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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09화 (209/323)

##  209화: 정말 사랑한다고

아드니엘을 구한 엔리르와 접전지역 몇 군데를 돌파한 휴고가 각자 하르벤타의 별궁으로 달려오고 있던 그 시점.

치료 가능한 직종이라면 모조리 끌어온 이샤트의 성의 덕에, 이벨리아의 상처는 특히 깊게 남은 몇 군데를 빼고는 제법 회복된 상태였다.

기력 없기는 매한가지지만 아까보다는 살만하다. 이벨리아는 몽롱한 눈을 내리감으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우웅…….”

괜히 황제의 침상이 아니다. 따뜻하고 포근하여 만족스러운 신음이 샜다.

그러자 매서운 눈으로 곁을 지키고 있던 아가레스가 즉각 반응했다.

이벨리아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가, 가는 목에 손가락을 대고 뛰는 맥박을 재다가. 이내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의료진을 향해 까닥 손짓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 위명 높은 대악마라는 사실에 질겁해 있던 의료진이 우르르 침대 앞으로 달려왔다.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 선 의료진을 향해, 아가레스가 일갈했다.

“치료를 이딴 식으로 하나.”

“예? 분명 제대로…….”

“맥박이 빠르게 뛰잖아.”

앗, 이상하다. 조금 전에 쟀을 때는 분명 멀쩡하셨는데. 다시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떠오르신 건가.

어의가 조심스럽게 이벨리아의 손을 청하고는 손목에 손가락 두 개를 가져다 댔다.

두근. 두근. 두근.

아주 규칙적이고 평화롭게 뛰는 맥박이 예민한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어의가 아가레스에게 고개 숙이며 고했다.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정확히 같은 부분을 두 손가락으로 넉넉히 감쌌다.

쿵. 쿵. 쿵.

상당히 빠르게 뛰는 맥박이 느껴진다.

그가 눈을 찌푸리며 의사를 노려봤다.

“돌팔이로군. 나가.”

“아니, 분명 제가 잴 때는 멀쩡하셨는데!”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으나 악마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모양새다.

“내, 내가 악마 공인 돌팔이 의사가 되다니…….”

하르벤타 최고의 명의로 인정을 받아 황제 폐하를 모시길 어언 30년.

그 화려한 경력을 모두 부정당하고 한순간에 돌팔이로 전락한 명의가 어깨를 추욱 내렸다.

‘본인 잘못일 거라곤 생각도 안 하시는군.’

맥박이야 본디 기분 따라 달리 뛰기 일쑤인 것. 저런 준수한 외형의 악마가 손목을 감싸고 쓰다듬음에야, 다 자란 소녀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뛸 법도 하지 않은가.

그러나 의술 실력만큼이나 눈치도 발군인 어의는 섣불리 불경한 말을 내뱉지 않았다.

물러가는 의사를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이번에는 흰옷을 입은 신관에게 손짓했다.

마치 갓 태어난 양처럼 바들바들 떨며 신관이 성호를 그었다.

“오오, 전능하신 꽃의 신이시여. 부디 악마의 손아귀에 잡힌 이 어린 종을 가엾게 여기시고…….”

“별 잡신이 다 있군.”

신관의 신앙을 처참히 짓밟으며, 대악마가 명했다.

“꽃의 신인지 나발인지 모가지 따오기 전에 이브를 고쳐놔.”

마음 여린 신관이 훌쩍 눈물을 흘리며 신성력을 퍼부었다.

이후로도 숱한 의료진이 같은 행패의 피해자가 되었다.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악마의 욕심에 이벨리아의 몸 위에는 기력에 좋다는 약초, 회복력을 높인다는 신성 주문, 상처를 치유한다는 마법 등등이 쉴 새 없이 내려앉는 중이었다.

안 나으려야 안 나을 수가 없는 수준.

이불 밖으로 빼꼼 눈을 내민 이벨리아가 웅얼거렸다.

“의사들 그만 괴롭혀, 토끼.”

“여기 의사 없어. 죄다 돌팔이뿐이다.”

“인간은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별안간 벌떡 일어나진 못해. 그보다는 시녀들 좀 불러줘. 부탁할 게 있어.”

