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품에 안겨들었다
예로부터 용이 날갯짓하면 하늘이 갈라지고 숨을 내쉬면 땅이 진동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상식 범주로는 불가해하였기에 재앙 또는 천재지변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힘.
이곳, 부르고뉴(Bourgone) 영지.
무려 수백 년 만에 다시 창공에 자리한 세계 유일한 용이 재해나 다름없는 위용으로 포효한다.
현실을 부정하며 턱을 덜덜 떨던 연금술사들이 그제야 말 그대로 혼비백산했다.
“으아아아악! 요, 요, 용이다!”
“도, 도망쳐!”
“저게 어찌 된 일입니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쪽짜리였는데!”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누군가는 원망할 대상을 찾아 노인의 멱살을 콱 틀어쥐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여유만만했던 표정도, 참극을 즐기던 표정도 온데간데없다.
자신의 안위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들이 상정했던 건 동물과 섞인 불완전한 용, 제어가 가능한 어린 용, 고통에 몸부림치는 실험체 용 정도였다.
저리 성체가 되어버린 완전한 용을 마주하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호문쿨루스들만 풀어두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갔을 터다.
“저거 눈이 완전 맛이 갔지 않습니까!”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아, 아까 그 쇠사슬이라도 다시 좀 꺼내보시는 게……!”
그 말에 백발의 연금술사가 끌끌 웃었다.
“소용없을 걸세.”
“예에?”
“그 사슬은 용의 불완전함에 기대는 제약이니.”
저것이 미처 태어나기도 전이었기에 동물과 섞어냈고, 이후 갓 태어난 데다가 불완전하기까지 했기에 제약도 손쉽게 걸 수 있었다.
노인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건 자신의 실책이었다.
“본디 용은 해츨링에서 성체가 되는 성장 기간을 거친다고 하지. 이 기간은 필히 성체인 용이 이끌어 유도해야 하는 것이라 홀로 남은 어린 용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일 줄 알았건만…….”
너무 깊이 건드렸다.
공자와 용이 어떤 관계인지는 잘 모르나, 공자의 죽음이 저 용에게는 각성의 촉진제가 되어버린 듯했다.
“저리 성체가 되어버리면, 과거 섞은 불순한 것들은 모두 희석이 되어버렸을 테고…… 과거 용들과 마찬가지로 제약이 제대로 듣지 않을 것은 자명하지.”
백발의 연금술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용의 날개에 가려 온통 검어져 버린 하늘.
“……자업자득인가.”
이곳에서 살아나갈 방도는 없다.
노인이 뒤를 돌아 연금술사들에게 말했다.
“다들 가시게. 호문쿨루스들을 저 용에게 붙여두고.”
“그, 그러면…….”
“그대들이 도망칠 때까지 이곳은 내가 최대한 막아보겠네. 내가 관여했던 실험의 실험체였던 만큼 책임도 내가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금술사들은 한마디 만류 없이 곧바로 등을 돌려 산산이 도망쳤다.
‘나, 나라도 살아야지.’
‘어차피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누군가는 장로께 전해야 해.’
‘실험에 실패한 이가 책임을 져야지, 암, 그렇고말고.’
뛰어난 합리화 능력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제각기 도망치던 이들이 뭔가에 퉁 부딪히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이게…….”
“이게 왜 이래! 뭐야! 뭐냐고!”
손을 앞으로 뻗어보았으나 무언가에 턱 막힌 듯 더는 나아가지 않는다.
공포에 질려 허공을 쾅쾅 내리쳐 보았으나, 제대로 된 형태도 없는 것이 부서질 리 만무하다.
6계급 속박 마법.
연옥(purgatory).
그제야 이 영지에, 아니, 저 용의 코앞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연금술사들이 사색이 되어 주저앉았다.
“사, 살려줘…….”
“제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유희로 삼던 이들이 자신들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하다.
연금술사들의 의지를 받은 호문쿨루스가 허공으로 하나둘씩 뛰어올라 엔리르의 주변을 둘러쌌다. 검 몇 개가 엔리르의 몸에 박혔으나, 거대한 용에게는 그저 따끔한 바늘에 지나지 않는다.
귀찮다는 듯 고개를 털어버린 엔리르가 마치 날벌레를 내쫓듯 꼬리를 크게 휘둘러 내리쳤다.
흉기나 다름없는 꼬리가 이리저리 휘둘러지자, 뛰어올랐던 호문쿨루스들이 저 아래 지상으로 세게 처박힌다.
이내 수십 개의 마법진이 제한 없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드넓은 하늘이 온통 알 수 없는 다채로운 빛으로 번쩍이는 것을 감히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연금술사들은 그저 거품을 물고 뒤로 주춤거릴 뿐이었다.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강제로 성체가 되어버린 용이 거친 울림으로 읊조렸다.
아무도 감히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한다.
천지를 뒤집는 우레와 같은 용언이 연금술사들의 귀에 고통스럽게 박혀 들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죽음을 낳으니.」
그러자 마치 하늘을 추로 달아둔 것처럼 거대한 천칭이 용의 등 뒤에 후광처럼 내려앉는다.
