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내게 달려와, 아가레스
몸을 빼고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벨리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광대?’
저것이 걸을 때 마족들이 좌우로 갈라지는 것을 보면 제3악마인 것 같은데.
하도 위명이 높으니 우락부락한 덩치 또는 기괴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리라 짐작했건만-.
막상 보이는 건 열댓은 되었을까 싶은 소년 광대의 모습이다.
이벨리아와 밧사고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위를 올려다보던 밧사고가 생글 웃었다.
‘하르벤타 좀 놀아주려 왔다가 별안간 공녀라니.’
참 맛있는 먹잇감 아니던가.
‘저것만 잡아가면 2차 인마전쟁 열 것도 없이 인간계는 끝이야.’
저걸 미끼로 동쪽의 지배자부터 우리 쪽에 편입시킬 수 있을 테니까.
공녀를 잡기 위해서 마왕의 힘을 담은 도구를 만들고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녀가 지금보다 더 자랐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정도의 수준이라면 누워서 땅콩 먹기지.’
게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동쪽의 지배자도 보이질 않는다.
‘실력을 자만하고 혼자 왔나 본데.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밧사고의 입매가 조금 더 경사진 호선을 그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잘 되었다. 싸워보고 생포가 어렵다면 죽이면 그만.
성벽의 지척까지 다가온 밧사고가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야.”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주변 소음에 묻혀야 정상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귀에 꽂히는 음성.
“내가 예언 하나 할까.”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한데.”
어린 인간의 당찬 대답이 밧사고에겐 그저 이 유흥을 더욱 재밌게 해주는 양념에 불과했다.
그가 허리를 접어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도 들어. 내 예언은 비싸.”
“…….”
“넌 오늘 여기서 내게 져.”
저런 예언은 나도 하겠다. 이벨리아가 고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뭐 대단한 거 있나 했더니. 사이비였잖아.”
“……?”
“희망 사항 말하면 다 예언이야?”
고고한 악마의 눈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붉은 입가가 길게 찢어지고. 이내 검지를 들어 까닥 움직인다.
“공녀야. 이리 내려올래?”
“…….”
“아니면 내가 올라갈까. 그러면 그 예쁜 성은 엉망이 될 텐데.”
밧사고가 마치 장난처럼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일순 형태를 잃었다가 다시 모여든 실비아의 결계.
이벨리아가 슬쩍 실비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실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 결계로는 저 악마의 힘을 견딜 수 없다는 뜻.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성벽을 이루는 돌 위로 올라섰다.
“내려가지.”
그러자 황제와 이샤트가 다급히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공녀!”
“공녀. 곧 지원군이 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는 것이…….”
“그러니까.”
“응?”
“그래서 내려가는 거야. 저 악마가 마음만 먹으면 이 황궁은 끝이야. 폐하와 너도 마찬가지고.”
그 말이 맞다는 듯, 실비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악마의 손짓 한 번에 그녀가 쳐둔 모든 결계가 파훼될 뻔했다.
그리고 이 결계가 뚫리면…… 황궁이 불바다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제국 내 유수의 장수들이 다른 전장으로 나가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시간만 좀 벌어볼게.”
“……하지만!”
“알잖아. 내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는 거.”
토끼도 나름의 일을 하고 있을 테니 무작정 의지할 생각은 없지만, 정 위험해지면 부를 수도 있고.
이샤트를 보고 씩 웃으며, 이벨리아는 그대로 실라페를 불러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 타닥.
정확히 밧사고의 앞에 군더더기 없이 착지한 이벨리아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용감하네.”
“용기 빼면 시체라.”
“시체로 만드는 방법이 아주 간단한걸.”
“날 시체로 만들면 너도 무사하진 못해. 벼를 이들이 여럿이라.”
잠시의 침묵.
소리 없는 탐색전이 이어졌다.
실로 묵직하고 어두운 마기다.
