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엘라임의 고백
약속일은 이틀 뒤.
엘라임은 물의 영역에서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였다.
풍성한 갈기를 가진 일레스트도 왕의 발뒤꿈치를 쫄랑쫄랑 따라 영역을 빙빙 돌았다.
엘라임이 딱 걸음을 멈추자, 바짝 뒤쫓던 일레스트가 엘라임의 다리에 꿍 머리를 박았다.
[흐업! 죄송합니다!]
“일레스트.”
[예! 죄송합니다!]
“동부의 지배자가 내 계약자와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아…… 악마들이 노는 법이야 뻔하지요. 어두침침한 마계에 데리고 갔거나, 악독한 것을 재미라며 알려주었을 겁니다.]
정령들이 생각하는 악마의 이미지가 잘 반영된 대답이다. 그러나 엘라임은 턱을 쓸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통상 그렇게 놀겠지만, 나의 계약자를 대하는 동부의 지배자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그 어떤 누구보다도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또 따뜻하고 다정하게. 그런 눈으로 내 계약자를 바라보고 있는 이라서.
“그놈은 분명 계약자의 눈높이에 맞춰 놀아줬을 거다.”
가장 좋은 식당을 가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구경하고. 그렇게 인간계 내의 최고의 것들을 가져다 바쳤을 터.
그렇다면…… 잠시 고민하던 엘라임이 씩 웃었다.
좋아, 결정했다.
“뭐든 차별화 전략이 중요한 법이지.”
우리 아가 계약자, 아니, 이젠 소녀가 된 계약자께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해드려야겠다.
내가 그 시꺼먼 악마 못지않게 능력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면, 어쩌면 내게도 데뷔탕트 파트너가 될 기회를 주실지도 모르지.
늘 왕의 마음을 찰떡같이 읽어내는 일레스트가 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왕이시여.]
“집을 지어라. 내일까지.”
[네? 집을, 내일까지, 네?]
“장소는 해저가 좋겠군.”
집을. 내일까지. 해저에. 셋 중 대체 어디서 놀라야 하는가. 일레스트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무, 무엇으로 짓습니까?]
“난파선 조각으로 짓든 조개로 짓든 어쨌든 지어. 냉큼. 다른 정령들을 동원해도 좋다.”
상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대강 지시하고 물로 화해 사라져버린 왕.
물의 영역에 덩그러니 남은 일레스트는 거대한 앞발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엘라임과 데이트를 하기로 한 당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에 맞추어 공작저 밖으로 나가보니, 앞에 떡하니 서 있는 것은 마차도 아니고, 엘라임도 아니고, 멋들어진 갈기를 휘날리고 있는 푸른 늑대 하나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벨리아가 늑대를 불렀다.
“일레스트?”
[출세인 줄 알았더니 좌천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왕께서 보내셨다. 계약자를 모셔오라고.]
“마차 대용?”
[유감이지만 그런 듯하다.]
“나도 유감인데. 너 탑승감 굉장히 안 좋을 것 같거든.”
[무식하게 땅 위를 뛰어가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타.]
“어디로 가는데?”
[바다.]
흐음. 물의 정령왕이라서 그런가. 데이트 장소는 아무래도 바닷가인가 보다.
나쁘지 않았다. 바다를 보는 건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벨리아는 몸을 낮춘 일레스트의 등에 올라타고자 다리를 올렸다.
‘이익. 높잖아.’
자존심이 상해 홀로 낑낑대자, 흘끗 일별한 일레스트가 이벨리아의 뒷덜미를 물어 등 위로 휙 던져버렸다.
“야! 나 혼자 할 수 있었어!”
[내일이 되어야 가능할 것 같아서.]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하늘을 가로지른 지 몇 식경이 지났을까.
어느새 불쾌하지 않은 짠 냄새가 물씬 밀려들었다. 습기를 머금어 조금은 끈적한 바람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간다.
“바다 냄새 엄청 좋다!”
이벨리아가 환하게 웃자, 일레스트 역시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허공을 휘돌던 늑대가 부드럽게 아래로 착지했다.
해변에 내려앉은 이벨리아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날카로운 조개 따위도 없이 그저 깨끗하고 맑은 해변. 발가락 사이로 사르르 들어왔다 나가는 모래가 간질거렸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니 하늘인지 바다인지 그 경계가 불명확할 정도로 푸른 물.
“와아-.”
바다를 본 적이 많지는 않지만, 단연 가장 아름다운 해안이라 칭할 만했다.