「탐오함이 이 천칭에 닿은 죄인.」
끼리릭 끼리릭 마치 세계의 축이 움직이는 듯한 굉음을 내며 천칭이 서서히 왼쪽으로 기운다.
「처형.」
9계급 소멸 마법.
단죄(convict).
쿠구구구궁. 거대한 울림과 함께 죄인들의 머리 위로 저울판이 내려앉는다.
항거할 수 없는 고위 마법. 말 그대로 눈으로 감히 담기도 어려운 재앙.
점점 무게를 더해가는 저울판이 그들을 서서히 짓눌렀다.
“끄, 끄아아아아!”
“살려…… 살려줘!”
“제, 제발, 이대로 죽고 싶진……!”
털썩. 주저앉는 소리.
우드득. 척추뼈가 부서지는 소리.
콰직. 끝내 온몸이 터져나가는 소리.
용의 단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더 긴 시간 고통에 몸부림치게 하고 싶었으나, 지금 엔리르에게 그럴 여유 따위는 없었다.
광룡(狂龍)이 될 징조라는 붉은 시야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것 하나가 용의 정신을 다잡게 했으니.
연금술사들이 모두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을 확인한 엔리르가 지상에 조심히 내려앉았다.
혹시 크게 날갯짓했다가 다치기라도 할까.
“……형아.”
혹은 상하기라도 할까.
덩치에 맞지 않게 머뭇거리는 걸음이 세드릭에게로 향했다.
맑은 눈물이 연신 땅을 적셨다. 존재력 충만한 용의 눈물을 받은 땅에서 애처로운 들풀이 아롱지며 피어났다.
엔리르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 검에 의지하고 있는 세드릭을 작게 불렀다.
“형아…….”
나 좀 봐봐.
나 이렇게 멋지게 컸어.
내가 다 해치웠어.
“형아…….”
나한테 못된 짓만 해도 괜찮아.
카드놀이도 내가 다 져줄 수 있어.
앞으로는 형아 머리 위에서 뛰어놀지도 않을 거야.
날 미워해도, 동생이라고 불러주지 않아도, 다 괜찮아.
“그러니까 나랑 같이 돌아가자…… 일어나 봐. 응?”
답이 없다.
슬쩍 얼굴을 들이밀어 보니 몸이 싸늘하리만치 차갑다.
더는 외면할 방도가 없다.
감히 형언할 수 없도록 괴로운 마음으로, 용은 어렵사리 현실을 받아들였다.
“……내, 내가…… 잘 데려가 줄게…….”
커다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세드릭의 몸을 함빡 적셨다.
“흐윽, 가장 좋은 곳에…… 묻어줄게.”
“……야.”
“훌쩍, 응, 형아…….”
작은 부름에 본능적으로 대답한 용이 멈칫했다. 아니 잠깐.
“형아아?”
화들짝 놀란 엔리르가 그 커다란 몸을 허둥지둥 움직이자, 지축이 쿵쿵 울렸다.
검으로 지탱하고 있는 세드릭의 몸이 그에 맞추어 아래로 죽죽 내려가다가 이내 털썩 바닥으로 쓰러진다.
“형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크게 부르니, 감은 눈은 변함없으나 잔뜩 갈라진 입술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웅얼거림이 새어 나온다.
“……이 망할 자식. 그런 거로 변할 수 있었으면…… 진작 좀 하지…….”
“흐어어엉-! 형아아-!”
“……내가 정신만 차리면…… 넌 뒈졌다 이놈아…….”
“응! 때려! 죽여! 난 다 좋아!”
“…….”
“아니, 이럴 게 아니지! 형아, 잠시만!”
엔리르가 거대한 앞발을 쿵 구르자 이 너른 영지 전체에 흰색 마법진이 새겨졌다.
「그대 쓰러지지 않는 설화가 될지니.」
7계급 회복 마법 변형.
집단 재생(group regeneration).
마법진에서 찬란한 광휘가 퍼져나가더니,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과 세드릭의 몸을 부드럽게 휩쓸고 지나갔다.
목숨이 붙어 있다면 본래의 상태로 완벽히 회복시켜주는 고위 회복 주문.
이 경우에는 엔리르가 임의로 변형하여 다수를 대상자로 지정했기에 효과는 조금 떨어졌지만, 적어도 이곳 모두가 치명상을 회복할 정도는 되었다.
제법 아문 옆구리와 어깨. 덩달아 기력 또한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자신의 몸을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세드릭이 물었다.
“야. 너 이렇게 마법 난사해도 돼? 아까부터 죄다 보통 마법이 아닌 것 같은데.”
“……업어줘라, 형아. 나 집에 못 가.”
털썩. 거대한 용이 배를 깔고 드러누웠다.
작을 때야 귀여웠지, 비늘 잔뜩 난 거대 용이 저러니까 기괴하기 짝이 없다.
“널 업는 순간 내 명줄이 다시 끊기지 않을까?”
“……맞네. 나 이제 커졌지.”
