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제3악마, 밧사고
이벨리아와 이샤트는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침략하는 쪽과 수호하는 쪽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거점을 꼽으라면 바로 제국의 얼이 담긴 황궁이니까.
‘…….’
정신없이 달리며 주변을 살펴보니 수많은 민가가 불에 타고 있다.
하르벤타의 건물들은 주로 목조로 지어져 있기에 화마는 통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제국민들을 바라본 이샤트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지금은 도울 여력이 없다.’
자신의 피를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제국민들이다.
마음 같아서야 말을 멈추고 돕고 싶지만, 황궁이 어찌 되었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멈출 수는 없다.
‘비라도 오면 좋을 텐데…….’
그저 하늘의 자비를 바라며 쓰린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말을 재촉하는데.
- 쏴아아아.
하늘을 탁하게 물들이고 있는 포화 사이를 뚫고 맑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이샤트가 볼에 떨어진 빗방울을 훔쳤다.
“……비?”
얇지도 굵지도 않게 내려앉는 빗줄기. 마치 불바다가 된 제국을 다독이는 위안인 것 같다.
먹구름도 전조도 없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자는 동서제국을 통틀어 단 한 명뿐일 터다.
이샤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공녀.”
그러자 나란히 말을 달리던 이벨리아가 씩 웃었다.
“어서 달리기나 해. 급하다며.”
“…….”
“또 뿌애앵 울지 말고.”
“훌쩍…… 곤녀는 하느리 내려준 천사야…….”
“……콧물 좀 닦아.”
“크응. 쿨쩍. 닦아써어.”
그렇게 가능한 최고 속도로 황궁을 향해 달리던 중이었다.
저 멀리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붉은 머리가 보였다.
“이샤트. 저거 아드니엘 아니야?”
“훌쩍, 맞네. 그냥 가도 된다, 공녀.”
“그러기엔 좀 위험해 보이는데?”
아드니엘은 게이트 하나를 홀로 막아내고 있었다.
족히 2급은 되어 보이는 제법 커다란 게이트.
마치 모래 알갱이처럼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마족들이 아드니엘의 주위를 둘러쌌고.
그 사이에서 아드니엘은…….
“으아악! 뼈는 때리지 말아라!”
“크륵. 크르륵.”
“으악! 아악!”
먼지 털리게 맞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유심히 보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샤트. 검에 맞은 아드니엘한테서 왜 깡깡 소리가 나?”
“……저 자식 이상한 기술을 익혔거든.”
“무슨 기술?”
“돌머리로는 성에 안 찼는지, 온몸을 돌처럼 단단하게 하는 기술.”
“그런 게 있어?”
“그러게 말이다. 사실 공녀의 책임도 없지 않아 있다.”
“내 책임? 저 돌 깡깡에?”
“공녀가 곧 혼약을 올린다는 헛소문이 하르벤타에 돌았다고 저번에 말해줬었지. 그 소문을 듣고 회까닥 돌아버린 저 자식이 냅다 무공을 수련하겠다고 산속에 들어가 버렸거든.”
“…….”
“이참에 정신 차리면 좋지 싶어 내버려 뒀더니 별안간 돌덩이가 되는 능력을 가지고 나타났다.”
이샤트가 한숨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하간 이런 국지전이 있을 땐 몸빵으로 잘 쓰는 중이다.”
“그럼 그냥 두고 가?”
“내가 검으로 몇 번 찔러봤는데, 등껍질 속에 숨은 거북이가 따로 없으니 죽진 않을 거야.”
아니 이 냉혈한 좀 보소……?
역시 한 나라 황태녀 정도 해 먹으려면 이 정도 강단은 있어야 하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지인을 내버리고 섣불리 말을 달리지 못하는 이벨리아의 등을 말랑한 앞발이 톡톡 쳤다.
“내가 남을게, 누나. 어서 가.”
“엔리르!”
“어서. 황궁이 위험하다며. 빨리 가.”
누나가 가야 내가 인간형으로 변신을 해서 돕지.
뒷말은 삼킨 채,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말 엉덩이를 앞발로 팡팡 두드렸다.
“조심해, 엔리르! 정 위험하면 그냥 브레스 뿜어도 좋아!”
“나 용이야, 누나. 상처 하나 없이 돌아갈 테니까 누나야말로 위험하면 그 악마 불러.”
고개를 끄덕이고 황궁을 향해 달리는 이벨리아의 뒤로.
훤칠한 소년의 모습으로 변한 엔리르가 땅에 굴러다니는 검을 대충 집어 들었다.
“……옷이 작아졌네.”
일전에 집주인이 사준 옷인데. 이젠 제법 꽉 끼여 전투에는 불편이 있을 것 같다.
엔리르는 망설임 없이 앞섶의 단추를 좌르륵 뜯어버렸다.
어깨를 붕붕 돌려보니 한결 편하다.
