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잊었어? 나 용이야.
아르칸의 이마에 선명한 힘줄이 솟았다.
‘이 악마 새끼가 애를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애당초 연인이 될 여지를 열어두고 만난 이들과 처음부터 친구로 시작한 이들의 관계 발전 속도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후자의 경우 변화하는 감정에 대한 혼란과 확신의 단계를 추가로 거쳐야 하니까.
‘그런데 첫 데이트에 벌써 이런 말을 하게 만들다니.’
그 악마 놈은 아주 현란한 데이트 실력으로 우리 아가의 혼을 쏙 빼놓은 것이 틀림없다.
“왜 대답이 없어, 오라버니들. 오라버니들은 다 연인이 있으니까 잘 알 거 아니야.”
“너무 터무니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연모라는 형태의 사랑은 그렇게 한순간에 생기는 감정이 아니야.”
“그래?”
“그래. 게다가 너는 이제 막 성인이 되었으니, 지금 그 감정은 그저 첫 데이트라는 흥분감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가만히 듣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 오라버니의 지적은 제법 합당했다. 자신도 바로 조금 전까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지 않았는가.
“맞아. 있지, 그래서 나 다른 친구들하고도 데이트를 해보려고.”
목덜미를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세드릭이 마치 시체가 되살아나듯 벌떡 일어섰다.
“뭐?! 왜 결론이 그렇게 나?”
“왜냐니. 더 만나봐야 알지.”
“우리 아가가 똥인지 초콜릿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는 그런 아가였어?”
“그러는 오라버니들은 똥인지 초콜릿인지 맨날 퍼먹고 있으면서.”
“난 반대야!”
“그럼 오라버니도 페르세스 언니랑 그만 만나든가.”
“그건 잔인해!”
“거봐. 오라버니들은 다 하면서 왜 난 못하게 해.”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고 여동생이 하면 스릴러랬어.”
“오라버니의 연애를 스릴러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순순히 비켜.”
갓 성인이 된 병아리, 아니, 중닭의 위협이 상당히 사납다.
깨갱. 무시무시한 눈빛에 꼬리를 만 세드릭이 슬금 옆으로 비켜 길을 텄다.
스쳐 지나가며 이벨리아가 입술 위에 검지를 댔다.
“아빠랑 엄마한텐 일단 비밀이야. 데뷔탕트 파트너가 정해지면 그때 말씀드릴 거니까.”
“네 연인은 허리가 역으로 꺾일 준비나 해야 할걸!”
“어디 그러기만 해봐.”
“나야, 그놈이야!”
“아직 그놈 없어, 오라버니.”
“이래서 요즘 애들은 안 돼! 갓 성인이 된 주제에 벌써 연애에 눈을 뜨고 말이야!”
“누구보다도 가장 요즘 애들인 오라버니가 할 말은 아니지.”
오라버니 둘을 물리치고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꽤 가뿐하다.
팔랑팔랑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드릭이 작게 외쳤다.
“아가! 벌써 연애하려는 건 아니지? 그냥 데뷔탕트 파트너를 정하려고 하는 거지?”
그러자 이벨리아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애매한 으쓱 뭐야!”
분노한 세드릭이 발을 구르며 아르칸을 바라봤다.
“형님. 나 그 악마 죽여버리고 싶은데!”
“마찬가지다. 게다가 다른 것들과도 데이트를 한다고 했지.”
“다른 것들이라고 해봐야 뻔하지. 황태자 전하를 필두로 한 떨거지들 아니겠어.”
“전하께 떨거지라니. 불경해.”
“다 형님한테 배운 거야.”
“……찌끄래기 정도로 타협하지. 여하간 그 선두주자가 이 제국의 국본이니 냅다 가서 때려잡을 수도 없고, 참 곤란하군.”
“흐음.”
고지식한 아르칸에 비해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굴러가는 세드릭이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씩 웃었다.
“형님. 일단 내버려 둬볼까?”
“어째서?”
“지금 때려잡으려면 우리가 몇을 때려잡아야 하는 거야?”
“악마. 황태자 전하. 정령왕. 그리고 누구일지 모르는 기타 등등.”
“거봐. 많잖아.”
“그런데?”
“그런데 이브가 그 모든 잔챙이들을 만나 보고 아 이것은 똥이로구나 하는 존재들도 분명 있을 거 아니야. 그럼 그것들은 굳이 때려잡을 필요가 없잖아.”
“드는 품을 줄이자?”
