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내가 네 구원이 되어줄게
파라반트의 마스터와 이벨리아가 회동하고 엿새 뒤.
[구! 구! 구우!]
아침도 아닌 한밤중, 창밖에서 정신 사납게 울리는 새 소리에 마스터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무시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고작 새 따위가 별수 있겠나.’
그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 딱딱딱딱!
오묘한 색을 가진 커다란 새가 창문이 부서져라 부리로 두들긴다.
흘끗 창문 밖을 바라보니 날카로운 눈매가 말하는 듯했다.
오 어디 누가 이기나 볼까? 하고.
읽던 서류뭉치를 휙 내동댕이치며, 마스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으아악!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견디다 못해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열어 새를 안으로 들이자, 뻔뻔하게 내미는 앞발.
[구우!]
쪽지를 풀어 읽지 않아도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아니나 다를까.
「일 안 해? 왜 정보 안 줘?」
흡사 맡겨 놓은 물건 내놓으라는 듯한 독촉장이다.
“이게 진짜……!”
있는 대로 으르렁대면서도 차마 쪽지를 구기지는 못한 마스터가 서랍을 쾅 열어 쪽지를 퍽 내동댕이쳤다.
그곳에 옹기종기 모인 동글동글한 글씨의 작은 쪽지 다섯 개.
하루에 하나씩 온 쪽지에 담긴 내용은 다 엇비슷한 독촉이었다.
「정보. 정보.」
「급하다니까.」
「일단 가진 거라도 좀 내놔봐.」
「아이고, 정보 기다리다가 이벨리아 죽네.」
「깨꼬닥.」
질린 표정으로 쌓인 쪽지들을 보던 마스터가 애먼 새에게 투덜댔다.
“야. 네 주인 성격 진짜 급하다.”
[구우!]
“너한테도 그래? 빨리 답장 받아오라고? 손등 그만 쪼아라.”
[구구!]
“안쓰럽군. 그런데 네 주인은 정인이 있나?”
[……구우?]
“하긴. 새 주제에 알 리가 없지. 자, 여기 답장.”
[구우우우.]
이벨리아의 요청대로 손등을 사정없이 쪼며 끝내 답장을 받아낸 새가 파라반트의 최상층 창문을 박차고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발목에 「좀 기다려라. 너는 성격이 왜 그 모양인가?」라는 내용의 쪽지를 매단 실라페, 그러니까 바람의 정령이 부리를 열어 투덜댔다.
[내가 구구거리니까 진짜 새인 줄 아나 저 멍청한 것이.]
물론 계약자의 명령에 따라 보통 새와 크게 다르지 않게 외형을 바꾸긴 했지만.
[우리 계약자 예쁜 건 알아가지고, 흥. 정인은 무슨 정인.]
웬만한 인간쯤은 쉽게 낚아챌 수 있을 커다란 발톱이 불쾌한 듯 움찔거렸다.
[그딴 게 생기면 우리 왕들께서 허리를 순리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확 접어버리실 것인데.]
***
이벨리아는 받은 쪽지를 와그작 구겼다.
“이게 구해준 값을 아주 허투루 치르네?”
벌써 엿새나 지났는데 아주 게을러터져서!
“정보가 필요하다고 했으면 하늘에 기도를 하든 땅에 소원을 빌든 어떻게든 구해와야지!”
씨익, 씨익, 분노를 표하던 이벨리아가 실라페에게 물었다.
“실라페. 그 게으름뱅이 마스터는 지금 뭘 하고 있어?”
[두꺼운 서류뭉치를 보고 있었다.]
“일도 못 하는 게 일하는 척은 엄청나게 하네!”
[그런데 계약자. 물어볼 것이 있어.]
“뭔데?”
[혹시 계약자는…… 정인이 있나?]
“정인? 아니? 갑자기 왜?”
말할까. 고민하던 실라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애먼 놈의 연애사업을 도와줄 용의는 절대로 없다.
심지어 그 상대가 우리 병아리 계약자라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아냐. 앞으로도 없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하려고.]
“……?”
[생기기만 해봐. 온 대륙에 폭풍을 일으킬 테다.]
“뭐야. 이 새대가리가 왜 이래?”
흥. 칫. 뿡.
괜한 심술로 날개를 파닥거리던 실라페가 이내 자취를 감췄다.
***
‘게으름뱅이 마스터만 믿고 있을 게 아니야. 나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봐야지.’
정보의 심한 불균형은 곧 관계의 불균형으로 이어질 터.
이벨리아는 넋 놓고 앉아 을이 되기만 기다리는 성미는 결단코 아니었다.
“엔리르. 네 동굴에 가서 아주 오래된 책을 좀 가져다줘.”
“대단한 용은 대단한 책이 아주 많지. 무슨 위대한 책을 가져다줄까?”
“금제탑에 대한 책.”
금제탑과 연금술사들의 역사는 아주 길고 깊다고 했다.
대를 이어 존재한 그 시간이 상상을 초월한다 하니, 오랜 세월을 담은 용의 소장본들을 살피다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복수에 한 발 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엉덩이를 씰룩이며 날아간 엔리르는 커다란 자루 속에 온갖 책을 쑤셔 넣고는 공작저로 돌아왔다.
