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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00화 (200/323)

##  200화: 친구, 그 이상?

천국을 맛본 대악마와 별반 다르지 않게, 휴고와 엘리시아의 눈도 빠르게 돌아갔다.

휴고가 그림 하나를 집어 들며 금화를 쏟아냈다.

“문화제는 매해 열어야겠어.”

“행사명도 이브제로 바꾸는 건 어때요?”

“역시 당신은 현명해.”

이리 둘러봐도 이브. 저리 둘러봐도 이브.

온통 우리 아가를 기리는 작품이 가득하다.

흡족하게 둘러보던 휴고의 금안에 시커먼 악마가 포착됐다.

보따리 보부상도 아니고. 벌써 가득 찬 자루를 네 개나 들고 있다.

“엘. 저 망할 악마가 우리 아가 그림을 잔뜩 사고 있는데.”

“질 수 없죠.”

엘리시아가 주머니에서 보석을 한 움큼 쥐어 주변 예술가 모두에게 건넸다.

“황금색과 푸른색이 섞인 그림은 모두 내게 팔도록.”

“아이고, 영광입니다, 공작부인!”

“여기 있습니다, 공작부인!”

족족 손에 들어오는 딸의 초상화. 이게 바로 돈 쓰는 맛인가.

“어머. 그 조각상은 우리 아가를 닮았는데?”

“맞습니다, 공작부인. 공녀님의 어릴 적 모습을 담았지요.”

“세상에…… 이건 꼭 사야 해.”

잔뜩 고조된 엘리시아의 옆.

붉은 털 뭉치가 조르르 지나갔다.

금화를 잔뜩 넣은 비단 주머니를 목에 건 엔리르도 위풍당당 예술품 사이를 누볐다.

신이 난 궁둥이가 씰룩쌜룩 흔들렸다.

이 기특한 인간들. 뭐가 가장 아름다운지 뭐가 예술인지 아주 보는 눈이 있다.

‘앗. 이것도 우리 누나다.’

엔리르의 말랑한 앞발이 그림을 톡톡 짚었다.

“캬릉!”

“이 여우는 뭐야?”

“캬르릉! 캬릉!”

그거 내놓으라고. 그거. 우리 누나 그린 그거.

“어어, 그림이 상하잖아! 저리 가! 쉭! 쉭!”

“캬앙!”

홀대에 심히 언짢아진 엔리르가 송곳니를 드러내고는, 비단 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개를 물어 땡그랑 패대기쳤다.

그러자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웬 여우가 금화를……?”

양심 없는 사내가 주변을 살피며 금화들을 집어 스윽 주머니에 넣었다.

“캬악!”

눈 뜨고 코 베인 어린 용이 으르렁댔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세상의 쓴맛에 분노한 엔리르는 광장 계단과 계단 사이 어두운 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조금 뒤.

붉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타난 어엿한 소년이 조금 전 사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봐.”

일견 살짝 얹고 있는 것 같지만, 내리누르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수도 뒷골목을 주름잡고 있다는 ‘골져스’ 패거리인가.

사내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 맺혔다.

“왜,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십니까아? 몰라서 물어?”

“호, 혹시 아까 그 여우의 주인……?”

“내 주인, 아니 여우의 주인은 따로 있지만, 대충 비슷한 거라고 해두지. 그 그림 내놔.”

“저, 공녀님의 초상화는 인기가 아주 많아서 여우가 떨어뜨리고 간 금화로는 조금 부족합니다. 두 개밖에 안 떨어뜨리고 간지라.”

“장난질 치다 걸리면 모가지 날아간다.”

흔치 않은 홍옥 색 눈동자에 담긴 살벌한 경고.

사내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눈앞의 이 소년은 인간을 죽이는 데 별 거리낌이 없는 이라는 것을.

“죄송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내미는 그림을 받아 챙기며, 엔리르가 차가운 눈으로 사내를 흘겼다.

“넌 앞으로 공녀님을 그리지 마.”

“예?”

“우리 누…… 아니, 공녀님을 그리려면 마음을 경건히 먹어야 하는데, 넌 심성이 썩어빠졌어. 다시 한번 그리는 꼴을 보면 손목을 분질러버릴 거야.”

기사단에게 배운 험한 말을 찰지게 잘 써먹은 엔리르가 비단 보자기에 싼 그림을 소중히 등에 메고 돌아섰다.

