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하르벤타의 명복을 빕니다
이명. 해양(海洋) 총통.
42위 악마 베팔(Vephar)은 터져나간 팔을 부여잡았다.
재생력이 뛰어난 종족답게,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던 팔은 스스로 봉합되듯 형태를 갖춰가는 중이었다.
“크으…… 인간 따위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려 이 제국 황태녀를 가지고 논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해 있었는데!
분노한 듯, 해초로 이뤄진 머리카락이 뱀처럼 구불대고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역으로 좌르르 일어섰다.
한편 이샤트는 사뿐히 앉혀진 땅에서 힘겹게 눈을 떠 위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호하듯 앞에 선 가녀린 등.
익숙한 이의 것이었으나,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와달라며 요청한 것이 고작 반나절 전이었는데 에르카디아에서 하르벤타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사나흘은 걸리는 거리니까.
“……혹시 이거 꿈이야?”
“진짜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실라페를 타고 날아왔지. 죽는 줄 알았어.”
슬쩍 돌아보며 씩 웃는 얼굴. 이샤트는 그만 눈물을 떨궜다.
“흐어엉, 독수리 타고오 어떠캐 나라와써어……!”
감사와 안도가 뒤섞여 뿌애앵 오열하는 이샤트의 팔에 엔리르가 부드러운 꼬리를 비볐다.
그사이 제법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팔을 회복한 악마가 코웃음을 쳤다.
“지루한 신파극이로군.”
“신파는 이변 없는 흥행 요소인데. 뭘 모르네.”
이벨리아가 손목을 돌리며 악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렸다.
악마라면 몇 번 만났었지만, 특출나게 요상한 생김새다.
손가락 사이에 있는 물갈퀴도 신기한데, 물고기 꼬리처럼 생긴 두 다리는 더욱 묘하다.
“너 물고기야?”
“감히 나를 그깟 하등한 것에 비유하느냐!”
“손에 개구리처럼 물갈퀴가 있는데.”
“나는 인어다!”
그러자 이벨리아의 표정이 무진장 싫다는 듯 일그러졌다.
“인어어어?”
“그래! 인어!”
“……못 들은 걸로 할래.”
“뭐?”
“내가 동화 속에서 봤던 인어들은 이렇게 못생기지 않았단 말이야.”
내 동심 아야.
본의 아니게 이벨리아의 동심을 정통으로 파괴해버린 악마가 으르렁 우짖었다.
“너도 황태녀와 함께 보내주마.”
“어디로?”
“지옥으로.”
“그것참 안 무섭네.”
지옥은 아가레스의 전문 분야.
따라서 악마의 무시무시한 협박이 이벨리아에게는 적절히 필터링 되어 들렸다.
네 친구 토끼의 영역으로 보내주마, 정도로.
이벨리아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분노한 베팔이 손에 쥔 삼지창을 바닥에 쿵 내리찍었다.
실로 무식한 힘에 땅이 깊게 패었다.
“멍청한 인간. 그 무모함을 후회하며 죽어가라.”
이내 이 전장 오른편에 흐르던 하천의 물이 베팔의 주위로 회오리치듯 흘러들었다.
삽시간에 뚜렷한 경계가 없는 작은 바다가 만들어지고.
“진수(進水).”
짧게 읊조리자 악마의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전투 함대.
해양(海洋) 총통이라고 불리는 그의 고유 능력이었다.
강과 바다를 다스리고,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환상 함대를 빚어내며, 그 안에서 수천 년 해저를 떠돈 망령들을 불러내는 것.
“진격(進擊).”
반투명한 함선이 일제히 이벨리아와 이샤트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사방으로 튀는 물보라가 이 능력이 단순한 환상은 아님을 알렸다.
“공녀. 저 배들은 저들에겐 환상이며 우리에겐 실재다.”
“우리 공격은 안 먹힌다는 소리야?”
“반면 저들의 공격은 우리에게 통하지.”
“뭐 이런 사기적인 능력이 다 있대?”
“공녀가 그 말을 하면 기만이야.”
“……?”
갑자기 무슨 말이야.
고개를 갸웃한 이벨리아가 볼에 튄 물방울을 손등으로 대강 훔쳐냈다.
“어쨌든 저 악마, 물과 배를 다룬다 이거지.”
“크하하하! 네놈들 역시 익사시켜 기꺼이 내 해골 병사로 삼아주지!”
“엥. 거절. 얼굴에 불가사리 붙이고 다니고 싶진 않아.”
