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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13화 (213/323)

##  213화: 이벨리아의 첫 데이트

내 토끼가 이렇게 눈이 부셨었나. 이벨리아는 민망하여 시선을 돌렸고.

내 구원자가 이리도 아름다웠었나. 아가레스는 눈을 떼지 않고 가만히 올려다봤다.

시간은 정오 즈음.

두 존재의 머리 위로 부서지듯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찬 겨울 속에서도 따스했다.

아가레스가 자신의 손에 내려앉은 이벨리아의 손을 살짝 쥐며 씩 웃었다.

“갈까?”

“응.”

어딘지 평소와는 달리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이벨리아도 마주 미소 지었다.

친구의 커다란 손에 폭 파묻힌 자신의 손을 보니 문득 와 닿았다.

‘나도 이제 어른인데. 아스에 비하면 여전히 작구나.’

아가레스 역시 느끼는 바는 다르지 않았다.

‘어른이 된 이브도 여전히 작고 소중하군.’

조금만 힘을 잘못 줘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데이트 상대. 악마의 행동이 보다 조심스러워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가레스는 이벨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이끌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불안함에 안전장치를 하나 곁들이면서.

“혹시 네게 손을 대는 것이 불쾌하거나 아프다면 말해줘.”

“그럴 리가. 내 착한 토끼.”

답하며 마차 계단을 밟은 이벨리아가 마부석을 보고는 알은체를 했다.

“어? 예전에 이바스 저택에서 봤던 악마인데.”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악마, 라움(Raum)이 반색하며 돌아봤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기억해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라움은 마치 땅에 엎드리기라도 할 것처럼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눈앞의 소녀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주군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라면 그에겐 하늘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공손한 꾸벅임에 이벨리아가 미처 화답도 하기 전이었다.

아가레스가 질투 난다는 듯 이벨리아의 손등 위를 엄지로 느리게 쓸었다.

“이브. 저딴 것들 일일이 기억할 것 없어. 넌 나만 기억해주면 돼.”

“하지만 우리 토끼 부하인걸.”

“그러니까. 넌 가장 높은 것만 보면 족해.”

봐달라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올곧게 내려다보는 요망한 금빛 눈.

“적어도 오늘은 나만 봐줘.”

마치 그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에 이벨리아의 손끝이 살짝 경련했다.

‘얘 사실 몽마 아니야?’

붙박인 시선을 도무지 돌릴 수가 없다.

이벨리아는 라움 따위는 까맣게 잊고 아가레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들어섰다.

그러자 늘 맞은편에 앉던 악마가 오늘만큼은 바로 옆에 앉는다.

맞은편 넓은 자리를 두고 굳이. 그것도 벽 쪽이 아니라 이벨리아의 옆에 찰싹 붙은 채로.

“……아스?”

그러자 귓가가 약하게 붉어진 아가레스가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데이트를 할 땐 원래 이리 가까이 앉는 거라고 했다.”

“누가?”

“부하와 책이.”

나름대로 이것저것 알아본 모양이다. 제법 대견하여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머리를 짧게 토닥였다.

흘끗 둘러보니 마차 안은 이벨리아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각양각색의 통에 담긴 쿠키와 젤리부터, 작고 따뜻한 난로, 보드라운 털로 만든 방석, 향기로운 노란색 꽃, 혹시 발이 아플까 배려한 폭신한 슬리퍼까지.

‘여기가 천국인가.’

그야말로 완벽하다. 세심한 배려에 감탄한 이벨리아가 굽 낮은 구두를 벗었다.

그렇지 않아도 익숙하지 않은 신발에 뒤꿈치가 쓰라리던 차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작은 발을 조심히 감싸 쥐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따뜻한 슬리퍼를 신겨 주었다.

발에 와 닿는 부드러운 손길이 간지럽다. 이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송아지 뒷발차기하듯 아가레스의 손을 밀어냈다.

“고, 고마워.”

“별말씀을.”

몸을 일으킨 아가레스가 다시 옆자리에 앉자 이유 모르게 흐르는 정적.

민망했던 이벨리아가 테이블에 놓인 쿠키 통을 집으려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

생각보다 멀다. 무게중심이 조금 더 아가레스 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어느 순간 둘의 다리가 살짝 맞닿았다.

“히익!”

이벨리아는 마치 가시에라도 닿은 듯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살짝 상처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브…… 내가 더러워?”

“아니!”

“그럼 내가 불편해?”

“아니!”

“그러면 평소 같지 않게 왜 이리 목각인형 같아?”

“…….”

나도 몰라!

뚝딱뚝딱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나무토막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건네주는 쿠키 통을 괜히 꼬옥 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그 옆. 마찬가지로 귓가가 발개진 악마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렘과 긴장감의 과다 투여. 묘한 침묵에 휩싸인 마차가 번화가로 달렸다.

***

쿠키의 효과로 조금 진정된 이벨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다정한 시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주 닿아온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

“이브 배고프면 안 되니까. 밥부터.”

