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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27화 (227/323)

##  227화: 제대로 된 사령관이 없어!

오랜 시간 끝에 겨우 진정한 칼라일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종장이 눈치 빠르게 진한 브랜디 한 잔을 내밀었다.

입에 탁 털어 넣자 속이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독주이면서도 삼키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이, 딱 아르티나 가문을 닮았다.

“후우…….”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영지민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영주는 이에 대한 대가로 그들의 생명, 신체, 재산, 자유를 두루 보호함이 마땅하니.

물론 그 기본적인 의무조차 지키지 않는 영주들이 태반이었으나, 아르티나만큼은 아니었다.

‘그 녀석들이 영지와 영지민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눈이 있으면 모를 수가 없지.’

흉년에도, 내리쬐는 여름의 막바지에도, 혹은 혹독한 겨울의 끝에도.

아르티나는 시도 때도 없이 영지민들의 세금을 면해주고 본인들이 그 몫을 고스란히 감내하곤 했으니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영지민들이 말 그대로 대학살을 당했다?

무력이라고는 밤톨만큼도 없는 그 선량한 양민들이?

그 아르티나가 이 사태를 팔짱 끼고 관망만 할 리가 없다.

“다시는 엄두도 못 내도록 제대로 본보기를 보이고 오겠지.”

그렇지. 공작과 공작부인, 공자와 공녀라면…….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본보기가 다 뭐야. 오히려 자기들이 영지를 뒤집어엎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단 한 놈도 정상인이 없는 일가이니, ‘점령한 마족들을 때려잡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마족들이 점령한 영지를 파괴하자’에 이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쯧쯧. 왜 하필 아르티나의 영지에 쳐들어가서는.”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우리 제국에 영주들이 탱자탱자 놀고 있는 만만한 영지가 한둘이 아닌데.

여러모로 속이 탄 황제가 잔에 담긴 얼음을 입안 가득 넣고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탁, 내려진 잔을 채우며 시종장이 넌지시 말했다.

“폐하. 공작만이라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됐다. 그게 어디 내 말을 들어 먹을 인간이더냐. 어디서 개가 짖나 보다 하고 귀나 파지 않으면 다행이지.”

놀라운 파악 능력! 정확히 맞춘 황제가 도수 높은 술 한 잔을 더 머금고 등받이에 기대 밖을 내다보았다.

저 아래. 사자 문양을 가슴팍에 단 황실 기사단이 이리저리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문득 황제는 생각했다.

만일 수도에 마족이 들이닥친다면, 황실은 아르티나가 그러했듯 1시간 이내에 완벽한 공세를 갖출 수 있을 것인가.

‘……어렵겠지.’

그러나 아르티나는 마치 아직도 전시(戰時)에 사는 것처럼 한순간에 무려 세 개의 군을 꾸려 출정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했다.

그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 전투가 얼마나 혹독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고, 가족을 잃었는지.

“오랜 평화에 모두가 잊고 있었던 것을…….”

적어도 그 시절 가장 앞서 달렸던, 가장 많은 것을 잃었던.

아르티나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열을 맞추어 말을 타던 기사들이 흘끔흘끔 단장 에딘에게 눈치를 주었다.

‘단장.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

‘이러다가 저희 모두 닭이 되게 생겼습니다.’

‘…….’

‘아가씨께서 닭으로 자라시는 것보다 저희가 닭이 되는 게 빠르겠다는 말입니다.’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에딘이 슬쩍 고개를 젓자 기사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줄을 잘못 섰다.’

‘여기로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다른 놈들 목젖을 후려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아가씨 따라갈걸.’

늘 충성심에 가득 차 있던 눈빛들이 지금만큼은 불경하기 그지없다.

그들이 짜게 식은 눈으로 찰싹 달라붙은 주군과 마님의 등을 바라봤다.

‘솔로 만세, 커플 지옥!’

‘뽀뽀 멈춰! 포옹 멈춰!’

그러나 본인들만의 세상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빠져버린 휴고와 엘리시아에게 그깟 기사들의 눈초리 따위가 느껴질 리 없었다.

마치 꿀통을 통째로 쏟아버린 것만 같은 대화가 연이어 들려왔다.

“여보. 말 타는 실력이 형편없어졌네요.”

