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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19화 (219/323)

##  219화: 아가레스의 질투

엘라임이 넋을 놓고 바라만 보고 있다.

심지어 이상하게도 한쪽 손은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댄 채로.

보아하니 평소와 달리 입도 헤벌리고 있다.

뭐야. 갑자기 바보가 되었나, 왜 저래?

이벨리아가 발치에서 훌쩍이는 운다인을 잠시 떼어내고 엘라임이 앉은 자리 바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새를 못 참고 이벨리아의 다리를 껴안은 운다인이 새끼 코알라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함께 딸려간다.

“엘라임?”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보았으나 별 반응이 없다.

“엘라이임?”

말끝을 늘리며 짝 손뼉을 쳐봐도 매한가지.

“엘라임! 와악!”

고함을 치듯 크게 부르자 그제야 몸이 부르르 떨리며 집 나갔던 초점이 되돌아온다.

“아. 계약자…… 부르셨습니까?”

“많이 불렀지! 왜 이래? 혹시 썩은 물이 몸에 흘러들어온 거야?”

“……반해서 그렇습니다.”

“갑자기? 뭐에?”

“계약자에게.”

“…….”

“……아차.”

한 자락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뱉어버렸다.

맑디맑은 약수도 지금 이 답변처럼 바닥이 훤하게 드러나보이지는 않을 터다.

마음을 숨기거나 거짓을 말하는 데는 영 재주가 없는 정령. 혼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엘라임이 푹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최악이다.’

데이트한답시고 불러놓고는 냅다 고해성사를 뱉어버린 것도 모자라, 그대에게 반했다고 고백까지 던져버렸다.

‘고백으로 혼쭐낸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참담하게 떨리는 손이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푸핫-!”

그 어색한 기운을 몰아내는 맑은 웃음이 들려왔다.

“아하하하-!”

“……계약자?”

“내가 방금 굉장히 멋있긴 했지?”

“항상 멋있지만 방금은 특히 더 멋있었습니다.”

“내가 봐도 그래!”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일 전생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일절 동요 없이 담대하게 넘겼으니까. 이 정도면 선방이지!

“사실 나도 말하면서 크으, 멋있다 나 자신, 하기는 했어.”

이벨리아가 찰랑대는 금빛 머리칼을 뒤로 휙 넘겼다. 마치 뽐내듯.

그러자 여전히 다리를 꼬옥 붙잡고 매달려 있던 운다인이 암요, 옳습니다, 하는 것처럼 고개를 빠르고 세차게 끄덕였다.

쥐구멍을 찾던 엘라임도 황급히 동조했다.

“맞습니다. 저도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 반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뭐 계약자를 보고 전생의 그대가 떠올랐다거나, 심장이 뛴다거나, 식은땀이 흐른다거나, 어쩔 줄을 모르겠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누가 뭐래?”

네, 제 양심이 자꾸 뭐라고 합니다.

제대로 마음을 표현하라고 했다가.

염치 좀 있으라고 했다가.

아주 혼자 온갖 난리를 치고 있지 뭡니까.

“여하간 엘라임, 말해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이벨리아가 엘라임의 바로 옆에 앉아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근데 내 전생, 비밀로 해주면 좋겠어.”

“……?”

“특히 우리 가족들하고 토끼한테는 더더욱.”

“듣더라도 계약자에 대한 그들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건 당연하지. 그 문제가 아니라, 속상해할 것 같아서.”

“……아.”

“물론 예전에 보니까 토끼는 대략 짐작하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직접 듣는 거랑 짐작하는 거랑은 차이가 크니까.”

우리 토끼는 내가 다치면 나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짓거든.

내가 속상하면 나를 대신해서 더욱 화내주고.

그런 토끼가 내가 전생에 그리 외롭게 죽어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면…….

“우리 토끼 마음에 대못을 박고 싶진 않아.”

그러자 엘라임이 딸꾹 숨을 들이켰다.

오늘 대체 무슨 날인가. 작정하고 미움받을 짓만 하네.

“저기, 계약자.”

“응?”

“사실…… 그자는 이미 꽤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엥? 어떻게?”

“일전에 계약자가 저를 소환한 것을 기리기 위한 축하연이 열렸었지요. 그날 제가 말실수를 한 것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계약자가 운다인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것과 제가 환생을 도왔다는 것까지는…….”

턱. 이벨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아니, 그걸 나불나불 말했는데 왜 엘라임 목이 아직 붙어 있는 거야?

“우리 토끼가 순순히 그렇구나 했어?”

“그럴 리가요. 그 괴물 토끼에게 제 목이 떨어질 뻔했습니다.”