“그 여유만만한 얼굴도 지금뿐이다! 크하핫!”
광소하는 악마.
이벨리아가 안쓰럽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좋아.”
“으하하하! 왜, 지금이라도 꼬리 말고 도망을 치고 싶어졌나?”
“그런 건 아니고…….”
- 딱.
이벨리아가 가볍게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러자 별안간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물. 그 위를 부유하던 환영 함대들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득의양양 진격을 외치던 베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네게 안타깝게도, 종목이 물이라면 나 역시 자신이 있어서 말이야.”
***
물로 빚어낸 창이 함대 하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유속을 이기지 못하고 기울던 함대가 그대로 침몰한다.
이벨리아가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악마를 향해 물었다.
“어때, 내 창술.”
“크아아악! 이 쥐새끼가!”
“어떠냐고 묻는데 쥐가 왜 나와.”
다시금 겨눠지는 창. 날아가라 얍, 명하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물에 내리꽂힌다.
검술과 창술에는 젬병이나, 의지대로 물을 다룰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기예였다.
연이어 여러 척의 함선이 나뭇조각이 되어 사라졌다.
“나 잘 던지지.”
“잘 던진다, 잘 던져! 그러니 그만……!”
“잘 던져? 그럼 더 구경해.”
- 콰과과광.
함대 한 척이 더 침몰했다.
악마가 황급히 의견을 변경했다.
“모, 못 던진다! 못 던져! 그러니 그만……!”
“못 던져? 눈 똑바로 뜨고 봐.”
- 콰아아앙.
함대 한 척이 더 가라앉았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봐!”
“재미.”
“……이 사탄도 울고 갈 꼬맹이가!”
속절없이 파괴되는 환상 함대를 지켜보던 기사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게 지금…….”
“가능한 싸움이라고……?”
“그보다 에르카디아의 공녀님께선 참으로…… 악마 같으신데.”
아무리 베어도 베이질 않던 환상 함대.
그리고 그 속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던 해골 병사들.
그토록 고전하여 거의 궤멸을 면치 못하였건만,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타 제국의 공녀가 고양이 털실 가지고 놀 듯 수월하게 굴리고 있다.
승리의 목전에서 좌절을 엿본 악마가 발악했다.
“포격하라! 포격해!”
환상 함대 갑판 위의 해골 병사들이 동그란 포탄을 함포에 굴려 넣기 시작했다.
“앗. 그건 위험하지. 살라맨더.”
부르자 불도마뱀 형상의 중급 정령이 나타나 짧은 앞발을 휘저었다.
“저 함포 좀 터뜨려줘.”
고개를 끄덕이고는 휙 사라졌다가 삽시간에 함대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불도마뱀.
[감히 우리 병아리 계약자에게 이 동그란 콩알을 쏘려고 했어……?]
손속을 두지 않고 방사되는 화염에 함포 안에 굴려 넣은 포탄이 터져나갔다.
- 콰앙. 콰아앙.
함대 위에서 포탄이 터짐에야, 배와 병사들 역시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비장의 수가 오히려 독이 된 상황.
악마가 삼지창을 앞으로 쭉 뻗고 외쳤다.
“함대를 버리고 상륙하라! 저 인간을 쳐라!”
오랜 기간 해저를 떠도느라 온몸에 조개나 불가사리 등을 붙이고 있는 해골 병사들이 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휘익. 이벨리아에게 투척되는 검을 쳐내며 이샤트가 날카롭게 경고했다.
“공녀, 조심해라! 이것들 안 죽는…… 아니, 뭐야.”
돌아보니 와르르 무너져 있는 해골 병사들.
그 가운데에서 멋쩍은 표정으로 창을 들고 있는 공녀.
“죽었어.”
“……그러게. 죽네?”
“내가 저 배를 망가뜨릴 수 있었던 거랑 같은 원리인가 봐.”
악마의 지배력으로 만들어진 배와 병사들이니 내 자연력에는 약한 모양이지.
“으음. 좋은 생각이 났다.”
“뭔가, 공녀.”
“잠시만. 실프 오십!”
[실프, 실프, 실프, 실프, 실프, 실프, 실프…….]
“그만.”
[그만!]
[계약자가 멈추래!]
[우리 병아리 계약자!]
[우리를 이렇게 많이 불렀어, 왜?]
[악마다. 웨엑.]
[무서워.]
