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공녀가 탐이 나는구나
제4악마, 가마긴(Gamygin).
이명, 혼주(魂主).
흔히 혼과 백의 영도자라고도 칭해지며, 죽은 이의 넋을 불러내는 강령에 그 권능이 닿은 자.
가마긴의 심기를 거스르면 사후에도 평안한 안식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은 악마들뿐만 아니라 인간계에도 잘 알려진 속설이다.
그런 잔학한 위명에도 불구하고, 그를 소환하는 것은 고대로부터 적지 않은 인간들의 꿈이자 목표였다.
죽은 이의 망령이나마 다시 만나게 할 수 있는 이는 세상천지 이 악마밖에 없었기에.
죽은 가족을. 죽은 연인을. 수수께끼 같은 말을 늘어놓고 죽어버린 현자를. 불확실한 보물 지도를 남겨놓고 요절한 왕을…….
인간의 욕망은 수천 갈래였고, 강령과 사령에 특화된 가마긴의 능력은 이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 유일무이한 권능과 위세, 마계 내에서 인정받은 서열, 게다가 마왕의 굳건한 총애까지.
하늘 아래 무서울 것 없어야 마땅할 가마긴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바닥에 이마를 대고 굴종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왕이시여. 감히 죄를 아뢰옵고 벌을 청하나이다.”
얼마나 세게 짓찧었는지 회색 대리석 바닥에는 옅게 팬 자국과 함께 끈적한 피가 주변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
왕께서는 아무런 답도 없다. 하여 가마긴이 한 번 더 이마를 찧으려던 찰나.
사락.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든 장포가 의자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가 흡사 이를 드러내고 목덜미 주변을 도는 짐승의 숨결처럼 들린다.
가마긴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으로 형편없이 갈라진 목 안쪽이 타는 듯 아려왔으나, 감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왕의 처분만을 기다릴 뿐.
엎드린 가마긴의 시야에 금사가 화려하게 수놓아진 옷자락이 슬쩍 보였다.
그가 다시 한번 머리를 찧고자 고개를 조금 위로 들었다가 쿵 내렸다.
그런데,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
번쩍 눈을 뜬 가마긴이 자신의 이마와 바닥 사이에 놓인 것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듯 소스라쳤다.
“……와, 와, 왕이시여! 어찌!”
황송하다는 듯 소리친 가마긴이 소매로 왕의 신발을 닦았다.
무려 4위의 악마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태도.
내려다보던 마왕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다 좋은데 그 태도가 문제다. 고개 들거라.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는 줄 알겠구나.”
그 말에 가마긴이 천천히 고개만 들었다. 몸은 엎드린 그대로였다.
마치 명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그 어느 사소한 것 하나라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방증하는 듯했다.
그러자 옅은 웃음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 속에 흡족함이 담긴 것으로 보아, 바짝 몸을 낮추는 가마긴의 선택은 옳았던 모양이다.
“이런, 이런. 고지식하기는. 예가 너무 과해도 좋지 않은 법이다.”
“자중하겠습니다, 왕이시여.”
“옳지. 몸을 바로 세우고.”
그제야 가마긴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래. 한결 낫구나.”
마계의 왕. 구옥(九獄)의 주인, 게티아의 기둥…… 그 장엄한 수식어들을 가진 바알이 나른한 발걸음으로 다시 왕좌에 걸터앉았다.
감히 왕의 걸음을 낭비하게 한 죄를 스스로 용서하기 어려웠던 가마긴은 무릎걸음으로 왕좌 앞 계단 아래까지 기어갔다.
어느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복종과 숭배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모두가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바로 눈앞의 이 악마가 왕에게 보이는 것이라고.
“가마긴.”
“예. 왕이시여.”
“왜 연구에 성과가 없을까.”
“다 제 불민함 탓입니다. 밧사고에게 온전히 맡겨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니지. 아니지. 그게 왜 네 잘못이 되느냐.”
왕이 느리게 손을 뻗자, 가마긴이 네발로 기어 단상 위로 올라 조아렸다.
그러자 바알이 마치 말 잘 듣는 사냥개를 대하듯 가마긴의 머리를 무심하게 쓰다듬었다.
