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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197화 (197/323)

##  197화: 진정한 명화(名畫)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찬 손을 비비며 칭얼대던 아이가 넋을 잃고 마차 위로 시선을 올렸다.

바라보는 아이의 콧잔등에 카사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벨리아의 자연력을 받아 선명한 빛으로 나풀거리는 날개.

작은 손이 정령을 잡으려는 듯 허공을 훑었다.

“따뜻하다…….”

발갛게 얼어 있던 코가 제 색을 되찾는다.

“고맙습니다.”

티 없이 맑은 인사에 이벨리아는 흡족한 듯 웃으며 카론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커튼을 슬쩍 들춰보니 광장에 모인 이들이 왠지 아쉬운 듯 입을 달싹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벨리아는 마차 창을 열고 틈으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그럼, 다들 이따 봐.”

아무래도 맺는 인사를 원했던 듯, 제국민들의 만면에 미소가 들어찼다.

“아름다운 작품들 기대하고 있을게. 나 오늘은 용돈도 많이 챙겨왔거든.”

그러자 마차 주변에서부터 저 멀리까지, 광장 안팎이 모두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와아아아!”

“공녀님! 이따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감기 조심하십시오!”

다른 의도 없는 순수한 환호와 걱정에 얼굴 붉힌 이벨리아가 커튼 뒤로 쏙 숨어들었다.

에르카디아.

높은 곳에 시선 두자면 미운 것이 한가득한데.

가장 낮은 곳에 시선 두면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쿠션을 끌어안은 이벨리아가 중얼거렸다.

“하나를 주면 열을 되돌려주네.”

“아가씨의 존재가 저들에겐 곧 안위입니다. 외려 아가씨께서 저들에게 백을, 천을 주고 계시지요.”

“가진 능력 일부로 저런 호의를 살 수 있다면 비싼 것도 아니야.”

“값은 늘 상대적입니다.”

오늘따라 카론이 삐딱하다.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하간, 밖에 나올 때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왜 그렇게 이 제국을 지켰는지 알 것 같아.”

“모르시길 바랐습니다.”

“응?”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의무를, 동정을, 가엾음을 깨달으시기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홀로 평안하시길 바란다고-.

카론은 감히 모시는 주인의 이기심을 빌었다.

그리고 이벨리아의 마차가 지나는 길 뒤편.

천천히 광장 중앙으로 향하는 마차를 바라보던 한 화가는 주섬주섬 이젤을 펼치고 붓을 꺼내 들었다.

짙게 턱수염 난 사내가 화가에게 물었다.

“뭘 또 그리려는가?”

“오늘은 아름다운 것을 기리는 날이지.”

“그래서 그대가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려오지 않았는가.”

“이깟 것들 다 헛되었네. 내 방금 보았어. 가장 아름다운 분을.”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예술에 재능 꽤나 있다 자부하는 이들은 모두 양피지와 악기 등을 꺼내 자리를 잡았다.

예술. 아름다움의 현출.

사방에 불새가 날아다니는 이 비현실적인 광경과 이것을 자아낸 공녀.

지금 이 순간, 광장의 제국민들에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

한편 선행 일정으로 인해 먼저 도착해 지정된 자리에 앉아 있던 세드릭이 씩 웃었다.

“형님. 우리 아가 진짜 대단하지.”

“대단하지. 손짓 한 번에 겨울을 없애버렸는데.”

아직 이벨리아의 마차조차 보이지 않았고 광장 중앙에선 바깥쪽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치 한밤중 숲속의 반딧불처럼 빼곡히 허공을 수놓는 불의 하급 정령.

이 많은 수를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이 제국에 단 하나뿐이니까.

“형님은 모르겠지만 우리 아가 태어났을 때 울음소리가 진짜 우렁찼거든. 딱 대장부 감이었어.”

“내 인생에 유일한 후회가 있다면 그 시기에 하필 시찰에 나가 있었던 거야.”

“하긴. 형님은 우리 아가가 가장 아가아가일 적을 보지 못했으니까.”

후회될 만도 하지. 키득 웃은 세드릭이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었다.

“형님. 전생을 믿어?”

“뜬금없군. 안 믿는다.”

“나도 안 믿었었는데, 우리 아가를 보면 전생이란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왜?”

“그냥. 전생에 덕을 많이 쌓으면 금수저 물고 새로 태어난다는데, 우리 동생은 금수저 수준이 아니라 정령왕 수저를 물고 태어났잖아.”

대체 얼마나 대단한 전생을 살면 저런 어마어마한 걸 쥐고 태어나나 싶어서.

대답 없이, 아르칸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이벨리아의 마차를 응시했다.

짧지 않은 침묵 끝에 그가 흘리듯 말했다.

“그런 건 없었으면 좋겠어.”

“……?”

“우리가 없는 곳에 있었을 이브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

“……하긴.”

아무리 강해도 그들 형제에겐 평생을 지켜줘야 할 여동생이다.

다른 시간 다른 세상에서 어떤 소중한 사람과 있었든, 어떤 삶을 살았든. 그곳에 그들이 함께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가슴 언저리가 시큰했다.