아무래도 여우형으로는 작품을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 같으니, 이왕 변한 김에 인간형으로 조금 더 돌아다니는 게 좋겠다.

‘누나한테 안 들키게 조심조심 움직여야지.’

은인에게 여전히 아양 떨고 싶은 용은 자신이 이렇게 자랐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진 않았다.

마침 이벨리아와 관련된 예술품을 잔뜩 사서 옆을 지나던 루드비히가 쯧 혀를 찼다.

“이리 컸으면서 아직도 어린 짐승 행세라니. 양심 어디 팔아먹었나.”

“내 양심은 멀쩡해. 난 아직 아가 용이야.”

“……그 모습으로 그 말을 하니 심히 역겹군.”

“너한테는 다 큰 용이야. 말 함부로 하면 이 제국을 날려버릴 줄 알아.”

“제국을 날려버린 악룡으로 남으면 이브가 참으로 좋아하겠군.”

“그래? 누나가 좋아할까?”

“……멍청하긴.”

그때. 부럽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둘 사이에 날아들었다.

“전하. 스승님. 공녀님의 그림을 사셨군요.”

“카시스 영애로군. 눈에 보이는 건 전부 샀다.”

“나도.”

“현명한 선택이셨네요. 명률(明律) 구역부터 돌고 왔더니 남은 공녀님 초상화가 하나도 없어요, 속상하게.”

“조금 전에 배려 없이 휩쓸고 간 악마를 탓해라.”

“……?”

누가 누구에게 배려를 논하는가.

렐리안은 마찬가지로 배려 없이 그림을 잔뜩 품에 안은 루드비히를 빤히 바라봤다.

“전하. 그거 하나만 제게 되파시면 안 될까요?”

“무슨 소릴. 저기 악마한테나 가보도록.”

“전하께서도 많이 가지고 계신걸요.”

“전혀. 난 이만 명률(明律) 구역으로 가봐야겠군.”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렐리안이 비단 보따리를 주섬주섬 펼쳤다.

안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악보. 양이 상당하다.

걸음을 옮기던 루드비히가 경악하여 아래를 내려다 봤다.

“카시스 영애, 이게 다 무슨…….”

“명률 구역에 있는 건 제가 모두 쓸어왔어요.”

“정말 너무하는군.”

“전하께서도 너무하셔요.”

“이러기야?”

“전하께서도 이러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지금 내게 악보 많다고 자랑하나?”

“그런 목적도 있기는 하고요. 전하께서 가지신 그림 몇 장과 제 악보 한 개를 교환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탐욕이 이크리안과 똑 닮았군.”

“그건 욕입니다, 전하.”

“욕이었네, 영애.”

그렇게 돈이 썩어 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사들이고 있는 문화제.

그런 삶과는 꽤 동떨어진 카밀라는 멍하니 책 하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공녀님과 관련된 웬만한 것들은 팔린 지 오래지만, 워낙 구석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남아 있는 책 하나.

「구원」

간결한 제목이었으나 누가 주인공인지 모를 리 없었다.

표지에 그려진 것부터가 붉은 여우를 어깨에 올린 소녀였으니까.

‘가지고 싶다…….’

그러나 공녀님을 담은 작품들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기에, 자신이 수중에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려던 찰나.

금화 몇 개가 불쑥 카밀라의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전하?”

“일전에 도와준 값. 생각해보니 제대로 못 치렀더군.”

“제가 감히 무엇을…….”

“황자궁에 들인 시녀들의 뒷조사.”

“황공하오나, 그건 공녀님께 도움이 되고자 한 일이라 전하께 이런 대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나를 대가 없이 신하 부리는 악덕 군주로 만들 셈인가.”

“예?”

“받아두도록. 그대는 이것마저 이브를 위해 쓸 것 같으니.”

툭. 카밀라의 거친 손에 묵직한 비단 주머니가 올라앉았다.

“…….”

카밀라는 더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과 가문에는 돈이 필요했다. 동정이든 보상이든 중요치 않다.

쌩하니 지나친 이 제국 소지존의 등 뒤로, 그녀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원치 않았으나 주인공이 되어버린 이벨리아.

그 탓에 모욕감을 느낀 세레스.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행복했던 문화제의 막이 내렸다.

***

그리고 그 잔재는 이벨리아가 진저리를 칠 정도로 길게 남았다.

공작저에는 사방팔방 이벨리아의 초상화가 자리했다.