마치 악마의 작은 몸 뒤에 만악(萬惡)의 근원인 어느 세계 하나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이기에 본능적으로 이는 공포심. 이벨리아는 살짝 떨리는 손을 보이지 않게 감췄다.
한편 밧사고 역시 이벨리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렸다.
웬만큼 강단 있을 줄은 알았지만, 자신을 앞에 두고도 이리 꼿꼿할 줄은 몰랐다.
‘마음에 들어.’
쉽게 망가지는 걸 싫어하는 밧사고에겐 제법 흡족한 장난감이다.
그가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물었다.
“공녀야.”
이벨리아가 고개를 까닥였다.
“나의 왕께서도 네게 제안하셨다고 들었는데.”
“뭘.”
“귀화. 우리 쪽으로 말이야.”
“개소리 집어치워.”
“개소리라기엔 상당히 고급지지. 네게 땅도 주고 성도 주고 보석도 주고 하인도 줄 수 있는데.”
“악마 체면이 안 서겠네. 내가 이미 다 가진 것들이라.”
“그럼 원하는 걸 말해봐. 그냥 죽이기엔 정말 아쉬워서 그래.”
“원하는 거……?”
“그래. 원하는 거.”
“…….”
밧사고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먹잇감을 살살 구슬리는 듯한 목소리가 담뿍 쏟아졌다.
“솔직히 네가 이렇게 희생할 이유가 있어? 무슨 일만 생기면 공녀, 공녀, 공녀, 에르카디아도 모자라서 이젠 하르벤타까지 네게 손을 뻗어.”
“…….”
“그래서 구해주고 나면 뭐가 남지?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 염치도 없지. 적어도 우리 쪽에 오면 그럴 일 없어. 네 가치만큼 널 이용하는 게 아니라, 떠받들어줄 테니까.”
이벨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형체 없는 저울을 재는 것처럼.
어쩌면 원만한 포섭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밧사고가 짐짓 너그럽게 웃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뜬 이벨리아가 흘끗 성벽 위를 바라봤다.
이내 다시금 곧게 악마를 향하는 푸른 눈.
“내 세계가 남지.”
“……?”
“다 버리고 홀로 남은 세계, 내겐 의미 없어. 그런 면에서 네 목과 마왕의 목을 모두 주면 생각은 해볼게. 그 귀화라는 거.”
생글생글 웃고 있던 광대의 눈이 별안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흰자위가 온통 검게 물들었다.
“공녀야. 너 실수했어.”
“…….”
“감히 나의 왕께 그딴 식으로 말을 뱉으면 안 되지. 건방지게.”
강아지 보는 기분으로 예쁘게 봐줬더니.
중얼거린 밧사고가 허공에 손을 뻗자 카드 여러 장이 둥둥 띄워졌다.
하트. 스페이드. 클로버. 다이아몬드.
각자의 문양을 뽐내며 어지러이 흩날리는 카드들이 일제히 이벨리아를 향해 날을 세웠다.
밧사고가 마치 시범 삼아 보여준다는 듯 카드를 성벽 쪽으로 날렸다.
“……!”
실비아의 결계를 쉽사리 뚫고 곧바로 성벽에 박히는 카드 한 장.
- 쿠구구구궁.
성벽 외곽이 그대로 무너졌다.
이벨리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뭐야. 이 괴물은.’
카드 하나의 위력이 저 정도인데, 허공에 뜬 카드는 무려 수십 장이다.
내내 여유롭던 이벨리아의 입꼬리가 살짝 떨리자, 이를 기민하게 알아챈 밧사고가 조롱하듯 웃었다.
“어때, 공녀야. 이래도 무릎 안 꿇을래?”
이벨리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까딱하면 진짜 죽겠는데.’
위기를 마주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여기선 물을 다루는 능력을 보이면 안 돼.’
정령 없이 물을 그대로 다루는 건 훗날 마왕과의 최종전을 위해 아껴두었던 수.