두 형제는 털 망토를 어깨에 얹고 마차에서 내리는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호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늘 그렇듯 티 없이 맑은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여동생.

그래. 전생 따위 있을 리가.

한달음에 달려간 아르칸과 세드릭이 이벨리아의 양손을 하나씩 잡았다.

“왔어, 우리 동생?”

“오자마자 계절을 바꿔버렸네.”

“다들 추워하고 있길래!”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 가운데로 안내하며, 빙글 웃은 세드릭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브. 이브는 전생을 믿어?”

순간 멈칫한 이벨리아가 세드릭의 눈을 빠르게 살폈다.

‘뭘 알고 묻는 건가?’

그러나 금빛 눈엔 탐색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이벨리아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냥 별 뜻 없는 장난이구나.’

혹시 엘라임이나 토끼로부터 뭔가 들었나 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아주 기구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걸 알면 마음 아파할 거야.’

어차피 난 기억조차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게 그런 삶이 있었다는 걸…… 가족들만은 평생 몰랐으면 한다.

나보다 훨씬 슬퍼하며 가슴 칠 이들이니까.

하여 이벨리아는 활짝 웃으며 아르칸과 세드릭에게 팔짱을 꼈다.

“전생 같은 게 뭐가 중요해. 지금 오라버니들과 함께 있는데!”

***

가장 늦게 광장 내부로 들어온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화제의 시작을 알렸다.

눈짓을 받은 시종들이 사방에 놓인 북을 크게 울리자, 허공에 달린 속이 빈 공이 갈라지며 안에서 축제를 상징하는 색색의 작은 종이들이 흩날렸다.

황족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조차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하기에, 운 좋게 앞줄을 차지한 제국민들은 목을 길게 빼고 연신 감탄했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이벨리아는 두 손을 곱게 포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차라리 명화(名畫)가 첫 순서이게 해주세요.’

빠르게 망신당하고 다음 순서 마음 편히 구경이나 하게.

그러나 그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명화(名畫)는 시종장이 좌르르 펼친 두루마리에 적힌 순서 가장 마지막에 쓰여 있었다.

“일 더럽게 안 풀리네.”

귀족 영애치고는 제법 험한 말씨에 놀란 귀족들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으나.

불쾌한 상황으로 인해 전투력이 최고조로 차오른 이벨리아는 뭘 보냐는 식으로 눈썹을 까닥일 뿐이었다.

심지어 마음도 몰라주는 오라버니들은 옆에서 키득대고 있다.

“걱정 마, 이브. 네가 똥을 그려도 난 박수를 보낼 테니까.”

“우리 아가 정도면 그림 못 그리는 건 흠에도 끼지 않는다. 나가서 도화지를 밟고만 들어와도 괜찮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고작 그림 못 그리는 거 따위로 가진 위치가 상할 리는 없다는 건 이벨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의도적으로 이 판을 만든 세레스의 장단에 어울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걔가 얼마나 득의양양하게 날 비웃겠어!’

그러자 오늘도 역시 루페르트 후작의 지정석 따위 내다 버리고 아르티나 가문의 자리에 눌러앉은 아가레스가 물었다.

“판을 엎어버릴까?”

“그건 안 돼.”

“아니면 네가 사용할 붓에 악마 한 마리를 잡아 넣어둘까?”

“……악마 들린 붓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럼 정령을 넣어두면 어때?”

“정령들이 자연은 잘 움직이지만, 붓에 들어가서 예쁘게 물감을 뿌릴 수는 없…….”

말하던 이벨리아가 순간 입을 딱 다물었다.

“이브?”

“잠깐만. 나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 같아.”

이벨리아가 지나가는 시종을 손짓으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공녀님.”

“바쁜 와중에 미안. 혹시 명화(名畫) 종목에서, 그림을 반드시 배부되는 도화지에 그려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벽에 그리셔도, 천에 그리셔도 무방합니다.”

“그렇지? 예술이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거니까.”

“그렇습니다.”

짧은 문답으로 개략적인 방향을 생각해 낸 이벨리아가 흡족하게 웃었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해본 적이 없으니.

다만, 이길 순 없어도 적어도 망신을 당하지는 않을 수 있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으로 달달 떨리던 손이 차츰 멎어 들었다.

그렇게 이벨리아가 번뜩인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동안.

명률(明律)을 뽑은 렐리안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하프 연주로 귀족들과 제국민들, 그리고 아르칸의 혼을 쏙 빼놓았고.

화무(花武)를 뽑은 카밀라는 검무인지 암살 기술인지 모를 단검 휘두르기로 심사위원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인 명화(名畫).

황제가 무겁게 울리는 종을 한 번 치자, 시종장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명화에 참여할 참가자들은 모두 위로 나오시오-!”

황제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외치는 것이므로 말끝은 짧았다.

우아하게 일어선 세레스는 흘끗 뒤를 돌아 이벨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하. 담담한 척은.’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 나가고 있지만, 세레스는 그 속을 빤히 알 것 같았다.

아마 이렇게 많은 인원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지는 않을까 불안해 죽겠지. 당장이라도 기권하고 싶겠지.