그렇게 감탄을 아끼지 않던 와중. 이리저리 흩날리는 머리칼을 누군가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시선 돌려보니 익숙한 물빛의 머리칼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계약자. 기다렸습니다.”
“엘라임! 우리 오늘 여기서 놀아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이곳은 아닙니다.”
“그럼요?”
“저 아래. 바닷속이지요.”
“……!”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엘라임이 가리키는 손을 따라가던 이벨리아가 기함했다.
“진짜 바닷속? 이 추운 날씨에요?”
“춥지 않을 겁니다. 하나도.”
옅게 웃은 엘라임이 미리 챙겨온 담요 하나를 이벨리아에게 둘러주었다.
‘하긴. 바다는 엘라임이 지배하는 영역이니까.’
나를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지는 않을 터다.
안위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이벨리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인간이라면 경험할 수 없는 곳. 바닷속은 어떨까.
‘동화에서 보던 것처럼 분홍색의 말하는 불가사리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있을까?’
궁금하다. 호기심 많은 이벨리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갈래요!”
“영광입니다. 그럼 아까처럼 편히 일레스트를 타주시지요.”
“네!”
호기로운 대답과는 달리 아까와 마찬가지로 낑낑대며 오르고 있자, 미리 눈짓으로 허락을 구한 엘라임이 가볍게 들어 위로 올려주었다.
- 찰박. 찰박.
밀려드는 바다를 역으로 가로질러 일레스트가 걷고. 이내 위에 올라탄 이벨리아의 발과 무릎까지 물에 잠겼다.
‘신기하다.’
정말 하나도 춥지 않다. 외려 따뜻한 목욕물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엘라임이 파도마저 잔잔하게 잠재워두었는지, 바다는 겨울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턱 끝까지 물이 차올랐다. 이벨리아가 본능적으로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꽉 감았다.
그러자 옆을 걷던 엘라임이 왜인지 침잠한 눈빛으로 이벨리아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쉬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그대가 물로 인해 고통을 받을 일은 다신 없을 테니.”
일레스트가 한 발 더 내디디자, 머리끝까지 바닷물에 잠겼다.
이벨리아는 엘라임의 말을 믿고 슬쩍 눈을 떴다.
‘어, 진짜네?’
전혀 따갑지 않다. 땅 위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감각이었다.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켜봐도 역시 이상하지 않다. 마치 물고기라도 된 것처럼 물속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벨리아가 자신을 살피고 있는 엘라임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대는 제 계약자니까요.”
“그럼 엘라임이 없어도 나 혼자서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그건 무리일 겁니다.”
실은 가능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고, 이벨리아의 정령술이 조금 더 발전하면.
그러나 엘라임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야 이 바닷속을 보고 싶을 때 자신을 불러주실 테니까.
그대로 믿은 이벨리아는 점차 아래로 내려가면서 가감 없이 감탄했다.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하고, 커다란 고래가 빤히 바라보다 멀리 사라지기도 한다.
한때 바다를 호령했을 것이 분명한 난파선이 풍파를 맞아 진녹색의 이끼로 덮여 있었으며, 군락을 이룬 산호가 그 주변에 꽃처럼 피어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 광경이 선명히 잘 보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본디 깊은 물속에는 빛이 들지 못해 어둡다고 들었는데.
‘바닷속이 이렇게 밝을 수도 있구나.’
꽤 오랜 시간을 내려왔으나, 아직도 햇살은 물길을 따라 바닷속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손수 빛이 들 길을 낸 엘라임의 배려였으나, 이벨리아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일레스트의 갈기를 붙잡고 연신 감탄하던 이벨리아는 저 멀리 포착되는 무언가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응?”
물살을 가르고 빠르게 다가가자, 이내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
“성? 이 바닷속에?”
“어떻습니까, 계약자.”
“대, 대단하긴 한데…… 저기, 엘라임.”
“예.”
“혹시 여기에 말하는 불가사리나 샌드위치를 만드는 오징어가 사나요?”
“……네?”
“그런 애들이 해저에 산다는 동화를 읽은 적 있거든요. 아주 옛날에.”
“그런 것들은…….”
왕의 당황을 느낀 일레스트가 후다닥 물보라를 일으켜 불가사리 하나와 오징어 하나를 잡아 뒤로 건넸다. 태연히 받은 엘라임이 이벨리아 앞에 그것들을 짠 내밀었다.