“바로 그거지. 게다가 똥으로 판정받은 것들을 우리 편으로 회유해서 이브의 선택을 받은 한 존재를 한마음 한뜻으로 뚜드려 패는 거야.”
“다구리라니. 기사도는 개나 줘버렸군.”
“기사도가 웬 말이야. 우리 이브 건드린 것들에겐 뒷골목 양아치가 될 준비 완료인데.”
“하긴. 저것들이 양아치처럼 굴면 우리 역시 투견이 되어야지.”
아장아장 걷던 아가가 어느덧 훌쩍 커서 성인의 문턱을 넘었다.
그렇다 한들 그들에겐 마치 물가에 내놓은 것같이 불안한 여동생.
두 오라버니는 이벨리아의 주위를 맴도는 늑대들에 대한 살의를 다시금 불태웠다.
***
무사히 방으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테사를 불러 욕조 안에 뽀그르르 가라앉았다.
외출 이전의 몸단장을 도왔기에, 테사는 이벨리아의 첫 데이트와 데이트 상대를 모르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몸을 닦아주던 테사가 작게 물었다.
“아가씨. 데이트는 어떠셨는지요?”
“재밌었어. 아주.”
“재미 외에 다른 것은 없으셨나요?”
이벨리아가 욕조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떠올리니 다시금 몸에 열기가 돈다. 따뜻한 물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글쎄. 내 몸속에 나비들이 마구 날갯짓하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어.”
부드러운 면으로 팔을 닦아주던 테사가 옅게 웃었다.
우리 아가씨. 가장 고귀하신 가문에서 둘도 없는 신분으로 태어나셨음에도, 그 다정한 천성 탓에 적지 않은 고난을 겪으신 아가씨.
비비안이 전사한 이후 이벨리아가 아홉 살일 적부터 보필한 테사는 그저 깊이 기원했다.
‘부디 서로 기댈 수 있는 사내를 만나시어 백년해로하시기를.’
그리고 조금 주제넘게 흘러나오려던 사심을 꾹 눌러 참았다.
‘……루페르트 후작님께서 참으로 건실해 보이시던데.’
대악마라면 좀 어떤가.
그저 한평생 한눈팔지 않고 우리 아가씨 알뜰살뜰 보살펴주며 웃게 할 이면 충분하지.
***
어렵사리 데이트의 여운을 털어낸 이벨리아는 다음 희생자…… 아니, 후보자를 물색했다.
루드비히에게 전서를 날릴까 했지만, 시간은 이미 늦은 밤.
마침 고개를 돌려보니 방석 위에 도롱도롱 코를 골고 있는 봉제 인형 하나가 보인다.
이벨리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기척을 느낀 엔리르가 한쪽 눈을 살짝 뜨고는 툴툴거렸다.
“나만 빼놓고 악마랑 놀다 오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서럽다는 듯한 말투. 동그란 머리를 앞발에 폭 숨기자 심장 폭격에 즉효인 빵 굽기 자세가 만들어졌다. 이벨리아가 오구오구 소리를 내며 엔리르를 안아 들었다.
“엔리르, 삐졌어?”
“삐진 거 아니야. 위대한 용은 안 삐져. 난 화가 난 거야. 지금은 악룡이야.”
“그렇다기에는 말랑말랑 귀여운 아가 용인데.”
“흥. 내가 얼마나 컸는지도 모르…… 합.”
“얼마나 컸는데?”
“안 컸어. 그대로야. 용은 원래 그렇게 성장이 빠르지 않아.”
하마터면 나 이제 다 컸다고 말해버릴 뻔한 엔리르가 황급히 앞발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다. 살포시 고개를 기울이던 이벨리아는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있지, 엔리르.”
“나 하나도 안 컸어.”
“응. 그건 딱 봐도 알겠고. 시간 되면 나랑 같이 데, 데, 데…….”
“데? 데? 데?”
“…….”
차마 데이트를 하자는 말은 안 나온다.
이 아가 용은 아무리 봐도 데이트 상대는 아니었다. 아마 인간으로 변해도 이젠 나보다 훨씬 작은 아가일 테니까.
하여 이벨리아는 선회하여 청했다. 데뷔탕트 파트너 후보로 여기기보다는 그저 어릴 적부터 함께 했던 소중한 용과 단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으로.
“오늘 내가 토끼랑 둘이 놀았던 것처럼, 엔리르도 나랑 둘이 놀래?”
그러자 이벨리아의 품에서 축 늘어져 있던 아가 용이 날개를 활짝 펴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두울이?”
