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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14화 (214/323)

##  214화: 예쁘다, 네가

짧지 않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완연한 오후가 되어 있었다.

충분히 부른 배에 흡족해하던 이벨리아가 물었다.

“그런데 토끼. 왜 저녁이 아니라 점심을 먹자고 했어?”

“식사 시간은 길잖아.”

“그런데?”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 널 들여보내는 시간이 늦어지니까. 첫 데이트에는 그러는 거 아니라고 들어서.”

“악마가 생각보다 도덕적인데?”

“네 앞에서는 성인군자도 될 수 있지.”

똑바로 맞닿아오는 시선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떨궜다.

오늘따라 하는 말들이 전부…….

자꾸 기분이 묘해진다. 구름 위를 노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발판 없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공연. 어때?”

잠시 낯선 기분을 헤아리던 이벨리아는 아가레스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 좋지! 무슨 공연인데?”

“죄다 때려 부수는 거.”

“내 취향이야.”

친구의 승낙이 떨어지자, 아가레스는 라움에게 공연장으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

왠지 이벨리아가 좋아할 것 같은 공연은 미리 예매해 둔 차였다.

당당한 용사가 나와 악당이고 뭐고 펀치 한 번에 모두 날려버린다는 그런 공연.

그런데 정작 황립 공연장에 내린 이벨리아의 시선은 다른 포스터에 붙박였다.

이벨리아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피던 아가레스는 그 시선 끝에 있는 포스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롤루스 왕과 12기사」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작품이다. 이벨리아가 어릴 적에 좋아하던 동화. 그것이 각색되어 공연으로 만들어졌나 보다.

“이브. 저거 보고 싶어?”

“응. 재밌겠다.”

“보자. 저거.”

“하지만 다른 공연 예약해 둔 거 아니었어? 저걸 보면 그건 보지 못할 텐데.”

“널 위해 세워진 계획이 네 만족 앞에 놓여서는 곤란하지.”

별을 따다 등장인물로 삼아달라는 청도 기쁘게 받들 마당에, 이미 있는 공연을 못 보게 할 이유가 없다.

아가레스는 곧바로 라움에게 까닥 손짓했다.

마부석에서 내린 라움은 헐레벌떡 매표소로 달려갔고, 공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표를 구해왔다.

언제 급작스럽게 방문할지 모르는 고위 귀족들을 위해 VIP 좌석의 일부분은 항상 남겨두는 것이 관례였고, 아르티나와 루페르트의 이름이라면 VIP 중의 VIP였으니까.

얇은 금으로 만든 티켓을 건네며 라움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 그런데 안내인이 말하기를, 이 공연은 과거 유행하던 동화를 성인용으로 각색한 것이라, 보시는 데에 약간의 불편함이 따를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가레스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벨리아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잔인하게 각색했나 보네. 아무래도 전쟁 이야기니까.”

“괜찮겠어?”

“당연하지. 전쟁을 직접 뛰어본 내가 그깟 가짜 피 따위에 놀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아픈데.”

아차. 그때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울먹이던 토끼를 봤으면서 말이 헛나왔다.

이벨리아가 미안, 사과하던 그때였다.

최고 VIP가 방문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황립 공연장 대표 빈센트 자작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로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지위로 따지자면 황족이 위라지만, 실질적인 권력과 화제성을 따지자면 이 제국에 저 둘만 한 인사들은 없다.

‘티끌만 한 실수라도 있었다가는 곧바로 실직이다……!’

그가 마치 절이라도 올릴 모양새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찾아주시어 영광입니다, 후작 각하, 공녀님!”

“잡설은 됐다. 안내나 하도록.”

그 차가운 명령에 재빠르게 티켓을 살피던 그의 손이 파르르 경련했다.

고르셔도 왜 하필 이 공연을……!

“저, 저기…….”

“뭐.”

“그게, 이 공연을 보셔도 무리가 없으실지…….”

“없어. 안내해.”

“후작님께서는 그러하시겠으나, 안내 문구에 적힌 대로 이 공연은 성인용으로 각색이 된 것이라 공녀님께서 관람하시기에는…….”

“나 올해 열일곱인데. 설마 내가 그리 안 보인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어엿한 성인처럼 보이십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지?”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빈센트 자작은 체념한 표정으로 두 고객을 가장 좋은 자리로 직접 안내했다.

관람이 끝난 이후에 뭐 이딴 것을 공연했냐며 자신을 때리지만 말아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곳입니다. 각하. 공녀님.”

“고맙네.”

역시 VIP 좌석은 달랐다.

자리는 편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좌석 앞마다 다과가 올려진 테이블이 있었으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도록 양옆과 뒤는 검은 천으로 막혀 있었다.

