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네 하루를 내게 허락해줘
“데이트……?”
“네, 데이트요.”
“우리 토끼랑……?”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공녀님의 토끼님부터요.”
이벨리아가 똥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자, 렐리안이 웃으며 첨언했다. 연애 중인 연장자의 여유로움을 가득 담은 채로.
“부담스럽게 생각하실 건 없어요. 데이트의 범위는 아주 넓으니까요.”
연인의 나들이, 서로 호감 가진 이들의 외출, 혹은 가볍게 연회 파트너를 찾기 위한 티타임까지도 폭넓게 ‘데이트’에 속했다.
“그냥 다른 이들을 다 떼어두고 새로운 곳에서 함께 식사하는 정도면 충분해요.”
뭐든 척척 잘 해내시는 공녀님께서 이 분야에는 영 취약하시다.
영민한 머리를 갸웃 기울이며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이 그 나이답게 사랑스러웠다.
“감정을 깨달으려면 곱씹어보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그냥 넘기지 않고 천천히 바라보는 거죠. 조금 더 가까이에서. 조금 더 공을 들여서.”
“다들 그렇게 번거롭고 힘든 과정을 거쳐?”
“그 끝이 불장난일지 백년해로일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워질 이를 찾는 과정인걸요. 쉽다면 거짓이죠.”
“……노력이 필요한 거였구나.”
“그럼요. 친구를 만드는 것에도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걸요. 하물며 연인이야 말해 무엇하겠어요.”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알아갈 순서가 자신의 주변인들부터인 것도 꽤 합당한 것 같다.
원래 양초 밑이 가장 어둡다고도 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될 존재가 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결심한 이벨리아가 살짝 몸을 기울여 속닥속닥 물었다.
“데이트하면 뭐 해?”
“입도 맞추…… 어머, 이게 아니고, 밥을 먹고, 불꽃놀이도 보고, 별도 구경하고 하지요.”
바로 어제 아르칸과 했던 어른의 데이트를 말하려던 렐리안이 황급히 노선을 선회했다. 데이트가 처음일 대악마와 공녀님께 딱 맞는 수준으로.
앞에 나온 말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이벨리아가 조금 더 바짝 붙어 앉았다.
“밥은 어디서 먹어? 불꽃놀이는 어디서 봐? 별은 멀리 있는데 어떻게 봐?”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물음에 렐리안이 진정하라는 듯 이벨리아의 손을 다독였다.
“이브.”
“응?”
“이브는 고민할 것 없어요. 하나도요.”
“왜?”
“이브가 데이트를 신청하면 루페르트 후작님이나 황태자 전하께서 최선을 다해 알아 오실 것 같거든요.”
“걔들도 아무것도 모르긴 매한가지인데?”
“원래 목마른 강아지가 우물을 파는 법이랍니다.”
렐리안이 드물게 소리 내 웃었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살던 이들이 데이트하자는 공녀님의 말 한마디에 얼마나 절절맬지 상상하니 제법 유쾌하다.
“이브. 데이트가 어땠는지 나중에 제게도 꼭 알려주셔야 해요?”
“그럴게! 고마워, 렐리안!”
그렇게 경험자의 든든한 조언을 가슴에 새기고 카시스 후작저에서 나오는 길.
행동력 하나만큼은 발군인 이벨리아는 곧바로 실라페를 불러 전서를 날렸다.
「토끼, 나랑 데이트하자.」
***
불퉁한 표정으로 날아온 실라페는 아가레스의 손바닥 위에 전서를 내동댕이쳤다.
[계약자가 보냈다.]
뭐라고 적었는지 이미 보았기에 마음 같아서는 이 대악마의 머리 위에 새똥이라도 싸버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정령생 마감하게 될 것이 뻔해 눈물을 머금고 참았다.
실라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으로 이바스 저택의 창문을 세게 쾅 닫아버렸다.
전서를 열던 아가레스가 시선조차 두지 않고 경고했다.
“새대가리. 소멸당하고 싶지 않다면 태도를 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뭐, 뭐! 바람이 그런 거야! 내가 그런 거 아냐!]
졸렬한 변명을 흘려들으며, 아가레스가 커다랗고 단단한 손으로 얇은 쪽지를 펼쳤다. 그저 이브의 필체가 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종이를 대하는 손길이 심히 조심스러웠다.
“……!”
그리고 그대로 경직.
그의 눈이 짧은 쪽지를 몇 번이고 훑었다.
‘데이트……?’
이브가 왜 내게 이걸 보낸 거지?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 벌을 주겠다는 의미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난데없는 데이트 명령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아가레스가 실라페의 두 날개를 잡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으악! 독수리 살려!]
“별다른 말은 없었나.”
[있었어! 지금 말하려고 하잖아!]
“부리 빠르게 움직여라.”
[우리 계약자가 데뷔탕트 파트너를 찾는대! 아무나 데려가고 싶지는 않아서 후보자들을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만난 다음에 결정한댔어!]
그제야 풀려난 실라페가 날개깃을 고르며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우리 계약자의 오만한 요청을 저 악마가 어떻게 정의했을지가 궁금했다.
