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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28화 (228/323)

##  228화: 이것이 아르티나 엿이다

기사들의 얼굴에 질렸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괴물.’

존경해 마지않는 주군 내외를 상대로 하는 생각이라 하기에는 상당히 불경했으나, 이 단어 외에 지금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듯한 명령이나 격문 한마디도 없이 냅다 검을 빼 들고 적진 한가운데로 달려가 버리시기에 헐레벌떡 뒤를 쫓았는데…….

‘망할.’

‘거리가 좁혀지질 않아.’

기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전장에서 합을 맞춰오신 건지, 마치 한 몸처럼 약진하는 두 분을 따를 방도가 없다.

마님께서는 오로지 정면으로 부딪쳐오는 적만 베어내시고, 주군께서는 마님의 뒤에 바짝 붙어 양옆과 뒤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일거에 베어내신다.

한때 아름다웠던 항구 도시를 시커멓게 메운 마족들은 단 한순간도 휴고와 엘리시아의 걸음을 붙잡진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에 단둘뿐인 소드마스터 중 하나가 바로 저곳에 있으니.

사령관과 군이 발을 맞추지 않는 이 독특한 전투 스타일은 휴고와 오랫동안 함께한 기사들에게는 제법 익숙했다.

그들이 이를 악물고 죽을 각오로 주군의 등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상대 진영에 황금 용의 깃발이 꽂혀 있는 것.

그것이 주군과 함께 수도 없이 치렀던 전쟁의 결말이었으니까.

그러나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기사 로웰에게는 경악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누가 전투를 이렇게 무식하게 치러!’

앳된 얼굴이 불안감을 가득 담고 선두에 선 주군의 등을 흘끗거렸다.

훈련의 성과를 착실하게 보여주듯 한눈을 팔면서도 나름대로 부족함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긴 했으나, 당연하게도 칭찬보다는 험한 일갈이 날아들었다.

“야아아! 여기 솜털도 안 빠진 신입 기사 새끼가 한눈을 판다아아!”

“오늘 묘비 하나 세우겠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시간 남는 놈들은 가서 관짝 좀 짜와라.”

“뻘짓하다 뒈진 막내 들어갈 거니까 대충 짜와, 대충.”

“…….”

한눈팔지 말라는 경고가 참으로 직설적이다.

망할 선배들. 조동아리들이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자유분방해.

로웰이 눈앞의 적에게 시선을 돌리며 불퉁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말씀들을 하셔도 꼭.”

나 상처받았어요. 대놓고 표현하듯 시무룩해진 막내의 머리 위로 단장 에딘의 커다란 손이 턱 내려앉았다.

“전쟁터에선 앞으로 침을 뱉어도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재수 옴 붙은 대상이 네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막내 초상 치르기 싫어서 하는 말들이니 제대로 새겨듣도록.”

아뇨. 아주 초상 치르고 싶어서 눈을 번쩍 발을 동동 구르시는 것 같은데요.

선배들의 험한 내리사랑에 푸욱 한숨을 내쉰 로웰이 에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단장님. 주군과 마님을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겁니까?”

로웰의 옆에서 찔러 들어오는 손톱을 대신 막아주며, 에딘이 태연히 말했다.

“막내 1 죽음 적립.”

“예에?”

“방금 내가 안 막았으면 넌 죽었다. 죽음은 착실히 적립했다가 공작저로 복귀했을 때 숨이 간당간당 넘어갈 때까지 굴려주지.”

“아니, 그보다 주군과 마님 말입니다! 주군과 마님! 이젠 보이지도 않아요! 두 분께서만 저리 가시다가 포위라도 당하시면……!”

왜 다들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거지? 미친개 미친개 하니까 진짜 지능도 죄다 강아지 수준이냐고!

분개하여 발을 구르는 로웰의 말에 아르티나 기사들이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내 그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를 본 로웰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봐라. 이거 아주 심각한 사태 맞지. 내가 일깨워주니 이제야 깨달은 거지.