이내 심신을 편안히 하고 관람하라는 취지로 가져다주는 브랜디 두 잔.

킁킁 냄새를 맡은 이벨리아가 독하게 쏘는 알코올 냄새에 웩하며 코를 찡그렸다.

“이게 뭐야!”

“술이다.”

“술?”

이벨리아의 눈이 심상치 않게 반짝였다. 동시에 싸늘함을 느낀 아가레스가 급히 손을 뻗었다.

“이리 줘.”

“왜? 나도 먹어보고 싶은데!”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두긴 아쉬워서.”

“무슨 뜻이야?”

“보다 좋은 자리에서 보다 좋은 술을 나와 함께 해달라는 뜻.”

아가레스가 자신 몫의 브랜디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이벨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숨결에서 훅 끼쳐오는 쓰고도 무거운 향.

이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이내 유리잔을 쥔 손 위에 커다란 악마의 손이 겹쳐진다.

“그러니 오늘은 부디 참아줬으면 좋겠는데.”

유혹인지 부탁인지 모르겠다.

이벨리아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잔을 부드럽게 받아낸 아가레스가 가볍게 털어 마시고 씩 웃었다.

몸을 바로 하지 않아…… 여전히 둘 사이 거리는 가까웠다.

“고마워. 들어줘서.”

“……대신 내 첫 번째 술은 토끼가 책임지기야.”

“영광이지.”

악마의 확언에 이벨리아는 아쉬운 대로 오렌지주스로 만족하고 좌석에 편안히 기대 누웠다.

이내 공연 시작을 알리듯 붉은 휘장이 위로 올라갔다.

어릴 적 즐겨보던 동화의 각색본에 한껏 기분이 고조된 이벨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시작한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식경 뒤.

“…….”

이벨리아의 표정은 희게 질려 있었다.

‘전쟁물 아니었어, 이거……?’

왜 이런 기승전결 없는 더러운 이야기가 된 거야.

‘싸우다 말고 껴안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건 무슨 심보지?’

함께 죽어보자 뭐 이런 마음인가?

‘저 후계자는 돌에 박힌 검을 뽑다 말고 왜 입을 맞추는 거야?’

무능력한 호색한이 따로 없다.

그야말로 개연성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진한 스킨십에 초점을 맞춘 공연.

얼마 전에 책에서 봤던 그 남사스러운 삽화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한편, 턱을 괴고 무심하게 무대를 내려다보던 아가레스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데이트 상대는 경악한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브에게는 난이도가 조금 높나.’

설상가상으로 전투를 하다 말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거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작게 소리를 지른 이벨리아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으아악! 왜 옷을 벗어! 그러지 마! 더러워!’

성인 버전의 각색이 실감 나는 전투 각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성인물이었냐고!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이벨리아가 허둥댔다. 그러자 공연 시작 전에 옆에 놓아두었던 오렌지주스가 팔에 치여 기우뚱거렸다.

재빠르게 포착한 아가레스가 삽시간에 몸을 기울였다. 그에게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잔을 잡고자.

그저 치우려는 담백한 목적이었으나…….

“…….”

“…….”

의도치 않게 몸이 조금 많이 겹쳐졌다.

보드라운 몸에 맞닿은 단단한 근육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렇지 않아도 오만가지 상상에 당황하던 이벨리아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자극이었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한쪽 팔로 이벨리아의 얼굴 바로 옆을 짚은 채로, 아가레스가 속삭였다.

“쉬이. 주스 치워주는 것뿐이야.”

“……뭐, 뭐. 내가 뭐래?”

“숨을 못 쉬고 있잖아.”

작게 웃은 그가 이벨리아의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이 공연은 네가 접하기엔 유해하다.”

“……나도 어른이야.”

“알지만 굳이 저런 것으로 배울 필요는 없는 것들이라.”

“그럼 어디서 배워?”

“나중에 내가…….”

“네가?”

“……말이 헛나왔다.”

그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늘 도와주려던 버릇이 이번에도 주제를 모르고 튀어나옴으로 인한 불상사였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절대로. 결단코.

손이 뜨거워지는 이유가 그 자신이 민망하기 때문인지, 손 아래 친구의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눈이 가려진 채로 침묵.

어느새 공연이 끝나고 어두웠던 공연장에 불빛이 들어찼다.

동시에 아가레스와 이벨리아는 남들이 알면 안 될 죄라도 진 것처럼 화들짝 놀라 서로 떨어졌다.

서로 흘끗 바라보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큭큭.”

“실컷 어른인 척하더니 너도 얼굴 빨개졌네!”