아가레스가 준비한 첫 코스는 식사였다. 배가 고픈 이벨리아는 잔뜩 성난 병아리처럼 사나워지니까, 방지 차원에서였다.

“역시 내 악마.”

흡족하게 끄덕인 이벨리아가 살짝 커튼을 올렸다.

어느새 번화가로 진입한 마차. 밖은 상당히 많은 인파로 북적대고 있었다.

연말 연초를 흔히 장사의 대목이라고 부른다.

들뜬 분위기에 지갑이 열리는 것은 물론,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까지 있으니까.

그 바글바글한 거리에 기가 질린 이벨리아가 커튼을 내리고는 걱정스럽다는 듯 아가레스를 돌아봤다.

“토끼야. 우리 이대로 그냥 다녀도 괜찮을까?”

“왜?”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후드라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혹시 네가 불편할까 봐 후드를 준비해 두긴 했어.”

“토끼는 안 쓸 거야? 네가 나와 연인이 되었다는 헛소문이 돌 수도 있는데.”

“아아.”

“역시 좀 꺼려지지? 너도 쓸래?”

“바라는 소문인데. 허락만 해준다면 내가 내고 싶을 정도로.”

“…….”

이 자식 어디서 무슨 수업을 받고 왔길래 이렇게 혀가 매끈매끈 잘 굴러가?

“자. 후드.”

“아냐. 네가 괜찮다면 나도 됐어.”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건네는 후드를 받아들지 않았다.

기실 토끼만 상관없다면 이벨리아 역시 그딴 소문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으니까.

어디선가 들은 바로, 토끼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추측은 이미 여러 갈래로 난무한다고 했다.

그러니 이건 이미 있던 소문에 살짝 장작을 넣어주는 정도에 불과할 터다.

이내 달리던 마차가 부드럽게 속력을 낮추었다. 마차 주변은 심히 소란스러웠다.

“오늘 문을 닫았다고?”

“우린 아주 예전에 예약을 해뒀다고! 열어줘!”

“사전 공지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야!”

고대하던 레스토랑이 예고 없이 닫음에 당황 또는 불평하는 소리인 듯하다.

이벨리아가 살짝 커튼을 걷어 올려 바깥 상황을 살폈다.

수도 내 경치도 분위기도 가장 좋다고 소문이 자자한 레스토랑, 라 스칼라(La Scala).

예약을 위해서는 몇 달을 대기해야 한다는 악명 높은 그곳.

‘이 정도의 레스토랑이 예고 없이 닫을 리 없는데.’

아무래도 주인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이벨리아가 난감하다는 듯 아가레스를 돌아봤다.

“아스. 여긴 오늘 닫았나 봐. 다른 곳으로 가도 난 괜찮아!”

아랑곳하지 않은 아가레스가 마차 문을 열고 내리고선 이벨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여긴 닫았다니까?”

“당연히 닫았지. 내가 사들였으니까.”

“……뭘 사?”

“여기. 전부.”

“왜?”

“예전에 네가 여기서 보는 경치가 좋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샀다고?”

“선물이야.”

이 레스토랑을 인수해버린 행동력도 대단하긴 한데…… 이벨리아는 그것보단 다른 측면에서 조금 놀라웠다.

“내가 여기 경치 좋다고 말한 거 기억하고 있었어? 엄청 옛날인데.”

그러자 아가레스는 외려 그 물음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널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너에 관한 것 중 내가 잊은 건 단 한 가지도 없어.”

그게 어떤 기억들인데. 얼마나 소중한 발자취들인데. 그리도 반짝이는 그것들을 내가 감히 어떻게 잊어.

“자, 가시지요.”

아가레스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데 또 생경하다. 살짝 입술을 깨문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손을 잡고 발을 내디뎠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오느라 일순 온전히 안긴 몸. 시원하고도 무거운 박하 향기가 훅 밀려들었다.

그렇게 마차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곧바로 둘을 향했다.

조금 전만 해도 불만을 표하던 눈빛들이 삽시간에 호기심과 경탄으로 변모했다.

“어머, 루페르트 후작님 아니신가요?”

“옆에 계신 분은 아르티나의 공녀님이시네요!”

“두 분께서 나들이를 나오셨나 봐요!”

그 사이 누군가는 소리 낮춰 속삭이기도 했다.

“맙소사, 이런 말씀은 실례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 어울리시는걸요.”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걸까요?”

“공녀님께서도 이제 정혼자를 정하실 때가 되기는 하셨지요.”

이 레스토랑에 올 정도로 재력 있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다. 워낙 가격대가 높기에 예약자들은 모두 유수의 귀족들 혹은 거상들.

하여 이 제국 유일한 공녀와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는 후작의 관계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흔치 않은 관계인만큼 더욱 집중되는 관심과 이목.

희미하게 들려오는 잘 어울린다는 말에 이벨리아는 손을 꼼지락거렸고, 아가레스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하찮은 인간들이 눈은 제대로 박혔구나 싶어서.