앞발을 턱에 괴고 잠시 고민하던 엔리르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으으…… 이제 마나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한숨 쉬며 읊은 주문은.
5계급 변형 마법.
폴리모프(polymorph).
다시 예전과 동일하게 작은 여우 형태로 돌아온 용이 꼬리를 힘없이 살랑였다.
“자, 이제 머리 위에 올려줘.”
“……굳이 굳이 업혀 가겠다는 의지 보소. 좀 날아가지?”
“나 저 연금술사들도 다 잡고 형아랑 기사들도 회복시키고 귀여운 용용이로 변신하기까지 했다고. 이제 정말 남은 힘이 없어. 그리고 나는 큰 전공을 세웠으니까 대접받아 마땅해.”
합리적인 요청이다. 세드릭과 마찬가지로 거진 죽었다 살아난 기사들이 엔리르에게 두 손을 뻗었다.
“우쭈쭈, 우리 위대한 용님!”
“자, 자, 우리가 꽃마차를 만들어 올 테니 올라타고 돌아가시지요!”
“아니야. 나는 형아 머리 위가 꽃마차야.”
그러더니 두 뒷발로 서서 두 앞발을 앞으로 쭉 내밀고 순박하게 눈을 깜박인다.
“안아줘. 업어줘. 동생이라며.”
“…….”
한숨 쉰 세드릭이 결국 엔리르를 덥석 들어 올려 머리 위에 얹었다.
그러자 이제야 제집을 찾았다는 듯, 엔리르가 추욱 늘어져 눈을 꼭 감았다.
세드릭이 몸을 돌려 기사들을 바라봤다.
용의 회복을 받았다고는 하나, 다들 상처가 깊었기에 꼴들이 말이 아니다.
“……내 욕심에 따라줘서 고맙다.”
“별말씀을요!”
“결국 이렇게 또 살아날 줄 알았습니다!”
“죽여도 죽여도 안 죽는 우리가 바로 미친개 기사단!”
“그게 문제긴 한데. 여하간 다들 고생했다. 돌아가자.”
살펴본 바, 영지에 생존자는 없었다.
하여 재건과 회복에 대해서는 어차피 아버지께 보고를 드리고 명을 하달 받아야 할 사항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산을 최대한 흔들림 없이 내려가려 애쓰면서, 세드릭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엔리르. 고마…… 읍.”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머리에서 꼼질꼼질 내려와 세드릭의 입을 앞발로 막아버린 엔리르가 말했다.
“내가 고마워, 형아.”
“…….”
“구해줘서 고마워. 안 버려줘서 고마워.”
내 형이 되어 줘서. 날 동생이라고 불러 줘서. 내 앞을 막아 줘서. 끝내 이렇게 함께 집으로 돌아가 줘서.
“……전부 다 고마워.”
영지는 엉망이 되었고, 희생자는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연금술사들의 건재함을 확인한 데다가, 그들 역시 큰 부상을 안고 사선을 넘나들었다.
잃은 것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얻은 것 하나가 세드릭에게는 그것들을 덮고도 남을 거라…….
젊은 사령관의 입가에는 고요한 미소가 자리했다.
***
세 개의 격전지 중 가장 먼 곳에 있는 영지, 로트링겐(Lothringen).
저 멀리 거대한 성벽이 보이자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아가씨와 악마의 분홍빛 기류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
‘힘들었다.’
‘후. 야영하는 동안 악마를 아주 셀 수도 없이 죽일 뻔했지 뭐야.’
‘센 척하지 마라. 다 걸려서 되레 얻어맞은 주제에.’
헤롤드의 냉정한 속삭임에 알렉이 입술을 삐죽이며 시퍼렇게 변한 눈가를 문질렀다.
그렇게 조용히 재잘대는 와중에도 그들은 이벨리아의 안색을 기민하게 살폈다.
‘아가씨 괜찮으실까.’
‘많이 놀라실 텐데.’
아직 성문을 열고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짙은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이 먼 곳까지 흘러온다. 그러니 그 안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할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문 앞에 다다른 이벨리아는 희게 질려 있었다.
아가레스가 마뜩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열어, 이브?”
“응.”
“……주제넘은 말이지만, 괜찮겠어?”
“네가 내게 하는 말 중 주제넘은 말은 없어. 그리고 괜찮으니까 열어.”
명하신다면 거부할 권리는 없다.
악마는 이벨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마기를 이용해 성문을 열었다.
그리고.
“……헉.”
흡사 시체의 바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참상을 본 이벨리아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바로 뒤에 버티고 서 있던 아가레스가 두 팔을 앞으로 뻗어 감싸 안듯 이벨리아의 눈을 가렸다.
이어 귓가에 걱정을 한껏 담은 낮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내가 처리하고 올까?”
“…….”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이벨리아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아가레스가 눈을 가리기 전까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잔상은 짙게 남았다.
험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리 많은 죽음과 마주한 적 또한 없다.
“우욱…….”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잠시 기댈 곳이 필요했던 이벨리아가 몸을 돌려 아가레스의 품에 마주 안겨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