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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30화 (230/323)

##  230화: 동생을 지키는 데 이유가 있나

부르고뉴(Bourgone) 영지의 깊은 지하.

세드릭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겨우 연구실로 숨어든 연금술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왜소한 몸집의 연금술사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버럭 성질을 냈다.

“그러게 일찍 튀어야 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난들 저것들이 이리 빨리 들이닥칠 줄 알았겠나. 저게 어떻게 말 타고 달려온 인간의 속도냔 말이야! 용을 타고 날아왔다고 해도 믿겠는데!”

“어허, 용은 얘기도 꺼내지 말게. 부정 타니까.”

그러자 그나마 개중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연금술사가 왁자하게 남 탓을 하는 이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진정 좀 하시게나.”

“하지만 저 위에 아르티나의 개들이……!”

“쉬이.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혼비백산하던 연금술사들의 시선이 천천히 노인에게로 모였다.

자신에게 관심이 쏠린 것을 알아챈 노인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우리가 이곳 부르고뉴로 온 이유는 단 두 가지였네. 하나는 영지민들을 모조리 죽여 장로의 부탁을 이행하는 것. 둘은 행여라도 마족들이 영지를 뒤집어엎다가 이 연구실을 발견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

“그건 우리도 알고 있소이다.”

“우리는 그 두 목표를 모두 달성했네. 그렇지?”

“……그렇지요.”

“그럼 우리는 저들이 물러갈 때까지 잠시 숨만 죽이고 있으면 그만일세.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들이 이미 도망쳤다고 생각한 아르티나는 별수 없이 발걸음을 돌릴 테지.”

그러자 비교적 나이 어린 연금술사 하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차, 참말입니까? 아르티나 일가는 하나같이 정신 나간 작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걸리면 뼈도 못 추리는 것을 넘어서 영혼까지 탈탈 털려버린다고.”

“악마 사냥꾼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니,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지.”

“히익, 뭐 그런 무시무시한 것들이 귀족의 탈을 쓰고 제국을 돌아다닌답니까?”

“악마로 태어나야 할 것들이 인간으로 잘못 태어났지. 어쨌든, 아무리 그런 그들이라 하더라도 이곳은 찾지 못하네. 우리가 실험실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는 다들 잘 알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지.”

하긴. 최근에 만들어진 실험실도 아니고, 금제탑의 위상이 높았던 시절에 장로가 손수 만든 실험실이라면 발각이 쉬울 리가 없다.

그제야 완전히 여유를 찾은 연금술사들이 굳어 있던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 예전에 도망쳤다는 그 용도 이곳을 다시 찾지는 못하는 겁니까?”

“글쎄. 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는 존재이니, 이 근처에 온다면 어렴풋하게나마 기운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그러면 왜 이 연구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셨습니까?”

“일부러 그랬다네. 일부러.”

“예?”

“복수에 눈이 멀어 다시 이곳을 찾으라고.”

백발의 연금술사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클클 웃었다.

“우리가 이 실험을 진행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거든. 용을 복속시켜 군대를 만드는 것. 그런 우리가 실험체였던 용을 속박하는 안전장치 하나 만들어두지 않았을 것 같나?”

“……그게 뭐든 간에, 용에게 통하긴 했습니까?”

“자존심이 상하긴 하네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성체인 용에게는 전혀 듣지 않았다네. 다만, 갓 태어난 데다가 하위 동물을 조금 배합해 두었던 새끼 용에게는 기가 막히게 잘 듣더군.”

그가 머리로 창살을 들이받으며 울부짖고 있는 키메라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만에 하나 그게 살아서 이곳을 찾는다면…….”

연금술사의 갈라진 입술이 기괴하게 옆으로 찢어졌다.

“오히려 좋지. 다시 생포하여 못다 한 실험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

그러자 그곳에 모인 연금술사들이 일제히 광소를 터뜨렸다.

용!

실험체가 된 용!

이 얼마나 달콤한 상상인가!

이쯤 되니 오히려 그 용이 기적처럼 살아 있어 이곳에 다시금 발 들이기를 간곡히 바라야 할 것 같다.

노인이 길게 자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낡은 의자에 앉았다.

