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그 비밀기지가 내 선물이었어
마치 태엽 빠진 인형처럼 손, 손, 손만을 외치는 루드비히.
‘얘가 왜 고장이 났지?’
커다란 눈을 슴벅이며 올려다보던 이벨리아가 손을 뻗어 루드비히의 머리에 얹었다.
“얌전히 손을 줬으니까 칭찬해달라는 의미인가?”
“……!”
그러자 그나마 엉거주춤 삐걱대기라도 했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오른손에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말랑한 감각. 머리 위에는 다정한 토닥임.
……심지어 그를 갉아먹을 것처럼 간지럽게 만드는 튤립 향.
이 모든 감각이 이리 예민하게 다가올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검술 수련을 게을리할 것을.
일순 눈앞이 일렁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안개가 사위를 뒤덮은 것처럼 시야가 흐린 와중.
그 사이 오로지 너만 다채로운 색을 뿜는다.
‘미치겠군.’
루드비히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시각이든 후각이든 뭐든 하나라도 차단할 요량으로.
그때였다.
친구의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하여 고개를 갸웃대던 이벨리아가 알았다는 듯이 끄덕였다.
“오구오구. 우리 루이 멍멍이 손도 참 잘 준다.”
“……?”
“쮸쮸쮸.”
“……내가 개냐.”
“스읍. 개라니. 어디 그런 망발을.”
“그래, 내가 이래 봬도 황태자…….”
“귀여운 강아지지. 오구오구.”
가늘고 긴 손이 이젠 턱밑까지 살살 긁는다.
‘완전히 반려견 취급이로군.’
더럽게 좋아.
아니, 이게 아니지.
“……얼른 가기나 하자.”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작은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빼고는.
- 덥석.
역으로 이벨리아의 손을 잡아챘다.
한 손에 가득 잠긴 가늘고 여린 손.
잘못 힘을 줬다가는 삽시간에 부러질 것만 같아, 그는 평소 유리잔을 쥐는 정도의 힘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안하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아프진 않지?”
“뭐가?”
“손.”
“설마 네가 잡아서?”
이벨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날 뭐로 보고. 나도 나름대로 검술 수련을 한 몸이란 말이지. 네가 아무리 힘을 꽉 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말씀!”
“그래. 그래.”
“진짜야!”
“알지. 그럼.”
병아리가 몸집을 부풀린 것과 같이 하찮은 허세.
옅게 웃은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손을 살짝 당겨 게이트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러자 하르벤타 제국으로 가는 게이트를 탔을 때처럼 삽시간에 변한 풍경.
“……!”
마주한 이벨리아는 말을 잃었다.
신선들이 산다는 선경(仙境)이 바로 이곳일까.
아니, 그조차도 이처럼 절경은 아닐 터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인 제국과는 달리 이곳은 따스했다.
바다처럼 드넓은 초원. 연분홍색 복사꽃이 샛바람에 날려 허공에 넘실거렸다. 티 없이 맑은 푸른빛 하늘에 마치 수라도 놓는 것처럼.
사방이 도화(桃花)라, 달콤한 향취가 바람을 타고 몸을 스쳤다.
“…….”
비밀기지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이곳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하르벤타 황궁의 후원이 지극히 자연에 가깝다고 한들, 여기에 가져다 댈 수는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작고 초라한 정자 외에는 그 어떤 화려한 전각도 성도 없는 곳.
그럼에도 기꺼운 것은 아마 신이 빚은 세계 중 이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긴?”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머리 위에 붙은 복사꽃 꽃잎을 떼어주었다.
훅 가까워진 거리.
순간 금낭화 향이 만발한 도화 향을 잡아 삼켰다가…… 느리게 떨어졌다.
“선산(先山).”
“……선산?”
“선대 황제들의 혼이 깃들었다 일컬어지는 곳이지.”
“히익! 죄송합니다!”
“무덤이란 뜻은 아니고.”
“휴우.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마치 귀신 소굴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새파랗게 질렸다가, 이내 안도했다는 듯 다시 눈을 반짝인다.
그 숨김없는 반응이 잔뜩 긴장해 있던 루드비히의 입가에도 미소를 띠게 했다.
“그럼 여긴 뭐야? 귀신 소굴?”
“너 그러다 천벌 받는다.”
“죄송합니다!”
“……하여간.”
루드비히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며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제국에 선대 황제들의 묘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봤어?”
“아니, 그러고 보니까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아.”
“이상하지. 대부분 왕조(王朝)에서 선황의 묘나 사당은 흡사 신물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기 마련인데 말이야.”
“으음, 우리 제국은 패륜 제국인가.”
“너 진짜 천벌…… 아니, 됐다.”
자유분방한 저 입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그나저나, 보통 귀족 가문에서 자라면 자연히 알게 되는 사실이기는 한데.”
