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지원군 이브
시종장이 전한 소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르벤타에서 지원 요청이라니…….”
1차 인마전쟁이 한창 격화되었을 때 이후로는 없었던 일.
기실 하르벤타와 에르카디아의 국력은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그러니 양 제국의 패권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하여, 하르벤타가 해결하지 못하여 지원을 요청했다는 건, 역으로 같은 일이 에르카디아에 벌어져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국난이라는 것을 뜻했다.
황제가 침음했다.
‘다시 시작되려는가…….’
휴고가 물었다.
“공격을 받은 건 수도만인가.”
“아직은 그렇다고 합니다.”
이미 지방 거점에 병력이 분산된 것이라면 몰라도, 그게 아닌 상황에서 수도 타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다는 건 제법 심각하다.
“…….”
휴고가 턱을 쓸었다.
하르벤타의 기사들도 절대 만만하지 않다. 직접 부딪혀봤으니 더욱 잘 알고 있다.
게다가 현 황제는 그 인마전쟁을 일선에서 지휘하였던 인재며, 장성한 황태녀와 황자도 발군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어떻게든 막기야 하겠다만. 그동안 발생하는 피해 때문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겠군.”
그러자 카시스 후작이 말을 받았다.
“각하의 의견이 옳을 겁니다. 악마 몇의 습격 정도를 막지 못할 하르벤타가 아니지요.”
“심지어 얼마 전에 슈타인 공작위를 이어받은 공녀는 대단한 결계사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쨌든 황실과 주요 귀족들의 목숨만 보전하면 재건에는 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악마 몇 정도가 현현한다고 해서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니다.
그러니 섣불리 원군을 보내기보다는 사태를 조금 더 관망해도…….
그때였다. 정보 수집에 주력하던 시종장이 회의장으로 들어와 추가 사실을 알렸다.
“폐하. 하르벤타를 습격한 악마들의 수장이 확인되었습니다.”
“누구인가.”
“……제3악마라고 합니다.”
“……!”
회의장이 싸한 침묵에 휩싸였다.
으레 일어나는 습격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제3악마라니.
이내 시종들이 붉게 빛나는 통신구를 수레로 밀고 들어왔다.
“하르벤타 황제의 전서입니다.”
가려진 것인지, 화면이 일절 보이지 않는 영상구.
황제 세필리아의 무거운 목소리만이 간결하게 흘러나왔다.
「……그대들의 호의를 청한다.」
“…….”
“…….”
잠시 서로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이내 웅성대며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가서는 안 됩니다. 폐하.”
“이세르나 백작의 말이 옳습니다. 하르벤타 스스로도 극복할 능력이 있음에도 굳이 우리 제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하르벤타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대신 에르카디아의 피를 흘리겠다는 목적 아니겠습니까!”
“전황이 정말로 위험하다면 우방국의 도리로 모른 척할 수야 없겠지만, 이 상황에서 기사들을 파견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사실 모두 궤변이다.
다만 귀족들은 자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을 뿐이다.
그 의도를 모를 리 없는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누군가 날카롭게 반론을 제시했다.
“가야 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세르나 백작이 즉각 시선 돌려 일갈했다.
“각하! 친분과 동정으로 돕기에는……!”
“돕기는 무슨.”
“예?”
“내가 그딴 어쭙잖은 이유로 내 기사들을 사지에 내몰 것 같나.”
“그러면 대체 왜……?”
휴고가 멍청이들과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무서운 전쟁이 무엇인지 폐하께선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국민들의 터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지.”
차라리 산. 평야. 황무지. 이처럼 제국민들이 없는 곳에서 훈련된 군사들끼리 벌이는 전쟁이라면 그리 무서울 것도 없다.
그러나 제국민들의 터가 전장으로 변모한다면, 단순히 국지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이후에 지역을 재건하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이 걸리게 되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다른 제국의 땅에서, 다른 제국의 자원으로, 어차피 여기서 놓치면 우리에게 올 적을 미리 섬멸할 기회이니.”
