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36화 (236/323)

##  236화: 가족들의 품에 안겨

이벨리아가 손을 놓자 아가레스는 곧바로 다시 무릎에 기대 늘어졌다.

한가롭게 눈을 감은 악마를 쓰다듬기를 몇 분.

저 멀리서 뿌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곧이어 희미하게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잔디인가?”

귀를 쫑긋 세우고 목을 쭉 뺀 채 언덕 너머로 시선을 옮기자, 황톳빛의 사자가 마치 바위 굴러 내려오듯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잔디다!”

이벨리아가 반색하며 아가레스를 흔들었음에도 드러누운 악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잔디인지 잡초인지 나는 모른다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무릎을 차지하고 있을 뿐.

“토끼야, 잔디가 왔다니까?”

“풀때기 온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정수리가 여전히 파릇파릇한 걸 보니까 잘 해결하고 왔나 봐!”

“고작 그것도 해결하지 못하면 죽어야지.”

뭐야. 우리 토끼 태도가 왜 이렇게 뚱해.

문득 이벨리아의 뇌리에 미심쩍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눈을 가늘게 뜬 이벨리아가 미끼를 던졌다.

“한낱. 한낱 잔디가 왔으니까 굳이 일어서서 맞이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러자 감정에 솔직한 악마가 냉큼 물었다.

“그렇지. ‘한낱’ 잔디지. 네가 반겨줄 필요도 없는.”

이거 봐라.

'내가 조금 전 실수로 ‘우리’ 잔디라고 부르는 바람에 심사가 뒤틀렸었네.'

이벨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던 그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거대한 사자가 한 번의 도약에 인간으로 변한 다음 허겁지겁 이벨리아에게 달려들었다. 눈치도 지지리 없이.

“야, 땅콩! 밥풀! 너 어디 안 짜부라졌냐? 엉?”

“날 뭐로 보고!”

“방금 말했잖아, 땅콩, 밥풀!”

“나도 나름 강하거든? 아주 말짱해.”

“강하긴 뭐가 강해! 앞발로 밟으면 픽 소멸해버리겠는데!”

“……너 진짜 날 밥풀로 보는구나.”

이벨리아의 투덜거림 따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마르바스가 코를 킁킁댔다.

“이 어두침침하고 꾸질꾸질한 기운…… 이거 마왕 맞지!”

“응, 맞아.”

“와, 이 쥐새끼가 마계 비우고 뭐하나 했더니 이런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네? 상대도 봐가면서 덤벼야지 명색이 왕이라는 게 이깟 한 입 거리 땅콩한테 와서 이를 세워?”

“한 입 거리는 아니야.”

“그래서 주군을 불러 방패막이로 써서 살아남았구나! 아주 잘했다!”

“방패막이…… 근데 지금 잘했다고 했어?”

“어, 잘했,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푸르르 고개를 털며 잠시 집 나갔던 자아를 찾은 마르바스가 짐짓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끼, 이 밥풀! 어디 감히 지고하신 주군을 방패로 써서 살아남는단 말이냐!”

“충신 코스프레는 이미 늦은 것 같아, 잔디야.”

“…….”

마르바스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밥풀만 한 땅콩이 주군을 방패로 썼다는 말에 분노해야 옳건만 안도감이 먼저 들다니. 자칭 대악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마르바스가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야, 땅콩. 내가 남쪽 진영에서 활약한 얘기를-.”

“응, 안 궁금해.”

“아니, 좀 들어봐. 내가 거대한 앞발을 한 번 휘두르니까 마족들이 그냥 추풍낙엽처럼 우수수수 떨어지고 호롤롤로 날아가는데-.”

“응, 안 물어봤어.”

“……적 대가리가 아주 겁을 잔뜩 집어먹어서 오줌을-.”

“응. 어쩌라고.”

“저쩌라고……가 아니고! 마음을 활짝 열고 좀 들어보라고!”

눈을 슴벅이던 이벨리아가 돌연 입을 틀어막고 탄성을 질렀다.

“앗!”

“오, 이제 들을 마음이 생겼어?”

“저기 헤롤드 온다! 비켜봐, 잔디. 생존자가 얼마나 있나 봐야 해.”

이벨리아가 매몰차게 마르바스를 밀치고 지나쳤다.

“…….”

내심 땅콩에게 ‘와아, 잔디는 정말 대단한 악마로구나. 예전에 네가 말했었던 계약 다시 한번 생각해볼게’ 정도의 말을 듣고 싶었던 마르바스가 입을 삐죽이고는 소심하게 아가레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군, 저, 제가 아까 앞발로-.”