책 무게 때문에 둥실 떠올랐다가 푹 가라앉았다가 둥실 떠올랐다가 푹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하면서.
“……이게 다 금제탑에 대한 책들이야?”
“아니!”
“그럼?”
“표지가 멋있는 것들을 가져왔어. 이것 좀 봐봐. 책에 사슬이 감겨 있으니 아주 멋있지.”
“우와! 우리 아가 용!”
정말 도움이 일절 안 되는구나!
“고생했으니까 저리 가서 코 자고 있어! 아, 글 읽는 마법만 좀 걸어주고.”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아가 용은 앞발로 이벨리아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더니 앞다리 뒷다리 기지개를 쭉쭉 켜고 침대 위에서 눈을 감았다.
도롱. 도롱.
고요하게 들리는 어린 용의 숨소리.
사박. 사박.
발코니 너머로 들리는 사용인들의 낙엽 밟는 소리.
집중해서 책을 읽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위기다.
‘뭐부터 읽는담…….’
이렇게 마구잡이로 가져와서야.
별수 없겠다. 하나씩 집어서 내용을 보는 수밖에.
고개 저은 이벨리아는 따스한 가을 햇살을 맞으며 자리를 잡고, 제일 먼저 집히는 책을 펼쳤다.
‘뭐야. 꽝이네.’
금제탑. 연금술사. 전쟁. 이런 내용을 기대하고 열었건만. 정작 안에 쓰인 내용은 세계 모든 귀보(貴寶)에 관한 것이다.
각각 고유번호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아, 전례 없는 장인의 손길이 닿았거나 오래된 역사를 축적한,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운 귀물들임이 분명했다.
‘흥미롭네. 세상에 보물이 이렇게 많았단 말이야?’
싹쓸이하면 이게 다 얼마야?
“이참에 우리 토끼랑 페어 맺어서 보물 사냥꾼이나 해봐?”
원하던 정보는 아니지만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 예열하는 시간 정도로 생각하며, 이벨리아가 팔랑팔랑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마주한 익숙한 보석.
책장을 넘기던 손이 딱 멈췄다.
“어? 이거…….”
아무 특징 없이 그저 흰빛으로 시리게 반짝이는 목걸이와 팔찌.
“내가 가진 보석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황실의 보물창고에서 강탈하다시피 한.
“죄업의 해방이랬나?”
신기하네. 이걸 이 고대 서적에서 보게 될 줄이야.
“용의 책에 기재돼 있을 정도면 보통 보물은 아닐 텐데…….”
이상하다. 식량 도둑은 분명 이게 황궁 보물고에서 가장 가치 낮다고 했었는데.
죄업의 해방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해대면서.
이 책이라면 자세한 설명이 쓰여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들의 시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용들의 책이었으니까.
이벨리아가 아래 빼곡하게 쓰인 글씨를 찬찬히 훑었다.
본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고대어가 엔리르의 마법 덕에 수월하게 읽혔다.
「알려지길 죄업의 해방. 본래 명칭은 도탈(度脫)의 단초(端初)라 한다.」
“도탈의 단초…….”
「세계에 가해한 자는 죽지 못해 살고, 이탈하지 못해 걷는다. 비정한 세계는 자신에게 죄를 지은 존재를 모든 순리에서 배제한다.」
“…….”
「손짓하는 것이 설령 죽음이라 할지라도.」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왜일까. 소중한 이가 떠오른다.
외로이 이 세계를 홀로 떠돈…….
「이것은 세계의 모태인 신이 빚은 물건. 하여 세계가 씌운 배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머리를 마련한다.」
“단초…… 첫머리를 마련한다…….”
즉, 이게 있으면 실마리는 되겠으나 곧 장땡은 아니라는 소리.
설명은 추상적이었다.
어쩌면 미욱한 인간이기에 그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고.
다만, 이벨리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 토끼…….”
그래. 예전부터 조금씩 위화감을 느끼긴 했다.
아무리 대악마라 해도 아가레스만큼 오래 세계를 떠돈 악마는 없잖아.
정령왕들이 그랬었지, 징벌을 받고 있다고.
아스도 말했었어. 벌이었다고.
영민한 아이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동시에 심장이 깨질 듯 아파왔다.
“……내 친애하는 악마.”
너는 오래 ‘산’ 것이 아니구나.
“버려져 있던 거였어.”
시간도. 공간도. 그 무엇도 의미 없도록.
깊고. 어둡고. 외로운 세계 속에.
***
두 손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바람을 맞던 이벨리아는 결심했다.
“이건 아스에게 줘야겠어.”
어떻게 쓰는 건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터다.
필요한 이가 가지고 있다 보면 언젠가 열쇠가 되어주기도 하겠지.
언제 어느 형식으로든 간에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준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루이한테는 제대로 설명하고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다.”
선물을 홀랑 다른 이에게 줘버리면 속상해할지도 모르니까.