“아무래도 후작님께서 레스토랑을 전부 빌리셨나 보네요.”

“공녀님께선 정말 좋으시겠다…….”

“저는 오히려 후작님이 부러운걸요. 저도 공녀님과 마주 앉아 식사 한번 해봤으면!”

민망하다. 이벨리아는 마치 이 소란을 즐기는 것처럼 느릿하게 걷는 토끼의 옷자락을 당겨 빠르게 레스토랑 입구로 향했다.

입구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대신하여 문을 열어주었다.

습관처럼 인사를 건네려던 이벨리아가 익숙한 얼굴에 멈칫했다.

“아, 고맙…… 잔디이?”

“……어서 오십시오. 경치 죽이는 레스토랑입니다.”

“잔디,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 잔디는 없습니다. 저는 종업원 잡초라고 합니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쓰러워라. 우리 토끼가 혹시 협박이라도 했어?”

“……네니요.”

깔끔한 정장에 보타이를 맨 마르바스가 울며 겨자 먹기로 두 손을 펼쳐 마법진 위로 안내했다. 뒤따라가며 이벨리아가 키득 웃었다.

“불쌍한 종업원 잡초. 아무래도 악덕 상사를 만났나 봐.”

“합당한 급여를 받고 할 일을 하는 중일 거다.”

“급여 줬어?”

“살려줬잖아.”

월급을 생존으로 퉁쳐버리는 진정한 악마를 보았다.

이벨리아가 안쓰럽다는 듯 잔디 악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이 딛고 선 커다란 반석이 최상층까지 부유했다.

수도 종탑보다는 조금 낮지만, 그래도 레스토랑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 덕분에 수도 전경이 한눈에 훤히 보였다.

“여긴 언제 와서 봐도 정말 예뻐.”

정신없이 밖을 내다보는 이벨리아를 향해 마르바스, 아니, 종업원이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맞춤형 코스 요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하시겠습니까?”

“무슨 요리인데?”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이벨리아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몇 번이고 달달 외운 듯 유려하게 읊는 메뉴는 꼬치구이나 소고기 등, 이 식당에서 평소 팔던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른 음식들이다.

“여긴 풀로 만든 음식 위주로 파는 걸로 알고 있는데. 메뉴가 완전히 달라졌네?”

“그야 당연하지요. 주군께서, 아니, 저 손님께서 레스토랑을 인수하시면서 메뉴를 싹 다 바꿔버리셨으니까요.”

“……메뉴까지?”

“예. 이제 과거에 팔던 그런 잡스러운 풀때기는 팔지 않습니다. 육류 위주의 음식이 메뉴판을 온통 점령하였지요.”

주군께서 손수 뜯어고치신 메뉴는 오로지 이 땅콩의 기호에 철저하게 맞춰져 있었다.

“어쨌든 메뉴는 그 코스 하나입니다만. 혹 다른 것을 원하신다면 만들든 얻어오든 하겠으니 편히 말씀해주시지요.”

“아니, 일단 내가 다 좋아하는 거긴 하니까…… 그냥 그걸로 줘.”

“땅콩께서 좋아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달리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종업원 잡초를 찾아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친절과 불친절의 경계를 넘나드는 종업원 잡초가 나가자, 이벨리아가 물었다.

“토끼야.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혹시 음식이 네 입에 맞지 않을까 봐 미리 와서 먹어봤다.”

“그랬더니?”

“별로였어. 그나마 경치 하나는 봐줄 만하더군.”

“그래서 식당을 인수한 다음 주방장부터 메뉴까지 싹 바꿔버렸다?”

“정확해.”

“……원래 데이트라는 게 이렇게 스케일이 큰 거야?”

“뭘 이 정도로. 네게 해주고 싶은 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아가레스가 따뜻한 물수건으로 이벨리아의 손을 닦아주고, 식기 옆에 놓인 냅킨을 펼쳐 무릎 위에 놓아주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삽시간에 마쳐진 식사 준비.

곧이어 애피타이저부터 천천히 식사가 올려졌다.

작게 탄성을 지른 이벨리아가 작은 꼬치 하나를 집어 한입에 물었다.

아가레스는 자꾸만 친구의 얼굴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돌려냈다.

입에 한가득 음식을 넣고 오물오물 움직이는 모습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으나, 빤히 쳐다봤다가는 식사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이벨리아가 먹기 좋게 음식을 잘라 그릇 위에 올려주며 충실히 시중을 들었다.

“토끼. 안 그래도 돼. 나도 이제 어른이라서.”

“굳이 뭐라도 해주고 싶은 게 데이트 상대의 마음이라.”

“…….”

“자. 이것도 먹어.”

네가 조금 더 편안하도록. 조금 더 웃을 수 있도록. 조금 더 행복하도록.

그 조금을 위해서 들여야 하는 노력이 수만 가지라고 해도 좋았다.

너의 1과 나의 1만을 저울 위에 올려도, 가치는 네 쪽으로 기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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