“음. 좋아.”
터벅. 터벅.
전쟁을 직접 겪어본 적은 없었으나, 위대한 용에겐 그저 유희에 불과했다.
한가로이 아비규환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 엔리르가 웅크려 있는 아드니엘을 번쩍 잡아 들어 올렸다.
“도와주러 왔다. 멍청한 황자야.”
***
아드니엘의 전장을 엔리르에게 맡기고 약 세 식경 정도 말을 달리자 저 멀리 궁의 바깥문이 보였다.
그리고 황궁과 정확히 대치되게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성 하나.
분명 일전에 하르벤타 제국에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것이다.
“이샤트. 황궁을 마주 보고 있는 저 성은 언제 지은 거야?”
“……우리가 지은 성이 아니다.”
“응?”
“내가 출정할 때, 그러니까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저딴 건 없었어.”
“그럼 고작 하루도 안 돼서 황궁하고 엇비슷한 규모의 성이 세워졌다고?”
이벨리아가 기함했다.
유구한 역사, 그 어떤 형태의 전쟁보다도 수성(守城)의 승전 가능성이 컸던 것은 성이 가지고 있는 이점 덕분이었다.
하여 성 앞에 성을 만들어 대항하는 축성(築城)의 계(計)가 있다고는 들었으나, 실질적으로 창칼이 오가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한가로이 성을 쌓는 건 불가능하기에 사장된 계책인 줄 알았는데.
지금 하르벤타 황궁 바로 앞에서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계에 축성(築城) 능력이 있는 악마가 있다고……?”
황궁 코앞에서 돌을 하나하나 쌓았을 리는 없으니, 아마 이건 특정 악마의 고유 능력일 터다.
심지어 강철로 된 성 벽면에는 활용할 수 있는 온갖 무기까지 구현되어 있었다. 대포부터 투석기, 끓는 기름까지.
‘그나마 수성전이라는 이점을 믿고 있었는데…… 큰일이야.’
경계하며, 이벨리아와 이샤트가 황궁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그들을 반긴 것은 하르벤타의 황제였다.
무사히 귀환한 이샤트의 어깨를 한번 툭 두드린 황제가 이벨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공녀. 그대에겐 감사하는 마음을 감히 다 표현할 수조차 없네.”
“예전에 후원에서 말씀드렸었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그땐 옷감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말하더니. 올바른 말을 할 정도로 잘 컸군.”
“……꼭 그렇게 짚으셔야 속이 시원하신가요.”
“괜히 장한 마음이 들어서 그러니 봐 주게.”
넘실대는 화염의 기운으로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그것과 똑 닮아 꼿꼿하게 선 황제는 예전보다 외로워 보였다. 이벨리아는 조금 더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폐하. 궁 내로 들어가시지요. 여기 서 계시다간 불덩어리 맞기 십상이십니다.”
“제국 대신 내가 불덩어리를 맞을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지.”
“폐하가 불덩어리 맞는다고 제국의 불덩어리가 꺼지는 건 아니라서요.”
“……사실 황궁 안에 박혀 있는다고 해서 딱히 위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거든.”
위로 향하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이벨리아와 이샤트 역시 하늘을 바라봤다.
“……!”
“……!”
창공을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마족들로부터 온갖 공격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것은…… 반투명한 장막 하나.
돌로 된 장창. 불에 타는 기둥. 그 모든 것들이 부딪힐 때마다 커다란 파동이 지며 흔들거린다.
“놀랍지 않은가, 저 장막.”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은 아비규환인데, 저 장막 덕에 황궁은 아직 전소되지 않고 버티는 중이지.”
“마법인가요?”
“아닐세. 서대륙 출신인 공녀에겐 생소할 수도 있겠다만…… 저건 결계술이라네.”
“결계술……?”
이벨리아의 되물음에 황제 대신 누군가 답했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예. 결계술이요.”
뒤를 돌아보니, 아주 어릴 적에 봤음에도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갈색 머리를 청초하게 늘어뜨린 여인이 옅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에르카디아의 공녀.”
군더더기 없는 고요한 인사. 이벨리아 역시 마주 고개 숙이며 화답했다.
“오랜만이네요. 공녀……가 아니라, 이젠 공작님이 되셨다고 들었는데.”
과거엔 슈테인 공녀였으나, 이젠 공작위를 거머쥔 실비아 슈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을 뒤덮은 결계를 홀로 유지하고 있어 제법 창백해진 얼굴로.
“공녀. 상황이 좋지 않긴 하지만, 사과부터 하고 싶어요.”
갑자기?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요. 공녀가 우리 제국에 방문했을 때.”
벌써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 실비아가 부끄럽다는 듯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요.”
“네?”
“제가 공녀에게 언성도 높였었고, 또 속으로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었거든요.”
“…….”
