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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35화 (235/323)

##  235화: 네 길 끝에 무엇이 있더라도

거대한 기운의 충돌을 받아넘기지 못한 세계가 우짖는다.

피조물이었으나 그 한계를 뛰어넘은 이들. 한 세상에 가두기에는 지나치게 몸집을 부풀려버린 지배자들.

- 콰가가가가각.

충돌할 때마다 하늘이 요동치고 땅이 몸서리친다. 산천초목이 두려움에 고개를 숙이고 사해와 팔방이 찢어질 듯 일렁였다.

진한 보랏빛 기운이 붉은 마기를 잡아 삼키려다가도 이내 흩어진다. 그러면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붉은 마기가 사방을 잠식했다.

마왕이 씩 웃었다. 시선을 이벨리아에게 둔 채로. 그 눈짓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와 맞부딪치는 와중에 네 소중한 인간을 지킬 수 있겠냐는 뜻.

이벨리아에게로 쏘아지는 마기를 받아치며 아가레스가 읊조렸다.

“자존심 없는 왕이라……. 추하군.”

“그런 허울에 목매지 않는 소탈한 성품이라.”

바알의 검술은 그 자체가 뛰어난 것은 둘째치고, 고유 권능인 ‘공간’과 결합하여 가공할 위력을 자랑했다.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적의 눈앞에는 이미 참격이 다다라 있었으니, 가히 시간의 사각(死角)이 없는 검이라 부를 만했다.

소드마스터보다 몇 수 위의 검기가 이벨리아와 아가레스 주변에 동시다발적으로 날아들었다.

“아스!”

아가레스는 조금 더 강대한 마기로 이벨리아의 주변을 감쌌다. 정작 자신은 날아오는 검격을 맨몸으로 받아내면서.

전투에 있어 몸을 사리지 않는 악마답게, 이곳저곳에 생긴 자잘하고 깊은 상처들은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다.

“…….”

아가레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저 고유 권능. 타 차원에까지 미치는 게 확실하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 지배력은 말이 되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짓누르고 부수고 지배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차원을 짓밟아 복속시킨 것인가.

‘……까다롭겠어.’

아가레스가 땅을 박찼다.

일 초를 수십 겹으로 나눈 찰나. 바알은 아가레스와 자신 사이의 공간에 권능을 흩뿌렸다. 그러자 필시 바알의 목에 가닿았어야 하는 검의 경로가 휙 틀어진다.

공간의 왜곡을 자신의 지배력으로 억눌러 바로잡은 아가레스가 다시금 검을 휘둘러 마왕의 어깨를 길게 베어냈다.

“꽤 많은 것을 처먹고 다닌 모양이야.”

“알아주니 기쁜걸.”

마왕이 아가레스의 검을 쳐내며 이를 드러냈다.

“그대는 1차 인마전쟁 때 나를 죽였어야 했어.”

“잡아 죽이기도 민망하게 약했던 터라.”

“덕분에 이젠 네 목을 노릴 늑대로 자랐지.”

마왕의 말에 아가레스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하룻강아지가.”

곧이어 온 영지에 진한 보랏빛 기운이 휘몰아친다. 거대한 태풍처럼 휘도는 기운이 용솟음쳐 창공을 온통 뒤덮었다.

대지가 진동한다. 딱 이벨리아의 발 앞에까지만.

어두워진 하늘에서 우레가 내리쳤다. 동시에 땅이 갈라져 울컥거리며 용암을 내뿜는다.

마왕이 입술을 짓씹었다. 권역 전체를 아우르는 저 정도 권능. 진정 규격 외의 괴물이 따로 없다.

지옥에서 기어 나온 용암이 마왕의 발에 닿았다. 굳이 피하지 않자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살가죽이 녹아내린다. 그렇게 타서 녹았다가 재생하기를 반복하는 괴이한 광경 속, 마왕이 큭큭 웃었다.

“역시 아직은 쉽지 않네, 괴물 같으니.”

다리가 반쯤 녹아버린 바알이 절뚝이는 걸음으로 수하인 가마긴 곁으로 다가갔다.

두 악마의 사방에 아가레스가 만든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비단 땅이 아닌 허공까지 한계 없이 갈라져 흡사 새장과도 같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흘끗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균열 아래 지하에 흐르는 것은 악마의 영(靈)마저 태워버린다는 화염이 분명했다. 발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그대로 소멸할 판이다.

“……이런.”

