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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01화 (201/323)

##  201화: 버러지 중에 상버러지

데퐁트 전 후작, 그러니까 루시우스 데퐁트는 구구절절 쓰인 편지를 망설임 없이 구겼다.

“한심하긴.”

그의 딸인 세레스와 약속하길, 반드시 전해야 하는 내부 정보가 있다면 흔적을 없애는 결계를 두른 산맥의 나무 밑동에 묻어두고 호문쿨루스를 보내 신호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가 기대하던 호문쿨루스의 경지에 한참 못 미치는 쭉정이가 와서 끼악끼악거릴 때부터 못마땅하긴 했다.

그래도 혹시 제법 귀중한 정보라도 물었나 싶어 바쁜 몸을 이끌고 편지를 가지러 갔더니…….

쓰여 있는 내용이라곤, 문화제 때 공녀가 얼마나 얄밉게 굴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그깟 관심 없는 내용들뿐이다.

휙. 뒤로 던진 편지가 벽난로 속에서 타닥 타닥 타들어 갔다.

루시우스가 구석에 놓인 철창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내 딸이라지만, 네 여동생은 싹이 글렀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깔끔하게 위로 넘긴 잿빛의 머리. 같은 색의 눈동자.

철창 내에서 신음하던 희생자의 목을 주욱 그어내며 리카드 데퐁트가 해죽 웃었다.

“우리 여동생. 저걸 호문쿨루스라고 보냈답니까?”

“그러게 말이다. 하급 마물도 저것보단 나은 형태겠구나.”

킥킥 웃은 리카드가 오른손을 뻗었다. 이내 자랑하듯 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뒤이어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갖춘 호문쿨루스가 리카드의 앞에 부복했다.

이를 본 루시우스가 광소했다.

“크하하하하! 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내 아들이지!”

“제가 왜 그 더러운 전쟁터에서 수년을 굴렀겠습니까.”

제국을 위한 선봉장? 후작가의 명예? 전부 틀렸다.

“연금술은 곧 인간의 목숨으로 완성되는 것. 제물을 구하기에 전장보다 더 좋은 곳은 없지요.”

누굴 얼마나 죽여도 티 나지 않는 곳.

그곳에서 사령관 리카드는 적아를 나누지 않고 수많은 인간을 학살했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은 손색없는 전투 병기라 불리는 호문쿨루스.

작은 씨앗 형태로 태동하던 그것은 인간을 바치면 바칠수록 형체를 갖춰갔다.

“이봐. 네가 아버지의 호문쿨루스와 싸우면 이길 수 있나?”

“97% 제가 패배합니다.”

“크하하하! 아직 멀었구나, 리카드.”

“그럴 수밖에요. 아버지는 1차 인마전쟁 때 금제탑을 불태워 연금술사들을 제물로 바치셨으니…….”

생명의 경중을 재는 연금술에서는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소위 말해 질 좋은 인간의 생명력을 먹을수록 끝을 알 수 없게 강해지는 연금술의 비기(祕器).

고서에는 적혀 있었다.

대륙을 식(食)한 호문쿨루스는 용을 살(殺)하고 마왕을 멸(滅)했다고.

그만큼, 연금술사들에게는 지식 다음으로 호문쿨루스의 존재가 중요했다.

“하하하! 그래도 나쁘지 않다. 나조차 네 나이 때 이 정도 성과를 내지는 못했으니까.”

다음 철창으로 넘어간 리카드가 살려달라며 비는 인간 하나를 더 베어 호문쿨루스 앞에 툭 던져두었다.

“지금이야 가주 승계의 정식 절차를 밟기 위해 수도로 귀환하지만, 곧 다시 출정할 생각입니다.”

- 오드득. 오드득.

뼈째로 인간을 잡아먹는 호문쿨루스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리카드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야 더 많은 재료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 사사받던 연금술.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단연 최고의 힘이라고.

다른 모든 전투 학문은 자연과 법칙에 기반을 두지만, 연금술은 다르다.

세계를 독식하고 거스르는 힘.

다른 생명을 바쳐 잡아먹고 자라는 힘.

법칙을 지키는 정직한 것들은 그 법칙을 찢고 올라서는 학문을 이길 수 없다.

금제탑의 진리를 일부 깨우치며 득의양양해진 리카드는 아버지의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아버지. 다시 수도로 귀환하셔야지요. 아버지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 가문을 지지하던 귀족들도 다시 결집할 것입니다.”

“아니. 나는 죽은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 단호한 거절에 잔뜩 실망한 리카드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금제탑을 이끄시기 위해서입니까?”

그러자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을 감추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사망했다는 사유만큼 좋은 게 없다.

