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아스 왜 얼굴이 빨개?
쉬이 진정되지 않아 여전히 불안정하게 휘몰아치는 마음과는 달리, 아가레스는 이벨리아의 볼에 남은 먼지를 조심스럽고 규칙적인 손길로 쓸어내렸다.
“원하는 걸 말해, 이브.”
“으응?”
“이곳에 있고 싶은지, 쉬고 싶은지, 에르카디아로 돌아가고 싶은지.”
“……아직 돌아가고 싶진 않아. 하지만 쉬고 싶어.”
돌아간다고 했으면 가장 좋았겠으나 이것도 나쁘진 않다.
제법 흡족한 답을 들은 악마가 이벨리아를 소중히 안고 이샤트를 돌아봤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의 의미는 명확했다.
내 주인께서 쉬고 싶다고 하시니 네 제국에 남은 가장 좋은 안식처를 제공해라.
목숨이 경각에 달려 빠릿빠릿하게 의미를 알아챈 이샤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의 제 방으로…… 아차, 황궁 폭삭했지.”
“…….”
아가레스의 눈썹이 불길하게 꿈틀대자, 이샤트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멀지 않은 곳에 폐하의 별궁이 있습니다!”
“깨끗한가.”
“그럼요.”
“안전하고?”
“당신이 계시면 어딘들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대번에 납득한 아가레스가 이샤트에게 턱짓했다. 어서 안내하라는 뜻.
다른 국지전에 뛰어들 생각 따윈 일절 없었다. 그에게 하르벤타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그가 의미 두는 건 오로지 이벨리아의 평안뿐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샤트는 말 한 필을 아가레스의 앞에 대령하고, 자신은 다른 말에 올라탔다.
몸이 번쩍 들리는 감각에 이벨리아가 흐릿하게 눈을 뜨고 웅얼거렸다.
“……이샤트, 우리 직접 데려다주게?”
“당연하다. 왕도(王都)를 지켜준 은인을 아무나 붙여 안내할 순 없지.”
“아직 전쟁 안 끝났는데…….”
“공녀가 제대로 쉴 수 있도록 자리만 정리하고 바로 뛰쳐나올 생각이다.”
확고한 대답에 이벨리아가 느리게 끄덕이며 자신을 포근히 받치고 있는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
자연히 목덜미에 와닿는 작은 숨결이 더워, 아가레스의 귓가가 옅게 붉어졌다.
작게 헛기침한 아가레스가 시선을 살짝 내려 친우를 바라봤다가, 가까이 맞닿는 얼굴에 화들짝 놀라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펴, 크흠, 편해?”
“응. 편해.”
“춥진 않아?”
“응. 따뜻해. 아스가 뜨거운걸.”
묻고 답하자 다시금 목덜미에 간질이는 숨결이 와닿는다.
아가레스는 자칫 이벨리아를 떨어뜨릴 뻔한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나란히 말을 달리던 이샤트는 흘끗 아가레스의 눈치를 봤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히익. 대악마님 얼굴이 빨갛다. 어마어마하게 분노하셨음이 분명하다.’
어쩌지. 지금은 드릴 게 없는데. 안절부절못하던 이샤트가 어물어물 말했다.
“저기, 감사합니다.”
“네게 인사받을 이유 없다.”
“물론 공녀를 구하고자 하셨겠지만, 그 덕에 반사적으로 저희 역시 제국을 구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멋대로 공녀에게 도와달라 청해서…… 아마 대단히 화가 나셨을 텐데 살려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몽롱한 귀로 그 말을 들은 이벨리아도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였다.
우리 토끼가 대단히 화가 났다고?
천천히 시선을 올리니 붉어진 얼굴과 경직된 턱이 보인다.
평소 늘 여유롭기만 하던 토끼에게서는 도통 볼 수 없던 표정.
‘그렇네, 화난 것 같네.’
내가 혼자 이곳으로 달려와서? 혹은 너무 아슬아슬했던 순간에 토끼를 불러서?
날 좀 보시라 톡톡 가슴팍의 옷자락을 당기니, 아가레스가 늘 그랬듯 곧바로 눈을 맞췄다.