난처하다는 투의 탄식과 달리 마왕의 눈에는 살욕과 광기가 번들거렸다.

“킹이 오래 살아남아야 이야기가 재밌어진다는 건 동서고금 불변의 진리인데…….”

아가레스는 답하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죄어오는 균열.

"이리 몰아붙이면 방법이 없지.”

마왕이 가마긴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화염이 넘실대는 균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잔상처럼 남은 괴이한 웃음.

아가레스의 오른쪽 눈이 살짝 경련했다.

그러자 균열 아래 흐르던 권능이 삽시간에 몸집을 키워 지상에까지 옮겨붙었다.

권능에 닿기 전에 마지막 힘을 짜내 공간을 연 것이 먼저였는지.

공간을 열기 전에 무리해서 키운 권능이 닿은 것이 먼저였는지.

작은 신음이 환청처럼 들렸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빌어먹을.”

아가레스가 드물게 욕설을 내뱉었다.

***

권능을 갈무리하고 성큼성큼 다가온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어깨를 와락 잡았다.

“아야.”

그 조그마한 소리에 손아귀의 힘이 곧바로 빠져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계 그 위에서 힘을 과시하던 악마가 어쩔 줄을 모르고 눈꼬리를 내렸다.

“이브. 안 다쳤어? 응?”

“멀쩡해. 토끼가 바람처럼 달려왔잖아.”

“…….”

우물쭈물하던 아가레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벨리아의 눈에는 그 뒤로 축 처진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 못 죽였어.”

“천만에. 아스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걸? 그리고 마왕의 전투를 본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고.”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은 이 경우엔 통용되지 않겠지만, 앞으로의 주적을 직접 눈으로 본 것만으로도 얻은 것은 충분했다.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팔을 토닥이며 물었다.

“저거. 네 예상보다 강해진 거 맞지?”

“……생각보다 조금. 물론 내게 비할 건 아니지만.”

“예전 사냥제 때보다 훨씬 강한 마기가 느껴졌어.”

그게 고작 2년 전이었으니, 강해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스. 차라리 우리가 먼저 마왕을 치는 건 어때?”

“아마 마계에 없을 거야. 또 다른 차원들을 돌면서 지배력을 키워가겠지.”

“집을 두들겨 패서 폭삭 주저앉혀 놓으면 알아서 모가지를 내밀지 않을까?”

“인마전쟁을 먼저 일으키자는 얘기지?”

“우리 토끼는 찰떡같이 알아들어서 좋아.”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소매에 파묻힌 검지가 까닥까닥 움직였다.

“마족들이나 연금술사들이나 뭐 어디 한 군데 모여 사는 게 아니다 보니까 선제적으로 치기에 무리가 있는 건 맞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먼저 들쑤시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이건 돌아가서 다 같이 논의해보자.”

그렇게 둘의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처럼 보이자 카론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검과 더불어 잔뜩 꺼내두었던 표창과 단검을 정리하면서.

“전투 중에 생겼던 그 검은 공간이 마왕의 권능인가.”

기사들이 일제히 반짝이는 눈으로 악마를 바라봤다. 아가레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이동시킬 수도 있는 거로 보였는데.”

“본 그대로다.”

“거리에는 한계가 있나?”

“거리는커녕, 차원에까지 닿는 상위 권능으로 보는 것이 맞을 거다.”

“……뭐?”

“그 권능으로 차원도 건널 수 있다고. 물론 그것까지 타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카론과 기사들이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속된 말로 칼밥을 먹고 사는 그들은 전투에 있어 공간의 활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간도 모자라 심지어 차원이라니……. 막말로 마왕이 수틀려서 다른 차원으로 튀어버리면 영영 잡을 방도가 없게 되는 것이다.

“……뭐 이런…….”

기사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탄식.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차갑게 답했다.

“그러니 마왕이지. 내게 하룻강아지라고 해서 네놈들에게도 그 수준일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

“마족들은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복종하지 않아. 천성이 글러 먹었지. 즉, 저 하룻강아지는 세계 모든 마족을 힘으로 찍어누르고 왕좌를 지키고 있다는 소리다.”

기사들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이 악마의 더러운 성격에 이 정도면 상당히 친절하고 따뜻한 걱정…….

“그러니 주제 모르고 나대다가 모가지 잃지 말고 일찌감치 검 놓고 감자나 캐며 살도록. 어차피 너희 같은 똥 덩어리들은 가망이 없으니.”