그제야 뜻을 알아챈 귀족들이 하나둘 시선을 내렸다.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수긍했다.
“공작의 말이 옳다.”
1차 인마전쟁 이후 처음으로, 원군의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의 우방을 돕는다.”
***
제국의 일이 으레 그러하듯 지원군을 꾸리는 과정은 온갖 불필요한 절차들로 가득했다.
자원자가 손들면 그만인 것이 아니란 소리다.
그것에 따라붙는 여러 절차…… 예를 들면, 기사를 데리고 출정한 사령관이 외려 에르카디아에 칼을 겨누지 않도록 담보하는 과정 등도 있게 마련.
그렇게 황궁에서 소위 ‘하르벤타 지원군’이 꾸려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직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한 이벨리아는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엔리르의 꼬리를 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엔리르. 너 똑똑하잖아. 이거 답 좀 알려줘.”
“착한 어린이는 스스로 하는 거야. 누나가 해.”
“난 이제 어린이가 아니니까 도와줘도 돼.”
“착한 어른이도 스스로 해야 해.”
“이거 다 못 끝내면 스승님한테 혼난단 말이야!”
“그러게 미리미리 하지 그랬어. 어제도 놀고 그제도 놀고 매일매일 놀았잖아.”
“……매정한 용 같으니. 아스한테 물어볼래.”
그러자 엔리르가 웅크렸던 몸을 펴고 쭈욱 기지개를 켰다.
“그 악마 며칠 자리 비웠다며.”
“아, 맞다……. 내 숙제 안녕…….”
“어디 갔대?”
“몰라. 바쁘대.”
“바쁘긴 개뿔. 악마 주제에 바쁠 게 뭐가 있어?”
“아스는 마왕과 반대 진영의 수장이니 이것저것 일이 많을 법도 하지.”
소위 말해 반군의 수장이 안일하게 머물렀다가 피 보는 것은 부하들일 테니까.
과제를 스스로 해결할 의지 따위 추호도 없는 이벨리아가 종이 뭉치를 침대 아래로 밀어 넣던 찰나였다.
똑. 똑.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테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고, 아가씨. 숙제를 또 침대 아래로 숨기고 계십니까?”
“물증을 없애야 해. 스승님께는 모르쇠 전략으로 나가면 그만이야. 어라, 세상에 숙제가 있었나요, 전법이지.”
“……침대 아래 쌓인 종이 뭉치 덕분에 침대가 위로 떠오르겠습니다.”
“괜찮아. 주기적으로 카사를 불러서 태우고 있으니까.”
“우리 아가씨, 커서 무엇이 되려고 이러시나…….”
“아주 어릴 적부터 내 꿈은 훌륭한 백수였어.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테사?”
비비안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아가씨 교육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까.
한숨 쉬며 테사가 용건을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가장 커다란 통신구가 빛나고 있어서 알려드리려고요.”
“앗! 이샤트!"
이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성년을 앞둔 두 아이의 연락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해가 갈수록 바빠지긴 했으나 언제 통화해도 그저 웃음이 나는 사이.
이벨리아는 환히 웃으며 통신구 방으로 향했다.
가장 커다란 통신구에 손을 대자.
- 기이이이잉.
연결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적색의 머리칼이 나타났다.
“이샤트! 이샤트! 잘 지냈어?”
그리고 저편에서 통신구를 돌아보는 얼굴…….
이벨리아가 말을 잃었다.
이내 다시 묻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노를 여과 없이 담고.
“무슨 일이야.”
얼굴에서 길게 흘러내리는 피가 통신구에 톡 떨어졌다.
이샤트가 통신구를 대충 문지르자, 이벨리아가 보는 시야도 붉게 물들었다.
자신의 머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피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벨리아의 친우가 울먹였다.
[공녀…….]
“지금 갈게.”
[도와줘…… 제발…….]