그 사유라면 리카드도 더 할 말은 없었다. 제국 내엔 자신이. 금제탑엔 아버지가. 그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없을 테니까.

“그러시다면…… 또 한참 뵙기 어렵겠군요, 아버지.”

“자주 만나기는 어렵겠지만, 네가 떠나기 전에 아비로서 선물 하나는 남기게 해다오.”

자신의 뒤를 이을 만큼 잘 자란 아들을 향해 모처럼의 부성애가 빛을 발했다.

루시우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 아래로 나타난 계약서.

“이게 무엇입니까, 아버지?”

대답 없이 계약서 가장 아래의 붉은 인장에 검지를 가져다 대자.

- 우우우우웅.

계약서가 옅게 진동하며 허공으로 휙 날아올랐다. 이내 짙은 마기가 줄기처럼 방 안에 뻗어 나갔다.

이 정도면 상당히 고위의 마기다. 리카드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춤 뒷걸음질 치자, 루시우스가 아들의 팔을 꽉 부여잡으며 광기 어린 눈으로 속삭였다.

“내가 마계를 등에 업었다는 소식을 들었느냐.”

“예? 예, 세레스가 그리 말하기는 하였습니다만…….”

“내가 계약을 맺은 상대는 그저 고위 악마가 아니다.”

마계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고 하면서, 그 상대방이 고위 악마가 아니다?

의미를 곱씹던 리카드가 경악했다.

“……설마.”

“그래. 이 계약 저편에 있는 자는.”

휘몰아치는 마기 속, 지엄한 계약에 따라 현현한-.

소년 광대 모습의 제3의 악마 밧사고가 히죽 웃으며 말을 맺었다.

“우리의 왕이시지.”

***

감히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리카드는 본능적으로 떨리는 몸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일전에 전장에서 하위 악마 하나를 마주한 적이 있기는 하나…… 눈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악마는 결이 달랐다.

침을 꿀꺽 삼킨 리카드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평했다.

“제법 고위의 악마로군요.”

물론, 아버지와 마계가 대등한 계약 관계에 있으리라 여겼기에 뱉은 대담한 평가였다.

그러자 입이 찢어져라 웃던 밧사고가 리카드의 턱 밑에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반은 맞았어.”

“반은……?”

“고위의 악마라는 건 정답. 제법이라는 건 오답.”

킬킬 웃던 광대가 손을 뻗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리카드의 다부진 목에 검붉은 마기가 둘렸다.

체구만큼이나 작은 손이 꽈악 주먹을 쥐자 동시에 자비 없이 조여드는 마기.

리카드가 처절하게 목을 부여잡았다.

“커억. 크어억.”

밧사고가 질식의 문턱에서 오락가락하는 리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위에 계신 분은 단 한 분뿐이야.”

“커억! 컥!”

“네까짓 하등한 버러지가 ‘오 제법 고위구나’ 하며 평가할 위치가 아니란 소리지.”

“크억!”

“알았으면 고개 끄덕.”

구르는 쓰레기를 보듯 멸시하는 눈빛에도, 리카드는 그저 혼신의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루먹은 모습이 마음에 든 밧사고가 검지를 까닥 움직여 마기를 풀었다.

리카드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고.

“옳지. 무릎 꿇고.”

이내 털썩. 바닥에 널브러진다.

“잘하네. 그게 네 위치야.”

손조차 대고 싶지 않다는 듯, 밧사고가 아슬아슬하게 검지 끝으로 리카드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잊지 말도록 해. 주제만 안다면, 우리가 인간계를 집어삼킨 다음 너희들을…… 그래, 유일한 귀족 같은 것으로 삼아줄 테니까.”

“…….”

“원한다면 아르티나에 대한 처분권도 줄 수 있어.”

“……따르겠습니다.”

“쮸쮸쮸. 옳지. 이제야 착한 강아지답네.”

진정 강아지를 대하듯 턱 아래를 살살 긁어주며 서열정리를 마친 밧사고가 리카드의 어깨를 발로 짓누르며 루시우스를 바라봤다.

제 아들이 악마의 발밑에서 놀아나고 있는데 표정 변화 하나 없다. 그래서 밧사고는 저 인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날 부른 이유는? 설마 네 핏줄을 소개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인간입니다.”

“에엥? 얼마 전에 잔뜩 구해줬잖아! 아직도 철창 속에 저렇게 많이 남아 있는데?”

“조금 더 필요합니다.”

“그 가짜 인간 키우는 데 먹이가 많이 필요한가 보네.”

이미 먹은 인간의 양이 작은 왕국 하나 정도는 될 텐데.

쯧쯧. 밧사고가 혀를 찼다.

“마침 우리도 실험할 게 있었으니 그 김에 잡아다 주도록 하지.”