“흐음, 그러니까…….”
아가레스가 천천히 턱을 쓸었다.
“왕의 간택이로군.”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외려 떠받드는 악마의 말에 실라페의 부리가 삐끗하며 애먼 깃털을 뽑았다.
“조신한 후궁이 되어 아양을 떠는 것도 좋지.”
[뭐야, 이거 진짜 또라이…… 아니, 다 전했으니 나는 이만 간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실라페의 부리에 노란 꽃다발을 물렸다.
[으그 므으.]
“꽃. 일전에 보니 이브가 좋아하는 것 같길래.”
[…….]
“명은 기꺼이 받들겠다고 말씀드리도록.”
뒤뚱뒤뚱 창틀로 걸어간 실라페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악마의 말투는 더없이 차가운데, 눈에는 환희가 가득 들어차 있다.
저 악마에게 우리 계약자가 이 정도의 의미인가.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실라페가 흥 콧방귀를 뀌고는 푸드덕 하늘을 가로질렀다.
***
이바스 저택 집무실에 홀로 남은 아가레스는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고작 한 줄짜리 전서였으나, 담긴 의미를 되뇌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이 되기도, 또 가장 축복된 신언이 되기도 한다.
‘그때 한 말이 진짜였나.’
나중에 내 데뷔탕트 파트너는 네가 해주면 되겠다고 했던 그 달콤한 말.
그에게는 삶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던 지표였으나, 그의 친우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저 호혜로 던져준 한 조각의 희망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당연히 황태자를 데려갈 줄 알았는데.’
인간들에게 에스코트하는 이의 지위는 상당히 중요하니, 데뷔탕트라는 특별한 자리를 빛내기에는 차기 황제만큼 적절한 파트너도 없을 터.
그래서 어렴풋하게 고개 드는 기대감을 애써 지웠었건만…….
‘이런 기회를 주실 줄이야.’
입매가 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네게 그 무엇이라도 달라 먼저 청할 생각은 없지만, 네가 준 이상 빼앗길 생각도 없다.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악마의 본성이 몸집을 부풀려 존재를 알렸다.
창틀에 걸터앉은 아가레스의 머리가 맹렬히 돌았다.
‘이브가 파트너 후보로 삼을 이들이야 뻔하지.’
멍청한 황태자와 모자란 용, 질척한 물 덩어리 정도.
‘아마 그들에게도 나와 같은 기회를 주었을 터.’
그중 가장 좋은 시간을 선사한 이를 파트너로 선택하겠지.
말 그대로 왕의 간택. 또는 성은(聖恩).
마계로 돌아간 그는 방대한 자료가 축적된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최고의 데이트가 되어야 한다.’
네 소중한 날 가장 가까운 곳에 서기 위한 욕심으로.
또 그것과는 별개로, 그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네게 가장 행복하길 바라는 염원으로.
***
그날 저녁.
보고를 올릴 건이 있었던 마르바스와 로노베는 한참 주군을 찾아 방황했다.
이바스 저택에도 안 계시고 마계의 집무실에도 안 계시니, 아무래도 땅콩의 집이나 비밀기지에 가셨나 보다 싶어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악마 라움이 주군께서는 서재에 계신다는 소식을 알렸다.
주군께서? 서재에? 책을? 말도 안 된다며 낄낄 웃던 마르바스는 까불거리면서 서재 문을 열자마자 냉큼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주군, 서재에 계시니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으…….”
“본론.”
“보고를 드릴 건이 있습니다.”
“바쁘다. 내일.”
흘끗 보아하니 주군께서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높이 쌓인 자료를 살피고 계신다.
로노베와 마르바스가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저럴 때의 주군을 방해했다가는 그대로 지옥행이다.
오래 살고 싶은 두 수하는 조용히 물러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주군께서 여전히 서재에 계신다는 말에 두 수하는 문을 똑똑 두드리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주군. 어제 못 드린 보고를 드리고자…….”
“바빠. 꺼져.”
단칼에 돌아오는 답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보니, 주군께서 어제와 정확히 같은 자세와 조금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훨씬 높게 쌓인 자료를 뒤적이고 계신다.
살짝 까치발을 들고 보니, 양피지에는 [계획]이라는 제목만 큼지막하게 쓰여 있을 뿐, 달리 내용이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나가라고.”
“예, 옙! 나가는 중이었습니다!”
마르바스는 그렇게 서재에서 쫓겨나자마자 경악한 표정으로 로노베에게 물었다.
“봤어?”
“주군께서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거?”
“무슨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거지? 설마 새해 계획인가?”
“그럴 리가.”
“그치, 그건 좀 아니지. 우리 주군께서 어떻게 하면 올해를 보람차게 보낼지 따위를 구상하실 리는 없지. 그럼 대체 뭐지?”
눈치 면에서는 마르바스보다 위인 로노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주군께서 저리 집중하시어 계획을 수립하실 정도로 주군을 곤란하게 하는 일이라…….
'그런 일은 그 밥풀과 관련된 일밖에 없을 텐데.'
그리고 그날 밤.
두 수하는 다시금 서재 문을 두드렸다.