미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아가레스가 서늘한 눈으로 마르바스를 일별하고는 쌩하니 지나쳐 이벨리아를 따라갔다.

“주, 주군께서 왜, 왜 저렇게 차가우시지……?”

마르바스가 달달 떨며 시무룩하게 주저앉았다.

이를 본 알렉이 혀를 쯧쯧 차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야. 힘내라.”

마르바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올려다봤다.

“뭐냐, 안 어울리게? 싸우다가 대가리 맞았냐?”

“시무룩해 보여서 위로해준 건데.”

“와, 대가리 맞은 거 맞구나! 그럼 이왕 정신이 온전치 않아진 김에 내 얘기나 좀 들어줘라. 내가 아까 앞발로-.”

“아이구!”

“왜!”

“이걸 어째? 나도 안 궁금한데.”

알렉이 킬킬 웃으며 마르바스를 툭 치고 지나갔다.

“…….”

사는 게 진짜 힘들다…….

어디 가서 이런 홀대를 받아본 적 없던 자칭 대악마 마르바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

헤롤드가 마치 양을 몰듯 몰고 온 생존자들은 이벨리아를 보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저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영주의 직계가, 그것도 소문 자자한 막내 공녀가 이 수라장에 직접 발 들일 줄은 몰랐기에.

“고, 공녀님…….”

“공녀님께서 직접…….”

원망이 없다면 거짓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가족과 살 부대끼며 살았던 이웃이 죽어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도 아닌 영주 일가에게 왜 당신들은 이 참상을 막지 못했냐면서 한 서린 원망을 퍼부었더랬다.

그런데…….

막상 아직 앳된 티도 채 가시지 않은 소녀가 검을 들고 최전선에 선 것을 보니 차마 날 선 말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다.

대신 누군가는 비통하여 울부짖고, 누군가는 통한에 가슴을 쳤으며, 누군가는 간절함에 달려와 이벨리아의 갑옷 밑단을 부여잡았다.

“공녀님, 제 아들! 제 아들 좀 찾아주십시오, 공녀님!”

“고, 공녀님, 분명 저곳에 제, 제 어머니가 계셨는데…….”

“흐윽, 혹시 제 남편을 못 보셨나요? 대장간 쪽에 있었을 건데……!”

붉게 충혈된 눈이, 파랗게 질린 얼굴이, 하얗게 바랜 손마디가. 모두 이벨리아를 향했다.

이벨리아가 생존자들의 뒤에 선 헤롤드를 바라봤다.

충실한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린 사령관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애도로 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비극을 알린다.

“……생존자는 그대들뿐이다.”

잔인한 선고.

그 끝에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속 끓는 울음이 따라붙었다.

부모를 잃은 자식은 숨넘어가게 우짖었고, 아내를 잃은 남편은 비명을 질렀으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상처 입은 짐승의 소리를 냈다.

전장이 할퀴고 지나간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 끔찍한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발이 뒤로 주춤했다. 이벨리아는 허벅지에 손톱을 박아 넣고 버텼다.

“……미안하다.”

저편, 다 부서진 골목. 작은 황금 용이 그려진 낙서들이 보인다.

영지 곳곳 아르티나에 대한 신뢰를 상징하는 것들이 희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내가…….”

저것들이 모두 짓밟힐 때까지 내가 오지 못했다.

“늦어서…….”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휘청이는 이벨리아의 등을 아가레스가 단단하게 받쳤다.

어린 사령관은 자세를 바로 했다. 이를 앙다물고 그저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원망할 이가 필요하다면 내가 그 대상이.

잡을 희망이 필요하다면 내가 그 빛이 되어주겠다는 마음으로.

***

그렇게 얼마나 오래 자리를 지켰을까.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영지 전역에 안식처럼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울다 지친 생존자들이 이곳저곳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긴 시간 동안 단 한시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이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돕겠다. 이주를 원한다면 이주를. 재건을 원한다면 재건을.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라.”

마족들에게 쳐들어가서 복수를 해주겠다는 등의 비현실적이고 무용한 위로가 아니라,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현실적인 대안.

외려 그것에 바짝 정신을 차린 영지민들이 더듬더듬 말했다.

“공녀님…… 저는 이곳에선 더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저도…….”

이벨리아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할 영지를 알아봐 주겠다.”

영지를 잃은 이들은 소위 난민이나 다름없다.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이들 개개인의 특성과 알맞은 영지를 부단히 찾아보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벨리아가 번거로워질 것을 예상한 아가레스는 어둠 속에서 팔짱을 낀 채로 제안했다.

