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가자, 대가리 깨러
루드비히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 입술이 짓눌려 진한 핏빛을 띠었다.
여지없었다.
정성껏 감춰뒀던 마음을 내뱉는 순간 네가 보인 표정.
그게 모든 것을 말해줬다.
내가 성급했다는 것.
나는 네게 벗 이상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관계의 발밑이 그대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만은 안 돼.’
섬찟함을 느낀 루드비히는 다급하게 조악한 안전장치를 곁들였다.
“부담 갖지 마.”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 이들이라면 숫제 붙이는 그 무용한 말.
그건 낭떠러지 바로 앞에 툭 튀어나온 작은 돌부리 같은 것이었다.
잠시. 아주 잠시 추락을 막아주는.
이를 지지대로 삼아 다시금 온전한 땅으로 올라올지, 아니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릴지는 두 사람 하기 나름일 터.
“그저…….”
이를 잘 알고 있는 루드비히가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울 것만 같은 눈으로.
“……전하고 싶었어.”
이토록 금방 후회할 것을 알았음에도.
그럼에도 내리누를 수가 없기에 비로소 사랑이라 부르고 연모라 칭하니.
***
‘부담을 어떻게 안 가져!’
이 망할 식량 도둑이!
어떻게든 다른 방면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영민한 두뇌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단 하나의 결론으로 화살표를 그려냈다.
이건 진심이라고. 눈 돌려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눈앞의 이 사내, 그러니까 소꿉친구이자, 식량 도둑이자, 은발의 강아지이자, 이 제국의 국본은…….
‘나를…….’
눈이 어질어질하다. 꾹 감았다가 뜨자, 금방이라도 으앙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홍안이 보인다.
루드비히로부터 저런 시선을 받아본 적 없음에도, 하고자 하는 말을 명약관화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눈빛이었다.
답하지 않아도 돼. 아니, 거절해도 좋아.
다만, 미워하지는 말아줘. 버리지는 말아줘. 이대로만 남아줘.
……그리 간청하는 시선.
이벨리아가 꼬였던 호흡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차라리 여우 같기나 할 것이지.’
평소에는 머리 잘만 굴리다가. 왜 이렇게 앞뒤 없이 굴고서는 울먹거려. 안쓰럽게.
“있잖아.”
운을 떼자, 여직 그렁그렁한 눈으로 루드비히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나는 아직…….”
“알아.”
“…….”
“아직, 아직 네가 마음을 정하기엔 이르다는 거…… 알아.”
아는데 눈빛이 왜 그래 이 자식아.
잘못한 것 없이 죄인이 된 기분으로, 이벨리아가 시선을 돌렸다.
“멋대로 가진 마음이야. 네가 책임져야 할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불편해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기껏 표현한 마음을 다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이벨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네 마음은 잘 받았어.”
그리고 잠시 침묵. 신중히 말을 고르고서는 이어나간다.
“소중하게 간직할게. 그런데, 지금은 이게 끝이야. 나는 아직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다 알지 못하고, 솔직히…… 특히 너와는 친구가 아닌 다른 관계가 된다는 걸 상상하기도 어려워.”
“…….”
“그러니까 네가 준 네 마음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지금처럼 끙끙 앓지 마. 앓고 고민하는 건 내 몫이니까.”
얼마나 귀한 마음을 얼마나 어렵게 준 건데. 그 책임까지 모조리 네게 지워버리면 불공평하지.
마음을 주고받는 그 순간에도 두 소꿉친구는 서로를 먼저 생각했다.
형태에 조금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그 깊이가 다른 것은 아니니까.
루드비히의 홍안이 친애해 마지않는 친우를 가득 담았다.
푸른 바다 빛 눈에 당황과 배려가 동시에 엿보인다.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이 와중에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 다정함에 또 천치처럼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래. 여러 개의 감정과 관계 중 하나가 순탄하게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모든 것들이 빛바래는 건 아니니까.”
“그럼! 우리 사이가 그렇게 허술하진 않지!”
“당연하지. 우리가 어떤 사인데.”
“식량 도둑과 식량 주인!”
“땅 도둑과 땅 주인이지.”
“소꿉친구기도 한 데다가.”
“전우기도 하고.”
“군신이기도 해.”
“……그건 빼. 네가 언제 날 군주 대접이나 했냐.”
받아들여지지 않은 고백의 끝에도 이리 웃음이 나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관계가 지금과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네가 준 확신 덕분이다.
어느덧 사위가 어두워졌다. 풀숲 속에서 동동 떠오르는 반딧불이 하나둘씩 선명해지고, 풀벌레들이 찌륵찌륵 부드럽게 울어댄다.