“그대가 내게 그렇게 기대 있는데 손이 안 떨리고 배기겠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흔들리잖아요. 내가 격전지까지 당신을 타고 달릴까요? 응?”

“……볼에 뽀뽀 한번 해주면 얌전히 몰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머. 그게 필요한 거였으면 진작 말을 하지.”

쪽! 쪽!

새가 쪼듯 가벼운 입맞춤. 고삐를 쥔 휴고의 손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겨우 중심을 잡은 휴고가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더.”

“기사들이 보잖아요. 채신머리없게.”

“보긴 누가 봐.”

휴고가 으르렁대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만 어린 눈으로 주군 내외를 바라보던 기사들이 일제히 시선을 내렸다.

“아무도 안 보고 있잖아.”

예, 아무도 안 보고 있습니다, 주군.

지금 눈 마주치면 연무장에서 돌 굴리듯 굴리실 거잖아요.

“얼른. 한 번 더. 응?”

“아이, 참.”

쪽! 쪽!

기사들의 시선이 이제는 아예 땅을 뚫고 내려갈 듯 아래로 향했다.

‘……하.’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을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같은 실수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1차 인마전쟁 당시에도 시도 때도 없는 둘의 애정 표현 때문에 고통받았었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또 쫄래쫄래 저 두 분을 따라오다니!

누군가 물기 어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작은 도련님하고 아가씨 뵙고 싶다.”

“……동감.”

쪽! 쪼옥!

“아 제발 살려줘.”

“우리도 앞 좀 보고 갑시다, 예?”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이 제국 최고의 무장과 지장이 알콩달콩 나누는 대화와 입맞춤 소리를 배경으로, 군(軍)은 최고 속력으로 안할트(Anhalt)를 향해 나아갔다.

***

그리고 놀랍게도, 세드릭과 엔리르의 군에 배속된 기사들 역시 정확히 같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늘 호쾌한 웃음이 가득하던 드웬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섰다.’

‘여기로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기사들의 눈이 모두 같은 의미를 담고 허공에서 마주쳤다.

‘누가 좀 말려봐.’

‘그냥 저 털 뭉치 버리고 가면 안 돼?’

‘아니, 차라리 둘 다 파묻자.’

‘그래도 하나는 도련님인데?’

‘알 게 뭐야. 증거 인멸.’

‘그거 찬성이다. 우리끼리 다녀오는 게 두 배는 빠르겠어.’

따르는 기사들의 눈빛이 흉흉해지고 있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이 군의 사령관인 세드릭과 그 머리 위의 장식품인 엔리르는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는 중이었다.

“내 머리에서 내려와라, 빌어먹을 털 뭉치.”

“싫어, 형아.”

“넌 손이 없어, 날개가 없어! 혼자 날든지 걷든지 말을 타든지 해!”

“안 돼. 나는 커다란 전공을 세울 거라서 힘을 아껴둬야 해.”

“여우 따위가 전공은 무슨. 넌 그거 세워도 어디 써먹지도 못해!”

“누나한테 자랑하면 누나가 칭찬해 줘.”

“……!”

“세상에, 기특하다, 하면서 궁둥이 팡팡.”

“…….”

세드릭이 머리 위에 올라앉은 엔리르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 숲 방향으로 휙 던져버렸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쌔애앵 날아가던 엔리르가 날개를 펼쳐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파닥파닥 돌아와 다시 세드릭의 머리에 찰딱 달라붙었다.

“나 왜 던져!”

“전공은 내 거야. 이브의 궁둥이 팡팡도 내 거다.”

“헹.”

콧김을 푸륵 뿜으며 비웃은 엔리르가 놀리기라도 하듯 말랑한 앞발로 세드릭의 머리칼을 고삐처럼 콱 쥐었다.

“달려라, 황금 머리통. 이랴 이랴.”

“너, 이 개자식이 진짜……!”

“난 용자식이야. 그리고 제대로 안 달리면 머리에 불 뿜을 거야. 대머리 공자가 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게으르게 달려 봐.”

“……너야말로 이번 여정 중에 털 다 뽑아서 구워 먹는다. 반드시 구워 먹는다.”

“야만적인 형아.”

“무능력한 용.”

“대머리 형아.”