……은 개뿔.

“…….”

“…….”

“뭘 봐.”

경멸하는 시선으로 기사들을 바라본 아가레스는 어느샌가 이벨리아가 주저앉은 돌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눈빛을 장착하고.

꿀 나오겠네. 양봉장이 따로 없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가볍게 무시한 채였다.

***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길게 그늘이 진다.

이벨리아가 고개 돌려 친우에게 말했다.

“긴장이 풀렸나 봐. 다리가 후들거려.”

아가레스는 굳이 망토를 풀어 돌 위에 깐 다음 이벨리아를 살짝 들어 그 위로 옮겨주었다.

“내가 있는데도?”

“네가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야.”

지금 거의 갓 태어난 고라니 수준으로 몸이 떨린다니까. 말하며 이벨리아가 픽 웃었다.

“남쪽 상황은 어때?”

“한낱 잡초를 불러두고 왔어. 주변 상황은 대충 정리해뒀으니 금방 끝내고 올 거야.”

“나랑 떨어진 지 30분 만에 진영 주변을 다 정리했어?”

“네가 빠르게 처리하라고 했으니까.”

누구 명이신데. 충실히 받들어야지.

아가레스가 돌 아래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아양을 떨듯 이벨리아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다.

“……토끼?”

그가 그대로 친우를 올려다봤다. 마치 무릎베개에 눕기라도 한 것처럼. 이벨리아를 향할 때만 친애를 담는 황금빛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칭찬 없어?”

“칭찬?”

“응. 오라고 해서 냉큼 왔고, 물라고 해서 열심히 물었는데.”

“…….”

대악마, 아니, 이벨리아에게만큼은 거대한 짐승에 불과한 그가 능청스럽게 재촉했다.

“칭찬.”

화르륵. 얼굴이 붉어진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머리를 어색하게, 또 천천히 쓰다듬었다.

검고 커다란 토끼는 마치 따뜻한 햇볕 아래 자리를 잡은 것처럼 흡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 솨아아아아.

바람이 불며 해를 가려주던 나무가 옆으로 휘청였다.

이벨리아는 작은 손으로 태양을 가려 아가레스의 눈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 정겨운 배려에 눈을 감고 있던 악마의 입매가 길게 늘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까지 치열한 전투가 오갔던 전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서로 함께 있다면 어디든 그들의 비밀기지나 다름없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한참 손길을 만끽하던 아가레스가 고요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브.”

“으응.”

“불러줘서 고마워.”

“…….”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아가레스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올려다보니 여러 감정이 빈틈없이 들어찬 푸른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

아가레스는 재촉하지 않았다. 원할 때면 언제든 편히 말하라는 것처럼, 혹은 답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처럼, 그저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 침묵 속에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한 이벨리아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토끼한테도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알면서 불렀는데도?”

마왕을 홀로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어쩌면 또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게 무서워서. 그런데 널 부르면 항상 그렇듯 이번에도 나와 함께 길을 찾아줄 것 같아서.

“그래서 불렀어. 만에 하나, 네가 다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무릎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래?”

물으며 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벨리아를 비스듬히 올려다본다.

“그렇다면 더 고마운데.”

“……?”

“날 믿어줬다는 것처럼 들려서.”

금안이 조용히 반달 모양을 그렸다.

그가 이벨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쉬운 길만 따를 거였다면, 이 작은 손에 내 혼과 연을 모두 쥐여주지도 않았어.”

나를 달게 속박한 그 언어. 네가 건네주었던 묵시록의 한 구절.

피어라, 등불이여. 피안의 경계에서 우리를 이끌어라.

너는 그 언약 그대로 고고하게 핀 나의 등불.

네가 걷는 길이 곧 내게는 차안(此岸)을 벗어나 피안(彼岸)으로 가는 안식이다.

그러니, 이벨리아.

“너는 마음껏 걸어.”

“…….”

“네 길 끝에 바다가 있다면 나는 잠겨 죽어도 좋고.”

“…….”

“네 길 끝에 태양이 있다면 나는 타 죽어도 좋으니까.”

***

이 맹목적인 감정에 유려한 언어로 답하는 방법을 이벨리아는 몰랐다.

그저, 네가 그렇다면 우리 함께 저 끝까지 걸어보자고 손을 힘주어 맞잡을 뿐.

긍정의 말도, 심지어 작은 끄덕임조차 없었지만…….

악마에게는 차고도 넘치는 화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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