“아. 여기 있군요. 말을 하거나 샌드위치를 만들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만, 원하신다면 제가 훈련을 한번 시켜보겠습니다.”
“아니에요! 동화는 동화니까요. 그러면 이 성에는 누가 살아요? 용왕님이 사시나요?”
“그건 또 누굽니까.”
“왜, 건강이 좋지 않아서 거북이를 시켜 토끼의 간을 빼앗아오게 한 극악무도한 악당 있거든요. 그 사람이 이런 곳에 살아서요.”
“……혹시 인간계에서는 제가 그런 이미지로 소문이 나 있습니까?”
“그게 엘라임이었어요?”
“토끼의 간을 빼먹진 않습니다만,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토끼라면 기꺼이 가능할 것 같군요.”
“우리 토끼는 맛이 없어요.”
“그래 보입니다. 여하간 계약자, 이 성은 제가 지은 성입니다.”
“우와, 언제요?”
“어제요. 계약자에게 바닷속 별장 하나를 선물하고 싶어서 급히 마련했지요.”
“이게 선물이에요? 제게 주는?”
“그렇습니다. 혹시 계약자가 인간계에 환멸을 느껴 쉬러 올 곳이 필요하다면, 이곳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세상에.”
온갖 귀한 것들만 받으며 살아왔으나, 이런 선물은 그간 받았던 것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 누구도 받지 못했을 선물.
‘해저에 지어진 성이라니…….’
뭐야. 그 어떤 동화보다도 달콤하잖아.
일레스트에서 내려 걸어간 이벨리아가 거대한 높이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고자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의지를 갖자마자 물이 부드럽게 밀려와 문을 열어주었으니까.
‘꼭 내가 정령왕이라도 된 기분이야.’
대단해. 짜릿해.
현실의 구조를 반영해 지어진 성. 정원에는 오색의 산호와 바다 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 내부로 들어가면서, 이벨리아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실내는 물로 차 있지 않네요!”
안은 인간계의 여느 성처럼 보송보송했다.
그러나 크게 다른 점은, 사방의 벽이 모두 투명하게 되어 있다는 것.
조금 전에 밖에서 안을 볼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안에서는 밖, 그러니까 푸르른 바다가 훤하게 보였다.
신나게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구경하는 이벨리아의 반응에 엘라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계약자.”
“엄청요! 최고예요!”
“그러시다면, 계약자. 제 청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뭐든 말만 해요!”
“제게도 말을 놓아주시지요.”
“네에?”
“우리 계약자께서는 모두에게 말을 낮추시면서, 제게만 이리 높이십니다. 서운하게.”
“그야, 엘라임은 왕이잖아요.”
“그 애송이도 황태자고 악마도 지배자 아닙니까. 고작 왕이라고 차별 대우받는 것은 서럽습니다.”
“듣고 보니 그건 그런데…… 그러면 공평하게 엘라임도 말 편하게 해요!”
“그건 안 됩니다. 제 존대는 차별화 전략이라서.”
“무슨 차별화요?”
“사방에 버릇없이 반말 찍찍 싸대는 것들이 그득하니, 그 사이 신사적인 태도로 계약자의 시선을 사로잡고자 하는 전략입니다.”
“무슨 별 이상한…….”
“하여간 질투 나서 마계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제게도 말을 편히 해주십시오. 응?”
물바다. 이 정령왕은 진짜 실행에 옮긴 전적이 있다. 이벨리아는 자신이 꼴뚜기 황자로부터 청혼서를 받았던 날 황자궁이 어떻게 되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아, 알았어요. 그 손 좀 내려놔요.”
“알았어요? 내려놔요?”
“알았어! 내려놔!”
“이런. 생각보다 훨씬 좋군요.”
“엘라임 취향 이상해…….”
고개를 저은 이벨리아가 소파에 앉자, 그제야 엘라임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차를 좀 드시겠습니까?”
“좋지! 바닷속에서 마시는 차라니. 아마 내가 여태 마셔본 것 중에 가장 맛있을 거야.”
살포시 웃은 엘라임이 엄지와 중지를 짧게 맞부딪혔다.
그러자 소녀의 형상을 한 물의 중급 정령 운다인이 나타나 차와 찻잔을 이벨리아 앞에 놓아주었다.
“아. 고마워.”
인사를 건네자,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벨리아를 바라보더니 이내 발치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에 얼굴을 비빈다.
“……운다인? 얘 왜 이래?”
“이해해주십시오, 계약자. 그 아이는 계약자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요.”