이벨리아는 아주 상세한 내용을 담은 비밀 편지를 적어, 가장 믿음직스러운 전령새인 실라페의 발에 매달아 황궁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몇 분 뒤.
지체 없이 날아온 답은 간결했다.
「네가 원한다면 뭐든. - 너의 루이가.」
***
양해까지 구한 이상 더 망설일 것은 없다.
비밀기지로 간 이벨리아는 곧장 친우의 진명을 불렀다.
언제 어느 상황이든 반드시 만나러 오겠다는 약조에 따라.
“아가레스.”
기꺼이 답하듯 밀려오는 마기.
이벨리아는 눈을 감고 익숙한 기운을 더듬었다.
‘봐. 다르잖아.’
잔디의 그것과도. 악마 언니의 그것과도. 심지어 얼마 전 만난 마왕의 그것과도.
예전엔 그저 강하기에 특별한 기운을 지닌 줄 알았는데.
이젠 알겠다.
‘네 존재가 뭔지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적어도 그냥 악마는 아니라는 걸.’
이내 바로 앞에 부는 미약한 바람.
감은 눈 위로 따스한 손이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눈 감고 뭐 해. 나의 주인.”
“생각 중이었어.”
“무엇을.”
“내 가련한 토끼에게 어떻게 하면 백마 탄 공주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저 이렇게 있어 주면 족한데.”
이벨리아가 눈을 떴다.
기다란 속눈썹이 아가레스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그 묘한 느낌에 천천히 손을 떼어내자.
그보다 더 울렁이게 하는 바다 빛 눈동자가 똑바로 마주 닿아온다.
“아스.”
진중한 분위기.
아가레스 역시 장난스럽던 분위기를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응. 이브.”
“넌 벌을 받고 있댔지.”
“……응.”
“네게 벌을 줄 정도의 존재라면 분명 어마어마할 거야. 신이라거나, 세계라거나.”
“…….”
침묵에서 긍정을 읽어낸 이벨리아가 목과 팔에 각각 차고 온 죄업의 해방을 풀었다.
그리고 아가레스에게 건넸다.
“이거.”
“……!”
“예전에 루이가 황실 보물고 털어서 준 건데, 용의 책을 읽어보니까 이게 도탈의 단초라고 불린대.”
“…….”
“세계가 씌운 배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준댔어.”
아가레스도 익히 잘 아는 물건이다.
그는 섣불리 받아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벨리아가 한 번 더 내밀었다.
“받아. 어서.”
“이깟 거 없어도 돼.”
“왜?”
“세계의 순리 따위 필요 없어. 네가 내 법칙이야.”
“내가 없어진 후에는?”
“……뭐?”
“내가 없어진 후에.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이 세상에 더는 없으면.”
“……왜. 왜 그런 말을 해.”
“몰랐던 거 아니잖아. 난 인간이야. 그날은 언젠가는 와.”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내가 막아. 신도. 섭리도. 그깟 거 죄다 부수고 무너뜨려 이곳에 떨어졌는데, 두 번이라고 어려울 것 같아?”
대악마가 처절하게 으르렁댔다.
언제일지 어떻게일지 그 어느 것도 확실치 않은 미래를 향해.
알고 있다. 너무도 잘. 그래서 외려 외면했다.
끔찍하게도 두려워서.
네가 없는 비밀기지, 네가 없는 이바스 저택, 네가 없는 순간, 시간, 공간,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그 태도에 이벨리아는 확신했다.
내가 없으면 너의 세상은 다시 속박이고, 굴레고, 죄업이고, 지옥이겠구나.
“아스. 네 죄가 없어지면 어떻게 돼?”
“……잘 몰라. 겪어보지 않은 영역이라서. 다만, 아마 나도 세계 질서에 편입되겠지.”
“죽기도 하고. 시간도 걷고?”
“인간들이 의미하는 시간이라면 함께 걸을 수 있을 거야.”
가장 원했던 답에,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혹시 영생이 탐나?”
“지긋지긋하지.”
“그럼 나 없는 영생과 나와 함께하는 필멸. 선택해.”
그 선택지에 담긴 단 하나의 가정이 지나치게 황홀하다.
홀린 듯 악마가 답했다.
“너와 함께하는 필멸. 설령 찰나더라도.”
그럼 됐어.
이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가레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내려다보며, 백마 탄 공주가 손을 내밀었다.
“아가레스.”
“응. 이벨리아.”
“나 믿지.”
“더없이.”
“내가 구해줄게. 세계고 뭐고 다 깨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
“나 없는 세상에 절대 너 혼자 안 놔둬.”
“……약속이야?”
“맹세야. 우리 토끼 두고 어딜 가.”
눈이 부셨다.
저 먼 태양은 나무에 가렸으니, 이건 아마 바로 지척에 뜬 그의 태양 때문일 터다.
아아. 너를 어찌해야 할까.
아가레스는 밀려드는 운무(雲霧)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고작 인간이면서. 겨우 한 줌인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모든 연약한 것들로 이뤄진 네가.
감히 세계에 맞서 나를 구해내겠다고 선포하는 이 광경을.
……나는 아마 가없이 방랑하며 기다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