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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198화 (198/323)

##  198화: 나누기엔 질투심이 많아서

광장이 기이한 고요함에 휩싸였다.

대자연 중에서도 특히 신성하게 여겨지는 하늘에 그림을 그린 것도 모자라, 그 의미도 남다르다.

성벽과 황실, 초대 황제.

모두가 빛을 논할 때.

이름 없이 전사한 기사들. 유해조차 수습되지 못한 제국민들…….

단 한 명만이 그림자를 기억했다.

심사위원들이 슬쩍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이거 우승자가 너무 명백한데.’

‘그렇긴 한데 황가의 문양을 제치고 우승을 줘도 되는 건가?’

‘그보단 초대 황제 폐하의 어진도 있는데…….’

섣불리 우승자를 결정했다가는 ‘감히 네가 황실을 능멸해? 처형장의 이슬이 되어라’ 순서로 흘러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평가를 앞둔 손들이 머뭇거리자, 황제가 고개 돌려 심사위원들을 향해 끄덕였다.

‘저 끄덕임 의미 아는 사람?’

‘처형장 엔딩 끄덕 아닐까.’

보다 못한 황제가 한 마디 슬쩍 얹었다.

“훌륭하군. 가장.”

황제의 육성으로 생존권을 보장받은 심사위원들이 그제야 평가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벨리아는 살짝 고개 숙이며 말없이 손을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기특하다, 나 자신.’

순발력 아주 칭찬해.

조금 전을 회상하니 찔끔 눈물까지 난다.

정령들이 비록 도화지엔 그림을 못 그릴지언정, 숲이나 하늘 같은 자연에 물과 불을 배열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오산도 그런 오산이 없었다.

정령들의 자율도는 생각보다 심각히 낮았다.

그러니까, 검 그려달라 요청하면 알아서 뚝딱 그려줄 줄 알았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는 말이다.

부름을 받은 실프와 카사가 눈앞에 동동 떠서 고개를 갸웃거렸더랬다.

[무슨 검?]

‘무슨 검이냐니? 그냥 검. 멋있는 검.’

[어떻게 생긴?]

‘검이 뭘 어떻게 생겨, 그냥 검이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줘야지.]

‘그냥 검인데? 손잡이가 화려한?’

[손잡이는 동그래, 네모야?]

‘……이런 걸 일일이 말해줘야 해?’

[그럼 말 안 해주면 우리가 어떻게 알고 그려?]

[우리 계약자는 힘만 무식하게 많지 세심함은 텅텅 비었어.]

[계약자, 이 손잡이 예뻐?]

‘아니, 구려.’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그리는 모든 과정이.

아마 모르는 이들이 보면 하늘하고 원수라도 진 줄 알았을 거다.

다른 이들이 도화지를 보고 있을 때, 이벨리아는 하늘을 주야장천 노려보며 정령들에게 지시하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검을 든 병사들을 그리려 했었는데…….’

그건 정령들이 손잡이는 동그래 네모야 묻는 순간 포기했다.

병사들의 얼굴 생김새, 수염의 유무 등등 모든 것을 말로 읊어 지시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실프한테 그냥 검 복사 붙여넣기 하라고 했다고는 절대 말 못 해.’

검만 잔뜩 그려놓고서 의미 생각하느라 머리 터지는 줄 알았다는 것도 비밀이다.

‘아무도 눈치 못 챈 것 같지?’

이벨리아가 슬쩍 관중석을 살폈다.

대견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부모님과 약속대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는 오라버니들.

그리고…….

‘쟤는 왜 인상을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쓰고 있어?’

뭔가 상당히 언짢은 듯한 토끼.

당연히 잘했다 오구오구 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예상과는 너무 다른 표정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쨌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혹은 환호하고 있는 제국민들의 반응을 보자니 우승은 몰라도 꼴찌는 아닌 것 같다.

“휴. 다행이다.”

안도했다는 듯 내쉬는 한숨을 들은 세레스는 세게 주먹을 쥐었다.

이를 갈던 그녀가 자신의 약혼자, 에드윈을 바라봤다.

‘저 모자란 새끼는 눈치도 없게!’

내 그림을 보고 손뼉을 쳐도 모자랄 판에 공녀의 그림에 넋이 빠져 있다.

하늘을 보며 입을 헤 벌린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어쩌다가 저딴 것과 약혼을 해서!’

속마음과는 대조적인 우아한 발걸음으로 무대에서 내려가며, 세레스는 애써 위안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화의 기본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 변칙적으로 하늘에 그린 것이야 시간 지나면 흩어질 것이니 본래 의미의 그림이라 할 수는 없지.’