“아스는 그 이후에 내게 따로 티를 낸 적이 없는데…….”

이후에 열렸던 축복제 거리에서 잠시 멈칫했던 것을 제외하면, 달리 어떠한 티도 낸 적이 없다.

‘……그건 아마, 네 배려였겠지.’

다정한 내 토끼.

너는 진실을 파헤치기보단 그저 홀로 끌어안고 묻어두는 쪽을 택했겠지.

알게 될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섣부른 말이 내게서 엘라임을 앗는 결과가 될까 봐.

내가 작은 어떤 것 하나도 잃기를 원하지 않는 너는, 또 그렇게 조심히…….

이벨리아의 얼굴에 친애가 담뿍 담긴 미소가 떠올랐다.

이를 바라보던 엘라임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저 미소는 날 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계약자는.

‘……설마 그 악마를…….’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받은 것만 하더라도 생에서 받을 축복을 모두 모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주제 모를 욕심이 질투를 만들어낸다.

감히 손대지 못할 그 미소가 탐이 났던 엘라임은 짐짓 주제를 돌려 이벨리아의 시선을 끌었다.

“계약자. 혹시 이프리트와의 데이트는 어떠셨습니까.”

“이프리트? 양아치 오라버니?”

“그 자식에겐 오라버니라는 호칭도 아깝습니다.”

“양아치든 오라버니든, 무슨 데이트?”

“계약자가 그와 데이트를 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응? 그런 헛소문이 어떻게…….

아, 그 신문!

“그게 정령계까지 소문이 났단 말이야?”

이벨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계약자. 어디 같이 놀 존재가 없어서 그런 양아치와 어울리십니까.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습니다. 멍청한 놈 곁에 있으면 멍청함이 옮습니다.”

“……묘하게 뜻이 비슷하긴 하네. 하여간, 그거 이프리트 아니었어.”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이라고…….”

“그런 인상착의는 우리 집에도 하나 살고 있거든.”

“아. 그럼.”

“응, 우리…….”

“그 덜 자란 털실.”

“덜 자란 털실…… 응, 뭐 그런 거.”

그러자 엘라임이 난색을 표하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런. 그렇다면 저희는 아무 죄도 없는 불 멍청이를 척살할 뻔했던 거로군요.”

“죽일 뻔했어? 양아치 오라버니를?”

“예. 아마 꼴딱꼴딱 저승사자가 보였을 겁니다. 페르세스와 함께 팼거든요.”

“세상에. 어떡해, 안쓰러워서.”

“그러게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엘라임, 최소한의 양심은 있…….”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불 멍청이를 소멸시킬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닌데.”

“…….”

뭐라고?

잘못 들은 건지 눈을 깜박이는 이벨리아의 귀로, 빠르고 확실하게 죽여버릴걸, 하는 엘라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양아치 오라버니…….’

대체 거기서 무슨 취급을 받으며 사는 거야……?

***

“젠장. 이 망할 자식들.”

때려도 적당히 때려야지.

“정령왕의 권능으로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을 정도로 두드려 패면 어쩌자는 거야.”

이 지고한 몸, 그것도 하필 눈 위에 멍이라니! 멍이라니!

[와, 왕이시여. 닭에게서 달걀들을 빼앗아 왔습니다.]

“오. 이리 내놔라.”

어디선가 주워들은 대로 카사가 가져온 날달걀 하나를 눈 위에 도르르 굴리자, 삽시간에 삶은 달걀이 만들어진다.

“에잉. 금방 익어버리네.”

머리에 퍽 부딪혀 깨서 한입에 털어 넣으며, 이프리트가 툴툴댔다.

“내가 진짜 데이트를 했으면 또 몰라.”

그랬으면 덜 억울하기라도 하…… 어라? 그러고 보니 그렇네?

지금 아주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인데.

이참에 확 그냥 그 말랑말랑 인간과 데이트를 해버리면…….

그치. 데이트하고 맞은 거니까 별로 안 억울하지.

“이렇게 좋은 생각을 왜 못 했지?”

내가 병아리와 아주 성공적으로 데이트를 하고 오면, 그것들 표정이 볼 만하겠지?

“흐흐.”

이프리트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이내 얇은 불로 제련된 종이 위에 화염으로 글씨가 새겨진다.

「이봐. 말랑한 인간. 나랑 데이ㅌ」

- 콰앙.

미처 다 쓰기도 전.

날카로운 바람 촉이 이프리트의 종이를 벼락처럼 관통했다.

갈기갈기 찢긴 종이가 허망하게 팔랑이며 떨어져내린다.