“비상식량 용.”

“누나한테 다 이를 거야.”

“일러라 일러라 일름보.”

따르던 기사들이 이마를 짚었다.

우리가 모시고 출정하는 분이 공자님과 용이 맞는가.

아무리 봐도 철 안 든 어린이 둘인데.

누군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주군하고 마님하고 아가씨 뵙고 싶다.”

“……동감.”

이 제국 또래들의 선망 대상이라는 공자와 세계 유일하게 남았다는 용의 유치한 대화 소리를 배경으로, 군은 삐걱삐걱 부르고뉴(Bourgone)에 다다르고 있었다.

***

이곳, 로트링겐(Lothringen)으로 향하는 산 중턱.

다른 기사들의 목젖을 후려패고 끝내 이벨리아의 부대에 배속된 알렉과 헤롤드 역시 서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분위기 왜 이러냐.’

‘난들 알아?’

‘악마랑 아가씨가 뭔가 미묘하게 이상한데.’

‘싸우셨나?’

‘저 둘 사이에 싸움? 그게 성립이나 할 것 같냐?’

‘하긴. 우리 아가씨 눈꼬리만 한번 내려가도 저 악마가 벌벌 떨면서 싹싹 빌 텐데.’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두 사령관의 등을 향했다.

……그럼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외유를 나갈 때면 늘 같은 말을 타던 둘이 오늘만큼은 서로 다른 말 위에 올라 있는 것부터 이상하긴 했다.

아마 우리 아가씨께서도 이제 성인이 되셨으니 사내와 딱 달라붙어 말을 타는 것이 남사스러우셨나 보다 싶었건만.

이상한 점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아가씨 귀가 빨개.’

‘저 악마 자식도 그런데.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지?’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설마.’

‘둘 사이에 사심이 있는 건…….’

지금껏 작게 속삭이던 헤롤드가 그 말에는 버럭 소리쳤다.

“에이, 퉤퉤퉤! 어디 그런 망발을 해!”

“쉬잇. 좀 닥쳐봐.”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 알렉이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가씨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셨고, 그럼 마땅히 곁을 내어줄 누군가를 찾으실 테고, 그게 저 악마가 될 수도 있지……는 개뿔 저 악마 새끼 척살하자.’

‘죽여.’

‘족쳐.’

기사들의 눈이 생선을 앞에 둔 곰처럼 번뜩번뜩 빛나자, 그나마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카론이 손을 뻗어 알렉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다들 잠시 진정 좀 하십시오.’

‘진정? 우리 아가씨 귀가 빨개진 걸 보고도 진저어어엉?’

‘우리 아가씨도 눈이 달려 계십니다. 어디 저깟 악마에게 귀를 붉히시겠습니까. 날이 제법 따뜻해졌으니 조금 더우신 거겠지요.’

‘……그래?’

‘제가 아가씨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호위 기사 아닙니까. 확실합니다.’

근데 카론 경, 그런 거 치고는…….

‘왜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표창이랑 단도를 잔뜩 끼고 있어……?’

‘……크흠.’

재잘재잘. 평소 같으면 기사들의 이런 불경한 속삭임을 내버려 둘 이벨리아와 아가레스가 아니었으나, 안타깝게도 둘은 지금 뒤의 상황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출발 직후부터 흘끗흘끗 눈치를 보던 아가레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이브. 그…….”

“응?”

“어땠어?”

“뭐가?”

“황태자.”

그 말에 잠시 멈칫한 이벨리아가 누가 봐도 수상하게 되물었다.

“무, 뭐어어? 황태자 왜애애?”

“…….”

이벨리아학 개론에 있어서는 박사 학위를 따고도 남을 아가레스가 이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악마의 깊은 내부 어딘가가 선득하게 가라앉았다. 새싹이 움트는 초봄의 날씨가 삽시간에 황량하게만 느껴졌다.

그가 애써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마치 그렇게 크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하니 물어본다는 어조로.

“황태자와의 데이트. 어땠는지 궁금해서.”

“그, 그냥 그랬지 뭐.”

묘하게 흐리는 대답.

아가레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짙게 붉어진 귀와 볼이 금빛 눈에 시리게 박혀 든다.

“…….”

그 어떤 무기보다도 아프게.

