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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34화 (234/323)

##  234화: 광마(狂魔), 아가레스

‘마왕,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아연함을 애써 숨긴 이벨리아가 짐짓 여유로운 척 입을 열었다.

원래 싸움은 기세가 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반가울 사이는 아니지, 우리가.”

마치 약한 동물이 위협을 위해 몸집을 부풀리듯, 턱이 조금 위로 들리고 어깨가 넓게 펴진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던 바알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어 팔걸이를 잡고 있던 손이 조금 빨라진 속도로 움직였다.

카라라락. 카라락.

온통 금칠해둔 조각을 쓰다듬으면서도 붉은빛 눈은 단 한순간도 먹잇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호랑이가 앞발에 날아 들어온 참새를 어떻게 요리할까 바라보는 그런 시선이었다. 결정을 앞둔, 지극히 포식자의 눈.

“흐음…….”

타닥.

길고 가는 손이 일순 뚝 움직임을 멈췄다.

이 공간을 온통 짓누르고 있던 지배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소리도 죽인 고요한 진영. 비단 장포 쓸리는 소리가 꼭 전쟁의 신호탄처럼 들린다.

그가 한 발 내디딤과 정확히 동시였다.

카론을 비롯한 기사들이 일제히 발검하고 이벨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이리떼처럼 몸을 낮춘 채로.

바알에게 시선을 고정한 카론이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청했다.

“아가씨. 명을.”

이벨리아가 기사들의 어깨 사이로 마왕을 바라봤다.

바알은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미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물러서.”

“…….”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쯧, 혀를 찬 이벨리아가 기사들의 어깨를 밀어내고 가장 선두로 나아갔다.

“……아가씨!”

“전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보여야 하는 건 뒷모습뿐이야.”

마왕의 입꼬리가 조금 더 길게 늘어졌다. 손이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펴졌다. 역시……. 작게 읊조리는 소리에 가마긴이 자신의 주군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죽일 듯 이벨리아를 노려봤다.

한편 마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선 이벨리아는 천천히 그의 기운을 가늠했다. 지배력과 상극인 자연력을 극상으로 품고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사냥제 때보다 훨씬 강해졌어.’

이래서야 여기 있는 누가 나서도 개죽음이다.

‘내가 힘의 충돌을 견디고 엘라임을 불러도 승산이 거의 없어.’

시야에 다 담지 못하고 육신으로 다 느끼지 못하는 저 강대한 마기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힘의 원천인 세계조차 역으로 좀먹어버리는 저 힘을.

‘……고작 몇 년 새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야, 저 괴물이.’

만용을 부릴 상대가 아니다. 이벨리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때. 나른하고 느긋한 음성이 귀에 꽂혀 들었다.

“아아. 네 충견을 부르려는 모양이구나.”

“…….”

“잠시 진정하렴, 이벨리아. 피차 희생은 줄일수록 좋으니.”

바알이 턱을 쓸며 눈을 휘었다.

“버러지 같은 너희 인간들이 지금까지 세계에 빌붙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대화란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

“그래? 유감이네. 난 그걸 할 마음이 없는데. 적어도 너랑은.”

“득인지 실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건…… 글쎄, 좋은 지배자의 태도는 아닌 것 같구나.”

“…….”

“귀를 막은 폭군은 따르는 이들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

마왕은 재촉하지 않았다. 교묘한 화술로 상대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은 그의 특기였으며, 대화 중간에 주는 느슨한 침묵은 그가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었다.

잠시 뒤.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 빠르게. 잡설은 집어치우고.”

마왕이 한 걸음 다가오려 하자, 이벨리아가 즉각 손을 들어 올렸다.

“거기 가만히 서서 얘기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아스를 부를 테니.”

“아스…… 애칭이구나.”

“입에 올리지 마. 나만 부를 수 있는 거라.”

“탐나는데. 나도 하나 지어줄 생각은?”

“없어.”

“아, 진명을 알아야 지어주나.”

“아니.”

“바알.”

“그걸 왜 말해!”

내가 진명을 아는 악마는 우리 토끼로 족한데!

안 들은 귀 삽니다!

“그렇게 이름 막 나불댔다가 내가 확 너를 사역해버리는 수가 있어?”

픽.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바알이 웃었다.

“그래서, 내 애칭은?”

“너한텐 애정이 없어서 애칭 못 지어줘.”

“이런…… 이름만 듣고 튀어버리면 못 쓰지.”

“그럼 대충 별칭으로 만족해.”

“그러도록 하지. 지금은.”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마치 쓰레기를 던지듯 내뱉었다.

“바알치.”

“좋군. ‘치’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지?”

“뜻은 무슨 뜻. 내 인형들은 전부 치 돌림이야. 곰치, 상치, 돌치, 병치.”

이벨리아가 마왕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넌 바알치.”

“…….”

“뭐. 왜.”

“……네 작명 감각이 참으로 처참하구나.”

