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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08화 (208/323)

##  208화: 위대한 용에게는 칭찬이 필요해

휴고와 아르티나 기사단은 황궁에, 아니, 한때는 황궁이 있었던 곳에 도달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들이 부숴 먹은 성벽이나 토지가 한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궁을 부순 것은 완전히 결이 다르다. 기사들이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그새 하르벤타의 황궁이 이전이라도 했나……?” (#헤롤드)

“저 잔해 더미를 보아하니 무너진 것 같습니다.” (#카론)

“헤엑. 어떤 악독한 악마가 황궁까지 부쉈대?” (#알렉)

“그 제3악마 우리 생각보다 훨씬 독한 놈이었군.” (#드웬)

“그러게.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이 있는데 황궁을 다 부수다니.” (#헤롤드)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더라도 황궁을 무너뜨리는 일은 흔치 않다.

부수기보다는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였을 때 추후 정통성도 이어받고 자원도 아끼게 되니까.

상당히 이례적인 일에 눈을 찌푸리던 휴고는 황궁이었던 것의 잔해 앞에 서 있는 하르벤타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황제는 짙은 피곤이 드리운 얼굴로 그들을 환대했다.

“상황이 이래서 미안하네. 그대들의 호의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야.”

“빚 하나 달아둔 것으로 하겠습니다. 훗날 갚으시지요.”

“물론일세. 오는 길에 이미 많은 지역을 정리해주었다 들었는데.”

“눈에 띄는 곳 몇 군데만 뚫고 지나왔습니다. 그나저나, 제 딸은 어디 있습니까.”

“……차분하게 듣게, 공작.”

차분하라는 경고가 외려 휴고의 눈을 돌게 만들었다. 아무 일도 없다면 이런 말이 앞에 붙을 리가 없지 않나. 그가 황제에게 바짝 다가섰다.

“어디 있습니까. 지금.”

“내 별궁에서 쉬고 있네. 동(東)마계의 지배자와 함께.”

“제 딸은 굳이 이곳까지 와서 쉬러 갈 성격이 아닙니다만.”

공작의 딸 사랑은 바다 건너 하르벤타까지 정평이 나 있다. 닥쳐올 공작의 분노에 대비하며 황제가 심호흡하며 말했다.

“그게, 공녀가 제3악마를 상대하다가 조금 다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소식 전달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 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얼마나.”

“……어의의 말로는 적지 않게 다쳐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당장에라도 황제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손을 움찔거리던 휴고는 황제 곁에 서 있던 시종 중 하나의 목덜미를 들어 올려 자신의 말 앞에 앉혔다.

“으아악-!”

“안내해라.”

감히 황제의 시종이 허락도 없이 이탈한다는 건 굉장한 무례였다.

어쩌면 좋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종을 향해, 황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은인이시다. 부족함 없이 안내하도록.”

시종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휴고의 말 뒤를 따르며, 헤롤드가 황제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 아가씨께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셔야 할 겁니다. 하르벤타의 황제 폐하.”

“…….”

“그렇지 않다면, 하르벤타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끝내 멸망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외교 따위. 우방 따위. 그딴 건 모른다. 그는 깊은 교육을 받지는 않은 기사였다.

하여 하르벤타의 황태녀가 공식적인 루트도 아닌 얌체 같은 방법으로 우리 아가씨를 불러낸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침을 탁 뱉으며, 헤롤드가 주군의 뒤를 따랐다.

***

에르카디아의 원군들이 하나둘 하르벤타의 전장에서 날뛰기 시작하였을 무렵.

에르카디아에 머무는 이들 역시 그리 여유롭게 앉아 관망만 하고 있진 못했다.

특히 국외 정보를 담당하는 첩보 부서는 눈코 뜰 새 없이 하르벤타의 전황을 수집하는 중이었다.

에르카디아를 대표하는 최고 전력들이 지원군으로 출정하였으니 잘 처리하고 돌아오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까딱하면 하르벤타가 무너지고 에르카디아가 다음 순서가 될 수 있는 상황.

혹자는 이참에 전쟁의 상흔이 남은 하르벤타를 속국으로 삼는 것은 어떠냐 의견을 냈으나, 단번에 묵살당했다.

점령과 통치는 엄밀히 별개의 문제.

하르벤타를 날리고 동대륙의 패권을 쥐려면 에르카디아 역시 상정 외의 막대한 자본과 군사력을 투입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힘이 분산된 두 제국 영토에서 왕국 잔당들이 날뛰어 다시금 전국(戰國)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따라서 아직은 하르벤타가 제대로 버텨줘야 에르카디아 역시 패권의 선두로서 안정적인 치세를 이어가기 용이하다.

하여 소식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자 황제 이하 유수의 귀족들이 모두 모인 회의장.

벌써 하루 이상을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한 귀족들은 초췌한 모습으로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폐하-! 급보입니다!”

“폐하-!”

“하르벤타로부터-!”

황실의 첩보부, 귀족 가문의 정보부, 국경의 전령들, 하르벤타의 파발로부터 쉴 새 없이 급보가 날아들었다.