“응. 둘이.”
“아무도 없고?”
“응. 아무도 안 끼고.”
“좋아! 좋아!”
푸드덕푸드덕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붉은 털 뭉치를 이벨리아가 휙 잡아챘다.
“그런데 그러려면 네가 인간으로 변해야 해.”
“……왜?”
“논다는 게 뭐야?”
“같이 밥 먹고 얘기하고 구경하는 거.”
“봐. 여우랑 둘이 밥 먹고 얘기하고 구경하면 나 혼자 놀고 말하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거 아니야.”
“…….”
세차게 파닥이던 날개가 딱 멈췄다. 엔리르가 슬슬 시선을 피했다. 이쯤 되니 상당히 수상하다. 이벨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너 인간으로 안 변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변하는 거 까먹었어.”
“똥 싸는 소리 하네. 너 용이잖아.”
“난 용이지.”
“맨날 위대한 용, 대단한 용, 할 때는 언제고 까먹긴 뭘 까먹어. 얼른 변해봐.”
이벨리아의 채근에 엔리르가 머뭇거렸다.
뜸 들이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벨리아가 짐짓 고개 돌리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안 되겠다. 어쩔 수 없이 루이랑 아스랑만 나가서 놀아야겠네.”
“뭐?”
“데뷔탕트 파트너를 정하려고 밖에 나가서 노는 건데, 작은 여우를 파트너 삼을 수는 없잖아. 그럼 엔리르는 자동 탈락인걸.”
“안 돼!”
그것만은 참을 수 없다. 은인의 파트너가 되는 것은 인간의 데뷔탕트 문화를 알게 된 이래로 아주 옛날부터 꿈꿔왔던 일이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개를 푸르르 턴 엔리르는 네 발로 당당히 일어서서 침대 위로 올라섰다. 흡사 일생일대의 결전을 앞둔 것처럼 결연한 표정이 깜찍했다.
“누나. 나 미워하면 안 돼.”
“갑자기?”
“약속해.”
“응. 안 미워할게.”
“손가락도 걸고 약속해.”
“너 손가락 없잖아.”
“…….”
“사실 네가 하나도 크지 않았다고 해도 무시하지 않을게. 용은 원래 성장이 느리다며.”
“……그 반대야.”
“반대?”
반문과 동시에, 엔리르가 훌쩍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별 기대 없던 이벨리아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사이.
작은 용은 간데없이 적발의 머리칼을 늘어뜨린 소년이 서 있었다.
고개 들지 않고 앞을 그대로 바라보자,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탓에 단단한 근육질의 가슴이 보인다.
히익 숨을 들이마신 이벨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제법 고개를 꺾자, 그제야 멋쩍어하는 듯한 붉은 눈과 마주친다.
“…….”
뭐야. 얘 누구야.
내 귀여운 말랑 아가 용은 어디로 가고 웬 다 큰 남정네가 서 있는 거야.
침묵이 길어지자 엔리르가 뒷머리를 매만지며 이벨리아를 불렀다.
“……누나?”
“…….”
“누나. 나 미워하지 마. 다 이유가 있었…….”
“……야.”
“응.”
이내 느리게 손이 올라오더니, 등을 찰싹찰싹 내리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배신자! 혼자 이렇게 컸어! 은인이고 누나고 쫄랑쫄랑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아!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나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모르긴 뭘 몰라! 이거 숨기려고 인간으로 변신도 안 했으면서!”
“누나도 많이 컸는걸.”
“한참 내려다보면서 너 지금 나 기만해?”
“그러게 어릴 적에 화단에 우유 뿌리지 말라고 했잖아.”
이벨리아가 눈을 흘겼다. 자기 앞에서 온갖 아양이란 아양은 다 떨던 아가 용의 인간 모습이 이랬다니. 용의 모습일 때와 간극이 큰 만큼 충격도 크다.
찰싹찰싹 소리가 몇 번 더 방을 채우고. 잠시 뒤 조금 진정된 이벨리아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손을 탈탈 털었다.
“이로써 우리 가문 최단신은 나로 확정인가.”
“내 본체가 최(最)단신인걸. 누나는 차(次)단신이야.”
“……그것참 위로가 되네.”
이벨리아는 까치발을 들어 쭈뼛쭈뼛 눈치 보며 서 있는 용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더 몰아붙일 마음은 없었다. 성장을 숨긴 이유가 약간은 짐작이 가니까.