“자. 이제 마음들이 좀 편안해지셨는가?”

“어디 편안하다 뿐이겠습니까. 덕분에 아주 뜨끈뜨끈해졌습니다!”

어린 연금술사들까지 모두 두 다리를 뻗고 자리에 앉자, 노인이 찻잔이 놓인 곳을 향해 턱짓했다.

“그래, 조용해질 때까지 차나 우려서 마시지. 이 깊은 땅속을 전부 일일이 손으로 파내는 것이 아니라면 이곳을 발견할 도리는 없고…….”

노인이 가래 낀 목소리로 끌끌 웃었다.

“세상천지에 제 영지 땅을 모두 뒤집어엎어버리는 미친놈은 없을…….”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

- 콰아아아앙!

마치 폭약을 터뜨린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이 깊은 지하까지 울리는 것을 보아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익히 짐작할 만했다.

연금술로 만들어낸 특수한 금속이 뒤덮은 연구실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부르르 진동했다.

- 콰아아아앙!

연이어 들려오는 소리.

연금술사들의 얼굴이 천천히 노인을 향해 돌아갔다.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묻는 듯.

“……그런 미친놈은 없어야 하는데…….”

찻잔을 떨어뜨린 백발의 연금술사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여기에 있네……?”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연금술사들은 생각했다.

장로님. 장로님.

저희 엿 된 건가요?

***

한편 여전히 세드릭의 품에 안겨 있던 엔리르는 해롱해롱한 머리를 푸르르 털었다.

“형아. 위대한 용도 멀미를 해.”

“참아.”

든든한 품에 파묻힌 동그란 머리통을 빼꼼 들어 좌우를 살펴보니…….

영지의 단단한 땅이 흡사 우주에서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혹은 누나가 아이스크림 통에서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퍼낸 것처럼, 굉장히 깔끔하게 파여버렸다.

“형아. 영지가 마구 뿌서지고 있어.”

“어차피 생존자도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만든 것들이라도 제대로 족쳐야 속이 시원하지.”

“그런데 왜 땅을 그렇게 파고 있는 거야?”

“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래서 근방을 다 뒤졌는데도 없고.”

“응.”

“그럼 하늘로 솟았거나, 땅으로 꺼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응.”

“그래서 땅부터 뒤진 다음에 하늘을 뒤져보려고.”

“형아. 형아.”

“왜.”

“형아는 또라이야?”

“……그 또랑또랑한 눈으로 험한 말 내뱉지 말고 잠이나 자.”

누가 뭐래도 나는 이 영지 땅을 죄 뒤엎어서 그놈들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 좀 해봐야겠으니까.

그렇게 꽃잎이 달랑달랑 달린 명검에 옅은 검기를 두른 채로 무식하게 땅을 내려치길 몇 시간.

비로소 광기의 결실을 맺은 세드릭이 뺨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문질러 닦아내며 환하게 웃었다.

“봐라. 저기 있잖아, 저 썩을 것들.”

그리고 다른 쪽 구덩이를 파다가 이 광경을 바라본 드웬이 작게 속삭였다.

“아르티나 가문의 최고 미쳐버린 분은 작은 도련님이셨구나…….”

***

연구실 천장 중 일부가 휑하게 뚫려버렸다.

구멍과 균열을 통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평생을 실험실 안에서만 살았던 실험체들이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쳤다.

연금술사들이 멍한 표정으로 위를 바라봤다.

그러자 구덩이 위, 끄트머리에 마치 뒷골목 불량배처럼 쪼그려 앉은 아르티나의 공자가 보인다.

낭인처럼 검을 어깨에 턱 걸친 채로 그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곱게 죽고 싶으면 힘 빼지 말고 순순히 올라와.”

“…….”

“아. 혹시 원하는 죽음이 생매장이라면 들어주고.”

이렇게 대놓고 눈이 마주쳐버린 상황에 올라가지 않을 수도 없다. 그들이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서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 전까지 여유만만하게 수염을 쓸던 연금술사가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겁먹지 마라. 공작도, 공작부인도, 하다못해 소공작이나 공녀도 아닌 천덕꾸러기 공자다.”

“다 들린다. 그런 상처 되는 말은 속삭여야지, 이 개자식들아.”