“…….”

허공에 손을 딱 멈춘 이프리트가 황망히 돌아봤다.

그러자 마주하는 건 흡사 야차 같은 표정으로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페르세스. 주변을 거세게 휘도는 바람이 왕의 은빛 머리칼을 이리저리 휘날리게 했다.

“현장 검거.”

“아니, 야, 이건……!”

“변명 집어치워.”

뚜둑. 뚜둑. 페르세스의 목과 손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손가락을 까닥이자 주변을 구르던 날달걀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야, 아니지?”

하하. 내가 아무리 그래도 위엄이 있지.

달걀로 처맞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뒤로 주춤 물러나려던 찰나.

- 쐐애애애액!

- 퍼억!

머리에 마치 대포알이 날아온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더니, 끈적한 노른자가 주르륵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야! 진짜 너무한 것…… 으악! 으아악!”

“데이트? 데이트으? 네까짓 게 우리 말랑이와 데이트으?”

이윽고 달걀이 박자에 맞추어 신명 나게 날아오기 시작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욕심 많은! 짐승은! 매가! 약이지!”

“으악! 너 때문에 태어나야 할 수많은 병아리가……!”

“병아리를! 네 더러운 입에! 올리지! 마라!”

“사…… 살려…….”

“그냥 죽어!”

- 콰앙.

마지막 남은 날달걀이 이미 멍들어 있던 추프리트, 아니, 이프리트의 눈가에 정확히 명중했다.

이곳. 평화와 조화의 대명사, 정령계.

애먼 짓을 시도조차 하기 전에 검거된 흉수(兇手)가 대자로 널브러졌다.

***

엘라임은 이벨리아를 공작저까지 데려다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레스트가 몸집을 크게 키우고, 둘 다 일레스트 위에 올라탄 채였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엘라임을 만나러 올 땐 아주 잘만 달리더니. 지금은 거북이랑 경주해도 지겠어.’

의아해진 이벨리아가 늑대의 갈기를 쭉쭉 잡아당겼다.

“일레스트. 이러다 내일은 되어야 집에 도착하겠는데?”

[인간은 느긋하게 사는 법도 좀 배워야 한다.]

“인간은 짧은 생을 살기 때문에 뭐든 빨리빨리가 정석이야. 좀 달려!”

[못 달린다.]

“아깐 잘만 달리더니?”

[……바다에서 거북이를 좀 잡아먹었더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무엇을 먹는지가 정령을 결정한다. 거북이를 먹어서 한동안은 빠르게 달리기엔 무리가 있다.]

뭐라는 거야. 이 멍청이가.

이벨리아가 자신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엘라임을 휙 돌아봤다.

“엘라임. 일레스트가 고장 났는데.”

“영 틀리기만 한 말은 아닙니다.”

“……거북이를 먹어서 거북이처럼 느려졌다는 게 그럼 맞는 말이야?”

“때로 정령은 그럴 때도 있습니다.”

“……진짜? 그럼 여기 어디 토끼라도 좀 잡아먹어 봐.”

“계약자의 토끼라면 기꺼이 잡아먹지요. 맛은 별로 없겠지만.”

“그건 안 돼. 그럼 어디 강아지라도 없나?”

“계약자 곁을 알짱거리는 털실이 강아지와 비슷하게 생겼더군요.”

“아니면 저 위에 날아다니는 매라도?”

“고작 인간계의 황태자 자리로 거들먹거리는 핏덩이가 매와 유사하던데.”

“……됐어. 그냥 기어가자.”

그러자 엘라임이 티 나지 않게 일레스트의 궁둥이를 팡팡 두드렸다.

‘잘했다, 이 녀석.’

‘황공합니다, 왕이시여.’

그 정령왕에 그 수하.

두 군신(君臣) 사기단의 마음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그렇게 그들은 해가 질 때쯤에야 공작저 부근에 다다랐다.

[꺼억. 마침 거북이가 소화됐군.]

“마침 딱 우연히 우리 집 코앞에 와서?”

[크흠. 커다란 거북이였다.]

일레스트를 타박하던 이벨리아가 공작저 바로 앞에 석양을 등지고 선 인영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라? 토끼?”

그러자 아가레스의 고개가 휙 들렸다. 이내 금방이라도 뗄 것처럼 발이 움찔댄다.

사실 기민한 감각으로 이벨리아의 기척을 느낀 것은 몇 식경 전.

달팽이도 이보다는 빠르겠다 싶을 정도의 속도로 오고 있어, 마음으로는 이미 수십 번 달려갔더랬다.