“누가 키웠는지 잘 크긴 진짜 잘 컸다.”
“누나가 키웠지. 내 은인.”
살짝 풀린 분위기를 놓치지 않은 엔리르가 헤실 웃으며 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용의 모습일 때와 별다르지 않은 애교에 이벨리아가 픽 웃었다.
“어쨌든 인간형은 나랑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네.”
“그럼 나랑도 둘이 놀아줘?”
“그래. 나가자.”
“응!”
“이번 주말 괜찮아?”
“응!”
“좋아. 그럼 이제 내 방에서 나가.”
“응! 아니, 응?”
이벨리아가 엔리르의 등을 휙 떠밀었다.
영문 모르고 문 앞까지 쫓겨난 용이 어어, 뒤를 돌아봤다.
“아가였을 적에나 내 방에 들여보내 줬지. 이젠 아니잖아.”
“잠깐…….”
“어딜 감히 레이디의 방에. 허락 없인 얼씬도 마.”
“누나, 난 아직 아가야. 응애! 응애!”
- 쾅!
자비 없이 문이 코앞에서 닫혀버렸다.
엔리르가 톡톡 소심하게 문을 두드렸다.
“……누나, 깜깜해서 무서워. 문 좀 열어줘.”
반응이 없다. 안 속네.
“누나. 추워. 문 좀 열어줘.”
역시 돌아오는 답은 없다. 냉정해.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아무래도 성냥이 필요하진 않은가 보다.
용이 이벨리아의 문 앞에 풀썩 쪼그려 앉았다.
“……파트너 후보 자격을 얻고 누나 방 출입 자격을 잃었다.”
득인가 실인가. 엔리르는 울적해졌다.
***
그리고 그 주 주말.
하르벤타에서 찢어버린 옷을 대신하여 단정한 것을 갖춰 입은 엔리르는 이벨리아의 방문을 정중히 두드렸다.
그리고 빼꼼 고개를 내미는 데이트 상대를 향해 호칭을 조금 바꿔보았다.
“크흠. 이벨리아.”
“스읍. 말이 짧다?”
“……누나. 은인.”
“옳지.”
“쳇.”
엔리르가 짧게 혀를 찼다. 애초에 맺은 관계가 그렇다 보니, 악마나 황태자처럼 이름을 마구잡이로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나 보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둘이서만 밖에 나가서 노는 건 거의 없던 일이었으니까.
인간형으로 변한 엔리르가 이벨리아를 에스코트하여 공작저 회랑을 지나자, 하녀들은 입을 떡 벌리고 볼을 붉혔다. 하인들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단단히 오해한 엔리르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그만 쳐다봐. 우리 누나 닳아.”
밖에 나가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벨리아야 워낙 널리 알려져 있으니 그 정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들은 없었으나, 그 곁에 붙은 사내의 정체에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외견이 눈에 확 띄기까지 했으니까.
어느 가문의 자제인가. 혹은 타국의 왕족인가.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발 딛는 자리마다 새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우아하게 고기를 썰어 입에 넣던 이벨리아가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영 어수선하네.”
“다 치워버릴까?”
“마음 같아선 내 밥만 빼고 다 치워버리고 싶어.”
“그럼 인간들 다른 곳으로 보내도 돼?”
“어디로?”
“다신 못 돌아올 곳으로.”
이벨리아가 대번에 사고를 칠 것처럼 구는 용의 입을 덥석 틀어막았다. 어떤 주문도 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기실 마음만 먹으면 주문 따위 필요하지 않은 용이 픽 웃었다.
“그건 안 할게. 누나가 싫어하니까.”
굳이 고르자면 인간을 증오하는 편. 그러나 유일하게 애정하는 이가 인간을 아끼는 이상, 그 역시 그 의사에 반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이렇게 하자.”
엔리르는 테사에게 물어 준비해두었던 데이트 일정을 모두 엎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벨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손 줘.”
“자. 근데 왜?”
“조용한 곳으로 가자.”
“하지만 너랑 내가 같이 있으면 조용한 곳은 동굴 안밖에 없을 텐데.”
“잊었어?”
딱. 부딪히는 손가락. 이내 움직이던 사람들이 그대로 멈춘다. 수군거리던 잡음들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탕. 살짝 발을 구르자, 눈에 담기는 현실의 가장자리부터 마치 흩어지듯 사라진다. 대신하여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밤하늘. 그리고 선연한 빛을 내는 별 무리.
그 환상 아래. 세계의 정점에 선 존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 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