“너만 할까.”

그렇게 웃던 둘은 다른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천막으로 가려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연극에 여운이 남아서는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아까처럼 오롯이 둘만 남았던 그 깊은 분위기에서 헤어 나오기가 아쉬워서였다.

***

아직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선 계절. 해는 짧았다.

하여 비교적 이른 저녁임에도 불꽃놀이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한 달에 단 한 번 하는 불꽃놀이의 명당은 종탑의 상층부.

물론 종탑의 최상층은 한 번에 한 팀만 예약할 수 있기에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과거 아르칸 역시 이곳에서 렐리안과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몇 달 전부터 하델을 들들 볶았을 만큼.

상황이 이러하니, 고작 며칠 전에야 데이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아가레스가 최상층을 잡았을 리는 만무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벨리아 역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디서 보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냥 같이 노닥거리는 이 시간이 즐거웠으니까.

그런데.

“……최상층?”

“예, 공녀님. 간단하게 곁들이실 식사도 함께 준비해 두었습니다.”

불꽃놀이 날에는 안내원의 역할까지 겸하는 종지기의 말에 이벨리아가 아가레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예약했어? 여긴 돈으로 살 수 있는 곳도 아닌데.”

“별거 아니었어.”

태연한 답에 종지기가 저 구석에서 기함했다.

별거 아니긴 뭐가 별거 아니야.

불과 사흘 전이었다.

루페르트 후작 각하께서 전서를 통해 이번 달 불꽃놀이에 최상층을 비워두라 명하셨고, 종지기는 이에 난색을 표했더랬다.

종지기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선 예약자가 웬만한 이였다면 여러 특혜를 얹어주며 포기를 권하기라도 해보겠으나, 그분들 역시 서열로 따지자면 이 제국 최고 반열에 오른 분들이셨으니까.

그러자 루페르트 후작께서 직접 찾아와 물으셨더랬다.

“예약한 이가 누구냐.”

“그, 그것이…… 황자 전하와 황자비 전하이십니다.”

답하자 후작 각하께서는 그대로 사라지셨고.

불과 몇 시간 후, 황자 전하의 시종이 와서 전서를 내밀었다.

[취소해주게. 예약.]

가타부타 다른 말은 없었다.

다만, 전서구에 쓰인 글씨가 평소 황자 전하의 것과는 달리 뭐에라도 쫓기는 듯 엉망진창이었다.

세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으나, 종지기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루페르트 후작께서 황자 전하를 겁박하셨을 것이라고.

여하간 그런 적지 않은 노고를 들여 최상층을 차지하시고서, 공녀님께는 그저 별거 아닌 일 따위로 치부하시다니.

아무래도 공녀님께서 후작 각하의 목줄을 꽉 쥐고 계신다는 세간의 소문이 맞나 보다.

혹시라도 두 분의 시간에 방해라도 될까, 종지기는 보다 발소리를 줄이고 둘을 안내했다.

종탑의 구조상 최상층은 넓진 않았다.

둘이 나란히 앉아서 창문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소파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무겁지 않은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선명하게 밖을 바라보아야 하는 불꽃놀이의 특성을 고려하여, 방 내부 전경이 창에 불필요하게 비치지 않도록 조명은 최소화된 채였다.

온기를 위해 틀어둔 벽난로가 창에 비치지 않는 낮은 높이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며 몸을 따뜻하게 녹였다.

그 안온하고도 독특한 분위기에 경탄한 이벨리아가 창가로 달려갔다.

“우와아! 여기 엄청나다!”

“혹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이 종을 울려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정중히 인사를 건넨 종지기가 물러가며 문을 닫았다.

드높은 창공, 어두운 하늘과 그 아래 수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고개 돌려 아가레스에게 손짓했다.

“아스, 이리 와봐! 수도가 전부 내려다보여!”

“…….”

아가레스는 중심별을 벗어나지 못하는 별자리처럼 이벨리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밝지 않은 방 안에서도 너는 그저 가닿고 싶게 빛난다.

저 해사한 웃음과 손짓, 그리고 부름 한 번에 이 데이트를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 모두 아름답게 부유했다.

이내 시작을 알리는 작은 불꽃들이 반짝이더니.

- 퍼엉! 퍼엉!

곧이어 다채로운 색상의 불꽃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종탑의 높이 덕분에 바로 눈앞에서 터지는 색감의 향연.

마치 꿈속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유리창에 손을 대고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감탄했다.

“정말 예쁘다. 그치, 아스.”

“……응. 예쁘네.”

홀린 듯 답하는 악마의 시선은 불꽃을 향한 적 없었다.

단 한순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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