“거 보라…….”

그러나 로웰이 당당하게 외치기도 전. 기사들 사이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하!”

“크하하하! 이 솜털이 지금 뭐라는 거냐?”

“포위란다, 포위! 으하하하핫!”

그러자 로웰의 앳된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왜 웃으십니까! 전쟁이 애들 장난입니까? 예?”

“애들 장난이라…….”

키득. 키득. 여전히 웃음을 매달고 있던 장년의 기사, 헤르만이 로웰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휙 끌어당겼다.

그와 정확히 동시. 조금 전까지 로웰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로 커다란 장창 하나가 섬뜩한 파공음을 내며 지나갔다.

목덜미가 들린 채로 이를 보던 로웰이 황망하게 더듬거렸다.

“어어……!”

“이봐. 막내.”

“……가, 감사.”

감사를 표하려던 로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늘 유쾌한 빛을 담고 있던 헤르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은 채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 전쟁을 장난으로 보고 있는 건 너 하나다.”

“……!”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막내 기사의 목덜미를 잡고 훈계하는 와중에도 결코 한눈팔지 않는 검은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꽂힌다.

“제 위치를 지키는 거지.”

“저도 알고 있…….”

“네가 맡은 곳이 무너져 전우가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네 몸을 파고든 검날의 끝이 동료의 뱃가죽을 가를 수도 있고. 네가 이 후방에서 제대로 버티지 못하면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실 주군의 후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

“알고 있다고? 자리 하나 무너지는 게 이 전장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너 이따위로는 못 해.”

“…….”

“주제넘게 다른 이들을 바라보지 마라. 넌 그럴 깜냥도 안 되니까.”

“……예.”

순순한 대답에 헤르만이 로웰의 목덜미를 던지듯 툭 놓았다.

“그리고. 포위?”

이내 검을 들어 사방을 가리킨다.

“봐라. 발 들인 순간부터 사방에 적 아닌 곳이 없다. 그리고 우리의 전장은 매번 이딴 식이었지.”

“……매번.”

“그래. 매번. 고작 이깟 걸 가지고 포위니 뭐니 벌벌 떨 거면 그 검 반납하고 꺼져. 퇴로는 내가 뚫어줄 테니까.”

조금 전까지는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떨리던 로웰의 눈이 검을 반납하고 꺼지라는 말에는 화르르 타올랐다.

“안 갑니다! 아무 데도!”

“왜. 이쯤에서 꺼져주는 게 동료 몇 살리는 길일 것 같은데.”

“누가 처음부터 잘한답니까? 우리 아가씨께서 그러셨습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천재들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뭐지. 아가씨께서 본인 소개를 하신 건가.”

“저도 부족함 없는 기사가 될 겁니다! 언젠가는 주군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검을 휘두를!”

그 말에 단장 에딘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오. 내 자리를 뺏어보겠다?”

“기사라면 마땅히 노려봐야지요!”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짝 내리친 로웰이 크게 심호흡했다.

“죄송했습니다, 선배님들! 제대로 하겠습니다!”

또렷해진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헤르만이 씨익 웃고는 등을 돌렸다.

그래. 이거면 됐다.

모두가 본인 몫만 제대로 한다면, 아르티나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니까.

“막내. 내 등을 맡긴다.”

“예! 따라가겠습니다!”

크게 불어넣는 기합.

먼 전방에서도 기사들의 기척 하나 놓치지 않고 살피던 휴고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자리했다.

***

달리면서 휴고의 표정을 흘끗 바라본 엘리시아가 옅게 웃었다.

“뿌듯해 보이네.”

“제법 만족스러워.”

“기사들이 강해지는 게?”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 기사들이 강해지는 게.”

촤악. 검을 휘둘러 마족 두엇을 한 번에 베어버린 휴고가 엘리시아를 감싸 쏟아지는 피를 자신의 등으로 모두 받아냈다.