“난 몰랐는데.”
이벨리아가 슬쩍 목덜미를 긁었다.
루드비히는 어지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르티나 가문이라면 그럴 수 있지.”
선황에 대한 예우는 무슨. 현 황제에 대한 예의도 밥 말아 먹은 아르티나가 선대 황제들의 넋이나 혼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설사 공작이나 공작부인이 알려줬다고 하더라도 이 작은 친구는 ‘오, 선황제들의 혼 그거 먹는 건가요’ 정도로 흘려버리고 말았을 터.
그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기질을 잘 알고 있는 루드비히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식 차원에서 설명하자면.”
“내가 상식이 부족하다는 소리야?”
“그럼 아니야?”
“맞지. 얘기해 봐.”
“에르카디아에서는 죽은 선황들이 제국의 수호신이 된다고 믿진 않아.”
“그러면?”
“황제 노릇을 잘하며 제국을 번영케 했다면, 인간의 탈을 벗고 신선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유랑한다고 하지.”
아마 대다수는 지옥에나 떨어졌겠지만. 루드비히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물론 개소리야. 그저 도피를 원하는 노친네들의 바람일 뿐.”
“…….”
“너도 알잖아. 황제는 일평생 제대로 황궁 밖을 나가보지도 못한 채 죽는 거. 황궁 기둥이나 붙박이장도 황제보단 나아.”
“야, 너 너무…….”
“그래서 아마 사후의 허망한 자유에라도 기대고 싶었겠지.”
선조를 지칭하여 하는 말로는 조금 심하다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린 이벨리아는, 루드비히의 표정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
“황제가 서거하면, 육신은 태워 천지에 뿌리고 위패만 이곳 선산에 모셔.”
그 위패를 모시는 곳조차 정해진 곳이 없다.
일생 땅을 좋아했다면 흙 위에.
하늘을 좋아했다면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 위에.
선조의 바람을 존중하면서도 후대 역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길이 바로 이 선산이었다.
“그래서 이곳엔 황제와 황제의 직계 외엔 아무도 들지 못해. 편히 유랑하는 선조의 넋을 방해한다고 여기니까.”
“그럼 관리는?”
“황실 정령사들의 정령이 돕지. 거나한 관리랄 것도 없어. 어차피 자유에 묻히고 싶으셨던 분들이니, 그저 바람이 잘 드는지, 나무가 지나치게 시야를 가리진 않는지, 그 정도만 확인하는 거라서.”
이쯤 되자 이벨리아가 슬금 주변을 살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불어오는 바람조차 괜히 신성하게 느껴진다.
발 들이지 말아야 할 신선들의 세계에 감히 인간의 몸으로 흙발을 내디딘 기분이었다.
“……근데 그런 곳에 내가 들어와도 돼?”
“돼.”
이벨리아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선황 폐하들 쉬고 계신다며!”
“내가 주절주절 얘기하긴 했지만, 죽으면 다 끝이지. 넋과 혼은 얼어 죽을.”
“아이고, 이 못된 주둥이는 제가 아니고 이놈입니다! 잡아가려면 이놈을 잡아가세요!”
“팔아넘기는 속도가 빛보다 빠르네.”
“그러게 왜 말을 그렇게 못되게 해!”
“아까 귀신 소굴, 패륜 제국이라고 한 게 누군데…….”
“쉬잇! 쉬이잇!”
“여하간 그렇게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을 찾기도 어려울 거야.”
말끝에 다시 바람이 불었다.
뽐내려 꽃잎을 가득 떼어 입은 것처럼 도화를 싣고 나르는 바람이.
시선 돌려 가만히 눈에 담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본 곳 중에 가장 예뻐. 꼭 신이 사는 곳 같아.”
그 답에 루드비히는 생각했다.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는 선조들께는 죄송하나, 이 선산의 존재 목적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걷다 보니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정자는 멀리서 본 것과 별다를 것 없이 단출했다.
화려했다면 외려 정경과 어울리지 않았을 법도 한데, 투박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 꼭 애초에 초목이 이 형태로 자라기라도 한 것처럼 잘 어우러졌다.
루드비히가 발을 딛는 곳의 옆쪽으로 가서 이벨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잡고 먼저 오르라는 뜻.
고요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든 이벨리아가 짙은 미소를 띠고 정자에 올랐다.
“신선놀음이 이런 거로구나!”
“잠시. 신선께서 찬 바닥에 앉으시면 곤란하지.”
딱히 의자가 없어 그저 다리를 뻗고 앉으려 하자, 잠시 만류한 루드비히가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주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혹여라도 한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두어 번 곱게 갠 겉옷.
그 위에 앉아 기둥에 편안히 기대자, 루드비히 역시 맞은편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리 넓지 않은 정자이기에 둘의 다리가 아슬아슬 교차했다.
