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너 가질래, 이 길드?
실로 황홀한 광경이었다.
허공에 발 딛고 서 있음에도 마치 땅을 밟은 것처럼 안정감이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색 고리를 달고 느리게 공전하는 행성과 그 주위를 빠르게 흐르는 별똥별이 보였다.
단언컨대 난생처음 보는 풍경. 이벨리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여긴.”
“하늘. 아주 위. 누나는 시끄러운 걸 싫어하니까.”
“하늘?”
“무서워할 거 없어. 누나를 정말 하늘 위로 끌어올린 게 아니라, 그 공간을 내가 구현한 것뿐이니까.”
“세상에, 멋있다…….”
순수한 감탄에 마주 웃은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팔을 살짝 뒤로 끌었다.
다리 뒤에 무언가 걸려 주저앉으니, 어느새 나타난 침대가 부드럽게 몸을 받친다.
이벨리아가 희고 말랑한 침대를 검지로 꼭꼭 눌렀다.
“이거 설마 구름이야?”
“응. 구름이야.”
기묘하게도 시야가 어둡지 않은 밤하늘 속. 맑은 구름으로 만들어진 침대가 참으로 이질적이면서도 또 절경을 이룬다.
“이 마법은 이름이 뭐야?”
“누나가 지어줘. 아직 없어.”
“설마 네가 만들었어?”
“응.”
“언제?”
“누나가 날 구해준 그때쯤부터 만들기 시작했어. 완성한 건 얼마 전.”
“……그렇게 옛날부터?”
“응. 누나가 옛날에 동화책 보면서 그랬잖아. 아주 먼 하늘에 가보고 싶다고.”
침대에 턱을 괸 용이 나른하게 웃었다.
“누나는 인간이라서 아주 위로 올라가면 아파. 그래서 내가 가 봤지. 날아서.”
“…….”
“언젠가 이렇게 만들어주려고.”
용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맞부딪히자 별자리를 이뤘던 별들이 흩어져 은하수를 만들었다. 마치 카펫처럼.
“우와…….”
이벨리아는 경탄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맴도는 별을 톡톡 건드렸다.
구름으로 만든 침대에 앉은 엔리르는 별을 가지고 노는 이벨리아의 옆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나의 가족. 나의 구원. 나의 은인. 나의 신.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나를 붙잡아준 중력.
이 마법을 만드는 데 들인 시간은 무려 11년.
그 끝에 용은 깨달았다.
별들 사이, 가장 빛나는 별은 당신이라고.
***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별들의 흐름과 함께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다음 날.
제국신문에는 사실과 상당히 다른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공녀님의 데이트 파트너…… 불의 정령왕?」
내심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면 어쩌나 걱정했던 엔리르는 안도했고, 대차게 틀려버린 대중들의 추리에 이벨리아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레스는 곧바로 공작저로 쳐들어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선 실수인 척 엔리르를 발로 차버렸으며, 마찬가지로 전서를 통해 사실관계를 파악한 루드비히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곳, 정령계.
이프리트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악! 아악! 나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닥쳐라! 발랑 까진 양아치가 어디 감히 우리 말랑이를 건드려!”
“나 진짜 아니거든!”
“실프들이 인간계에서 떠도는 얘기를 다 듣고 왔는데!”
“네 정령들은 널 닮아 멍청한가 보지!”
씩씩대던 페르세스가 추프리트를 한 대 더 쥐어박으려던 찰나.
난데없이 솟아오른 얼음 기둥이 쩍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단단히 표정을 굳힌 엘라임이 걸어 나왔다.
근방에 뿌연 서리가 끼는 것으로 보아, 그 분노의 정도를 익히 짐작할 만했다.
“비켜라, 페르세스. 나머지는 내가 패게.”
“넌 또 왜 이래!”
“감히 내 계약자와 뭘 해?”
“너까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운디네들이 말을 전했다. 네가 내 계약자에게 요망하게 꼬리를 흔들었다는 기사가 났다고.”