루드비히 역시 황제의 지척에 앉아 초조한 표정으로 전서구를 살폈다.

이번에 펼친 전서구는 간결하면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부의 지배자 현현. 아르티나 공녀 구출. 제3악마 괴멸.」

잠시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으로는 짙은 안도가. 또 한편으로는 속절없는 무력감이 밀려든다.

불과 하루하고도 반나절 전이었다.

숨죽여 연모하고 있는 이가 홀로 출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옷매무새도 정리하지 않은 채로, 루드비히는 정신없이 황제의 집무실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더랬다.

“폐하, 출정하게 해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연모하는 이가 그곳에 홀로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인 이유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황제는 목 끝까지 차오른 다녀오라는 말을 어렵게 삼켰다. 그와 그의 아들은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됐다.

부러 서늘한 표정으로, 황제는 자신보다 올곧게 사랑을 마주하는 아들을 내려다봤다.

“이건 단순한 토벌이 아니다. 하르벤타의 명운을 건 전쟁이나 다름없어.”

“알고 있습니다.”

“타 제국 전쟁에 황태자를 원군으로 보낸다? 한낱 왕국도 그런 정신머리 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우스워 보일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네 체면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 짐이 걱정하는 건 네 목숨이야.”

“고작 악마에게 목숨을 잃을 정도로 헛되이 수련하진…….”

“틀렸다.”

“……?”

“악마가 아니야. 만일 하르벤타의 황제가 널 인질로 잡는다면. 만에 하나 아르티나가 널 배신한다면. 간도 쓸개도 뺄 것처럼 성문을 열어준 병사들이 네 뒤에 칼을 꽂는다면. 악마를 향한 것처럼 쏘아진 화살이 실은 네 미간을 노린 것이라면.”

“……폐하.”

“모두 역사서에 숱하게 기록된 황족의 서거 사유다.”

“…….”

“어리석게 굴지 말거라, 루드비히. 황태자란 그런 자리다.”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던 황제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감정을 버려라, 아들아. 아무리 공녀를 연모한다 한들, 만일 혼약을 올린다 한들, 그것이 이 제국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될 말이다.”

“…….”

“버릴 수 없거든 이 황좌를 버리거라. 차라리 그것이 제국을 위한 길이니.”

황제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한 루드비히가 전서를 꽉 쥐었다.

억압하고 짓누르는 모든 것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회의장 내의 소음이 마치 먼지처럼 혼몽하게 부유했다.

네가 없으면 나는 제정신으로 이 제국을 통치할 수 없다.

그런데도 네가 제국보다 우선일 수 없다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황좌를 내던지고 곧바로 뛰쳐나가지 않은 이유가. 이 지긋지긋한 자리를 끝내 놓지 못하는 이유가…… 전부 너를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너는 이해해줄까.

만일 에드윈이 차기 황제가 되고, 이세르나 백작이 그 측근이 되고, 데퐁트 후작가가 외척이 된다면.

그렇게 되면 지금과는 달리 너에 대한 탄압도, 아르티나에 대한 압박도 적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저 오물투성이 황좌를 꽉 움켜쥐고 그저 너와 네 가문을 지금처럼 안녕히 머물게 해주고 싶다고.

네가 알아줄 것인가 끝내 모를 것인가.

받아 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감히 말하건대, 사랑은 대가 없는 헌신마저 오롯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하였으니.

새 아침을 알리는 희뿌연 여명을 그대로 받아내며 집무실로 돌아온 루드비히는 이벨리아가 준 선물들이 담긴 보석함을 천천히 쓸었다.

부디 나의 우정이 얕다고 생각하지 말아줘.

황위에 올라 제위가 끝나는 그 날까지. 나는 이 제국 가장 높은 자리에서 오로지 네가 평안에 거하도록 할 테니까.

***

한편, 엔리르가 도우러 갔던 아드니엘의 전장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참전한 용이 팔짱 끼고 구경 중이라는 것.

그 방증으로, 사령관의 비명은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중이었다.

“으아악! 아드니엘 죽네!”

“안 죽네.”

“아악! 죽는다!”

“안 죽는다. 신기해.”

그리고 그 옆에서 엔리르는 마치 추임새를 넣듯 한마디씩 얹고 있었다. 인체의 신비를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저 빌어먹을 용이!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아드니엘은 간절한 표정으로 엔리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위대하신 용-.”

“스읍.”

엔리르가 경고하듯 눈을 살벌하게 찌푸렸다.

맞다. 이분이 용인 건 비밀이었지. 여기서 말 잘못 뱉었다간 용한테까지 두들겨 맞는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다분하다. 퍼뜩 정신 차린 아드니엘이 황급히 말을 바꿨다.

“용…… 요옹 요옹 죽겠지!”

용에서 말을 맺지 않으려는 혼신의 노력이었건만. 그걸 들은 마족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아드니엘을 밟기 시작했다.

- 키에에에엑!

- 크르르르륵!

어떤 양심 없는 마족이 자꾸 때린 데 또 때리고 찌른 곳 또 찌른다. 머리를 감싸 쥐며 아드니엘이 버럭 소리쳤다.

“으아악! 살려주십시오! 도와주러 오셨다면서요!”