이벨리아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등을 조심스럽게 받친 아가레스가 기댈 쿠션을 놓아주었다. 한 손으로는 지체 없이 시녀를 부르는 설렁줄을 흔들면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들어와 이벨리아와 아가레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샤트가 자신을 모시듯 이벨리아를 모시라 명해둔 탓에, 시종들과 시녀들의 대우는 지극히 정성스러웠다.

“부르셨습니까, 공녀님.”

“응. 배고파.”

“조금 전 의원께서 며칠간은 미음을 드시는 것이 낫겠다 하셨습니다. 미음을 올릴까요?”

“어허.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공녀님?”

“잘 먹어야 잘 낫는 법.”

“하지만 의원께서…….”

“아이고오- 기껏 하르벤타를 구해놨더니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어서 굶어 죽게 생겼네- 아이고오-.”

“하, 하지만 혹시 드셨다가 탈이라도 나시면…….”

“탈 나기 전에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되겠다-.”

시녀가 당황했다. 타국의 공녀님께서 제대로 진상을 부리신다.

좀 말려주십사 대악마님을 바라봤으나, 저세상의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금안은 그저 어서 명을 따르라 종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드셨다가 탈이 나시면 황태녀 전하께 경을 칠 것이나, 대령하지 않으면 저 대악마께서 날 썰어버리실 것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시녀가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에게 말했다.

“아까 그 의사는 돌팔이가 맞나 봐. 아프다고 미음이나 먹으라니. 그게 돌팔이가 아니고 뭐야.”

“맞는 말이다. 아플수록 잘 먹어야 빨리 낫지.”

“봐. 악마도 아는 인간의 진리를 의사가 모르다니.”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고소한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크기가 작은 별궁이다 보니, 본궁처럼 먼 곳에 조리실이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에르카디아를 뛰쳐나오고 하루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힘만 펑펑 써댄 이벨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냄새 좋다…….”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이벨리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아가레스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친구를 달래던 악마가 그대로 딱 굳어버렸으나, 이벨리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이벨리아가 종알거렸다.

“지금 이 냄새는 돼지고기야. 분명해.”

“……배가 고프니 침대에 앉는 건 어떨까, 이브?”

“앗, 이건 소고기 냄새다! 굽지 않고 찌고 있나 봐.”

“……침대에 앉는 건 싫어?”

“토끼야, 토끼야, 이건 닭을 튀기는 냄새야.”

“…….”

너 일부러 이래?

밀접한 접촉에 또다시 심장이 불편하게 뛰기 시작한다.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괜히 신경 쓰인다. 네게 들릴까 봐.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 티 낼 수도 없는 상태.

손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도 난감했다.

친구의 등에 올리자니 뭔가 부적절해 보이는 것 같고. 그렇다고 가만히 늘어뜨리자니 부자연스럽고.

결국, 아가레스는 마치 항복이라도 하는 자세로 두 손을 허공에 올렸다.

이벨리아가 그리도 기다리던 음식이 대령될 때까지, 계속.

***

한편 딸이, 그들의 아가씨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에 사색이 되어 달려온 휴고와 기사단은, 별궁 내 황제가 쓰는 방문을 쾅 열어젖혔다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이브?”

“……아가씨?”

적지 않게 다쳐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이벨리아가, 얼굴과 입가에 고깃기름을을 묻힌 채로 커다란 닭다리를 뜯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세차게 열린 문을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이내 아빠와 기사들을 발견하고는 닭다리 든 손을 반짝 들었다.

야무지게 쥐어진 닭다리가 불빛을 받아 성화(聖火)처럼 반지르르 빛났다.

“어서 와, 아빠와 멍멍이들!”

내가 떠났다는 건 금방 알아챘을 테니 신속하게 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실라페를 타고 날아왔던 것과 큰 차이 없이 도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청 빨리 왔네?”

반가워 활짝 웃자 상처가 남아 거즈를 붙여둔 볼이 아리다.

딸의 모습을 기민하게 살피던 휴고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자신도 잘못한 것은 알고 있어서, 이벨리아가 시선을 슬슬 바닥으로 내렸다.

‘히익, 아빠 표정이……. 이번에는 진짜로 혼나겠다!’

차원이 다른 대형 사고를 치긴 했으니까.

‘자수해서 광명 찾자!’

이벨리아가 닭다리를 내려두고 냅다 두 손을 모았다.

“아빠, 잘못했…….”

- 와락.

이벨리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휴고가 딸을 꽉 끌어안았다.