“아니, 그건 내가 아니……!”
“변명은 죽어서나 해라.”
문답무용(問答無用). 물의 창이 이프리트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퍼억.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은 팔이 불처럼 거세게 타올랐다가 이내 재생된다.
“야! 이건 진짜 심하잖아!”
“네가 한 일은 극악하다.”
“그럼. 그럼.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지. 야, 엘라임. 같이 패.”
그렇게 두 정령왕에게 원 없이 두들겨 맞으며 이프리트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억울하다…….”
보고 있니, 말랑한 인간아……?
제발 뭐라고 말 좀 해봐…….
***
그렇게 정령계 최초 정령왕 살인사건이 벌어질락 말락 하고 있을 무렵.
이프리트의 처절한 외침 따위 듣지 못한 이벨리아는 파라반트의 마스터에게 전서를 날렸다.
딱히 계획된 건 아니었다. 그냥 마침 오늘 심심했고. 하필 친구들은 다들 일정이 있었고. 그러니 생각났을 뿐이었다.
「시간 비워. 오늘. 놀자.」
데이트라느니, 뭘 하자느니, 그런 구구절절한 말은 없었다.
정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전서. 그럼에도 이를 받은 파라반트 마스터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자리했다. 그가 곁에 선 수행원에게 까닥 손짓했다.
“빠르게 처리해야겠군.”
“예, 마스터.”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스터는 눈앞에서 벌벌 떨며 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엉금엉금 기어 그의 발치에 닿으려 하는 꼴이…… 참으로 역겹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미를 알아들은 수행원이 들고 있던 단도를 건넸다.
“살려…… 컥!”
간결한 휘두름. 조금 전까지 기던 사내의 목이 데구루루 바닥을 구른다.
본인이 상납할 정보를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채우게 하고, 달성하지 못한 경우 살해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기던 길드원.
쓰레기에겐 번듯한 묫자리를 마련해줄 이유조차 없다. 그가 고개를 까닥이자 수행원이 사내의 시신을 불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같은 죄목으로 잡혀 온 길드원들이 비굴하게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었다. 누군가는 오줌을 지리기라도 한 듯 지독한 냄새가 퍼졌다.
그가 한쪽 눈을 찌푸리자, 보스의 기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수행원이 앞으로 나섰다.
“마스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됐다. 내가 하지.”
“손이 더러워지십니다.”
“몇 목숨 더 묻어봤자 티도 안 나.”
십수 명에 달하는 범죄자들의 목이 단숨에 떨어졌다.
파라반트 지하. 처단실의 두꺼운 석문 사이로 죽은 자들의 피가 끈적하게 흘러나갔다.
시신들 한가운데 서 있던 야차(夜叉)가 얼굴에 튄 피를 대강 훔쳐냈다.
“다 정리된 건가.”
“이번에 색출한 인원은 그렇습니다.”
“뿌리까지 뽑아. 특히 어린아이들에 대한 범죄는.”
“예. 마스터.”
그가 짧게 숨을 끊어 쉬었다.
빠른 시간 내에, 뒷골목의 폭군에서 번듯한 정보 길드의 마스터로 돌아가야 했다.
이벨리아가 온다고 했으니까. 드높은 그분께 이깟 꼴을 보여드릴 수야 없으니까.
그가 시신들을 불태우고 있는 수행원에게 명했다.
“길드 닫아.”
“예?”
“닫아.”
“지, 지금요?”
“당장.”
“얼마나…….”
“종일.”
아니, 하루에 벌어들이는 정보와 돈이 얼마인데 그 아까운걸……!
갑자기 왜 그러시는데요!
묻고 싶었으나, 지금 같은 혈해(血海)를 수백 번 헤쳐 이 길드의 왕좌를 움켜쥔 분께는 질문 하나라도 건네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마스터. 현재 정보를 거래 중이신 손님들까지는 조금 기다렸다가…….”