그러나 화났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곧바로 고개 들어 시선을 피해버린다.
게다가 언뜻 스친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인 것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화났네!’
아가레스에 대해서는 단연 이 세계 최고 권위자인 이벨리아가 식은땀을 흘렸다.
‘하긴, 나 같아도 아스가 혼자 위험한 곳에 뛰어든다면 찰싹 등을 내리쳤겠지.’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니 그 심정이 절절하게 이해된다.
제 발 저린 도둑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아가레스를 불렀다.
“토끼야아…….”
여전히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가레스가 답했다.
“응.”
“호옥시 화났어?”
“네게? 그럴 리가.”
“그러면 왜 나를 안 봐?”
“…….”
단단한 팔이 움찔 경련했다.
어떻게 말하겠나. 너와 너무 가까이 맞닿아서 못 보겠다고.
짧지 않은 시간 곁을 지키며 늘 잘만 봐놓고, 인제 와서 그런 이유를 대봤자 이상하기만 할 터다. 실제로 자신조차 이게 무슨 변고인가 싶으니까.
하여, 아가레스는 그나마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이유를 황급히 가져다 댔다.
“대단히 섭섭해서. 날 늦게 불렀잖아.”
“대, 대단히?”
“응. 몹시. 아주. 많이. 굉장히.”
“…….”
이런. 토끼를 알게 된 뒤로 이 정도 강조어를 듣는 건 처음이다. 허공에 손이 딱 굳은 채로 이벨리아가 푸른 눈을 깜박였다.
한편 아가레스 역시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본래 느낀 감정을 황급히 숨기려다 보니 누가 봐도 수상한 수식어들이 줄줄 나오고야 말았다.
귓가까지 발개진 채로 아가레스가 말을 돌렸다. 방금 내뱉은 그 부자연스러운 수식어엔 다 이유가 있다는 듯 태연하고도 당당한 척 연기하면서.
“또 이럴 거야?”
“아니이…….”
“대답에 자신이 없는데.”
“혹시 아스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게 너보다 우선은 없다는 걸 이젠 알아줄 때도 됐지, 이브.”
모르진 않는다. 아무리 무던해도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는 내게 보여줬으니까.
부정은 기만이다. 친구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치 위로하듯 담백하게.
“내 토끼.”
“…….”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걱정 안 시킬게.”
그 따뜻한 체온이 악마의 걱정을, 당황을, 민망함을, 불안함을, 그 모든 감정을 깨끗하게 지워냈다.
항상 그랬다. 네 작은 어떤 것이든 내게 와닿으면 나는 늘 그랬다.
세계도 하늘도 감정도 모두 저 먼 어딘가로 흘러가고 그저 너만 존재한다. 오로지 너만.
먹먹한 목소리로 악마가 애걸하듯 말했다.
“……모든 것이 어그러져도 난 견딜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
“하지만 온 세계가 순리대로 돌아가더라도 네가 없다면 난 못 견뎌. 단 하루도.”
내 등불. 나침반. 북극성.
길을 비추고 가리키고 이끄는 그 모든 것이 너라서.
이내 악마가 염원하던 답이 들려왔다.
“앞으로는 덜 위험할 때 꼭 부를게. 약속이야.”
“응. 약속이야.”
“이제 화 풀렸으면 나 좀 봐봐.”
“……안 돼.”
“왜애.”
“……이따 볼게. 조금만 있다가.”
내가 어떤 표정으로 너를 봤었더라. 문득 기억이 나질 않는다.
미묘하게 엇나가는 심장 박동과 손 닿지 않는 깊은 어딘가에 느껴지는 간지러움.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다 네 숨결이 너무 더워서 그렇다.
이 열기가 조금 식으면 다시 올곧게 바라볼 수 있겠지.
세계 모든 바다 중 유일하게 아름다운 네 눈을.
***
무너져버린 황궁에서 약 30분가량 말을 타고 달렸을까.
황궁보다는 훨씬 작지만, 편히 쉬기엔 부족함 없는 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야. 본궁보단 작지만 나름 쉴 만할 거다.”