그저 황공하여 가마긴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밧사고의 일 처리가 유연하기는 해도 잔 실수가 있는 편이었지.”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탓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으면 부족한 것도 있기 마련이니.”
“실로 자애로우십니다.”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주인의 역할이건만…… 내가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죽어 나자빠져 돌아올 줄이야…… 참으로 애석해.”
“왕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방심한 결과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매정하구나.”
“…….”
“……흐음.”
금방이라도 녹을 것처럼 흐린 비음이 흘렀다.
카라락. 카라락.
손톱으로 의자 팔걸이의 장식을 긁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이내 바알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런데 말이다, 가마긴.”
“예, 왕이시여.”
“밧사고를 도와 내 마력을 담는 연구를 하던 이들의 수가 몇이나 되느냐?”
“일백에 이릅니다.”
“그들은 그 외에 무엇을 잘하지?”
“그들은 연구를 목적으로 키워진 마족들이며, 연구를 목적으로 잡아 온 인간들입니다. 하여 그 외에 달리 잘하는 것은 없습니다.”
“쯧쯧, 유일한 장기가 영 쓸만하지 않아서야.”
진정으로 애석함을 느끼는 듯한 목소리. 그러나 그 눈을 마주한 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지금 왕은 안타까움이 아니라……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 딱.
바알이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짧고 굵은 마찰 소리를 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그 사이로…….
“으읍! 으으읍!”
“우욱! 커헉!”
일단의 마족들과 인간들이 머리에 검은 천을 뒤집어쓴 채로 줄줄이 끌려 들어온다.
가마긴이 말한 대로 어림잡아 백여 명에 이르는 수. 일렬로 무릎을 꿇리니 이 넓은 대전(大殿)의 가로가 빈틈없이 찬다.
꿇어앉은 이들 하나하나의 뒤에 마왕의 직속 호위들이 한 명씩 자리했다.
까닥.
왕의 턱짓 한 번에 죄인들의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이 일제히 위로 들렸다.
“허억!”
“억.”
부족했던 호흡을 갈급히 탐하는 것도 잠시.
마왕의 얼굴을 본 죄인들의 낯이 삽시간에 희게 질렸다.
곧 죽어가는 벌레처럼 벌벌 떨던 이들이 냅다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와, 와, 왕이시여! 거, 거의 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거의 다!”
“부, 부디 이레만 시간을 더……!”
“반드시,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반드시!”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두려움을 참지 못한 인간 하나가 실금한 모양이다.
“……흐음.”
바알이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느리게 의자를 쓸었다.
카락. 카라락.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음각된 각종 생물이 날카로운 손톱 아래 마구잡이로 굴려진다.
그러자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끌려온 이들이 하나같이 안쓰럽게 흐느끼며 두 손을 비비고 머리를 바닥에 짓찧었다.
“제, 제발.”
“자비를…… 자비를…….”
“왕이시여, 부디 용서를…….”
웅성대는 그 소리에 왼쪽 눈을 살짝 찌푸린 바알이 관자놀이에 검지와 중지를 가져다 대고 나머지 한 손을 슬쩍 들었다.
그 작은 몸짓에, 거대하던 공동에는 금세 쥐죽은 듯한 고요가 들어찬다.
“…….”
“…….”
톡. 톡.
고민하는 듯 팔걸이를 치는 손짓.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흡사 우레처럼 크게 들린다.
마침내. 피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좋아.”
긍정의 말. 끌려온 이들 모두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식은땀이 뚝뚝 볼을 타고 바닥으로 흘렀으나, 그 누구도 감히 닦을 엄두를 내진 못했다.
“그래. 그래. 그럴 수 있지. 조금 늦어질 수 있어.”
누군가는 마왕을 두고 세상 둘도 없는 폭군이라 평했고, 또 어느 일각에서는 그래도 제법 합리적인 군주라고 평했다.
이곳에 꿇어앉은 이들의 마음속 평가는 후자로 조금 기울었다.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해.”
마왕의 눈이 요요한 호선을 그렸다. 입술도 마주 따라 올라가는 것을 보니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로 보였다.
“화, 황공, 또 황공합니다, 왕이시여.”
고개를 조아리던 이들의 눈에 두려움이 살짝 가셨다. 이대로라면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그런데 말이다.”
“……?”