“닫으라고 했는데. 지금 당장. 이해가 안 되나?”
“당장 내쫓겠습니다. 모두.”
깊게 허리 숙이는 수행원을 흘끗 일별한 채, 그는 처단실을 나섰다.
외부인을 마주칠 일 없는 전용 통로를 지나 방으로 올라가는 모든 걸음, 짙은 핏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좋게 표현하자면 세계 모든 정보를 움켜쥔 자.
날것 그대로 표현하자면 음지(陰地)의 황제.
마스터는 피가 튀어도 티 나지 않는 검은 정장을 벗어던졌다.
대신, 곧 방문할 이와 어울릴 옷을 갖춰 입었다.
단정하고 정결한. 밝은 색의 정장을.
***
그는 직접 아르티나 가문으로 향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자신이 공녀를 에스코트한다는 건 이벨리아에겐 양날의 검이 될 것이었으니까.
사람들은 내심 파라반트와 연줄 닿은 이벨리아를 부러워하면서도, 겉으로는 대제국의 공녀가 어떻게 귀족 아닌 자의 에스코트를 받느냐며 헐뜯을 것이 뻔했다.
하여 그는 아쉬운 대로 수행원을 붙여 흑단 나무로 만든 마차를 보냈다.
잠시 뒤. 방문 앞에서부터 재잘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해맑은 소리에 마스터의 입가에 온화한 웃음이 새겨졌다.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파라반트 망했나?”
“그것이 아니오라, 마스터께서…….”
“마스터가 일을 잘 못 해?”
“아이고, 그런 말씀 하시면 큰일 나십니다!”
“큰일? 걔가, 나를?”
같잖다는 듯한 웃음. 수행원은 대번에 납득했다.
이분의 지위와 능력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마스터의 태도만 봐도 알았다.
‘설령 이분이 파라반트에 똥칠을 하고 가신다고 하더라도 마스터는 웃어넘기실 터.’
오죽하면 이분을 모시고자 길드 문을 닫아버리기까지 하셨겠는가.
새삼 느낀 수행원이 정중하게 마스터의 방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그보다 앞서 성격 급한 이벨리아의 손이 나갔다.
- 쾅!
“나 왔다!”
괜히 무심한 척 크라바트를 매고 있던 마스터가 흘끗 시선 돌려 투덜댔다.
“그 문 여는 습관은 어떻게 좀 안 되나.”
“놀랐어?”
“간이 떨어질 뻔했다.”
능청스럽게 답하며, 마스터가 이벨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이내 손수 후드를 내려주고는 얼굴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묻는다.
“괜찮냐.”
“뭐가?”
“하르벤타.”
“당연히 괜찮지.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인데.”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인 이벨리아가 마스터의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익숙하다는 듯, 마스터는 접객용 의자에 앉아 이벨리아를 마주 봤다.
“무슨 일로 갑자기 놀자는 전서를 보냈어?”
“데뷔탕트 파트너를 구해야 하거든.”
“그런데?”
“그래서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보는 중이야.”
“후궁 선발전 뭐 그런 의미인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탕왕(湯王)이라도 된 것 같잖아.”
“네가 성군이더라도 네 주변에 있는 이들이 탕비(湯妃)나 다름없지.”
나만 해도 봐라. 네가 놀자는 전서 한번 보냈다고 길드 문 닫아버린 거.
그가 이벨리아의 앞에 차와 설탕을 밀어주며 눈을 접어 웃었다.
“나도 후보자로 올려줬다니, 감격인데.”
“별로 기대는 하지 마. 네 표현을 빌리자면, 쟁쟁한 후궁들이 많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마스터는 킥킥 웃으며 이벨리아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나저나, 조금 일찍 알려주지 그랬어. 준비라도 제대로 했을 텐데.”
“괜찮아! 그냥 편하게 시간 보내는 게 목적이니까.”
“뭐, 그래서 아쉬운 대로 길드라도 좀 닫아봤어.”