[그런데 우리 계약자가 더 강해. 안 무서워.]
작은 날개를 단 요정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재잘댔다.
“기사들의 검날 위에 한 실프씩 앉아줘.”
[앉았어!]
[평소에 보던 갑옷 병정들이 아니네!]
[이제 뭐 할까?]
“검에 자연력만 조금 흘려주면 돼.”
내가 부른 정령으로 자연력을 실어주는 게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되면 앞으로 악마와 마족들을 상대하는 게 수월해질 텐데.’
이샤트의 친위대장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속절없이 부서지는 해골 병사들.
“부서진다!”
“죽일 수 있어!”
하필 만난 상대가 물리력이 통하지 않아 패전하였을 뿐, 기본적인 실력으로 치자면 어디 가서 절대 뒤지지 않는 기사들이다.
바야흐로 설욕의 시간.
이샤트의 기사들이 신명 나게 검을 휘둘렀다.
한편 함대와 병사들 뒤로 물러난 악마가 경악하여 더듬거렸다.
“이, 이 정도의 정령사가 하르벤타에……!”
“소식을 못 들었나 봐.”
해골 병사들은 기사들에게 맡긴 이벨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에르카디아에는 대정령사가 있고.”
“여긴 하르벤타…….”
“그 대정령사는 하르벤타의 황태녀와 둘도 없는 친구라는 소식.”
두 걸음. 세 걸음.
물안개로 신형을 가리고 악마의 지척으로 다가간 이벨리아가 창을 뻗었다.
악마의 심장을 항해.
***
엘라임의 손을 빌리지 않고 악마를 직접 처리한 것은 처음이다.
날붙이를 손에 쥐고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을 찌르는 것도 처음이다.
악마의 심장을 찌르기 전 본능적으로 일순 망설인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실수했네.’
잠시 멈칫한 찰나 팔을 스치고 지나간 긴 손톱.
‘조금 많이 다친 것 같기도 하고.’
불에 데는 듯한 통증과 함께 소매가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 났다.
이따가 상처를 한번 봐야겠지만, 막 승전한 지금 굳이 티를 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뒤돌아 진영으로 돌아오는 이벨리아를 향해, 이샤트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이샤트의 친위대가 부복하며 예를 갖췄다.
“이샤트?”
“고맙다. 친구로서가 아니라 하르벤타의 황태녀로서,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이벨리아가 픽 웃었다. 그 콧물이나 좀 닦고 위엄을 내세우지.
“좋아. 거절은 안 해.”
코를 톡톡 가리키자 이샤트가 민망한 표정으로 소매를 들어 코 아래를 스윽 닦았다.
“그나저나, 쳐들어온 악마들의 수장이 무려 제3악마라는 보고가 있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애가 달은 이샤트가 우물쭈물 눈치를 봤다.
“부른 주제에 염치없지만…… 혹시라도 공녀까지 위험해질까 봐 걱정이야.”
이벨리아가 무복 끝자락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냈다.
뭐, 제법 고위의 악마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겐 언제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잖아.”
“데우스 엑스 마키나?”
“부르면 나타날 귀여운 토끼.”
“그자를 귀엽다고 부를 수 있는 건 세상에 공녀뿐일 거다.”
두 소녀가 서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이전 세대가 미처 끝맺지 못한 전쟁.
끝내 그들의 부모님들과 다를 것 없이 서게 된 전장.
그 얄궂은 운명의 안배에도, 그들은 괜찮았다.
칼을 겨눠야 할 적은 명확했고, 우리는 함께 서 있을 테니까.
***
한편, 이벨리아가 하르벤타 제국에 막 도착했을 무렵.
휴고는 지지부진한 회의를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왔다.
하르벤타에 원군을 보내는 건 확정되었지만, 어느 가문에서 기사를 얼마나 파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끝나지 않았다.
아마 내일 오전 정도는 되어야 황제의 인가를 받아 군을 꾸릴 수 있을 듯하다.
‘멍청한 것들의 발언권은 빼앗아버렸으면.’
폭군이나 다름없는 생각을 하며 겉옷을 벗던 휴고는 문득 드는 기시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귀가하면 늘 달려 나와 폭 안기던 딸이 오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휴고가 겉옷을 받아드는 하델에게 물었다.
“이브는.”
“아가씨께서는 방에서 학업에 정진하고 계십니다.”
“그럴 리가.”
그러자 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테사가 깊이 고개 숙이고 고했다.