“준비해라. 우린 반드시 살아 돌아간다.”

“이보세요. 땅속에만 박혀 살아서 잘 모르나 본데, 우리 사회는 그걸 만용이라 부르기로 이미 합의했어요.”

“저 악마의 조동아리에 현혹되지 마라.”

“나보고 악마의 조동아리라니. 우리 아가 만나면 아주 까무러치겠네.”

“…….”

마귀라도 씐 것처럼 정신없이 나풀대는 저 조동아리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손해다.

나이 지긋한 연금술사가 쥐고 있던 지팡이로 땅을 쿵 내리찍었다.

그러자.

- 쿠우웅.

마치 거대한 석상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세드릭의 바로 뒤에서 차디찬 숨결이 훅 밀려들었다.

세드릭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러자 불과 찰나 전까지 목이 있었던 그 자리로 거대한 날붙이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곧이어 정확히 미간을 노리고 쏘아져 들어오는 검. 순식간에 발검한 세드릭이 검날을 세워 막아냈다.

검을 마주 댄 이는 표정이 없다. 느껴지는 호흡이 지나치게 차고, 기괴하리만치 흰 피부 아래에 핏줄이 선연하게 펄떡댄다.

“이게 그거로군. 호문쿨루스.”

인간을 먹이로 주면 줄수록 강해진다고 들었는데.

알아주어 기쁘다는 듯 노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다른 연금술사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내리찍고.

콰앙. 지축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아르티나 기사단의 주변에 인간 아닌 것들이 하얀 숨결과 함께 잔뜩 내려앉았다.

“……많이도 키워놨군.”

세드릭이 입술을 짓씹었다.

저것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무려 수천, 수만의 목숨을 잡아먹고 탄생하여 자라는 존재. 그게 약하다면 외려 어불성설일 것이다.

‘신입들에게는 벅차겠는데.’

그래도 수적으로 기사들이 우위에 있는 데다가 이쪽에는 용도 있으니…… 부상자가 속출하긴 해도 승기는 잡을 수 있을 터다.

세드릭이 드웬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여유 있으면 신입들에게 공략법을 설명하라는 뜻. 드웬이 검을 빙빙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이네, 이 푸르뎅뎅한 것들.”

“이게 호문쿨루스입니까?”

“엉. 신입들은 본 적 없을 테니 간단히 설명해주겠다.”

“예!”

“세다. 강하다. 빠르다. 눈 감으면 바로 모가지 날아간다.”

“……대응 방법은요?”

“뭘 물어. 더 세고,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눈 안 감으면 되지.”

“……그것참 도움이 전혀 안 되는군요.”

“원래 공략은 뒈지면서 배우는 거야. 온다! 살아서 아가씨 뵙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일사불란하게 자세 낮춘 호문쿨루스들이 표정 없이 땅을 박찼다.

이 군의 주축이 되는 실력자가 세드릭과 드웬이라는 것을 간파하기라도 한 것처럼, 둘에게 특히 많은 수가 몰려든 채였다.

‘일단 이것들부터 부숴야 저들을 잡을 수 있겠군.’

어렵기는 해도 세드릭 정도 되면 처리하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적당히 앞만 뚫은 다음 뒤는 기사들에게 맡겨야겠어.’

그렇게 정신없이 검을 섞는 와중.

몸을 추스른 연금술사들이 반파된 연구실에서 하나둘씩 기어 나와 구덩이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섰다.

흙먼지로 뒤덮인 옷자락을 불쾌하다는 듯 툭툭 털어낸 노인이 격전을 벌이고 있는 반대편을 살폈다.

그리고.

“음?”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눈이 익숙한 붉은색을 따라 움직였다.

“저건…….”

나름대로 정체를 숨기기 위함인지 날개를 숨기고 바닥에 내려앉은 채로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크크…… 크하하하하하핫!”

그래. 너로구나.

“크하하하하하!”

네가 빌어먹을 아르티나의 날개 아래 숨어 있었구나!

노인이 발을 한번 구르자, 아무것도 없던 손에 검은 쇠사슬이 좌르륵 감겨들었다.