“길드를 닫아?”
“응. 오늘 휴무야.”
“왜?”
“네가 놀자고 했으니까.”
아니, 이 굼벵이가! 이벨리아가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금제탑 정보 모아야 할 인간이 길드 문을 닫아버려?”
“그건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왜 정보가 안 들어오는지 알만도 하네! 너 이렇게 계속 농땡이 피우지?”
“곧 구해다 준다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이 길드 나한테 넘겨!”
그러자 맞은편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마스터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아차. 이벨리아가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좀 심했다. 얘가 어떻게 이 길드를 차지했는지 알고 있으면서.
담백한 사과를 건네기도 전에 지척으로 다가온 청년이 이벨리아의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들자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다갈색 눈이 맞닿는다.
안대로 가리지 않은 한쪽 눈이 곱게 휘었다.
“그럴까? 너 가질래, 이 길드?”
“뭐?”
“원한다면 줄게. 너 가져. 대신 날 보좌관으로 써주고.”
네가 내 보스라면 그것 나름대로 좋을 것 같다.
내가 험지를 돌며 정보를 모아 건네면, 너는 잘했다 치하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내가 밤새 네 방문 앞을 지키면, 너는 수고했다 말하며 날 어여삐 여겨주고.
혹여 그 옛날처럼 내가 누군가에게 맞고 돌아오면, 너는 나보다 더 화를 내주고.
그렇게 네가 이 길드의 마스터가 되는 것도…….
“나는 굉장히 좋은데.”
난데없는 제안을 들은 이벨리아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뭐야. 이거.
얘 왜 이래.
한동안 마스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그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즈음이 되어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응.”
“나한테 일 떠넘기려고 그러지, 너.”
“……날 뭐로 보는 거야.”
“내 꿈의 경쟁자.”
백수 자리는 못 뺏겨, 어딜 뺏겨, 절대 안 뺏기지.
***
파라반트의 마스터로부터 더럽게 눈치 없다는 평을 받으며 공작저로 복귀한 이벨리아는 베개를 끌어안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남은 후보자는 둘. 엘라임과 루드비히.
“누구를 먼저 볼까.”
손가락을 까닥이던 이벨리아가 졸린 눈을 비볐다.
“처음과 끝이 가장 중요하니까…… 마지막을 식량 도둑으로 해야겠다.”
그러면 자동으로 다음 순서는 엘라임이다. 이벨리아는 말을 전할 정령 하나를 불러냈다.
“운디네.”
[계약자! 계약자! 지금 우리 왕께서 불의 왕을…… 응? 계약자 잠들기 직전이네?]
“너무 졸려…… 이거나 엘라임한테 좀 전해줘.”
쪽지에 적힌 내용을 흘끗 본 운디네가 반색하며 꼬리를 살랑였다.
[아이고, 이걸로 정령계 살인사건은 막을 수 있겠다. 잘 전해드릴게! 계약자 잘 자!]
“무슨 살인사건…….”
[모르는 게 약이야. 얼른 코 자!]
더 묻고 싶었으나, 파라반트의 마스터와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눈 탓에 정신이 가물가물한 이벨리아는 이내 까무룩 잠들었다.
***
그리고 정령계.
[왕님! 왕님! 속보입니다! 속보요!]
[호외요! 호외!]
약 하루가 지나도록 이프리트를 괴롭히던 엘라임은 운디네가 뽈뽈 날아와 손에 떨어뜨리는 전서를 펼쳤다.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는 없는 필체로 쓰인 간결한 요청.
[엘라임. 나랑 놀아요.]
씩 웃은 엘라임이 이프리트의 멱살을 탁 놓아버리고는 탈탈 손을 털었다.
“내 계약자가 함께 놀자며 전서를 보냈다.”
“뭐 어쩌라고!”
“내가 더 잘하고 올 거다.”
“아니, 그러니까 나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닥쳐라, 꼬리 아홉 달린 불 멍청이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