찼다.

“우리 밥풀은 인간이야.”

그 말에 바르바토스가 휘청이며 창틀을 짚었다.

지금.

지금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동부가 이렇게 뒤집어졌다고……?

***

사흘 뒤.

마계 동부의 성 앞에 선 이벨리아는 입을 떡 벌리고 눈을 비볐다.

“이, 이, 이, 이게…….”

“내 성.”

“여, 여, 여, 여기…….”

“전부.”

“……히익!”

야, 토끼야.

그동안 집도 절도 없는 거지 토끼 정도로 생각해서 미안했다.

이바스 저택도 수도의 명물로 자리매김했을 정도로 성대하고 화려했지만, 이 성에 갖다 대기엔 한참 부족했다.

아니, 애당초 인간계에 있는 건축물 중 감히 이것에 비빌만한 것은 없을 터다. 황궁조차 빛바래게 하는 화려함과 위용이었으니까.

고개를 한껏 꺾고 위를 올려다보는 이벨리아의 앞에, 익숙한 턱시도를 입은 마르바스가 허리 숙여 예를 갖췄다.

“언제 어디서든 부르면 달려오는 집사, 풀때기입니다. 동부의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땅콩.”

“잔디!”

“잔디가 아닙니다. 오늘은 풀때기입니다.”

“풀때기?”

“네. 이바스 성에서는 잔디, 레스토랑에선 잡초, 동부 성에서는 풀때기.”

“혹시 또 협박 받았어?”

“……네니요.”

“눈에 멍이 있는데.”

“……훌쩍, 안으로 드시지요, 땅콩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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