“조금만 기다려.”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곧바로 실라페를 불러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것저것 잴 생각은 없다.
하르벤타의 후원에서 처음 만난 이후.
함께 병아리 잠옷을 입고 밤새 수다를 나눴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늘 함께 고민해주던.
상대의 안녕을 그렇게 진심으로 바랐던.
언젠가는 서로의 태양과 바다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던.
“누나. 가게?”
“……친구야.”
“같이 가.”
“너는 여기서…….”
“같이 가. 누나는 내 은인이야.”
엔리르는 답을 듣지 않고 실라페의 등 위로 폴짝 뛰어 올랐다.
“독수리. 우리 누나 떨어뜨리면 소멸할 줄 알아라.”
[용은 참 폭력적이야.]
“그건 반말이고. 이 건방진 새대가리가.”
[……용님께서는 참으로 깡패다우십니다.]
그렇게 공작저 창공으로 날아오르며 이벨리아가 짧게 읊조렸다.
“다들 미안.”
알리고 기다리고 준비할 시간이 없었어.
머뭇거리다간 어쩌면 내 친구가…….
팔랑.
땅으로 내려앉는 짧은 편지가 이벨리아의 마음을 대변했다.
「이샤트가 위험해. 다녀와서 혼날게.」
***
그리고 불과 두 식경 뒤.
이벨리아는 조금 전의 결심을 아주 약간은 후회했다.
“으아악!”
“누나, 용 죽어.”
“으아아악!”
“집 나오면 개고생…….”
실라페의 최고 속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인식할 새도 없이 뚫고 지나가는 구름 속.
이벨리아의 몸이 덜덜 떨렸다.
[크하하하! 이거 재밌다, 계약자!]
“시, 시, 시끄러워.”
[시, 시, 시? 뭐라고 하는 거야, 계약자?]
“…….”
본래 게이트까지 걸리는 시간은 말을 타고 달렸을 때 이틀. 그 거리를 무려 3시간으로 단축했으니, 얼마나 빠른지 알 법도 하다.
실라페에서 비틀비틀 내린 이벨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게이트 담당자에게 명했다.
“우욱…… 게이트 열어.”
“고, 고, 공녀니임?”
“맞으니까, 우욱, 얼른 열어. 이럴 시간 없어.”
공녀님께서 아주 어릴 적 뵈었었는데. 그간 참으로 장성하셨다.
짧은 감회에 젖은 게이트 담당자가 재빨리 마력을 운용하여 게이트를 작동시켰다.
“그럼 수고해. 이따 따라올 후발대에겐 으으, 내가 잘 출발했다고 전해주고.”
게이트 안으로 발을 옮기자, 그 옛날과 한치 다를 것 없이 삽시간에 달라진 풍경.
하르벤타의 게이트 담당 건물에서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이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아니, 고, 공녀님?”
“혼자 오셨습니까?”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곧 와. 난 선발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홀로……!”
“쳐들어온 것들이 악마인가.”
“예? 예.”
“그렇다면 내가 선발대인 걸 감사해야지. 악마 사냥은 정령사가 적격인데.”
“…….”
“뭘 멍하니 서 있어. 장소는.”
“수, 수도입니다.”
여기서 하르벤타의 수도까지 말 타고 사흘이었으니까…… 대략 5시간 정도는 더 날아야겠네.
포옥 한숨 쉰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다시 실라페의 등 위로 올라탔다.
[꽉 잡아라! 계약자!]
“엉. 잡았어.”
[아! 아! 머리털 잡지 말고!]
“더 빨리 날아라, 새!”
[아! 내 머리털! 이러다 대머리독수리 되겠네!]
***
실라페를 재촉해 수도 근처까지 날아가니 아래에서 보이는 광경이 영 심상치 않다.
[계약자. 거의 다 와 간다.]
상황의 급박함을 파악한 실라페도 더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래를 바라본 이벨리아도 침음했다.