앞서 들어간 이샤트는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에 떨고 있는 시종들에게 말했다.
“에르카디아 제국의 아르티나 공녀와 루페르트 후작이다.”
“……!”
“……!”
시종들이 꿀꺽 침을 삼키며 움츠렸던 어깨를 바로 세웠다.
황태녀 전하께서 데려오시길래 누구신가 했더니, 예상보다 더한 거물이다.
“공녀는 우리 제국을 돕다가 상처를 입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를 대함과 한 치 다름없이 성심으로 모시도록 하라.”
“예, 전하-!”
한마음 한뜻으로 답하며 시종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얼굴엔 짙은 안도가 들어찼다.
기실 모든 인력이 수도 중심부와 황궁에 몰려 있어 인적 드문 별궁에 머무는 것이 두려웠던 차다.
한데 대정령사로 명성 자자한 아르티나 공녀와 그 유명한 루페르트 후작이 함께 머문다면, 만일의 상황에 목숨 건질 확률이 가파르게 상승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은인이자 동아줄을 대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따뜻한 수프를 데웠다.
이샤트 역시 이벨리아가 안내받는 방으로 따라 올라가, 손수 이곳저곳을 점검했다.
“방을 더 따뜻하게 하도록.”
“예, 전하.”
“커튼은 닫아. 공녀는 자야 하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신관. 치료사. 마법사. 약초사. 뭐든 치료에 유능하다 정평 난 자들을 데리고 와.”
“바로 거행하겠습니다, 전하.”
“이 이불은 별로군. 폐하께서 쓰시는 걸 가지고 오도록.”
“예, 예에?”
“아니다, 이참에 그냥 폐하의 방으로 옮겨. 거기가 가장 좋은 방이잖아.”
“하지만……!”
“하지만은 개뿔. 공녀가 안 왔으면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어. 어서.”
그렇게 이샤트의 강압 아래 이벨리아가 무려 황제의 방을 점령하고 드러누운 찰나였다.
방 밖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쿵쿵 가까워졌다.
또 무슨 일이지 싶어 이벨리아와 아가레스, 이샤트가 일제히 인상을 찌푸리는데.
“저언하아-!”
벌컥 문을 열어젖힌 이샤트의 친위대 중 하나가 철퍼덕 부복하며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수도 사방위 중 남문(南門)이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뭐?”
수도를 둘러싼 사방위의 성벽은 통칭 ‘관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방어에 뛰어나다. 하르벤타의 심장부를 지키고 있기에 그 높이와 험준함은 제국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과 며칠 전 제3악마에 의해 서문(西門)이 반파된 것도 모자라, 이젠 남문까지……!
이샤트가 검을 들고 일어서며 이를 악물었다.
“또 악마인가. 끝도 없군.”
그러자 기사가 여전히 땅을 바라보며 난처한 듯 답했다.
“아, 전하, 그것이, 악마가 아니오라…….”
“그럼 뭐야. 제국 관문을 부술 게 악마 말고 뭐가 있어.”
기사의 눈이 저 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수프 그릇을 꼭 쥐고 있는 이벨리아를 향했다.
“아, 아르티나 공작이…….”
친위대의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은 이벨리아가 호로록 들이켠 수프를 꿀꺽 삼키고 태연하게 말했다.
“앗, 아빠 왔구나.”
***
산더미같이 쌓인 잔해를 밟고 넘어가며 기사단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이러려고 그런 건 절대로 아니었다.
소위 말해 불가항력이랄까. 혹은 억울하달까.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 휴고와 기사단이 가히 초인적인 속도로 하르벤타 수도의 남문(南門)에 도착한 직후.
마치 그 누구도 들이지 않겠다는 듯 드높은 성벽을 바라보며 아르티나 기사단은 크게 외쳤더랬다.
“문을 열어라! 에르카디아의 원군이다!”
그런데 아무도 답이 없다.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랄 마당에 건방지게.
우리 병아리 아가씨 구하러 가야 해서 마음이 다급한 기사단은 문을 쾅쾅 내리쳤다.
“열라고! 부수기 전에!”