그런 이유로, 저 그림이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우승은 아닐 것이다.

극심하게 이는 질투는 객관적인 시각 따위 태워버린 지 오래였다.

***

가장 마지막 종목이었던 명화까지 끝나고 나자, 1부 중 남은 절차는 우승자 발표뿐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심사표를 정리하고 머리 맞대는 동안 잠깐 시간이 남자, 이벨리아는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 옆에 앉은 아가레스에게 물었다.

“토끼. 내 그림 안 멋있어?”

“멋있어.”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꼭 세계를 정복하러 온 악마같이.”

“…….”

“혹시 내가 토끼를 그려주지 않아서 토라졌어?”

“그런 거 아니야.”

“에이. 앙큼한 토끼 같으니라고. 자, 여기 봐!”

다독이는 듯한 말에 아가레스가 시선을 내리자, 이벨리아의 보드라운 손바닥 위엔 물로 빚은 작은 토끼가 귀를 쫑긋대고 있었다.

어딘지 언짢았던 기분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악마의 입매엔 옅은 미소가 자리했다.

“우리 토끼 이제 기분 풀렸어?”

“……날 안 그려줘서 토라졌던 게 아니야.”

“그러면?”

“네가 너무 많은 것을 지고 있어서 속상했던 거지.”

넌 늘 그렇다.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벅차도록 약한 주제에.

산 사람들을 부단히 챙기는 것도 모자라 이젠 죽은 이들까지 저리 많이 어깨에 지다니.

그 우려 섞인 눈빛을 받으며, 이벨리아는 카사를 잡아 손난로처럼 쥐었다.

“난 그저 기억하는 것뿐이야.”

“그 기억조차 때로는 무거워.”

아마 경험담이겠지. 내 다정한 악마.

비스듬하게 올려다보며,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뺨을 쓸었다.

“무거워지면. 아스.”

“…….”

“나눠줄게. 넌 함께 들어줄 거잖아.”

“……물론이지.”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은 그가 슬쩍 기운을 내비치기만 해도 다칠 것만 같다.

아가레스는 표정을 풀고 고분고분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그치지 않고 다독이는 손과 함께…….

“대신 너도 힘들면 내게 조금 내려둬. 네 생각보다 나는 힘이 세니까.”

오래 얼어버린 시간을 녹이는 위안도 같이 내려앉는다.

고요히 뜨인 금안이 친애하는 이를 눈에 담았다.

살포시 접히는 맑은 눈이 반항할 틈도 없이 와닿는다.

“그게 뭐라도 우리가 함께 들면 분명 어렵지 않을 거야.”

높이 짙푸른 하늘. 봄을 준비하듯 여울진 나뭇가지. 그 틈 사이 폐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후조(候鳥).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혹한 세계 속-.

다시 묶이는 ‘우리’라는 굴레.

아가레스의 눈이 떠날 줄 모르고 이벨리아에게 붙박였다.

이제 더는 생경하지 않았다.

속절없이 얽매이고, 가없이 아리고, 더없이 녹아드는 이 기분을, 그는 잘 알았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있었을까.

“토끼! 저것 봐! 내가 우승이래!”

와락 닿아오는 작은 두 손과 맑게 웃는 웃음이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이 소중하다.

자신을 배척한 이 세계에 대악마는 처음으로 존중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이 광경을 만들어줬음에.

***

반응 없는 아가레스가 의아한 듯,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퍼뜩 정신 차린 대악마가 여유롭게 동조했다.

“그럴 줄 알았어. 네 손이 닿은 것은 뭐든 아름다우니까.”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아르칸이 아가레스에게 닿은 여동생의 두 손을 떼어내며 일갈했다.

“너 그 역겨운 멘트 집어치워라.”

“담백한 진실인데.”

“기름 두른 돼지고기도 너보단 담백하겠다. 어쨌든 우리 아가, 정말 기특하다.”

근처에 있다가 달려온 세드릭은 대놓고 아가레스와 이벨리아 사이를 비집고 앉아 경탄했다.

“세상에. 우리 집안에서 예술가가 탄생하다니!”

이를 본 휴고와 엘리시아는 딸을 번쩍 들어 아예 뒷자리로 옮겨버렸다.

“웬 악마가 우리 가문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나.”

“자리도 많은데 치졸하게 굴긴.”

“루페르트의 지정석은 저쪽이다.”

“가솔이 없어 외로워서 말이지.”

“내가 알 바인가?”

온기 없이 받아친 휴고가 휙 시선을 돌려 이벨리라의 말랑한 볼을 쓰다듬었다.

“아르티나에 이런 예술가가 탄생한 건 단연 처음이로군.”