“공녀가 부러웠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랑받으니까.”
쿠웅. 결계에 다시금 부딪히는 불덩어리.
그대로 시전자의 신체에도 가해지는 충격에 실비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공녀의 말투. 행동. 태도를 따라 하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뭐를요?”
“공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많은 걸 주고 있었다는 걸.”
“…….”
“그러고 나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제가 한심했어요.”
언젠가는 공녀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받길. 아껴주는 좋은 영식을 만나길. 그 자체로 활짝 피어 환하게 웃길 바랐는데.
내가 바란 모든 걸 쥐고 있는 공녀가 사실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함이란.
“그래서요, 공녀. 나도 노력이란 걸 좀 해봤어요.”
“…….”
“당신처럼 따뜻한 빛은 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사그라지는 재가 되고 싶진 않아서.”
실비아의 손끝에서 퍼져나가는 맑은 빛이 다시금 황궁을 휘감았다.
홀로 하르벤타의 심장부를 보호하고 있는 실비아…… 슈테인 공작이 과거 그날과 비슷하게, 또 다르게 웃었다.
자신을 완벽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그 덕에 난 슈테인 공작가의 가주가 되었답니다.”
“…….”
“그보다 더 내세우고 싶은 업적이라면 황궁을 지킬 수 있는 결계사가 되었다는 거고요.”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듣던 이벨리아가 가감 없이 입을 틀어막고 감탄했다.
“뭐야.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잖아……?”
그 꾸밈없는 반응에 실비아가 살포시 웃었다.
“공녀는 여전하네요. 좋은 의미로.”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순수한 감정 그대로를 내비치는 이 모습이 그때는 왜 그렇게 고깝게 보였었는지.
과거 질투했던 대상이 마냥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는 건, 아마 자신이 그 추악한 감정을 뛰어넘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일 터다.
실비아가 가녀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공녀. 혹시 저와 친구가…….”
“언니!”
“……네?”
“멋있으면 다 언니야!”
와락.
손을 끌어 잡고 짤짤 흔드는 해맑음에 실비아는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아르티나 기사단에 입단한 지 갓 두 달이 된 로웰은 대륙 최고 기사단 소속이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금지옥엽 아가씨를 구하러 하르벤타로 출정한다는 첫 임무에 가슴 설레기도 잠시.
선배 기사들의 뒤를 정신없이 따라잡던 로웰은 속으로 의문을 가졌다.
‘우리 아가씨께서는 대정령사이신데.’
다들 왜 이렇게 불안해하시는 거지?
아르티나 기사단은 늘 여유로 무장하고 전쟁터를 노니는 것으로 알고 있던 신입으로서는 의아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로웰은 가장 가까이에서 말을 달리던 기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알렉 경. 알렉 경.”
“뭐냐. 신입.”
“그게, 웬만한 악마들은 우리 아가씨 선에서 정리되지 않겠습니까? 선배님들 모두 왜 이렇게 불안해하시는지…….”
그러자 돌아오는 잿빛 시선. 로웰은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평소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멍하던 알렉의 눈이 마치 다가오는 무엇이라도 베어버릴 것 같은 예기를 담고 번들거렸다.
“그곳엔 제3악마가 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대정령사이신 우리 아가씨보다도?”
알렉은 답하지 않고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재촉했다.
1차 인마전쟁의 일선에 섰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악마들 중 21위와 22위의 차이는 근소하나, 9위와 10위의 차이는 천지와도 같다.
즉, 앞에 붙는 숫자가 한 자릿수인 악마들은 그 외의 악마들과는 격이 달랐다.
말 그대로 천외천(天外天).
마계가 혼란에 빠지면 그 개개인이 차기 마왕 자리를 노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
그 절대적인 힘 앞에 화려한 수식어는 무용하다. 알렉은 짧게 정리했다.
“우리 기사단 전원이 덤벼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그, 그 정도라고요?”
“무려 마왕의 대리자다. 호락호락할 리가.”
알렉이 이를 짓씹었다.
전투 경험이 부족한 우리 병아리 아가씨로는 어림도 없어.
불길한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알렉은 그저 더욱 속력을 높였다.
***
전황은 교착(膠着) 상태.
황궁 밖에서는 하르벤타의 귀족들과 기사들이 주축이 된 치열한 접전이, 황궁 내에서는 슈테인 공작의 결계에 의존한 수성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지지부진한 흐름이 지루했는지, 황궁 앞 돌 위에 누워 한가로이 풀을 씹던 밧사고가 이를 퉤 뱉어내며 기지개를 켰다.
제멋대로 뻗친 뒷머리를 긁으며 터벅터벅 걸어온 광대가 빤히 성벽 위를 올려다봤다.
세로줄이 그인 실눈이 단번에 이벨리아에게 고정됐다.
붉게 칠한 입가가 불길한 호선을 그렸다.
“럭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