“조금 전에 하르벤타의 황태녀 전하로부터 연락이 와서, 지금 담소를 나누고 계시는 중입니다.”
“……황태녀로부터?”
휴고의 눈썹이 불길하게 위로 솟았다.
싸한 예감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설마. 휴고는 곧바로 통신구를 진열해둔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영문을 모르는 하델과 테사가 그 뒤를 급히 따르고.
- 벌컥.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없다.
활짝 열린 창문에서 서늘한 바람만 새어 들어올 뿐.
“아이고, 아가씨!”
넋을 놓고 주저앉은 테사를 지나쳐, 휴고가 창틀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쪽지를 집어 들었다.
이내 야차와 같이 급변하는 표정. 또 숨길 생각도 않고 드러내는 날카로운 기운.
이 기운을 익히 알고 있는 아르티나 기사단이 수련장에서 곧바로 뛰쳐나왔다.
주군께서 분노하신 이유는 모른다. 감히 물을 생각도 없다. 다만 부복하며, 단장 에딘이 청했다.
“주군. 명을 내려주십시오.”
“하르벤타로 출정한다.”
“멸해야 할 것은 하르벤타입니까.”
“악마. 이브는 먼저 하르벤타로 향했다.”
이미 격전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무표정하던 기사들이 그 말에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
“……아가씨께서!”
“혼자 가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휴고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델. 부인과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들 수도에 남으라고 전하도록. 상황이 이렇다면 에르카디아라고 공격받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예, 주인님.”
휴고는 입고 있던 옷의 천을 찢어 대충 글씨를 휘갈겨 썼다.
「이브가 먼저 하르벤타로 향했습니다. 아르티나가 선발대로 출진하니, 후발대는 내일 보내시든지…… 보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걸 폐하께 전하도록.”
“예, 주인님. 항상 그러셨듯 무사 귀환하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휴고가 뒤에 도열한 기사들에게 명했다.
“쉬지 않고 달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견은 없었다.
***
곧바로 휴고의 전서를 받은 황제가 머리를 짚었다.
“황태녀, 그 약은 것이 공녀에게 직접 원조를 요청했군.”
국가 간의 지원 요청이라면 마땅히 복잡한 절차와 오고 가는 보상이 있게 마련인데.
이렇듯 우정에 기대 사적으로 손을 뻗고 그걸 냉큼 잡은 공녀가 가버렸다라…….
어찌 보면 하르벤타 입장에서는 최고의 한 수다.
공녀가 움직이면 줄줄이 따라가는 옵션들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아르티나. 용. 악마. 정령왕.
이래서야 공작이 후발대를 보낼 필요 없다고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심지어 그 아르티나 기사단도 대다수가 출정했다고 하니까.
“어쨌든 일은 쉽게 해결되겠어.”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황제가 통신구를 통해 세필리아에게 연락을 취했다.
상황이 급박하기는 한 듯 여러 번 닿지 않는 연락.
세 번째에 이르러 가까스로 수신하였다는 신호가 반짝였다.
“이봐. 나다.”
[어려운 요청을 해서 미안하군. 정말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제3악마까지 현현했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그뿐만이 아니야. 파악된 악마의 수만 일곱이고, 하늘은 온통 게이트가 뒤덮고 있어. 끝없이 밀려드는 마족들 때문에 병력을 나누기도 쉽지 않은 상황일세.]
“……정말 다시 시작되려나 보군.”
[……부정할 수가 없겠어.]
“원군은 보냈네.”
[고맙다. 칼라일.]
“아. 그리고 제국 차원의 원군과는 별개로, 이미 공녀가 출발한 모양일세. 황태녀의 원조 요청을 받고.”
[공녀가? 혼자?]
“뒤늦게 알게 된 공작이 아르티나 기사단을 대거로 이끌고 방금 출발했네.”
그러자 통신구 너머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내 당혹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공녀가 온다면…… 곧 동(東)마계의 지배자도 따라올 것 아닌가.]
“그렇겠지. 둘은 떨어질 사이가 아니니까.”
[그런데 거기다가 아르티나 기사단까지 온다고.]
“그렇네. 아주 든든하지.”
[……그렇긴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편히 말해보게.”
[안 그래도 개판인 제국이 더 개판이 될 것 같아서.]
“아.”
공녀에 루페르트 후작에 아르티나 기사단의 조합이라.
“이것 참.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황제가 경건하게 눈을 감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합장했다.
“하르벤타의 명복을 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