정자에서 일어선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돌아갈까?”
자연스럽게 마주 뻗어진 이벨리아의 손이 잠시 멈칫거렸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느리게 내려앉았다.
“……응.”
붉은 노을 진 선산을 뒤로하고 걷는 루드비히의 발걸음은 유례없이 가벼웠다.
아주 오랜 시간 담아두었던 묵직한 마음이, 마침내 있을 자리를 향해 날아갔으므로.
***
다음 날, 카시스 후작저에는 이른 아침부터 큰 소리가 울렸다.
“렐리안. 어디 가?”
“공작저!”
“너 또 아르칸 새끼 만나려고!”
“아냐, 오늘은 공녀님 뵈러 가는 거야!”
“가서 아르칸 새끼도 보고 올 거잖아!”
“내가 내 연인 보는데 뭐!”
억울하면 오라버니도 연인 만들든가.
아주 고아한 표정으로 혀를 베에 내민 렐리안이 후다닥 마차 안으로 피신했다.
뒤에서 저, 저,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귀여운 어쩌고저쩌고 한탄이 들려왔으나 깔끔히 무시한 채로. 지금 오라버니가 중요한 게 아니다.
‘공녀님께서 데이트를 모두 마치셨다니!’
괜히 자신의 심장까지 두근거린다.
‘벌써 공녀님께 고백한 눈치 없는 작자는 없을 테니, 짝을 찾으시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시겠지?’
세상에서 마법 공부가 가장 재밌었던 렐리안은 최근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마법 따위가 다 무슨 재미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남의 연애사다.
‘다들 공녀님 앞에서 집 잃은 강아지처럼 낑낑댔을 텐데.’
어디 내놓아도 꿇리지 않는 그 대단한 면면들이 귀엽게 살랑대며 꼬리 쳤을 이야기가 궁금해서 몸이 달았다.
마차에서 내린 렐리안은 재개 걸음을 놀렸다.
그렇게 꿀을 찾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응접실로 들어간 렐리안은.
“……이브?”
다크서클이 땅끝까지 내려앉은 좀비 하나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응접실 테이블에 엎드린 언데드가 느리게 손을 들어 미약하게 흔들었다.
“어어…… 왔어어…….”
답지 않게 평정을 잃은 렐리안이 호다닥 달려들었다.
“이브! 데이트 하고 오랬더니 전쟁을 치르고 온 것처럼 왜 이래요!”
“전쟁…… 하하, 전쟁이 따로 있나…… 이게 바로 전쟁이지.”
“대체 무슨 일이에요?”
“…….”
“……설마.”
“…….”
“어떤 눈치 없는 머저리가 첫 데이트에 냅다 고백을 갈기기라도 했나요?”
“…….”
“……맙소사.”
렐리안이 이마를 짚었다.
누구냐. 누가 이 사달을 내었어.
고백이란 것은 저마다 타이밍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서로 마음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첫 데이트에서 고백?
‘최악이지.’
쯧 혀를 찬 렐리안이 이벨리아를 영차 일으켰다.
“자. 자. 찬물 좀 드셔요.”
유리잔을 입가에 대주었으나 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으아! 이브! 정신 차려요!”
“꼬로록.”
“물! 물을 마셔야지! 물의 정령사가 컵에 코 박고 죽으면 어떡해요!”
“꼬록. 꼬록.”
아니. 글렀다.
렐리안이 유리잔을 치우려고 잠시 어깨를 놓자, 지지대를 잃은 이벨리아의 몸이 그대로 스르륵 기울더니 말랑한 볼이 테이블에 찰딱 달라붙는다. 다시 원위치.
“누군데요. 누가 우리 이브 넋을 이렇게 나가게 했어요?”
“……루드비히.”
“루드비히요? 그것참 개자식…… 헙!”
황태자의 본명이 익숙하지 않아 반사적으로 호응하던 렐리안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황태자 전하!”
“그냥 개자식이라고 해. 날 못 자게 만들었으니 그래도 싸.”
렐리안이 고개를 모로 돌려 이벨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떻게 대답하셨는지야…… 지금 반응 보면 충분히 알겠고. 잘 대답하시고 당당히 돌아오셔놓고 막상 침대에 누우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셔서 한숨도 못 주무셨군요.”
“……역시 마법사 족속들은 똑똑해.”
마치 심지가 다 된 양초처럼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 고개를 저은 렐리안이 시립한 하녀에게 쿠키를 가져오라 속삭였다. 정신이 번쩍 나게 단 것으로.