“응. 그렇기는 한데.”

“그럼 마법이라도 좀 써주십시오!”

“안 돼. 내가 요…… 여우인 거 들키면 큰일 나. 나는 우리 누나의 비밀병기야.”

“그럼 왜 오셨는데요!”

팔짱 낀 엔리르가 당당히 답했다.

“말했잖아, 도우러 왔다고.”

“안 돕고 계시잖아요, 지금!”

“네가 죽을 것 같으면 들고 튈 거야.”

아니, 조금 전엔 신의 강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멋들어지게 등장하고선 이게 할 말이야?

어이가 없어진 아드니엘이 헛웃음을 쳤다. 이거 농락이 따로 없다.

“당신 지금 누가 봐도 인간이잖아!”

“반말?”

“인간이잖아요! 마법 쓰시면 그냥 인간 마법사인 줄 알겠지요!”

흐음. 엔리르가 붉은 머리칼을 나른히 쓸어올렸다.

이 거북이 등껍질 인간이 하는 말이 영 틀리진 않다.

인간들 수준의 적당한 마법만 써서 이것들을 모두 처치하고 거북이를 데려가면 누나가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겠지.

“좋아. 결심했다.”

오른손을 살짝 들어 마나를 일으키려던 엔리르가 잠시 멈칫하고는 아드니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자야. 근데 어느 수준의 마법을 써야 적당해?”

“……전 마법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는데요.”

“나는 여우라서 잘 모르는데.”

고민하던 용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간들은 빌어먹게 약하니까 대충 저 아래 있는 마법을 골라 쓰면 될 터다.

엔리르는 5계급과 6계급 언저리에 걸쳐 있는 마법 중 하나를 불러냈다.

최대한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용에겐 필요 없는 영창까지 수고롭게 읊으면서.

「여기서 모든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것이 니벨룽(Nibelungen)의 노래.」

그러자 발뭉(Balmung), 옛 신화 속을 풍미한 영웅의 검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꽂히고.

탁, 엔리르가 발을 구르자 찬란한 빛을 등지고 쏜살같이 달려나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부족함 없는 마력을 받은 영웅의 검이 마치 전설을 썼던 그 전장처럼 적을 학살했다.

그 살풍경 한가운데 태연히 선 용이 팔짱을 끼고 죽어가는 마물들을 바라봤다.

“난 이 마법이 참 좋아. 손잡이가 꼭 우리 누나를 닮았잖아.”

황금으로 빚은 손잡이에 시리게 박힌 푸른 보석.

마력을 공급하는 주인의 말을 들었는지, 발뭉의 푸른 보석이 한층 더 맑게 반짝였다.

한편 마족들은 자아를 가진 것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는 검을 피해 혼비백산 도망쳤다.

“크륵. 마법이다.”

“대단한 마법이야.”

“하르벤타의 마법사들은 모두 다른 전장에 갔다고 했는데!”

개중 가장 선봉에 선 마족이 막대기를 붕붕 휘두르며 엔리르를 노려봤다.

“저자는 인간이 아니다!”

“나 인간 맞아. 연약한 인간.”

“거짓이다! 저 마법은 니벨룽의 서사 한 구절을 모두 읊어야 하는 것! 저자는 고작 마지막 문장만 읊고도 발뭉을 불러냈다!”

“……그으래?”

그건 몰랐지. 영창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본 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뭐. 들켜버렸으니까…….”

엔리르가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죽여야겠다.”

손가락을 튕겨 아드니엘의 기사들을 모두 재워버린 용이 손을 뻗었다.

제대로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굳이 낮은 계급의 마법을 가지고 놀 생각은 없다.

오른쪽 눈을 살짝 찡그리자 나타나 허공에 궤적을 그리는 것은…… 과거 그 어느 신의 피를 담았다고 전승되는 성배(聖杯).

투박하고 녹슨 장식의 그것이 창공에서 흔들리다가 이내 쏟아져 땅 위의 마족들을 흠뻑 적셨다.

불길한 느낌에 닿은 물방울을 황급히 털어내는 마족들을 오시하며, 엔리르가 읊었다.

「너희 죄를 사하고자 내가 흘린 피를 받은 이들아.」

성배의 물이 닿은 곳에서부터 마족들의 살갗이 타들어 갔다.

「받아 달리 행하였다면.」

균열 앞. 선두에 선 마족부터 저 뒤에 선 마족까지 일제히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마땅히 죄를 물으리라.」

7계급 신성 마법.

신벌(divine judgment).

성배에서 흩뿌려진 물을 단 한 방울이라도 묻힌 이가 생명을 해한 적 있다면 구제할 길 없이 소멸하는, 성유물에 의한 판정 마법.

치이이이익-. 바닥에 남은 마족들의 잔해마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균열 앞은 삽시간에 텅 비었다.

아드니엘과 친위대가 마주하던 적들은 애초에 없던 듯 증발했다.

다시금 손가락을 맞부딪혀 기사들을 수면에서 깨우며, 엔리르가 멍하니 엉덩방아 찧고 앉은 아드니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누나한테 칭찬받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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