“돌았냐? 원군 보내 달라고 징징댈 땐 언제고!”
“이봐, 됐어. 기왕 이렇게 됐으니 안타깝게도 하르벤타를 점령하자.”
“간만에 합리적입니다, 알렉 경.”
개중 가장 마음 급한 카론이 짧은 곡도(曲刀)를 꺼내 들었다.
성벽의 무게중심이 모인 핵심 부위로 던져 꽂으려던 찰나.
그 난장을 듣고 성벽 저 위에서 빼꼼 얼굴을 드러낸 것은…….
- 크르르르르.
- 컹! 컹!
“뭐냐, 저거. 멍멍이네.”
“멍멍인데 머리가 셋 달렸네.”
“그거군요, 파수꾼 케르베로스(Kerberos).”
“아 그 지옥문 지킨다는 멍멍이?”
“뭐야. 여기 점령된 거였어?”
“그럼 얘기가 쉽지.”
기사들이 서로 눈을 맞추며 끄덕였다.
이내 잔머리에 특화된 전두엽이 재빠르게 돌았다.
문이 우리를 막는다. 고로 부순다. 우리 아가씨가 저 안 어딘가에 계시다. 고로 부순다.
부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 이유는 아무거나 가져다 붙이면 된다.
헤롤드가 팔짱을 끼고 근엄하게 말했다.
“우리에겐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 문을 부술.”
“어허, 부수다니 그 무슨 위험한 말을. 점거당한 하르벤타를 구해주는 김에 부수는 거지!”
“그 김에 저 멍멍이 하나만 길들여서 우리 아가씨 선물로 드리자.”
“머리 셋 달린 멍멍이, 꼬리는 뱀, 이빨에는 독. 우리 아가씨 좋아하시겠다.”
재잘대던 기사들이 천천히 고개 돌려 주군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요, 하는 눈빛.
휴고가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까닥 턱짓했다.
“부숴. 개는 길들이지 말고.”
그러자 가장 앞에 서 있던 헤롤드가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주군께서 부수랍신다-!”
“부수랍신다-!”
“개는 길들이지 말랍신다-!”
“……말랍신다아-.”
헤롤드의 대검이 후웅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성문 쪽으로 뛰쳐나가던 알렉이 흘끗 바라보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기술 오랜만인데. 바스타드 소드는 떠나는 거야, 였나.”
“기술명 멋대로 바꾸지 마라. 바스타드 소드는 돌아오는 거야, 이거다.”
- 휘리릭.
그가 던진 검이 마치 부메랑처럼 돌아와 곰같이 커다란 손에 안착했다.
검이 갈고 지나간 성벽 한구석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짙은 금이 간 채였다.
“누가 먼저 부수는지 내기할 사람.”
“좋아. 마지막 타격으로 부수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하자.”
“부수는 것의 기준은 와르르 폭삭이다.”
“그건 좋다만…… 꽤 걸리겠는데.”
“괜히 하르벤타의 관문이 아니지.”
기사들의 검이며 활이며 표창 등이 성벽에 자비 없이 가닿았다.
점점 금이 가는 성벽.
다만 한 제국을 떠받치고 있는 성벽답게 와르르 무너뜨리자니 영 쉽지가 않다.
마음이 다급해진 기사단이 이를 악물고 온갖 기술을 펼치던 와중.
- 쐐애애애액.
우글우글 모인 기사들 사이로 얇은 검 하나가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반사적으로 검의 궤도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아지랑이 같은 황금빛이 언뜻 스쳐 지나간다.
이내 검이 박힌 성벽 중심부에서부터 길고 깊은 균열이 쫙쫙 뻗어 나가더니…….
- 쿠르르르릉.
기사단 전원이 달려들어도 쉬이 무너질 기미 없던 성벽이 와르르 폭삭 무너져 내렸다.
칼질 한 번으로 타 제국 관문을 박살 낸 무위에 기사들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케르베로스 한 마리를 주먹으로 냅다 날려버리며, 휴고가 흘끗 시선 돌려 고개를 기울였다.
“ 뭐 하나. 길 뚫렸는데 안 달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