기껏 지어줬더니 못하는 소리가 없다. 이벨리아가 못마땅하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얼른 본론이나 얘기해. 자꾸 이렇게 쓸데없는 장난질 치면 네 손모가지를 확 날려버릴 테니까.”

왕좌 앞에 선 바알이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몸짓이 지나치게 여유로워 누가 보더라도 그저 이 상황에 맞춰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뜩잖게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까닥 고갯짓했다. 한 세계의 왕이 아니라 한낱 아랫것을 대하듯 오만하게.

그러자 아까부터 아슬아슬하게 참고 있던 가마긴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위협적인 포효가 진영을 울렸다.

“감히 더러운 인간 따위가 건방지게!”

일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마기.

- 채앵!

아르티나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겨눴다.

일촉즉발의 상태.

마치 고무줄을 한계까지 늘려놓은 듯한 아슬아슬한 기류.

그 사이, 이벨리아는 가마긴 쪽으로 시선도 두지 않은 채 마왕에게 말했다.

“마계에선 왕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수하가 막 끼어들고 그러나 봐? 군기가 아주 엉망이네.”

“사과하지. 내 종의 충성심이 가끔 도를 넘을 때가 있거든.”

바알이 차가운 눈으로 가마긴을 응시했다. 냉큼 꼬리를 내린 가마긴이 고개를 숙이고 마왕의 뒤에 시립했다.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경고했다.

“다시 네 개가 이를 드러내면 이 대화는 없어.”

마왕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때의 버릇이다. 그 아래 입술은 기괴하게 비틀려 위로 올라가 있었다.

협상이란 건 대부분 제시하는 자가 을이다. 눈앞의 저 인간은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대화가 끝날 때까지는, 자신이 본인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좋아, 아주 좋아, 이벨리아.”

키득대던 바알이 왼손으로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오른팔을 뻗었다. 마치 이 세상을 보라는 듯.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 하, 웃기는 소리.”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이었지만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난세의 군중이 희생양 하나를 점찍어 이르는 것이 바로 영웅이지!”

얼굴을 가렸던 왼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광기 어린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커다랗게 진영을 울렸던 목소리가 이젠 바람결만큼 작아졌다. 안타깝다는 듯 내려간 눈초리로, 마왕이 검지를 펴 가리켰다.

“그게 너란다. 이벨리아.”

“……!”

“에르카디아? 아르티나? 카시스? 루페르트?”

바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린다.

“이 땅이 화마에 휩싸이면 인간들이 가장 먼저 내던질 제물들이지.”

“…….”

이벨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니까.

“네 목표는 필시 네 소중한 이들을 지키는 것일 터.”

“…….”

“이벨리아, 너는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니란다. 네 부모, 네 형제, 네 친우…… 네 영역 내의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지.”

바알이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떼려 하자 이벨리아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를 본 마왕이 옅게 웃으며 발을 되돌렸다.

“여기까지 나의 말이 맞다면, 이벨리아. 우리가 반목할 필요는 전혀 없단다.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이뤄줄 수 있으니.”

“……난 내 목표를 남의 손 빌려 이루는 취미는 없어. 그게 악마라면, 심지어 악마들의 대가리라면 더 말할 나위 없고.”

“그 대가리와 적대했을 때.”

마왕이 잠시 말을 멈췄다. 생각해보라는 것처럼.

“네 소중한 이들을 단 한 명도 잃지 않으리라고…… 너는 장담할 수 있나?”

협박인가, 회유인가.

그 경계 어딘가에서 이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을 뻔했다.

이벨리아의 눈앞에 기사들의 무덤이, 비비안의 시체가, 성문을 열었을 때 보았던 제국민들의 주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굳건했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인다.

이를 놓치지 않은 마왕이 마치 고양이를 달래듯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 현명한 네가 그 끝을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지.”

“……그래서. 손을 잡자?”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고개 돌려 그들의 사령관을 바라봤다. 이벨리아는 그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올곧게 마왕을 바라봤다.

“내 손은 언제든 비어 있단다, 이벨리아.”

“…….”

“나는 네 소중한 이들의 생명을 담보하고, 너는 인간들의 반대편에 서는 것.”

“…….”

“그저 네가 딛고 서는 진영과 모시는 왕이 달라질 뿐이야. 그것만 받아들이면 네 영역 안의 존재들은 일절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이벨리아가 고요한 눈으로 마왕을 바라봤다.

“말 다 한 것 같으니까 이제 내가 말 좀 할게.”

“얼마든지, 이벨리아.”

“……아가레스.”

단호한 부름.

마왕이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난 약조대로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악마와 한 약속 따위 알 게 뭐야.”

“이런……. 이러니 아르티나가 사탄 소리를 듣는 거란다, 이벨리아.”

마왕의 제안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

이기적인 인간이라, 이벨리아에겐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목숨보다 제 사람들의 안위가 우선인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대차게 판을 엎어버린 건.