“아르칸의 아르티나에는 나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이들이 아닌 어린 기사들이 주축이 될 테니까.”

“가령 새로 들어온 로웰 같은?”

“……뭐. 그놈도 잘 키우면 쓸 만하겠더군.”

“당신 입에서 그 정도 평가라니. 드문데?”

그렇게 길을 뚫으며 달리던 와중.

엘리시아가 잠시 멈춰 왼쪽 사선 방향을 똑바로 응시했다.

“휴고.”

“미안. 피 튀었어?”

“이쯤이야 우리가 베르타샨에서 뒤집어썼던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보다 저기.”

엘리시아가 저 멀리 항구 인근의 천막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있는 게 이 일대 대가리인 것 같은데.”

“대가리…….”

“응. 대가리.”

“가서 베어올까?”

“아니, 잠깐. 기다려.”

“왜?”

엘리시아의 물빛 눈이 가늘어졌다.

전략에 밝은 눈이 상대 군사(軍師)의 의도를 읽어내고자 쉴 틈 없이 반짝인다.

“엘. 그냥 가서 다 부수면 안 돼?”

“스읍.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어.”

“예에, 마님.”

그렇게 엘리시아가 적장을 둘러싼 진을 파악하는 동안, 휴고가 뚫어둔 길을 따라 아르티나 기사단이 하나둘씩 따라붙었다.

“주군. 왜 여기 서 계십니까? 혹시 신입들에게 적장 모가지 딸 기회를 주시려고요?”

그 말에 로웰이 허리를 곧게 세웠으나, 일별한 휴고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직 턱도 없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라도 베어 올까요?”

“지장의 조언을 듣지 않는 무장은 단명하는 법이지. 마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도록.”

“예, 주군!”

그렇게 엘리시아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은 채로 주변에 몰려오는 마족들을 군말 없이 베어내기를 몇 분.

엘리시아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머리 좀 쓰는데.”

“왜. 뭐가 있어?”

“제법 대단한 게 있지. 저거, 팔괘진이야.”

그 말에 기사들의 얼굴이 일제히 옆으로 기울었다.

팔괘진 그거 먹는 건가요, 하는 눈빛.

한숨 쉰 엘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 돌대가리들아. 그냥 시키는 대로 가서 치기나 해.”

그러자 아카데미 강아지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세간의 속담을 몸소 이행하는 휴고가 알은체를 했다.

“팔괘진이라…… 여덟 개의 문을 만들어 적을 끌어들이는 진이지. 어디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생과 사가 갈린다고 하던데.”

“그나마 말이 통하는 건 역시 내 부군밖에 없네.”

“크흠. 이 정도야. 제국 제일의 지략가를 부인으로 두면 당연히 알게 되는 것을.”

전쟁터 한가운데서도 떠는 아양에 엘리시아가 픽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여덟 개의 문 중에 생(生), 경(景), 개(開)로 들어가면 살고, 상(傷), 경(驚), 휴(休)로 들어가면 다치며, 두(杜), 사(死)로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무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알려진 몇 안 되는 진이야.”

그러자 기다시피 꾸역꾸역 뒤를 따라온 신입 기사 로웰이 더듬더듬 물었다.

“그, 그러면 어떡합니까? 어떤 것이 두(杜)문과 사(死)문인지 알 방도가 없어 보이는데.”

“본래는 확률 싸움이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예?”

“내가 제국 제일의 지장(智將)이라는 칭호를 거저 얻은 건 아니니까.”

가는 팔이 천천히 올라간다.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다.

“저쪽이 생(生).”

수 싸움에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지략가가 오연히 명했다.

“뚫어.”

***

앞을 돌파해 적장의 목을 베는 휴고의 무력과 그 과정에서 절대 불필요한 전사자를 내지 않는 엘리시아의 지략.