“다들 마계에 처박혀서 사는 건 어때.”

“…….”

“…….”

잠시의 침묵.

그 끝에 경기를 일으킨 영지민들의 울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앙!”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흐어어엉!”

“고, 공녀님! 저희 밭도 잘 갈고 검도 잘 갈 수 있습니다!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커다란 호의를 건넸는데 돌아오는 것이 공포에 질린 얼굴이라니. 이해하지 못한 아가레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특별히 마계에서 살게 해주겠다는데 왜 울지? 뭐 따뜻한 지옥불 옆자리라도 원하는 건가?”

“히끅!”

“지, 지옥…….”

생존자들의 입에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왔다. 그렇지 않아도 파리했던 얼굴들이 이제는 완전히 핏기를 잃었다.

대악마가 ‘우리 지옥으로 가자’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들에겐 ‘팔다리 묶여 지옥불에 활활 타올라라’ 정도로 해석된다는 걸 모르는 친우를 위해, 이벨리아가 친절히 설명했다.

“토끼야.”

“응.”

“입 다물어.”

“……응.”

***

다음 날 오전.

말 위에 올라탄 이벨리아가 생존자들을 죽 훑어보며 헤롤드에게 말했다.

“경.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생존자들의 거취가 정해질 때까지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보호를 맡기로 한 기사들이 염려하지 마시라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생존자들 괴롭히지 말고.”

“안 괴롭힙니다. 이 기회에 검이나 좀 가르쳐주려고요!”

“검을? 헤롤드 경이 직접?”

“예! 쓸만한 이들이 있다면 이참에 아르티나 기사단으로 영입이나 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

이벨리아는 헤롤드가 주관하는 검술 수련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신입 기사들이 형언할 수 없는 몰골로 연무장 바닥을 기며 울고 있었지.

그걸 감자 캐며 살던 이들에게 시킨다?

미래가 보였다. 생존자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차라리 대악마의 지옥으로 보내 달라고 울고불고 할 미래가.

“살살해. 적당히. 알지?”

“그럼요! 알지요! 카론 경 가르칠 때와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 이 못된 멍멍이, 카론을 아주 고기 다지듯 두들겨 패서 가르친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기껏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다 죽일 셈이야?”

“하핫, 제가 해봤는데요, 아가씨. 인간 그렇게 쉽게 안 죽습니다?”

“……사탄 같은 자식.”

한편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암운을 알지 못한 영지민들은 올망졸망한 표정으로 이벨리아에게 몰려들었다.

흙과 피가 묻은 손에는 형체를 알기 어려운 것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공녀님, 저, 저기, 이것을…….”

“가시는 길에 시장하실까 봐…….”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죄다 타서 남은 것이 이것뿐입니다.”

이벨리아는 그들이 내민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화마에 검게 그을려버린 감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채소. 검은 재가 조금씩 떠다니는 우유.

아르티나가 관리하는 영지가 으레 그러하듯 부족할 것 없이 풍요로웠던 로트링겐은, 이제 이들의 손에 들린 것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버렸다.

아마 저건 저들이 가진 전부겠지.

간밤에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잿더미 속에서 싹싹 그러모은 식량이 고작 저것뿐이겠지.

“…….”

이벨리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흔쾌히 손을 내밀어 그것들을 받았다.

“마침 배고팠는데.”

망설임 없이 감자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 이벨리아가 자신의 말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주머니를 끌러 생존자들 앞에 놓았다.

“이건 보답.”

그러자 이벨리아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 역시 일사불란하게 자신들의 주머니를 풀어두었다. 생존자들의 앞에는 순식간에 적지 않은 주머니가 쌓였다.

끌러 열어본 생존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공녀님! 이것들을 다 주시면 어떻게……!”

안에 든 것은 육포 등의 건조 식량들이었다.

먼 길 가는 이들이 여정 동안 먹을 식량들.

군이 가진 식량을 모두 내줘버린 이벨리아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는 길에 들짐승 잡아먹으면 돼. 멧돼지가 별미거든.”

“예에?”

“그대들도 이깟 것으로 몸을 챙기긴 어려울 테니, 배가 고프면 저기 저 기사에게 사냥이라도 해오라 청하도록. 사냥감을 손질까지 손수 해서 구워줄 테니.”

헤롤드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제가요, 아가씨?”

“응, 그대가, 헤롤드 경.”

삐죽. 헤롤드가 입을 내밀었다.