그 어떤 말보다도 차갑게.

악마의 심장이 한순간 저 지옥 밑바닥까지 쿵 떨어져 내렸다.

주체할 수 없이 튀어나온 질문은 스스로가 듣기에도 영 멋이 없는 것이었다.

“이브. 혹시 그 자식…… 좋아해?”

아니. 아니다. 괜히 물었다.

네 입에서 그렇다는 답이 나오면 나는.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도…….

차라리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여 만류하려고 했으나, 이벨리아의 입이 열리는 것이 더 빨랐다.

“아니!”

아주 간결한 답.

고작 그 두 음절이 아가레스의 기분을 다시 천국까지 끌어올렸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단서가 조금 언짢기는 하나 그래도 이 정도면 천만다행이다.

누군가는 그깟 솜털을 상대로 경쟁심을 느끼냐며 손가락질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벨리아의 발을 스치고 지나가는 풀잎 한 조각에도 질투가 이는 것을.

오로지 너만이 나를 하늘 위로 끌어올리고 또 진창 밑바닥으로 처박는다.

오롯하게 너만이.

아가레스가 말머리를 이벨리아 쪽으로 가깝게 붙였다.

지난 데이트가 생각나 괜히 쑥스러운 이벨리아가 조금 떨어졌으나, 다시 능청스럽게 붙어온다.

“이브. 우리 가문 문장(紋章) 말이야.”

“으응.”

“그거 정할 때가 됐는데.”

“그러고 보니까 아직도 없네? 뭐로 할 거야? 그래도 후작가 정도 되면 좀 멋들어진 거로 해야 할 텐데.”

“황금색 병아리는 어때.”

“……깃발에 똥색 병아리를 대문짝만 하게 그리고 다니겠다고?”

“똥색이라니. 태양빛이지. 게다가 널 닮았잖아. 가장 예쁜 문장일 것 같은데.”

그 여우 같은 말에 이벨리아의 귓가가 조금 더 붉어졌다.

그리고.

마치 구름 위를 걷듯 위태위태해 보이기도 하고, 살랑이는 꽃잎 위에 올라탄 듯 휘청이기도 하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사들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하고 마님하고 작은 도련님 뵙고 싶다.”

“……동감.”

목덜미까지 발개진 채로 앞만 바라보는 소녀와 그 소녀에게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는 사내.

그 울렁울렁 폭닥폭닥한 분위기를 타고, 이벨리아의 군(軍)은 순조롭게 로트링겐(Lothringen)으로 향했다.

***

가장 먼저 격전지에 도착한 것은 휴고와 엘리시아였다.

아름다운 바다와 왕성한 교역으로 이름 높은 항구도시, 안할트(Anhalt).

그러나 이제 과거의 융성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물결 위를 넘실거리며 타국으로 향하던 배들은 모두 반파되어 있었고, 거래하는 상인들로 가득했을 항구 주변은 나무판자와 천막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필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힘없는 이들의 것이었을 터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보이는 것은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억울함과 두려움, 고통으로 죽는 그 순간까지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한 이들이 시퍼런 눈으로 휴고와 엘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해달라고. 살려달라고. 갚아달라고. 그리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

“…….”

허리 숙여 여인의 눈을 감겨준 엘리시아가 검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희고 가는 손에 핏줄이 도드라지게 올라왔다.

1차 인마전쟁 이후 세 아이가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나, 전쟁을 겪은 이들은 아주 단순한 계기 하나에 곧바로 그 시절로 돌아간다.

전쟁의 일선에 섰던 엘리시아의 정신에, 손에, 다리에, 모든 육체에 끔찍하리만치 새겨진 기억. 그때의 참상이 다시금 눈앞에 일렁였다.

“휴고.”

하여 부르는 호칭도 과거 그날과 같았다.

“내가 할까?”

나란히 검을 휘두르던 그때와 같은 짧은 물음.

“함께 하지.”

그리고 그때와 같은 간결한 답.

엘리시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용이 새겨진 날카로운 검날이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칼끝이 악마가 내건 깃발을 향했다.

“가자.”

공작과 공작부인이란 허울은 평화로운 땅에서나 의미 있는 것.

오롯이 전우로 다시금 나란히 선 두 장군이 동시에 앞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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