“실험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밀.”

“혹 잘 안 풀리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맞다. 이 인간 연금술사였지.

눈을 가늘게 뜬 밧사고가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애를 먹고 있던 차인데, 상정하기 어려운 고대로부터 전승된 연금술의 힘을 빌리면 예상외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은 정령사지.”

“지배력과 자연력이 상극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밧사고의 눈이 흥미로 얇게 휘었다. 마치 아주 재미있는 광경을 기대하듯.

“그러면 정령사가 자연력을 발현할 때 그보다 상위의 지배력이 그 힘을 틀어막으면 어떻게 될까?”

“……?”

“내부에서 거대한 힘이 일어났는데 그게 분출되기도 전에 상극인 힘이 누르면?”

“설마…….”

밧사고가 두 손뼉을 마주쳐 큰 소리를 냈다.

“펑! 터져버리지.”

맙소사.

역시 한 세계의 주축이다.

다가올 인마전쟁을 위해 악마들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가능성을 점치던 루시우스가 이내 허리를 접고 웃었다.

“크하하하! 그거 공녀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걔 잡으려고 만드는 거야.”

웬만한 지배력으로는 상쇄하기도 어려울 테니, 우리 왕의 힘을 일시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거지.

“아주 잠깐이면 돼. 타이밍만 잘 맞추면 그만이거든.”

효과가 검증된다면 웬만한 악마들에게 모두 지급할 예정이다.

내부가 엉망이 되어 정령술을 쓰지 못하는 공녀는 위협적이지 않다.

그렇게 공녀만 잡으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다.

아르티나 일가부터 동(東)마계의 지배자까지, 공녀라고 하면 사족을 쓰지 못한다고 하니까.

“인질로 쓸 수도 있겠고. 아니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죽여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특히 동(東)마계의 지배자는 자결하라 해도 군말 없이 따를 정도인 것 같던데.

그 장밋빛 미래를 상상한 루시우스와 리카드의 입매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완벽하게 완성될 때까지 이 마정석 개발은 극비야. 공녀가 몰라야 홀로 전쟁터에 나올 테고, 그래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입니다. 이번에 잡아다 주시는 것들로 저 역시 실험을 좀 해보도록 하죠.”

“역시 넌 버러지 중에 상버러지야.”

“욕입니까.”

“칭찬인데. 버러지 중에 상등품 버러지.”

“……참 감사하군요.”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선 밧사고의 뒤로, 루시우스가 물었다.

“아. 어디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밧사고가 생글 웃으며 지도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

“……왜 굳이 이런 곳을.”

“당연한 걸 묻네. 쉬운 건 재미없잖아.”

***

밧사고가 항상 그렇듯 가벼운 모습으로 사라지고 난 뒤.

짙은 자국이 남은 목을 쓸어내리며 리카드가 낮게 물었다.

“아버지. 진정 악마들에게 복종하시는 겁니까.”

시약 플라스크를 흔들던 루시우스가 안에 담긴 액체를 조르르 부었다.

아래 놓인 금속이 치익 소리를 내며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그럴 리가.”

연금술은 누군가의 밑에서 복종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 아니다.

신도 씹어먹기 위해 쌓아 올린 지식인 것을.

“악마들의 저 작태를 봐주는 건 이 땅을 모두 정화하는 그날까지만이다.”

“그 이후엔 저들을 없앨 방도라도 있으십니까.”

“많지. 방금도 저들이 방법 하나를 알려주지 않았느냐.”

“……방금?”

루시우스가 끌끌 웃었다.

상위의 지배력으로 정령사의 기혈을 틀어막아 자연력을 내부에서 터뜨린다고 했나.

좋은 원리를 알려주었다. 세상만사는 역으로도 통하는 법이니.

“토사구팽이라 하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악마와 연금술사.

마계와 금제탑.

루시우스는 자신이 있었다.

용도를 다하여 폐기되는 사냥개가 자신들은 아닐 것임에.

***

며칠 뒤, 에르카디아 제국 황궁의 귀족 회의장.

마침 정기 회의가 있는 둘째 주 금요일.

“풍족한 구휼미 덕에 기근이 상당히 해결되었다고…….”

한 백작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발언하는 도중이었다.

회의장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별안간 들이닥친 시종장이 급보를 외쳤다.

“폐하!”

“시종장. 무슨 일인가.”

“하르벤타 제국의 수도가……!”

난세(亂世).

단 한순간도 평화에 잠식된 적 없으나 또 이렇게 빨리 시작될 줄은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

어지러운 세계에서 작은 빈틈은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 증거로, 시종장이 내민 관망용 통신구에 비친 하르벤타는.

……말 그대로 지옥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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