졸지에 생존자들의 보모가 된 것도 모자라서, 주군께서 이들의 거취를 정하실 때까지 삼시 세끼 밥까지 해먹이게 생겼다.

굴리더라도 밥은 잘 먹이고 굴리라고 눈빛으로 단단히 경고한 이벨리아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성문 밖을 나서는 작고 여린 등 뒤로, 감사를 담은 생존자들의 인사가 들려왔다. 아직 극복하지 못한 비극에 참담하여 흐느끼는 소리도 마치 화인처럼 함께 따라붙었다.

입술을 꼭 깨물고 성문에서 제법 떨어진 오솔길까지 말을 달린 이벨리아는 그제야 뒤를 돌아 로트링겐의 성벽을 바라봤다.

“…….”

울지는 않았다. 그건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고개 숙여 짧은 애도.

그리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각오.

푸른 눈이 또렷한 예기를 담았다.

***

이벨리아와 아가레스가 출정한 로트링겐은 이번 사태에 휘말린 다른 두 영지보다는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출정할 때만큼 밤낮없이 달리지는 않았으니, 벌써 이레가 지났음에도 수도에 입성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지칠 것이 당연함에도 일절 흔들림 없는 몸으로 꼿꼿하게 선두를 달리는 이벨리아에게, 카론이 말했다.

“아가씨, 이제 수도 인근입니다. 조금 휴식하셨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아. 너무 늦으면 다들 걱정할 거야.”

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할트와 부르고뉴는 그 길이 조금 험준하기는 하지만 거리로 따지자면 로트링겐보다 훨씬 가까웠으니, 이미 모두 도착하시어 아가씨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터였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린 이벨리아의 군은 수도에 진입하는 갈림길에 다다랐다. 출정 당시 세 사령관이 이끄는 군이 찢어져 방향을 달리했던 그곳이었다.

이곳에서 한데 합쳐지는 너른 길목을 통해 몇 시진만 더 가면 수도다. 가족들을 볼 생각에 화색이 도는 얼굴로 조금 더 빠르게 말을 달리던 와중.

다른 길들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오는 듯했다.

“……?”

익숙한 목소리. 이벨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저쪽 풀숲에서 황금색 머리와 붉은 털 뭉치가 쏙 튀어나오더니 머리와 볼에 나뭇잎을 잔뜩 묻힌 채로 동시에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어후, 길 한번 더럽게 험난하네.”

“아휴, 길 한번 더럽게 험난하네.”

“넌 내 머리에 얹혀 왔잖아! 양심 없냐?”

“양심을 빼도 다 자란 용은 위대해!”

그와 동시에 다른 갈림길 모퉁이에서 흘러나오는 투정.

“엘. 이참에 그냥 아르칸에게 양위하고 우린 한적한 곳에 가서 살까?”

“너무 좋지. 그런데 우리 애 성격에 안 받는다고 드러누울 텐데.”

“야반도주해서 잠적해버리면 지가 뭘 어쩌겠어.”

타이밍 한번 완벽하게 동시에 갈림길을 빠져나온 세 군 사령관들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들이 크게 뜨인 눈으로 동시에 서로를 가리켰다.

“어? 우리 아가들!”

“세상에, 이브. 대견하고 기특한 내 딸.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응?”

“묻지는 않으셨지만, 소자도 괜찮습니다, 아버지!”

“누나, 누나! 나 귀여운 아가 용!”

“맙소사, 내 동생 늠름해진 것 좀 봐!”

말 위에 멍하니 앉아 친애하는 가족들을 바라보던 이벨리아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어……?”

당황한 이벨리아가 소매로 얼굴을 슥슥 닦아냈다.

“나, 나 왜 이러지……?”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 마치 재앙이라도 목도한 것처럼 단번에 말에서 뛰어내려 달려오는 가족들이 보인다.

이벨리아의 입에서 기어코 끅끅거리는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 아빠아…….”

손을 뻗자 휴고가 딸을 번쩍 안아 말에서 내려주고 그대로 끌어안았다.

“흐으…….”

왜 아이처럼 이렇게 울음이 터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피바다가 된 영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 마왕. 생존자들. 그 끝에 남은…… 잔인하리만치 거대한 상실. 그 모든 것들을 보고도 눈물이 나오진 않았었는데.

본능적으로 어느 한구석에 밀어두고 단단히 빗장을 걸어 외면하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이 지금에서야 지극히 현실적으로 훅 끼쳐 들었다.

“흐아아아앙!”

열일곱, 첫 출정.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고 돌아온 어린 사령관은 그렇게 가족들의 품에 안겨 한참 울음을 토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