루드비히가 말린 복사꽃을 우린 도화차를 건넸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 두 손으로 쥔 이벨리아가 능글맞게 웃었다.
“내가 황태자 전하께서 타주시는 차를 다 먹어보고.”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가 타준 오렌지 주스와 코코아가 몇 잔인데.”
“우리 식량 도둑 이제 말대답도 하고.”
“…….”
선산에 머무시는 선황들이시여. 잠시 눈과 귀를 좀 막고 계시기를.
극악무도한 땅 도둑의 언사에 뒷목 잡고 넘어가지 않으시려면…….
잠시 망연히 시선 돌린 루드비히에게, 이벨리아가 물었다.
“그럼 여긴 제국 소유의 땅이야?”
“아니. 황제 폐하 개인 소유야.”
“폐하 부자시네.”
“너보다 더하겠나. 하르벤타 황제로부터 광산도 뜯어냈으면서.”
“그건 다 내가 세운 공 덕분이고!”
당당히 외치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다. 소유하니까 생각났는데, 식량 도둑아.”
“응. 땅 도둑아.”
이벨리아가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고개를 앞으로 숙여 속삭였다.
“세상 모든 땅에는 주인이 있대…….”
“……당연하지 않을까. 세상 모든 육포에 주인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그럼 우리 비밀기지에도 주인이 있을 수도 있는 거야.”
“…….”
“땅 주인이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건지, 아니면 무도하게 점령해버린 이가 황태자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떠냐. 아주 놀랍지!
딱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루드비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밀기지 역시 누군가 소유하던 땅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챈 저 물정 모름에 고개를 저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알아채서 참으로 대단하다며 칭찬을 해줘야 하는 건가.
“점령한 건 너잖아. 냅다 오두막 짓고 식량을 비축해뒀으면서 왜 내가 점령을 했대.”
“넌 황태자고 난 일개 공녀잖아. 원래 잘못은 윗사람이 책임지는 거야.”
“윗사라암?”
“응. 이럴 때만 윗사람.”
“그래서 비밀기지 돌려주자고? 땅 주인 찾아서?”
“…….”
“에라이, 무도한 땅 도둑아.”
무진장 돌려주기 싫다는 표정 다 보인다.
픽 웃으며 루드비히가 말했다.
“그거 네 거야.”
“루이 거?”
“아니, 네 거. 이브 거.”
“내 거?”
이벨리아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휘둥그레 눈을 떴다.
비밀기지가 언제 내 거야?
“난 산 적 없는데! 아, 혹시 우리 아빠가 샀나?”
“아니.”
“그럼?”
“원래 내 땅이었어, 거기.”
“에엥?”
“그리고 네 생일에 내가 소유권을 넘겼고.”
“……내, 내 생일 언제?”
“네 여섯 살 생일.”
루드비히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1년 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만난 지 고작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그 옛날.
‘그때 내게 비밀기지 소유권을 넘겼다고……?’
대체 왜?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영토가 광활한 에르카디아라고 하더라도 토지의 값은 천정부지라는 것을.
심지어 황궁 근처의 그런 터 좋은 산맥이라면 더더욱.
“왜 나한테 그걸…….”
“그래야 의미가 있었으니까.”
“그때 너는 돈 아니면 가진 힘도 없었잖아!”
“네가 힘이었지.”
“우리가 지금만큼 친하지도 않았을 때인데…….”
“이미 나한테는 하나뿐인 친구였어.”
그러니 얼마나 소중했겠나.
고작 그 ‘땅’이 아니라, ‘네가 있는 비밀기지’가.
그곳은 내게 은신처이자, 안식처이자, 유일한 친우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하여 증여하는 데는 별 고민조차 없었다.
어차피 네가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곳이니.
“그거 알아, 이브?”
“……?”
“비밀기지가. 아니, 네가 주인인 비밀기지가 없었더라면.”
“…….”
“나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묻혔거나, 혹은 미치광이 황태자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
“…….”
“그 정도였어. 너와 네 비밀기지가 내게 미치는 영향은.”
가장 힘든 시기엔 기댈 곳이 되어 주었고.
날개를 펴고자 했을 땐 받침대가 되어 주었고.
쉬고 싶어서. 울고 싶어서. 숨고 싶어서.
그래서 길을 오르면 그 끝엔 늘 네가 손을 흔들었지.
“많이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그 옛날, 이 말과 함께 멋들어지게 주고 싶었는데.
“네가 부담을 느끼고 더는 비밀기지를 찾지 않을까 봐 말하지 못했었어.”
그게 두려웠던 소년은, 무려 십일 년 만에 어릴 적 마음 한 조각을 내보였다.
아주 오래된.
닳고 닳았음에도 여전히 새것처럼 빛나는 친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