회랑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작부부, 아르칸, 세드릭의 방도 모자라…….

심지어 연무장에선 미친개 기사단이 흡사 이단을 숭배하는 사이비 신도들처럼 이벨리아의 조각상 근처를 빙빙 돌며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렸다.

참다못한 이벨리아가 정령을 불러 조각상을 빼앗아버리자,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우어엉 소리 지르는 꼴이 먹이 뺏긴 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하간 온 사방에 널린 자신의 모습에 제대로 질려버린 이벨리아는 발코니 난간을 붙잡고 선언했다.

“문화제는 올해로 끝이야. 절대 다시는 못 하게 할 거야!”

그리고 정확히 같은 시각.

잔뜩 걸린 이벨리아 초상화에 흠뻑 취해버린 대악마는 황제의 집무실에 냅다 쳐들어가서 당당히 요구했다.

“황제. 문화제 매해 개최해라.”

***

문화제 이후 어느덧 해가 바뀌었으나 여전히 한겨울.

시리게 부는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렐리안에게 이번 겨울은 생애 가장 따뜻한 계절이었다.

아르칸과의 연애는 서툴고 수줍던 초입을 지나, 헤어질 때 포옹하고 볼에 입을 맞추는 단계까지 진입했다.

심지어 어제 데이트 끝에는…….

렐리안이 슬쩍 입술을 매만졌다.

화르륵. 다시금 얼굴이 달아올랐다.

통상 귀족들의 약혼이 15세 전후로 이뤄지고, 18세에 성년이 되자마자 혼인하는 것을 감안하면 렐리안과 아르칸의 연애는 상당히 느린 축에 속했다.

그러나 둘 다 서두를 마음은 없었다.

남들에 맞춰 뛰기에는, 느린 보폭으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소중했으니까.

렐리안은 아르칸이 선물한 차를 입에 머금었다.

입맛에 딱 맞게 살짝 쌉싸름한 끝향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홀로 설레는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귀가한 이크리안이 크라바트를 풀어 던지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 자식이 준 차야?”

“응. 어떻게 알았어?”

“그 자식 방에서 나는 냄새가 나서.”

“…….”

“너 왜 얼굴이 붉어져? 설마 그 자식 방에 갔었어?”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차. 제대로 본심이 나와버렸다.

렐리안이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오늘 황궁은 어땠어?”

이크리안이 수상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답했다.

“골치 아팠어. 전하의 국혼에 관한 상소가 끊이질 않아.”

“벌써 약관(弱冠)이시니 그럴 법도 하네.”

“심지어 딸 없는 귀족들까지 난리야. 공녀님을 비로 맞으셔야 한다면서.”

“……공녀님을?”

이크리안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솔직히 말하면, 덮어두고 무시하기도 어려울 정도야.”

격무에 시달리는 이크리안이 한숨 쉬며 방으로 올라가자, 렐리안이 조용히 읊조렸다.

“……난 싫은데.”

고운 손이 책장에서 제국 역사서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일평생 순탄하게 살다 서거한 황후는.

정쟁. 숙청. 독살. 폐위. 후계 다툼.

황후에게 길은 보통 두 가지였다.

먼저 제거하거나 제거되거나.

역사서를 덮은 렐리안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아주 조금이라면, 내가 개입해도 되지 않을까.’

황태자 전하와 이브의 관계는 외부적인 압력을 많이 받으니까.

루페르트 후작님과 이브의 관계도 살짝 떠밀어 주는 것이…….

렐리안은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게 공평하니까.’

***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방문할 시간에 맞춰 티타임을 요청한 렐리안 덕에, 셋은 함께 온실에 모여앉았다.

그렇게 판이 만들어지자, 렐리안은 공작저로 오는 내내 생각했던 작은 계략을 펼쳤다.

“이브. 저 부탁이 있어요.”

“응! 뭔데?”

“이 편지, 아르칸 오라버니께 전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래! 이따가 전해줄게.”

“죄송하지만…… 혹시 지금은 어려우실까요?”

“아주 급한 일이야?”

“아주 급한 일이에요.”

렐리안이 부탁을 하는 일은 흔치 않다. 아마 정말 급한 일인가 보다.

“알았어, 바로 다녀올게. 둘이 재밌게 놀고 있어!”

미끼를 덥석 문 이벨리아가 흔쾌히 온실 밖으로 나갔다.

마치 외출한 주인 기다리듯 온실 문만 바라보는 대악마를 향해, 렐리안이 운을 뗐다.