‘최고위 귀족에 살롱의 주최자이고 심지어 이 문화제의 후원자이기까지 한데. 그림 한 장 제대로 못 그리면 얼마나 수치스럽겠어.’

세레스는 일부러 이벨리아의 곁을 가깝게 스쳐 지나가며 들으라는 듯 킥킥 웃었다.

나름대로 경쟁자의 정신력을 흔들기 위한 심리전이었다.

광장에 임시로 솟은 무대 위.

시종들이 희고 깨끗한 양피지와 붓 등을 부족함 없이 올려두었다.

시종장이 참여자들을 둘러보며 안내했다.

“놓인 도구들은 편의상 지급해드렸습니다만, 어디에 무엇으로 그리실지는 자유입니다. 주제는…… 저곳을 봐주십시오.”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황제가 끈을 당김과 동시에 허공에서부터 풀려 내려오는 거대한 양피지에는 단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구국(救國)」

……위태로운 나라를 구함.

의외의 주제에 참가자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이내 수려한 손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양피지에 가장 많이 현출되는 것은 단연 황가의 문양.

점수를 잃을 일 없는 안정적인 선택이었다.

다음으로 많이 그려지는 것은 성벽.

역시 무난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레스는 출중한 그림 실력을 살려 보다 나아간 선택을 했다.

‘초대 황제의 초상화.’

황가의 문양이나 성벽 등은 추상적이고 그리기가 쉽다.

반면 초대 황제의 초상화는, 보다 난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직관적이다.

본래 역대 황제의 어진을 함부로 그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세레스는 발 빠르게 시종을 통해 황제에게 허락까지 맡은 차였다.

빠른 손 덕에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세레스는 시선 돌려 이벨리아의 도화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입가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들어찼다.

‘백지야.’

바라보니 감히 붓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손도 대지 못하다니…… 실망인걸.’

하긴, 저 요망한 혀 하나는 발군이니, 아마 이 백지가 바로 구국의 뜻을 가지고 있다며 둘러댈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꼴사납기는 매한가지지.’

어느 모로 보나 오늘 저것이 면피할 가능성은 없다.

‘그나저나 채신없게 왜 이렇게들 웅성댄담.’

분명 이전 종목까지만 해도 다들 얌전히 구경하더니만.

오랜 관전에 지쳤는지 여기저기서 탄성과 탄식이 쏟아져 나온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세레스는 초대 황제의 왕관에 화려한 보석을 박아 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붓을 내려두었다.

마침 다 떨어진 모래시계.

황제가 두 번 종을 쳐 종료를 알리고, 참가자들에게 그림의 의미를 설명하라 명했다.

호쾌한 화풍뿐만 아니라 담긴 의미 역시 깊어야 비로소 명작.

자신의 순서에 세레스는 예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감히 이 불민한 손으로 초대 황제 폐하의 초상화를 그려보았습니다. 전란의 시대에 에르카디아를 일으켜 세우시고 끝내 모든 왕국을 통일하시어 이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셨으니, 진정 구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실로 대단한 그림 실력에, 나쁘지 않은 의미 부여다.

지금까지의 참가자들 중에서는 낭중지추였다.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황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이벨리아에게 닿았다.

이벨리아는 빈 도화지를 드는 대신…….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여태껏 본인들의 도화지만 보느라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했던 참가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억.”

세레스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렀다.

청명한 하늘을 도화지 삼아 진한 구름과 불의 테두리로 그려진 선명한 그림 한 폭.

언뜻 삭막해 보이는 땅에 칼이 수없이 꽂혀 있다.

그림 속 지평선을 넘고 넘어 시야가 닿지 않는 곳까지 빼곡하게.

도화지가 하늘이다 보니 그 크기 또한 압도적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소름이 돋았다.

참가자들과 제국민들이 일제히 팔을 문질렀다.

“하늘을 도화지로 삼아 그림을 그리다니, 실로 공녀답군. 그림의 의미를 물어도 되겠는가.”

“전쟁터에선 봉분을 만들 겨를이 없어, 전우를 잃은 자리에 생전 사용하던 칼을 꽂아두는 것으로 추모를 갈음한다고 합니다.”

이벨리아가 손을 한번 휘저었다.

사아아-.

바람이 불며 하늘 위에 그려진 칼 중 일부에 분홍색 축복제 꽃잎이 달려 반짝였다.

“여기. 이곳은 우리 가문 기사들이 전사한 곳입니다.”

다시 한번 손짓하자 다른 방향에 놓인 칼들이 일제히 녹슬었다.

“이건 출정했던 병사들의 묘지입니다.”

다시금 바람이 불었다.

저 멀리 그림 속 지평선에 닿은 칼들이 낡다 못해 형체를 잃고 무너졌다.

“이건 생계를 잇던 손으로 검을 잡고 죽어간 제국민들의 무덤입니다.”

맑은 눈이 하늘로부터 시선을 내려 좌중을 천천히 둘러봤다.

감히 누구도 입 열지 못하는 경건한 침묵 속.

늘 어두움을 외면하지 않는 이벨리아가 말을 맺었다.

“제게 구국이란 이런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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