곧이어 하녀가 초콜릿이 뭉텅이로 박힌 커다란 쿠키를 건넸다. 렐리안은 이것을 또각 부숴 이벨리아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가볍게 데이트하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서 오실 줄 알았더니. 기초 단계를 뛰어넘고 심화 학습을 겪고 오셨네요.”
단 것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돌게 만든다. 입맛 다신 이벨리아가 스르르 일어나 나머지 쿠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단 황태자 전하의 고백은 차치하고. 이브 마음에는 누가 가장 기꺼웠나요?”
쿠키를 오물거리면서 첫 데이트부터 하나하나 복기하던 이벨리아의 얼굴이 어느 순간에 이르러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잔잔히 가라앉았다.
“그, 그, 글쎄에?”
“……상당히 수상쩍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 드릴게요.”
반응을 보니 마음 언저리에 발 걸친 이가 하나 정도는 있는 모양이다.
이럴 때는 급하게 몰아치는 것보다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브. 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이번 데이트는 말 그대로 첫걸음에 불과했으니까.”
“으응.”
“이브의 성년식 겸 데뷔탕트까지는 아직 석 달이 남았잖아요. 그때까지 조금 더 고민해봐요. 곱씹고, 잠 못 들고, 설레고. 그런 시간은 오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마치 친언니 같은 다정한 조언.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흡족하다는 듯 웃은 렐리안이 찻잔 아래 손을 받치고 우아하게 찻물을 들이켰다.
시선이 창문 바깥, 조그마하게 움을 튼 나무에 가닿았다.
곧 다가올 해사한 봄에 과연 누가 공녀님의 손을 잡게 될까.
‘루페르트 후작님이면 꽁꽁 얼렸다가 녹여드리고, 다른 이들이라면 꽝꽝 얼려서 북쪽에 처박아버려야지.’
진성 아가레스 파(派).
렐리안의 온화한 보랏빛 눈이 결의를 담고 빛났다.
***
렐리안이 시선 두었던 나무에 소담한 새싹이 모습을 드러낼 무렵.
아르티나 공작저에서 북쪽으로 약 이천 리 떨어진 변방에도 느린 걸음으로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명, 로트링겐(Lothringen).
과거 타 왕국에 소속되어 있던 영토이나, 에르카디아의 왕국 일통 이후 아르티나에 소속된 봉토(封土).
소박하고 평화로운 마을에는 아르티나 가문의 상징인 황금빛 용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성문이나 깃발 같은 대외적 상징에 그려진 것이 다가 아니었다.
가가호호 마치 수호 부적처럼 자그마한 용이 자리했고, 심지어 아이들이 뛰노는 뒷골목에도 고사리 손으로 그려둔 용들이 아기자기 불을 내뿜고 있었다.
워낙 공사다망하여 제대로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영주 일가였으나, 이곳 영주민 그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외려 마을을 일별하기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터였다. 아르티나 가문에 대한 이들의 경외가 얼마나 깊은지.
한가한 늦은 오후.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어린 아이들은 목검을 들고 골목을 뛰놀고 있던 무렵.
이 영지에서 소위 마당발로 이름 높은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늘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던 풍성한 턱수염이 제멋대로 뻗친 것을 보니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알 법했다.
“자네들! 자네들!”
“이 사람 참. 무슨 일인데 이리 체통도 없이.”
“허억, 주제에 체통은 허억, 무슨, 허억.”
“아 그리 뛰어왔으면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보게. 무슨 일인가?”
“아이고, 숨차. 아니, 그거 들었는가?”
“뜸 들이지 말고!”
“영주께서 글쎄, 이번 분기 세금을 면하라는 명을 내리셨다네!”
그 말에,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있던 이들까지 몸을 휙 돌리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뭐어?”
“그게 참말인가?”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내야 하는 세금 전부를 아르티나가 대신 감당해야 할 텐데……!”
“그러게 말일세. 자네 뭘 잘못 듣고 온 거 아닌가? 응?”
군중들의 의심 가득한 표정을 본 턱수염 사내가 버럭 외치며 가슴을 탕탕 쳤다.
“어허, 의심할 사람이 없어서 어디 나를 의심하는가! 우리 아들이 저기, 저곳에서 일하고 있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면서!”
턱수염 사내의 어깨가 뿌듯하게 펴졌다.
가리키는 곳은 명실상부 이 지역 가장 웅장한 용의 깃발을 내걸고 있는 곳.
바로 영주의 성.