불바다도 이런 불바다가 없다.
창공과 땅을 가리지 않고 마족들이 날뛰고…….
일전에 에르카디아에도 나타났던 게이트들이 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지휘의 뿔 나팔을 불고 있는 것은 기운으로 보건대 악마가 분명했다.
대강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악마의 수만 대여섯.
그 악마들마다 각자의 군대를 개미 떼처럼 위시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데.’
이 정도면 그저 악마의 습격이라고 치부할 것은 아니다. 마계가 작정하고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고 봄이 옳을 터다.
아무리 이벨리아라고 하더라도 이 전황을 한 번에 뒤집을 수는 없다.
‘이샤트와 아드니엘부터 구하고, 위험한 곳들만 도와주면서 후발대를 기다려야겠어.’
내가 출발한 걸 알면 우리 제국도 바로 원군을 보낼 테니까.
푸른 독수리가 최대한 구름에 몸을 숨기며 날았다.
종종 눈치채고 손톱을 들이대는 마족들은 엔리르가 꼬리 한 번 휘둘러 모두 날려버렸다.
“누나. 저기.”
어린 용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저 아래 지상에 보이는 건 악마와 마족들에 포위된 소규모 군대.
주변에 쌓인 시체를 보아하니 당초엔 대군이었을 터다.
……그 가운데, 황가의 검을 들고 홀로 지휘하고 있는 소녀.
이벨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실라페. 저쪽으로 하강해.”
***
어디를 얼마큼 베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다만 족적마다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니, 아마 갑옷 속의 상처가 작지는 않은가 보다 추측할 뿐이었다.
귀족들과 기사들이 모두 출진하였음에도 도무지 수습되지 않는 전황에 참다못해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출정하였건만.
‘……함정이었어.’
이샤트가 도착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산속에서, 땅속에서, 게이트 안에서 줄줄이 나오는 악마와 마족들.
이미 적지 않은 기사들이 절멸하였으나, 소녀는 결코 등을 보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샤트의 전장.
바로 앞에 선 악마 하나가 키득 웃으며 이샤트의 목을 잡아 올렸다.
이미 무너진 군대, 얼마 남지 않은 기사들이 절규했다.
“전하!”
“황태녀 전하-!!”
“후퇴해서…… 크윽…… 대형을 재정비하라.”
“전하!”
“전하를 두고는……!”
목을 잡혀 허공에 들린 이샤트가 사그라지지 않은 눈으로 기사들을 일별했다.
“어서.”
기사들만 살리면 된다.
나는 여기서 죽더라도…… 아드니엘이 있다.
비겁하게 도망쳐 황위에 오른 황제가 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죽어 제국의 양분이 되겠다.
‘그래야 맞지. 그렇지, 공녀?’
너와 약조했으니까.
‘나는 모든 것을 불사르는 태양이 되기로. 너는 내가 잠길 유일한 바다가 되기로.’
이샤트는 가장 사랑했던 조국의 하늘을 바라봤다.
‘죽기 딱 좋은 날씨네.’
네게 직접 말하진 못하겠지만, 공녀.
‘달려와 줘서 고맙다.’
그렇게 이샤트의 정신이 꺼져가던 찰나.
저 하늘, 마치 신의 안배처럼 푸른빛이 반짝였다.
거의 동시에.
- 쐐애애애액.
거센 바람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 퍼억.
목을 죈 악마의 팔이 자비 없이 터져나갔다.
이샤트가 가물거리는 초점을 힘겹게 잡았다. 그러자 휘날리는 금발이 시야를 잠식한다.
이내 지지대를 잃은 몸이 허공에서 그대로 추락하고.
받아내는 누군가의 따뜻한 품이 느껴진다.
별안간 팔이 날아가 버린 악마가 분노 어린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악! 뭐냐!”
이샤트를 내려둔 이벨리아가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삭막한 전장, 단 하나의 따뜻한 빛이 반짝였다.
“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