“너희들은 내게 죄를 지은 게 아니다. 그 연구에 들어간 막대한 자본은 마계의 것. 결실이 늦어짐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것 역시 마계이지.”
바알이 실로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애석하게도…… 내게 지은 죄는 내가 사할 수 있으나, 이 마계에 지은 죄는 한낱 왕인 내가 멋대로 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느냐.”
그, 그 말은……!
꿇어앉은 이들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으나…….
폭군의 선고는 가차 없다.
바알의 팔이 느리게 들렸다.
그리고 가리키는 것은 정확히 가운데에 있던 마족 하나.
“……!”
“저것의 왼쪽에 있는 것들은 모두 사지를 하나씩 뜯어내 케르베로스의 먹이로 주거라.”
“와, 왕이시여! 왕이시여!”
“사, 살려, 살려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제발!”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바알이 눈언저리를 미세하게 찌푸리자, 연구원들의 뒤에 선 친위대가 그들의 등과 목덜미를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폭력 앞에는 장사 없다.
고통스러움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그들은 소리치던 입을 다물고 그저 끅끅거리는 울음만 내뱉었다.
그들을 차갑게 일별한 가마긴이 마왕에게 되물었다.
“하나씩만 뜯어내면 될는지요, 왕이시여.”
“이런. 내 명이 애매했던 모양이구나.”
요사스러운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하나씩. 네 개를 모두 뜯어. 전부 먹이거라.”
“예, 왕이시여.”
“그 끝에도 살아 있다면…… 흐음, 그래…… 그러면 몸뚱이만은 살려주도록 할까.”
“존명.”
산 채로 사지가 뜯기는데 멀쩡히 살아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저건 사형선고다.
그것도 개의 먹이가 되는, 아주 비참하고 끔찍한.
왼편에 꿇어앉은 마족들과 인간들이 난생처음 하나의 소리를 냈다.
“사,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으아악! 죽기 싫어!”
다시금 이는 소란에 가마긴이 손을 까닥 움직였다.
감히 왕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고 버러지들을 치우라는 의미.
감정 없는 왕의 친위대가 깊게 고개 숙이고 명을 수행했다.
질질 끌려나간 연구 전담 마족들과 포로로 잡혀 왔던 인간들의 비명이 아스라하게 멀어졌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오른편의 마족들과 인간들은 숨소리 하나도 내뱉지 못하고 꺽꺽 막힌 울음을 내뱉었다.
미동 없이 축 늘어져 있던 마왕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사락. 비단 장포에 머리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그저 차분하고 고고하다.
“가마긴. 나는 생각보다 온화한 왕이 아니더냐.”
“무려 반을 살려두셨습니다. 이것이 자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나만 보면 저리 벌벌 떨어대는지 모르겠구나.”
“다들 감히 왕을 마주하기에는 심약하여 그렇습니다.”
“……불쾌한 기분이로구나.”
마왕이 생존자들을 향해 두어 번 손을 휘저었다. 나가라는 뜻.
재빨리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아린 그들은 끌려나간 이들의 핏자국을 따라 엉금엉금 기었다.
덜덜 떨리는 손과 다리가 수차례 무너졌지만, 아득바득 어떻게든 문가에 다다랐다.
이건…… 본보기였다.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지금 개의 먹이가 된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처형될 것이라는 본보기.
그 광경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왕이 가마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소지에 낀 날카로운 반지가 가마긴의 머리를 불편하게 짓눌렀지만, 그런 미약한 고통조차 기껍기만 하다는 듯 그는 그저 눈을 감고 손길을 받아냈다.
조금 뒤. 마왕의 손이 떨어지자 몸을 물린 가마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이시여.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사사로운 것까지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 얼마든 묻거라.”
“황공합니다. 혹여 이번에 아르티나의 영지에만 공격을 가하라 명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미천한 저로서는 감히 왕의 혜안을 따라잡기가 요원하여 여쭙나이다.”
“흐음. 그렇지. 무용한 것으로 비칠 법도 하지.”
바알이 천천히 턱을 쓸었다.
“영지 몇 개 빼앗아 봤자 달라질 게 뭐가 있겠나, 차라리 그 병력을 아꼈다가 곧 다가올 전쟁에 투입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의미겠지?”