“아무래도 우리 아가는 베르타샨의 피를 이어받았나 보죠.”

그러자 휴고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 되물었다.

“엘. 그대는 선대 백작께서 만드신 조각상을 본 적이 없나?”

“봤는데요? 잘만 만드시던걸요.”

“혹시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하나?”

“그럼요. 분명 너구리였지요.”

“……베르타샨 쪽도 아니야. 장담하지.”

“어째서요?”

“그대가 너구리라고 한 그것은 그대의 아버지께서 내 아버지께 선물하신 용이었거든.”

“……아하?”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의 축하와 제국민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이벨리아가 반짝 손을 흔들던 와중.

문화제의 2부로 넘어가기에 앞서, 황제가 시종장을 까닥 손짓으로 불러 무언가 속삭였다.

경청하며 끄덕이던 시종장은 크흠 목을 가다듬고는 본래 계획되지 않았던 절차 하나를 추가로 발표했다.

“금번 문화제의 취지를 살려 간이 경매 절차를 거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간이 경매……?”

“갑자기?”

“1부에서 출품된 예술품들을 우리 보고 사라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물론 1부에서 출품하신 분들께 판매대금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니, 판매하신 대금은 모두 연말 구휼미를 위한 기부금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귀족들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출사표를 던진 자제들을 위해 각 가문의 주머니를 열게 된 상황.

심지어 예술품의 특성상 명확한 기준으로 가격을 책정하기도 어려웠으니…….

이건 그저 황제의 영리한 삥 뜯기요, 귀족들에겐 가문의 명예를 위해 그 날강도 짓에 적극적으로 어울려줘야 하는 불상사였다.

하여 귀족들이 앉은 좌석에서는 탄식이, 제국민들의 구역에서는 탄성이 짙어졌다.

그 사이, 시종장이 난감하다는 듯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다만 한 가지 곤란한 것이, 명화 부문의 우승자이신 공녀님의 그림은 기실 명징한 형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판매에 어려움이 있을 듯하여…….”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다.

가질 수도 없는 데다가 잠시 뒤 바람이 불면 흩어질 것들로 이뤄져 있으니, 저걸 내놓아봤자 사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 반응을 살핀 시종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런 연유로 공녀님의 작품은 모두의 소유로 두고 경매에서 제외하고자 합니다만…….”

그러자 휴고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일축했다.

“포함시키도록.”

“예?”

“내가 낙찰받을 테니 포함시켜.”

“하오나…….”

어물어물 토를 다는 시종장의 말을 자르며 루드비히가 말을 이었다.

“포함시키게. 나 역시 낙찰받을 마음이 있는 그림이니.”

“화, 황태자 전하…….”

“저런 명화를 대가 없이 나눠 가지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시종장의 등줄기에 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기실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황궁에 오래 적을 두며 알게 된 것 하나.

이 제국엔 공녀님 광신도들이 몇 있는데, 그들은 공녀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영 제어를 못 한다는 것.

그러니까, 소소한 기부를 위해 시작한 간이 경매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질 위기란 뜻이다.

그것도 제국민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흥미 본위의 이벤트가 죽자 사자 하는 경쟁판이 되어선 곤란하다.

“그러나 값을 치르시더라도 가지실 수 없는 작품인데…….”

다시 한번 만류하는 시종장의 말끝으로, 나른하면서도 서늘한 말투가 따라붙었다.

“그걸 왜 그대가 걱정하지?”

시종장의 시선이 황태자를 떠나 날 선 기운의 근원지를 찾았다.

루페르트 후작……!

“하라면 해.”

아가레스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별안간 허공에 나타난 검은 공간.

그 속에서 온갖 종류의 보석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채이도록 구르는 보석을 발로 밀며, 대악마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 역시 나눠 갖기엔 질투심이 많아서.”

시종장이 속으로 절규했다.

‘그래서 문제라고! 그래서!’

공녀님 일이라면 질투심 많은 작자가 어디 한둘이냔 말이다.

벌써 비단 주머니를 매만지고 계시는 황태자 전하.

목을 돌리고 손목을 풀고 계시는 공작 각하.

가치를 측정하기도 어려울 커다란 보석을 구둣발로 굴리고 있는 대악마.

저 봐라. 무려 소드마스터들이 돈 쓰는 데 몸을 풀고 있다.

‘이러다 세 분 중 두 분은 파산해야 끝나겠네……!’

시종장이 슬쩍 황제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황제가 누가 봐도 티 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마치 재밌는 구경거리를 발견했다는 듯 반짝 빛내면서.

시종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그러시다면 공녀님의 그림도 경매 물품으로 올리겠습니다.”

웅장한 종소리와 함께, 간이 경매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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