팔을 앞으로 쭉 내뻗으니 쇠사슬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구불구불 목표를 향해 날아간다.

“자아, 이제 주인에게 다시 돌아오려무나.”

비릿한 웃음이 끈적하게 공기를 적셨다.

***

구덩이 속의 연금술사들을 보고 분개하던 엔리르 역시 세드릭의 품에서 빠져나와 부지런히 기사들을 돕고 있었다.

말랑하고 통통한 앞발이 쉴 새 없이 동글동글 마법을 빚어냈고, 분전하는 신입 기사들의 주변에 적절하게 내리꽂혔다.

저쪽. 위험한 현장 하나를 더 포착하고 뽈뽈 기어가 앞발을 움직이던 그때.

- 촤르르르륵.

용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솜털이 삐죽 서고, 공포에 물든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지척까지 날아든…… 익숙한 그것.

“……!”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검은 쇠사슬이 어린 용의 몸을 칭칭 휘감고 꽉 죄며 억눌렀다.

- 치륵. 치르륵.

흡사 내부의 장기가 모두 터져버리는 기분. 거대한 격이 작은 철창에 가둬지고, 삼라만상을 두루 살피던 두뇌가 한없이 쪼그라드는 느낌.

“크아아아악-!”

어린 용이 몸을 격하게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이곳 그 누구도, 단연코 들어본 적 없는 끔찍한 호소.

“끄으…… 끄아아아악!”

그 우짖음에 퍼뜩 놀라 뒤를 돌아본 세드릭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엔리르가 피를 토하며 경련하고 있다.

“엔리르-!”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영민한 금빛 눈은 재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저 검은 쇠사슬. 저것을 쥐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 원흉이다.

‘저걸 베어야 해!’

그러나 걸음을 떼려는 순간.

격전을 벌이고 있던 호문쿨루스들이 일제히 눈을 번뜩이며 검을 휘두른다.

“……제길.”

이걸 다 처리하고 있으면 늦어. 그 전에 엔리르가…….

세드릭은 고민 없이 몸을 날렸다.

- 카앙!

엔리르를 속박한 쇠사슬을 있는 힘껏 내리쳤으나, 무엇으로 만든 건지 단번에 잘리지 않는다.

세드릭의 얼굴에 낭패감이 가득 들어찼다. 동시에 몸이 앞으로 휘청인다.

“……크윽.”

도련님! 외치는 기사들의 소리가 웅웅거리며 멀어진다.

후두둑.

호문쿨루스들의 검을 무시하고 엔리르 쪽으로 몸을 날리는 바람에 뜯겨나가다시피 한 옆구리에서 대량의 피가 쏟아졌다.

“쿨럭.”

기도를 타고 역류하는 피가 입가에 붉은 선혈을 만들어낸다.

구덩이 저 건너편에서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이렇게 되면 끝이로군.”

저쪽의 가장 큰 전력은 단연 공자와 용이었을 터. 그 둘이 전투 불능이 된 이상 승산은 없다.

백발의 연금술사가 길게 자란 수염을 슬슬 쓰다듬었다.

“우리야 목표도 다 달성했으니, 우연히 만난 실험체만 회수하여 돌아가면 그만인데.”

짐짓 안타까운 척을 하는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왜 만용을 부려 죽음을 자초하는지……. 쯧쯧.”

순간 암전되는 시야. 몸이 천천히 어딘가로 꺼져가는 기분.

“…….”

정신을 차리고자 일부러 왼쪽 옆구리를 세게 움켜쥔 세드릭이 검을 바닥에 박아 넣고 몸을 지탱했다.

“그럴, 쿨럭…… 그럴 순 없지.”

그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기어코 엔리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용에 대한 집요하리만치 끈질긴 집착에 연금술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지? 아르티나도 그것에게 용건이 있나?”

세드릭이 입안에 가득 고인 피를 퉤 뱉어냈다.

격하게 올라오는 통증.

반쯤 잃어버린 의식.

그 속에서 어렵사리 잡은 검의 기본, 중단세(中段勢).

“……용건은 무슨.”

흐릿한 시야 너머, 세드릭의 검이 그들을 향해 겨눠졌다.

“형이 동생을 지키는데 이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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