“난 영웅이 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내 소중한 존재들에겐 자랑스러운 딸이자 형제이고 친구이며 주군이어야 하거든.”

그러니까…….

“네 제안은 모두 기각이야, 이 머저리야.”

***

그 시각.

남쪽 진영에서 악마의 군과 조우한 아가레스의 눈에 황금빛 회로가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이브.”

짧은 읊조림과 함께 아가레스의 신형이 곧바로 보랏빛 마기에 휩싸였다. 공격이 아닌 이동을 위한 힘이었으나 바글바글하게 몰려 있던 하위 마족들은 그 파편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아가레스의 저런 이동 방법을 몇 번 본 적 있던 알렉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야! 너 지금 가버리면 안 되지, 이 양심 뒤진 자식아!”

“……?”

“좀 쓸만한 것들은 네가 죄다 아가씨 군에다 박아 놓고서 지금 가는 건 진짜 아니지! 우리 아가씨도 그런 악독한 짓은 안 하신다!”

주변을 휙 둘러본 아가레스가 혀를 찼다.

“눈물 나게 허약한 똥 덩어리들이로군. 하나 불러두고 갈 테니 잘들 해보도록.”

“야!”

삽시간에 사라져버린 악마. 바락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대답이 있을 리 없다. 드물게 큰 소리를 낸 알렉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저 새끼가 진짜!”

그때였다.

알렉의 바로 뒤, 뜨거운 입김이 훅 끼쳐왔다.

“……!”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돌아 검을 겨누자, 인간 따위는 손쉽게 물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송곳니에서 침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감히 지고하신 주군께 새끼……? 이 인간 새끼가 뒈지려고!”

사자의 묵직한 앞발이 휙 올라갔다.

따라서 시선을 올린 알렉이 냅다 허리를 숙였다.

“뭐야, 쫄았냐?”

“큭…….”

“하, 미개한 인간이 드디어 이 대악마님을 알아보고-.”

“크, 크하하하하하!”

“……?”

“으하하핫, 아이고오- 잔디 대가리 오셨어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든 알렉이 사자의 머리 위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자지러졌다.

“으하하하학! 야, 오랜만이다? 거기 씨 심으면 꽃 피냐? 열매 열려? 엉? 크하하하하!”

“이, 이게! 확 물어 죽여 버린다!”

“어디 물어봐라! 우리 아가씨한테 가서 확 일러버려야지!”

“……!”

땅콩이 주군을 등에 업고 있는 이상, 그 땅콩은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땅콩이다.

마르바스의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씨익 씨익 뿜어져 나왔다.

휙 몸을 돌린 마르바스는 달려드는 마족들에게 자비 없이 앞발을 휘둘렀다. 이것이 바로 알렉이다, 생각하면서.

“망할 아르티나! 죽어라! 죽어!”

“야. 거기다가 씨 심어봐도 되냐?”

“닥쳐!”

주인이고 기사고 죄다 인성이 글러 먹었다.

가문 내 가장 작은 밥풀의 성질머리를 보면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씨가 좀 그러면 나뭇가지 꽂아봐도 돼?”

“꺼져! 작위를 인성질로 얻은 것들 같으니라고!”

***

한편, 북쪽의 진영.

이벨리아의 단호한 거절에 마왕이 이후의 움직임을 채 전개하기도 전이었다.

- 콰가가가각.

쏜살같이 날아온 진보랏빛 마기가 마왕의 옥좌를 그대로 뚫고 땅에 틀어박혔다.

자욱하게 오른 흙먼지 사이.

훌쩍 뛰어 뒤로 물러선 바알이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왕좌의 잔해를 바라봤다.

“이런. 아끼던 거였는데.”

뚜벅. 뚜벅. 느긋한 발걸음과 함께, 무감한 목소리가 답했다.

“어차피 못 앉게 될 테니 아쉬워할 것 없다.”

“그대가 왕좌를 탐내는 줄은 몰랐-.”

“곧 의자에 앉을 몸뚱어리가 사라질 테니.”

이벨리아의 앞에 선 아가레스가 마왕을 직시했다.

그 다부진 몸 때문에 먹잇감이 가려지자, 바알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난 우리가 꽤 유용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벨…….”

쌔애액.

목젖을 뚫을 듯 거세게 날아오는 마기. 바알이 입을 다물고 황급히 몸을 틀었다. 그럼에도 제법 깊게 베인 목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네 소중한 인간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아직.”

“이름.”

“이름?”

“귀한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마라.”

“……듣던 대로 인간에게 미쳐버렸구나, 동부의 지배자.”

“광마(狂魔)가 되는 것이 이리 기꺼운 줄 알았더라면 진작 미쳐버릴 것을.”

이브가 물어뜯으라 불렀으니 손속엔 망설임이 없다.

허공에서 형상을 빚은 묵빛 검이 아가레스의 손에 쥐어졌다.

동시에 그대로 쇄도.

- 콰아아앙!

로트링겐 전역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마계의 두 지배자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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