휴고와 엘리시아가 함께 이끌었던 군이 늘 가장 적은 사상자를 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르르 생(生)문으로 달려가 냅다 부숴버리는 기사들의 무위에, 킬킬 웃고 있던 마족들은 하나같이 혼비백산했다.

분명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왜 물건이 날아가고 땅이 패어. 저게 검이야, 도끼야?

이곳을 점거한 악마가 질겁하여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어떻게 이곳이 생(生)문인 줄 알고 죄다 이리로 몰려왔단 말이냐!”

이명, 변용(變容)의 대가.

제57악마, 오세(Ose).

집채만 한 표범 위에 올라탄 구릿빛 악마의 권능은 인간을 가축 등의 동물로 변신시키는 것.

한때는 인간이었을 표범이 악마의 몸 위에 깔린 채 안쓰러운 신음을 내고 있었으나, 오세는 표범의 귀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길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 저것들이 마왕께서 친히 알려주신 팔괘진의 파훼법을 알고 있다니!”

그러자 그 옆에 부복하고 있던 참모 겸 군사가 침착하게 간언했다.

“진정하십시오. 운 좋게 생문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저희의 수가 저것들의 열 배는 훌쩍 넘습니다.”

“열 배고 백 배고! 저기 그 망나니 휴고 아르티나가 있단 말이다! 악마 모가지 따는 게 취미요 특기라서 저자의 저택 선반에는 악마들의 머리가 줄줄이 전시되어 있다고! 저자는 사탄이야! 사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던 엘리시아가 킥킥 웃었다.

“그렇다는데, 휴고.”

“내 집에 나도 모르는 악마들의 머리가 줄줄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에서 놀라야 할지, 아니면 악마에게 사탄 소리를 들었다는 것에서 놀라야 할지…….”

마치 사냥감을 몰듯 천천히 다가오는 휴고를 피해 뒷걸음질 치던 악마가 쥐고 있던 지팡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동시에 엘리시아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저건 좀 곤란한데.”

이미 뿌연 연기가 일대를 휘감은 것을 보니 이제 와서 저 권능의 행사를 멈추기엔 늦었다.

하여 슬쩍 뒤를 돌아본 엘리시아가 기사들에게 경고했다.

“정신들 똑바로 차려라. 돼지로 변해서 돌아가면 우리 아가가 좋다고 구워 먹을 테니.”

“……!”

심히 있을 법한 일이다.

악마의 권능에 당해 동물로 변한 기사들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불판 대령하라고 명하실 분이 바로 우리 아가씨 아니시던가.

기사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기실 이곳에 악마의 권능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기사들은 많지 않으니, 대다수 기사들의 운명은 불판 위 바비큐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내 마지막이 바비큐 엔딩이라니……!”

“으아악! 단장! 돼지로 변한 제 목에 꼭 이름표 달아주셔야 합니다!”

왁자한 비명과 함께 일대가 온통 권능에 잠기고.

악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크륵크륵 웃었다.

아르티나 일가와 눈에 띄었던 몇몇 기사들 정도면 몰라도 대부분의 평기사들이 자신의 권능을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인간과 악마는 지닌 격 자체가 다르니까.

어쨌든 이렇게 되면 휴고 아르티나 정도만 피해서 후퇴하면 되니, 자신의 생존 확률은 높아질 터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악마가 휘하의 마족들에게 명했다.

“자. 연기가 걷히면 일제히 달려들어라. 필시 대부분이 가축으로 변해 있을 테니, 남은 것들만 처리하면…….”

- 휘이이이이잉.

공교롭게도 마침 바람이 불어와 흐릿한 연기를 걷어냈다.

“…….”

이상하다.

분명 네 발로 기고 있어야 할 이들이 아직도 두 발로 꼿꼿하게 서 있다.

“남은 것들만 처리하면 되는데…….”

악마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남은 것들이 왜 이렇게 많아?”

마왕님. 마왕님.

저 엿 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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