이내 어깨 위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한 방울, 두 방울, 천천히 떨어진다.

“……아빠?”

커다란 몸이 울음을 삼키며 떨리자, 품에 안긴 이벨리아의 몸도 함께 바르르 떨렸다.

아빠가 느낀 공포와 좌절이 부족함 없이 전해진다.

늘 거목처럼 단단했던 아빠다. 이벨리아는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자신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아빠, 미, 미안해. 아빠아…….”

덜컥 겁먹은 이벨리아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히끅, 잘못했어. 울지 마. 미안해. 잘못했어…….”

“…….”

자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가족들이기에, 그들의 걱정에는 상한선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얼마나 오만한 오인이었나.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멋대로 재단하고 넘겨짚었다.

이벨리아는 절절하게 깨달았다.

‘나 진짜 못된 짓 했구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처를 줬구나.’

혼이 나진 않았으나 외려 그 어느 때보다도 제대로 심장에 박혀 드는 교훈.

미안해. 미안해. 잘못했어.

이벨리아는 연신 사과했다.

딸 걱정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이 먼 길을 달려온 아버지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

휴고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제인지.

아마 엘리시아가 그만 헤어지자고 말했던 때였나…….

그래,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날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려낸 휴고가 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몸은.”

“괜찮아요. 다 치료받았어.”

“……다시는 이러지 말거라. 네 마음 편하자고 여러 사람 마음을 이리 헤집어 놓으면 되겠느냐.”

고개를 끄덕이며, 이벨리아가 휴고에게 두 팔을 뻗었다. 그러자 휴고는 마치 잠시 밖에 내놓았던 심장을 되찾은 것처럼 딸을 품에 안았다.

둘의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이 보이자,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기사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가씨이-!”

“하이고, 우리 아가씨 상처 난 것 좀 봐라-!”

“조금 크셨다고 이렇게 돌발행동 하시깁니까? 예?”

“크시긴 뭘 크셔! 아직도 병아리콩만큼 작으신데!”

“아가씨, 이것들은 다 버리고 가시더라도 저만큼은 꼭 데리고 가주십시오. 저는 아가씨께서 선택하신 호위 기사 아닙니까.”

“다 버리고 가시라니. 카론 너 말을 굉장히 이상하게 한다?”

“경보단 제가 도움이 될 게 확실하니까요.”

“이게 먹여주고 길러준 은혜도 모르고! 한 판 붙어? 앙?”

이곳으로 오는 동안 바짝 긴장했던 기사들 역시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벨리아는 눈물 뿌앵 콧물 질질 흘리면서 침대 곁에 옹기종기 주저앉은 멍멍이들을 다독여 주었다.

그때였다.

- 쿠웅! 쿠웅!

궁벽의 바깥쪽에서 커다란 타격음이 들리더니…….

- 쿠르르릉.

이내 궁 전체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으앗!”

“아가씨. 잠시 이불을 덮고 계십시오.”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자 헤롤드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서 인 자욱한 먼지가 열린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안 돼! 내 밥!”

기겁한 이벨리아가 손에 잡히는 접시 하나를 황급히 품 안에 끌어안았다.

다른 음식들은 이미 늦은 뒤였다. 먼지를 뒤집어쓴 고기들이 처참히 널브러졌다.

이벨리아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내 밥…… 나 집 떠난 이후로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모습.

서럽게 삐죽이는 이벨리아의 입술을 본 아르티나 기사단이 곧바로 칼을 빼 들었다.

“감히 우리 아가씨 식사 시간에 먼지를 풍겨?”

……너희가 창문 열어놓고선.

“으른이 식사를 하시는데 이 버릇없는 새끼들이.”

……계속 알짱거리면서 먹는 걸 방해한 게 누군데.

“족쳐라.”

“죽여라.”

자신들의 잘못을 냅다 마족들에게 전가한 기사단이 우르르 달려나갔다.

그 꽁무니에 대고, 이샤트의 시종 하나가 간곡히 외쳤다.

“기사님들! 제발 이 별궁만큼은 무너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걱정 마라! 그런 극악한 짓은 안 한다!”

“그래, 우리를 어디 사는 어떤 악마와 똑같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쟁터를 누빈 베테랑. 부숴야 할 것과 부수지 말아야 할 것은 명확히 구분한다.