“후작님.”

대답 없이, 듣고 있다는 까닥임만 돌아온다.

“나중에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말씀하세요.”

같잖다는 듯 돌아오는 답조차 없다. 렐리안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럴 일 따위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분명 필요하실 거예요.”

아가레스의 눈썹이 슬쩍 위를 향했다.

렐리안이 살포시 웃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잡을 땐, 조력자가 필요한 법이거든요.”

“무슨 마음.”

“후작님께선 공녀님께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가요?”

“…….”

말로 표현하기엔 심히 깊어 아가레스는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렐리안이 검지로 턱을 쓸었다.

이 정도 떠먹여 주면 적당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 대악마 생각보다 더럽게 둔하고 눈치가 없다.

아무래도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봐야겠다.

“공녀님도 약혼 적령기시니, 곧 연인이 생기시겠…….”

말을 채 다 맺기도 전.

- 콰득.

아가레스가 쥐고 있던 의자 팔걸이가 처참하게 바스러졌다.

렐리안은 짐짓 놀랐다는 듯 연기했다.

“어머, 후작님. 화가 나신 것 같아요. 혹시 공녀님께 연인이 생기는 게 싫으신가요?”

“당연하지 않나.”

“왜 당연한가요?”

“이브는 내 친구다.”

“그게 이브가 연인을 만드는 것과 무슨 상관일까요? 친구와 연인은 엄연히 다른 것을.”

“……?”

“가령, 제가 아르칸 오라버니와 연애한다고 했을 때 이브가 싫은 감정을 내비쳤었나요?”

“…….”

그러고 보니 아니다.

아가레스의 금안이 옅은 의문을 담았다.

이브와 이 인간은 친구다.

나와 이브도 친구다.

이브는 이 인간의 연애를 기꺼이 응원한다.

나는 이브의 연애를 응원……하긴 무슨.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다.

왜 다른 거지?

렐리안이 찻잔 아래로 입매를 길게 늘였다.

‘좋아. 지금은 이 정도면 됐어.’

이내 온실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

렐리안이 소리 낮춰 빠르게 속삭였다.

“후작님. 개인적으로 저는 후작님을 응원해요.”

“……?”

“제가 사랑하는 공녀님이 그저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라거든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때가 되었을 때 너무 미적거리지 마시고요.”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소리만 하는군.”

“제가 도움을 드린다고 했던 것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온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렐리안은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는 듯 이벨리아를 보며 방긋 웃었다.

“편지 전해주고 왔어!”

“고마워요, 이브. 연인에게는 매일 편지를 써도 매번 건네고 싶은 말이 많아서요.”

“연애란 그런 거야?”

“연모란 이런 거예요. 그렇죠, 후작님?”

“물어봤자야. 우리 토끼는 그런 거 몰라.”

“글쎄요, 후작님께도 연인이 생겼을 수 있잖아요.”

이벨리아의 손에서 쿠키가 툭 떨어져 내렸다.

“……뭐?”

보드라운 쿠키가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작고 흰 얼굴이 아가레스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토, 토끼.”

“…….”

“연인 생겼어……?”

묻는 표정이 마치 떨어진 쿠키처럼 산산이 부서져 있다.

찰나. 대악마는 생각했다.

‘너도 나와 같구나.’

형체도 없는 서로의 연인에 대해, 서로가 같은 반응을 보인다.

어렴풋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뜬구름.

대악마는 굳이 잡으려 애쓰지 않고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야, 렐리안! 왜 그런 말을 해서 놀라게 만들어?”

“왜 놀랐어요, 이브?”

“그야 토끼한테 연인이 생겼다고 하니까!”

“싫은가요?”

“아주 싫어!”

“왜요?”

“토끼는 내 친구니까!”

“이상하네요. 이브랑 저도 친구인데. 제가 아르칸 오라버니와 연애를 한다고 했을 땐 이러지 않으셨잖아요.”

“그건, 그건…… 그러네?”

왜지?

토끼와 렐리안은 모두 내 친구야.

근데 렐리안의 연애는 괜찮아. 토끼의 연애는 싫어.

왜 다른 거지?

이벨리아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별안간 고뇌에 빠진 대악마과 공녀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렐리안은 유유자적 차를 머금었다.

‘이제 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느리더라도.’

새해, 눈이 내리는 날.

미묘한 감정-. 그 아주 작은 파문의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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