‘아마 저들은 내가 강한 지배력 앞에서 정령술을 쓸 수 없다는 걸 무기로 쓸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자연력을 일으키지 않고도 싸울 수 있다는 걸 들키는 순간 저쪽에 반격법 하나를 넘겨주는 것이 된다.
‘결국 정령술만으로 싸울 수밖에 없겠네.’
살짝 몸을 낮추며, 이벨리아가 신발 앞코로 땅을 툭툭 찼다.
“아깝다. 너 정도 인간이면 정말 예쁘게 키워줄 수 있는데.”
“사절하지. 말싸움하러 온 거 아니면 이제 덤벼.”
이벨리아가 손을 까닥였다.
그와 거의 동시. 밧사고의 입에서 짧은 휘파람 소리가 흐르고.
허공에 떠 있던 카드들이 일제히 이벨리아에게 쏟아져 내렸다.
“엘라…… 으윽.”
상대하는 악마의 격에 맞게 엘라임을 부르고자 했으나, 여의치가 않다.
거대한 마기가 온몸을 틀어막아 장기가 온통 뒤틀리는 느낌이다.
‘저 자식도 마왕 못지않은 마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가.’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대강 닦아낸 이벨리아가 가용할 수 있는 범위의 자연력을 사용해 정령을 소환했다.
“일레스트.”
[계약자. 나 또 출세하는…… 으악 저게 뭐야!]
“미안. 저런 거 앞에 불러내서.”
[계약자! 저건 무리야!]
“아는데 시간만 조금 벌면 돼. 곧 지원군이 도착할 거라서.”
[우리 왕은 왜 안 부르고! 저 정도 되면 왕께서 오셔야 하는데!]
“못 불러서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못 부른다고?]
“사정이 좀 있어.”
부산 떨던 거대한 늑대 형상의 일레스트가 날카로운 눈으로 이벨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터였다.
[온다, 계약자.]
- 콰가가가가가각.
일레스트가 펼친 물의 장막에 카드들이 자비 없이 꽂혀 내렸다.
대정령사인 이벨리아의 힘을 받아 가까스로 막아낸 카드의 향연.
사방으로 흩뿌려진 물보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밧사고가 언짢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상급 정령이네. 공녀야, 나랑 장난해?”
“…….”
“이깟 격과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라서 기분이 아주 더러워지려고 해.”
그가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카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조커(JOKER).
밧사고를 똑 닮은 어릿광대가 그려진 카드가 크게 팽창했다.
“공녀야. 팔다리가 날아가더라도 목숨은 좀 붙어 있도록 노력해봐.”
[계약자…… 저건 못 막아.]
“……그러게. 나도 자신 없는데.”
[어쩌려고 이래!]
“적당히 충격만 좀 상쇄해 봐. 살아만 있을 정도로.”
다른 수가 딱히 없다.
저 무식한 마기를 뚫고 엘라임을 불러내기에는 이 자리에서 요절할 것 같고.
토끼를 부르자니…… 여기도 온통 난장판인데 반란군 수장인 토끼의 상황이라고 다를까 싶고.
[계약자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음 수야 생기겠지. 일단 눈앞의 저것부터 막고 보자.”
- 쐐애애애애액.
짙은 마기를 띠고 날아오는 카드.
맞서기 위해 단단하게 쳐둔 물의 장막이 속절없이 찢겨나가려던 찰나.
“어……?”
구릿빛 품이 이벨리아의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내 그 무엇보다도 원초적인 화염이 카드를 화르르 불태운다.
연이어 불어오는 강한 바람. 반쯤 형체를 잃은 카드가 팔랑이며 궤도를 잃었다.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카드의 잔재가 그 일대를 폭파시켰다.
‘이게 무슨…….’
별안간 벌어진 일에 눈을 깜박이자, 봄바람같이 따스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우리 아가. 혼자 늑대 아가리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언니……?”