“주군, 헉…….”
안으로 걸음을 내딛던 마르바스가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방 안이 진득한 마기로 가득 차 있다.
그를 상대로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가만히 부유하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이어서 식은땀이 흐르게 만드는 기운.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주군께서 크게 분노하시어 조절할 마음이 없으시거나, 깊이 집중하시어 갈무리하는 것을 깜빡 잊으시거나.
지금의 경우는 후자인 것 같다. 기별하였음에도 미동도 없으신 것을 보아하니.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로노베가 재빠르게 주변에 널린 책과 문서들의 제목을 살폈다.
마기에 질려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며 물러가려던 마르바스의 팔을 잡아채고, 로노베가 냉큼 무릎을 꿇었다.
“주군.”
“야, 너 미쳤어?”
로노베가 황급히 속삭이는 마르바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조용히 하라는 듯.
“주군. 감히 충심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자 아가레스가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로노베를 내려다봤다.
그 차가운 시선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로노베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주군께서 그리 고심하시는 이유가 혹시 그 밥풀과 관련된 일이 아닐는지요.”
“…….”
“밥풀이 올해 열일곱이 되었으니, 마땅히 성대한 데뷔탕트를 치르겠지요. 데뷔탕트에는 파트너가 필요한 법이고요.”
주군의 마기가 조금 전보다 약간은 옅어졌다. 아무래도 이게 정답이었나 보다.
로노베가 요염하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자신 있다는 듯 요요한 미소를 띤 채로.
“주군, 저는 몽마입니다.”
아가레스가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드디어 주군께서 반응하셨다!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로노베가 유려하게 말을 이었다.
“몽마는 인간의 꿈을 먹고 살지요. 그만큼 인간들의 문화와 정서에는 통달하였답니다.”
그러자 아가레스의 시선이 완전히 로노베에게 붙박였다.
“데이트부터 에스코트까지. 저보다 잘 아는 악마는 없을 겁니다, 주군.”
“……너 제법 쓸모 있었군.”
하늘 같은 주군의 칭찬에 로노베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에 가린 고아한 입매에는 씁쓸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한때 마음에 담았으나…… 감히 올려다보는 것조차 황공하여 미련한 미련 따위는 버린 지 오래다.
그저 아주 가끔, 사랑의 잔재가 따끔거리며 아직 다 타버리진 않았다고 존재를 알릴 뿐.
짧지 않은 기간 곁에서 모시며 연정보다는 충성심이 조금 더 앞서게 된 로노베가 애써 활짝 웃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주군께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살짝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비끼며, 아가레스가 말했다.
“……데이트.”
“데이트 장소, 경로, 시간, 날씨 등의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시겠군요.”
허락하에 가까이 다가간 로노베가 펼쳐져 있는 책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 책 이리 주셔요, 주군. 쓰레기입니다.”
타고나길 수많은 이성을 홀리는 몽마의 본능이 빛을 발했다.
우리 주군의 첫 데이트.
그리고…… 미우나 고우나 우리 밥풀의 첫 데이트.
쓰디쓴 이 감정과는 별개로, 로노베가 아껴 마지않는 그들의 첫 데이트는 완벽해야만 했다.
***
약속한 당일.
아가레스는 꼭두새벽부터 계획을 점검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얼른 이브에게 가고 싶은데.’
곁에서 보필하고 있던 마르바스와 로노베가 뭐라고 계속 종알거리는 것 같기는 하나, 왠지 잘 들리지 않았다.
‘이게 긴장이라는 건가.’
마찬가지로 이벨리아 역시 이른 아침부터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우리 토끼 빨리 오면 좋겠다.’
데이트, 데이트.
그 어감이 달콤해서 그럴까.
단 것을 한껏 들이켰을 때처럼 정신이 혼몽하고 명치가 울렁거렸다.
이벨리아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나 왜 이렇게 달달 떨고 있지?’
매번 만나던 토끼를 만나는 것뿐인데.
괜히 데이트 같은 이상한 절차를 덧붙이니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진다.
후우. 후우.
이벨리아의 방 안에는 한동안 깊은 심호흡 소리가 울렸다.
***
겨울과 봄의 경계치고는 바람이 부드럽고 볕이 따뜻하던 어느 날.
세상 거칠 것이 없던 대악마는 답지 않게 단정한 옷을 갖춰 입은 채로, 이 세계 속 유일하게 반짝이는 빛을 향해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들자 내려다보는 푸른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또 갈급하게 뛴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갈구하듯. 조심스럽게.
“네 하루를 내게 허락해줘, 이브.”
***
마치 여름이나 가을처럼 유난히 창공이 맑고 높았던 그날.
항상 편한 옷을 고수하던 이벨리아는 답지 않게 예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채로, 이 세계 속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친우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따뜻하게 맞닿아오는 금안은 늘 그렇듯 깊은 친애를 담고 있다.
그 맹목적인 다정함 때문일까.
온몸에 도는 훈기가 이대로 자신을 녹여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써 정신을 다잡은 이벨리아가 내밀어진 손을 살포시 잡았다.
“기다렸어, 내 악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