“내게? 뭘요? 아니, 뭘? 나는 운다인을 부른 적도 거의 없는데.”
“마음의 빚이라 보시면 될 겁니다.”
영문 모를 말들에 영민한 눈이 반짝였다.
잠시 운다인을 빤히 내려다보던 이벨리아가 찻잔을 달칵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 전생 얘기인가 본데.”
“……역시 똑똑하십니다.”
특별한 감정. 마음의 빚. 고작 두 단어로 곧바로 전생을 유추해내실 줄이야.
“그렇지 않아도 조금 궁금하긴 했어.”
6년 전, 축복제에 놀러 나갔다가 악마를 마주쳤던 날.
혼에 새겨진 과거의 기억을 낱낱이 읽던 그 악마는 숨 끊어지기 직전 말했었다.
내가 전생을 아주 기구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그때 엘라임과 토끼는 뭔가 아는 눈치였는데.”
“…….”
“그때도 그랬던 것처럼,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어. 그저 호기심일 뿐이니까.”
왜일까. 엘라임의 얼굴이 일그러진 듯하다.
저건 분노가 아닌 죄책감이었다. 혹은 슬픔.
이벨리아가 맹약자의 손을 토닥였다.
“그때도 말했었잖아. 난 다시 돌아가더라도 다르지 않게 살 거라고. 그 대가가 지금 이 순간이라면 난 수백 번 수천 번 그렇게 살다 죽어도 좋아.”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계약자.”
엘라임은 반쯤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기실 아주 오래전부터 각오해왔던 일이었기도 했다.
내가 그대의 죽음을 두고 봤는데. 그대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바라만 봤는데. 그걸 숨기고 그대를 이리 대한다는 것이 기만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져서.
엘라임은 이벨리아의 환생 이후 깊은 관계를 맺어갈수록 씻어낼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여 이것은 부디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는 고해성사이자, 동시에 모든 것을 알고도 자신을 그대로 아껴달라는 이기적인 애원이었다.
“……나는, 계약자의 죽음을 지켜만 봤습니다.”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대가 살려달라 외치고, 가쁜 호흡을 몰아쉬고, 밭은 기침을 내뱉고, 기어이 그 찬물에서 외로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나는 그저 두고만 보았습니다. 손을 뻗지 않고.”
“…….”
“계약자는 운다인을 구하려다 죽었습니다. 내가 지배하는 물속에서.”
“……뭐로부터 구하려다가?”
“물로부터. 그리고 인지로부터. 정령은 자신들을 믿는 이가 없는 세계에선 소멸을 면치 못합니다. 그 세계에서 그대가 운다인을 알아본 덕에 저 아이는 목숨을 건졌지요.”
고작 정령 하나 구한 대가로 죽었다는 것.
지금의 맹약자가 그때의 죽음을 방관만 했다는 것.
어떻게 반응할까. 나의 고백을 들은 너는.
화를 낼까. 속상해할까.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감히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다.
엘라임은 고개를 숙이고 그저 처분만을 기다렸다.
“뭐야.”
움찔. 다음에 이어져 나올 말이 두려워 엘라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전생의 나는 굉장히 멋있는 인간이었잖아?”
“……?”
“뭘 그렇게 봐. 존재 하나 구했다면 그걸로 충분히 숭고한 삶이지.”
“……계약자.”
“엘라임이 날 구하지 않았던 건, 정령왕이 가진 제약 때문이었을 테고.”
“……맞습니다.”
충분히 이해한다. 낮게 웃은 이벨리아가 운다인에게로 시선을 내려 물빛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악마가 비참하게 죽었네 뭐네 해서 대체 어떻게 죽었나 했더니. 내가 널 살리고 죽었단 말이지.”
[죄송…….]
“다행이다. 내가 널 구했어서.”
[……!]
이벨리아의 발치에 앉은 운다인이 고운 손으로 입을 막고 뚝뚝 눈물을 떨어뜨렸다.
바라보던 엘라임이 한숨 같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때 네게서 들었던 말. 한치도 다름없는 고귀함.
다시 태어났어도 너는 너다.
그대로 그대답다.
문득 눈앞의 계약자가 그때의 인간과 겹쳐 보였다.
검은 눈으로 올곧게 바라보던. 고집스러운 입매로 고고한 신념을 내뱉던. 다시 없을 청명한 영혼으로 주변을 밝히던…….
- 두근. 두근.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때. 네게 마음 주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