비록 주인인 아르티나 일가는 부재하나, 영토 전반을 관리하는 관리(官吏)들은 있기 마련이다. 턱수염 사내의 아들은 바로 아르티나에 고용된 이였다.
이를 익히 알고 있는 영주민들의 입가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슬슬 길어지고, 끝내 환한 미소로 번졌다.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세금 걱정에 밤낮 잠을 못 이뤘는데!”
“나도 마찬가질세! 이번 겨울이 좀 혹독했어야지!”
“내 이럴 줄 알았네, 이럴 줄 알았어! 이 끔찍했던 겨울 끝에 세금을 걷으실 영주님이 아니시지!”
“하긴, 아르티나 가문은 워낙 돈이 많은 가문 아니던가!”
비쩍 마른 사내가 탁 손뼉을 치자, 옆에 걸터앉아 있던 이들이 즉각 눈을 부라렸다.
“어허, 큰일 날 소리를! 돈 많다고 다 이리 영주민을 생각해준다던가? 당장 옆 영지에서는 사람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도 속곳에 꿰매둔 동전 한 닢까지 떼어간 마당에?”
“그래, 이 사람아! 결국 아르티나 가문이 제국에 부담할 세금이 천정부지로 치솟게 될 것인데, 사람이 감사한 마음이라도 가져야지! 에잉, 나 참.”
그야말로 배려였고, 은혜였다.
아르티나가 영주로 있는 영토들은 다 비슷했다.
얼마나 많은 균열이 발발하든. 얼마나 혹독한 계절을 겪든. 그들은 늘 황금 용의 날개 아래에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난세라 한들 믿음은 확고했다. 영지가 위험에 처하면 영주 일가가 망설임 없이 구하러 올 것이라는 믿음.
그러니 영주와 그 가문에 대한 경외가 하늘보다 높이 솟고, 아이들이 여기저기 용의 문양을 새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또 한 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영지민 모두가 편안한 마음으로 모처럼의 풍족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평소 같으면 가장 평온했을 그 시간.
- 콰아아아앙!
난데없는 폭음이 귀를 찔렀다.
- 쿠르르르릉.
연이어 마치 천지가 울리는 듯한 굉음.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몸을 낮추었다.
“으아아아악!”
“아아악!”
“아가! 아가, 어서 이리 온! 어서!”
“으아아앙- 엄마아-!”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굉음이 몇 차례 더 지나가고.
곧이어 직전과 상반되게 마치 쥐 죽은 듯한 고요.
덜덜 떨던 이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느리게 바람에 쓸려나가자 보이는 것은…….
“영, 영주성이…….”
“영주성…….”
“내, 내 아들…… 아, 안 돼, 안 돼! 으아아아! 아아아악!”
반파된 영주성.
조금 전만 해도 한껏 뽐내던 턱수염 사내가 황망하게 네 다리로 아득바득 기어 영주성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채 몇 걸음 가기도 전.
- 키익.
- 그그극.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진하고 탁한 액체가 뚝, 뚝, 떨어진다.
사내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으…… 으어…….”
다행일까, 불행일까.
공포는 길지 않았다.
- 촤악.
단 일격.
단 일격에, 조금 전까지 그곳에 모여 내일을 걱정하고 영주의 덕망을 칭송하던 이들은 그대로 핏물로 화했다.
차라리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힘없는 양민임을 이유로, 채 자라지 못한 갓난아이임을 이유로 자비라도 구해보겠건만.
숨이 멎어가는 이들의 눈에, 담벼락에 그려진 작은 황금빛 용이 아리게 박혀들었다.
‘영주님…….’
‘제 아이라도…… 제발…….’
간절히 염원하던 눈빛들이 이내 공허하게 텅 비었다.
***
영지의 괴멸.
심지어 무려 세 곳.
사상자…… 불명(不明).
과거 베르타샨 이후로는 없었던 대학살이니만큼 소식은 빨랐다.
이곳. 아르티나 공작저.
보고를 들은 아르티나 일가로부터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부복하여 있던 기사들이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였다.
치솟는 분노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그때.
이벨리아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감히 우리 가문의 영지민을 건드려?”
이건 잠자는 용의 코털을 뽑은 수준이 아니라, 용의 대가리를 몽둥이로 후려갈긴 격이다.
“한 곳은 내가 갈게.”
“안 된다.”
“정정. 내가 아니라, 나랑 토끼가 갈게.”
“허가한다.”
……가만 보면 토끼를 가장 신뢰하는 건 아빠라니까.
고개 저은 이벨리아가 음산하게 손을 꺾었다.
“가자, 대가리 깨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