그러나 부르지 않았는데 달려가면 귀찮아할까, 몸은 이렇게 대문 앞에서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인 양 서성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토끼야. 거기서 뭐 해?”

그의 주인이 불러준다. 다정한 음성으로.

그제야 아가레스는 한달음에 이벨리아 곁으로 다가왔다.

이벨리아가 일레스트의 등에서 내리려고 다리를 바둥거리자, 훌쩍 뛰어내린 엘라임과 아가레스가 동시에 손을 뻗었다.

“잡아. 이브.”

“잡으십시오. 계약자.”

“…….”

이벨리아는 멀뚱히 자신 앞에 내밀어진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엘라임이 데려다 줬으니까 엘라임을 잡고 내릴게.”

그러자 그 찰나의 순간.

아가레스의 얼굴에는 짙은 실망과 불안이.

엘라임의 얼굴에는 깊은 환희와 만족이 들어찼다.

제법 높이가 있어 조심히 내리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로, 이벨리아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토끼. 왜 여기에 있어?”

조금 전 자신의 손을 잡아주지 않은 것 때문일까.

평소와 다름없는 질문이 아가레스에겐 왠지 차갑게만 들렸다.

나 지금 즐거운 데이트 중인데 왜 네가 여기 나타나서 방해해, 정도로.

“……저녁 같이 먹고 싶어서.”

“이 시간에?”

저녁을 먹으려고 공작저를 방문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

이벨리아로서는 순수한 질문이었으나, 듣는 아가레스는 또다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너무 참을성이 없었나…….’

사실 덜 자란 용이나 허름한 길드의 마스터 따위를 만난다고 했을 때는 전혀 걱정되지 않던 것이, 오늘 물 덩어리와 데이트를 한다고 하니 오전부터 가슴이 선득했었다.

사감(私感)과는 별개로 객관적으로 능력은 출중한 자.

그가 혹시 내가 선사한 것 이상의 하루를 네게 줄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마치 제 영역을 위협당하기라도 하는 늑대처럼 공작저 주변을 빙빙 돌던 중이었다.

네가 언제쯤 돌아오려나. 어떤 표정으로 돌아오려나. 과히 즐거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그때였다. 언짢다는 듯 아가레스를 바라본 엘라임이 툭 내뱉었다.

“치졸하군.”

그러자 아가레스가 삽시간에 평소의 표정을 되찾고 엘라임을 돌아봤다.

“내게 하는 말인가.”

“여기 그대 아니면 누가 있나.”

“자학이라면 더없이 잘 어울려서.”

“데이트 중간에 끼어들어 방해하는 건 버릇없는 악마들의 습성인가?”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으면 데이트는 끝이지.”

“그 뒤에 인사를 나누는 시간까지 포함하는 게 일반적인 개념인데.”

“보아하니 느릿느릿 기어온 주제에 말이 많군.”

장신의 두 사내 사이에 낀 이벨리아가 또 시작이네, 중얼거리며 둘의 가슴을 밀어 떼어두었다.

“그만! 그만!”

“하지만 이브. 저게…….”

“계약자, 저자가…….”

“알았으니까 그만!”

“…….”

“…….”

“옳지. 착하다.”

“감사합니다, 계약자.”

“내게 하는 말이다.”

“악마한테 착하다는 칭찬이 가당키나 한가. 내게 하는 말이다.”

응. 그냥 둘을 떼어두는 게 낫겠다.

고개를 저은 이벨리아가 아가레스를 올려다 봤다.

“토끼, 나 아직 엘라임과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어. 공작저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

“……으응?”

“데이트도 약속이잖아. 내가 토끼와 온전한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엘라임에게도 그래야 예의인 거야.”

“……응.”

“금방 들어갈게. 가서 같이 저녁 먹자. 들어가 있어.”

“……눼에.”

평소와는 다른 말투로 답한 아가레스가 엘라임을 죽일 듯 노려보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내가 바로 이 세상 가장 서러운 토끼라는 것을 티 내듯 터덜터덜한 발걸음.

왠지 모르게 짠하여 붙잡으려던 이벨리아는 손을 내렸다.

‘지금은 엘라임에게 집중해야지.’

마음을 정하는 것은 나중의 일.

지금은 약속하여 시간을 낸 상대를 후순위로 둬서는 안 된다.

그것이 못내 고마워, 엘라임이 선연히 웃었다.

“고맙습니다. 계약자.”

“당연한걸.”

***

당연한걸.

당연한걸?

그 소리를 들으며 공작저 문을 닫고 들어간 아가레스가 으르렁거리듯 읊조렸다.

“……마음에 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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