의기양양 별궁 아래로 내려간 기사단이 빠른 속도로 마족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들 수도에서 도망치다가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런 것 같군. 수도가 슬슬 정리되고 있는 모양인데.”

답하며 헤롤드가 바스타드 소드를 공기 중으로 날렸다.

늘 그렇듯 무거운 파공음을 내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가 마족 수십을 베어내고서 되돌아오던 대검.

문제는 하필 그 궤도에 자리를 옮긴 카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눈을 찌푸린 카론이 자신의 목을 향해 달려오는 대검을 롱소드로 퍽 내쳐버렸다.

그러자 궤도에서 이탈한 대검이 빙글빙글 돌면서…….

- 콰아아아앙.

별궁 한 귀퉁이에 박혀 들었다.

그것도 하필 기둥에.

“…….”

“…….”

다행히 하중을 분산하는 예비 기둥이 있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별궁이 전체적으로 사선으로 조금 많이 기울었다.

헤롤드가 난감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바로 조금 전에 극악한 악마 욕을 실컷 해놓고서 이번엔 내가 망가뜨려 버렸네?

“하. 하. 하. 요즘 기울어진 궁이 유행이라지! 하. 하. 하!”

과실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는 카론도 거들었다.

“그렇습니까? 어쩐지, 기울어지니 한층 세련됐군요.”

그 뻔뻔한 작태들. 악마도 일자리를 잃게 할 진정한 악마들.

이샤트의 시종이 털썩 주저앉았다.

한편, 먼지 쌓인 그릇들이 난데없이 생긴 경사면을 따라 저쪽 바닥으로 스르르 흘러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유일하게 지켜낸 강낭콩을 오물오물 씹었다.

‘아빠는 사방위의 성벽을, 토끼는 황궁을, 기사들은 별궁을 무너뜨렸어.’

이쯤 되면 아무래도…….

이벨리아가 소리 낮춰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있지, 우리 사실 원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던 거야……?”

“…….”

***

이벨리아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별궁을 반쯤 기울여버린 휴고와 기사단은 다시 수도로 출정했다.

기왕 도와주러 온 것 제대로 도와주고 생색도 부족함 없이 내서 뜯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뜯어낼 생각이었다.

하여 하르벤타의 별궁, 늦은 새벽.

밖은 간간이 소란함이 들리는 가운데, 이벨리아가 누운 방에는 아가레스와 엔리르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함께 누워서 쉬자고 조르는 바람에 아가레스는 오른쪽, 엔리르는 왼쪽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채로.

아드니엘을 대충 아무 데나 던져두고 홀로 이벨리아를 찾아 날아온 엔리르가 뿌듯하게 가슴 털을 부풀렸다.

“누나. 누나.”

“응?”

“나 엄청 세다.”

“알지. 우리 엔리르는 용이잖아.”

“맞아. 나는 용인데, 용 중에서도 아마 굉장히 센 용일 거야.”

“네 동족 다 멸종해서 없다고 말 지어내지 마라.”

“……재수 없는 악마 새끼.”

“뭐라고 했냐. 핏덩어리 용이.”

“내가 균열에서 쏟아진 마족들을 한 번에 다 없앴다고."

“난 제3악마를 없앴다.”

“내가 오늘 뭘 깨달았는지 알아?”

“돌대가리로 깨닫긴 뭘 깨달아.”

“너랑 싸워도 내가 승산 없진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어.”

“한참 잘못 깨달았으니 돌대가리 맞군.”

“……누나. 쟤 죽여도 돼?”

“이브. 이거 죽여도 돼?”

“…….”

굉장히 특별한 사건 속. 너희가 있으니 또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되기도 한다.

죽이니 살리니 으르렁대는 악마와 용의 소란이 마치 자장가처럼 달다.

낯선 곳임에도 마치 익숙한 곳에 있는 것처럼.

이벨리아는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내 친구들. 망설임 없이 늘 나와 함께 달려주는 소중한 존재들.

그 따스함과 포근함에 이벨리아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악마와 용이 입을 다물었다.

이내 용이 말랑한 앞발로 이벨리아의 손을 다독이고, 악마는 작게 자장가를 흥얼거린다.

반쯤은 꿈속을 헤매면서, 이벨리아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말했었나…….”

“……?”

“……정말 사랑한다고.”

이내 깊은 수마가 이벨리아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정말 긴 하루였다.

***

그날 이른 새벽.

전쟁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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