“송구합니다, 왕이시여.”
마왕이 실로 화려한 옥좌에 눕듯 기댔다.
창밖에서 어렴풋한 비명이 들린다. 조금 전 끌고 나간 이들일 터다.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그 가련한 소리가 기껍다는 듯 마왕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알기 위해서란다. 가마긴.”
“…….”
“그들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얼마만큼의 손해를 감수하는지.”
“아르티나가 영지를 얼마나 아끼는지가 왕의 계획에 변수가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물론이야. 그들이 황제에게 허가를 받고 움직이는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지, 영지까지 당도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누가, 몇 명을 데리고 출정하는지…….”
잠시 말을 멈춘 바알이 이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 눈을 날카롭게 빛내면서.
“……영지가 위험해지면 그들이 수도를 비우면서까지 그 잘난 걸음을 옮기는지.”
“……!”
“그래. 그거란다. 빌어먹을 아르티나가 수도를 비워야 황가 놈들 모가지를 수월히 따지 않겠느냐. 또 그들이 갈가리 찢어지면 하나씩 처리하기도 쉬울 테니.”
“그렇다면 이번 건은…….”
“실험이지. 저들이 제대로 덫에 걸려드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가마긴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가 모시는 왕은 일신의 무위가 신에 가닿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떼는 데 있어서 경계와 주의를 아끼지 않는다.
이런 분을 감히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벅차오른 가마긴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해하였습니다, 왕이시여. 다만, 이 불민한 종이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 물으래도.”
“그…… 왜 한 곳은 연금술사들에게 점령을 허가해주셨습니까.”
그 말에 왕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입가에 새겨진 미소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눈에는 마치 악귀가 수천 마리 득실거리는 듯 살기가 아로새겨졌다.
“필요하다질 않느냐.”
“…….”
“우리 역시 그 한심한 종자들을 이용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넘겨줄 것은 적당히 넘겨주고 취해야 할 것을 제대로 취해야겠지.”
“하오나, 이상한 꿍꿍이가 있을까 하여…….”
“없을 리가. 신에 닿았다고 거들먹거리던 자들인 것을. 썩어도 준치라고, 그 오만함이 어디 갈 리가 없지.”
“그렇다면 제가 미리 가서 전부 없애…….”
“쉬이. 가마긴, 가마긴. 오늘따라 어리석게 구는구나.”
왕의 몸에 진득한 마기가 흘렀다.
아니, 이를 두고 흐른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다.
차원을 돌아다니며 포식한 덕에, 이젠 지배력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정체 모를 힘. 그것이 말 그대로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그들이 스스로를 신이라 일컫는다면…….”
카가각. 카각. 그가 손톱으로 팔걸이를 긁었다.
“나는 그 오만한 신을 지상에 처박아버릴 것이니.”
허언이 아니다.
지금, 그의 주군은 연금술사들은 물론이요, 그 동부의 지배자와 맞서더라도 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끓어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가마긴은 그저 깊이 부복했다.
이내 짓누르던 마기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이 흩어지고. 마왕이 평소와 다름없이 느린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아. 그런데 말이다, 가마긴.”
“예, 왕이시여.”
“가지고 싶은 전리품이 있는데.”
“무엇이든 하명만 하십시오.”
“공녀.”
“……혹시 아르티나의…….”
“응. 그 공녀.”
“산 것을 원하십니까, 죽은 것을 원하십니까.”
“산 것.”
“……그깟 것이 왜 탐이 나십니까.”
불이 튀는 듯한 수하의 눈빛에 마왕이 키득 웃었다.
“쯧쯧. 질투는 나쁘단다, 가마긴.”
“…….”
“쉽게 죽이기에는…… 아깝지 않으냐.”
전쟁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지.
상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유린하고 망가뜨리는 것이 묘미인 것을.
카가각. 카라라락.
팔걸이의 장식을 긁는 손길이 마치 욕망을 대변하듯 빨라졌다.
‘일단 데려와 보면 알겠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적당히 작은 동물을 관찰하는 마음으로 두고 보다가 없앨지.
아니면 수하들의 원한을 모두 물어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게 할지.
‘고민하는 것조차 즐거울 터.’
치솟는 가학심을 내리누르며, 바알이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