“트로이. 우리 병아리 놔라. 어딜 감히 이 틈을 타서 안고 있어.”
“양아치 오라버니!”
“안녕, 엘라임의 계약자.”
“오랜만이에요, 트로이!”
“왜 나는 양아치 오라버니고 쟤는 트로이냐. 너 정령왕 차별해?”
툴툴대는 이프리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주욱 밀쳐 치우며, 페르세스가 말했다.
“우린 오래는 못 도와줘. 알다시피 아직 너와는 계약하지 않았고, 계약하지 않은 인간의 생사에는 원칙적으로 관여할 수 없거든.”
“엘라임을 안 부르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겠지?”
역시 눈치 빠른 땅의 정령왕.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어 날아오는 밧사고의 공격을 막아내며 페르세스가 말했다.
“다른 누구라도 불러. 있잖아, 언제든 부를 수 있는 그 부러운 자식.”
“하지만 중요한 일로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그 자식에게 너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너도 알잖아.”
“만에 하나 널 잃었다간 봐라. 이 세계도 같이 멸망하고 말지.”
눈 깜빡할 사이에 몇 합을 더 막아낸 정령왕들의 전신이 흐릿해졌다.
페르세스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아가. 우린 여기가 한계야.”
“그래도 너와 계약하지 않은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계약자 아닌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는 건 정령왕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그동안 참으로 아쉬웠던 일이나, 외려 이번엔 계약하지 않았기에 이벨리아의 자연력을 받지 않아도 되어 도울 수 있었다.
가용 가능한 힘을 끝까지 짜내어 이벨리아를 보호한 정령왕들이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자.
밧사고가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며 다가왔다.
“공녀야. 너 정말 대단하긴 하다.”
뛰어난 정령사라는 이야기는 귀에 못 박히게 듣긴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무려 정령왕들이 계약도 안 한 인간을 위해 이렇게 나설 줄은 몰랐는데.”
아마 지금쯤 인과율을 어긴 벌로 제법 큰 고통을 받고 있을 텐데 말이야.
“어쨌든, 운으로 연명했다만 이젠 끝이네.”
밧사고의 주변으로 다시 한번 카드들이 떠올랐다.
일레스트를 부르려던 이벨리아가 울컥 피를 쏟았다.
‘아까 한 번 부른 게 꽤 충격이 컸나 봐.’
마지막 패를 드러내더라도 물을 다뤄 싸워볼까 싶었는데……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까 악마 베팔과의 전투에서 긁힌 상처가 제대로 덧난 듯싶었다.
이벨리아가 팔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마치 가지고 노는 것처럼, 날아온 카드가 다친 팔을 주욱 긁고 지나갔다.
“으윽.”
이후로도 몇 번. 날카로운 카드들이 난도질하듯 몸 이곳저곳을 베고 지나갔다.
“공녀!”
“피해라! 물러나!”
성벽 저 위에서 아른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자기가 뭐라고. 검을 들고 성문 밖으로 내달려오는 이샤트의 모습도 보였고.
다 빠진 힘으로 이벨리아 주변에 결계를 만들어내는 실비아의 모습도 보였다.
피를 꽤 흘려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이벨리아가 푹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
“뭐를?”
“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는 걸.”
“우리 공녀는 똑똑한데 눈치는 없나 봐. 그걸 이제 알면 어떡해.”
“…….”
“그 대가로 이렇게 농락당하다가 죽잖아.”
“……그래서.”
“응. 응.”
“널 잡을 수 있는 친구를 좀 부르려고.”
“……?”
그도 한창 중요한 일을 처리 중일 테니,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령왕들 말대로 내가 죽으면 슬퍼할 존재가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야.
털썩.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며, 이벨리아가 속삭였다.
부르면 시간과 공간을 찢어서라도 달려오겠다 약조한 이의 진명(眞名)을.
“아가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