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자, 복수 시작이다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말만 잘하며 기어코 가득 채운 자루.
주인이었던 용이 죽었고 상속자도 없는 게 분명하니, 어차피 이젠 전부 무주물(無主物)이다.
제국법상 무주물은 먼저 선점하는 자의 소유이기에, 깜찍한 도굴꾼들은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누나. 문은 어떡하지?”
“부수면 그만이야! 들고 나가자!”
“응! 끄응…….”
“이잉차…….”
탐욕이 묻은 자루를 번쩍 들어보았으나 미동도 없다.
가득 채워진 황금의 무게는 소녀와 어린 용의 상상을 초월했다.
반짝반짝한 두 쌍의 눈이 아가레스를 향하고.
“……후.”
삽시간에 짐꾼이 되어버린 대악마는 자루 두 개를 손쉽게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구를 막은 석문에 손을 가져다 대던 찰나.
- 그워어어어어.
- 크르르르르르.
보물고를 가득 채우는 심상치 않은 우짖음.
이미 가둠으로써 경고했는데도 꾸역꾸역 보물을 가지고 나가는 자들을 응징하려는 목적인 듯했다.
이벨리아와 엔리르는 질린 표정으로 허공을 둘러보며 투덜댔다.
“에잉. 쪼잔하시긴! 황금을 저승에 가져갈 것도 아니면서!”
“맞다! 우리를 내보내 달라!”
당최 보물을 포기할 기색 없는 작은 도굴꾼들에 분노한 듯, 고대 용이 안배한 가디언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석상 형태의 가고일이 보물고 내벽을 빼곡히 둘러싼 채 땅에서 솟아오르고.
이어 활을 든 와이번이 허공을 틈 없이 점령한다.
정중앙의 제단 위에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아크 리치(Arch Lich)가 무거운 마나를 품은 완드를 바닥에 내리찍고 있다.
좌우를 둘러본 이벨리아가 씩 웃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것이지.”
복잡하지 않아서 쉽네.
“저걸 다 부수고 나면, 이제 이 보물은 제 겁니다.”
얼마 전에 깨달은 방법대로, 이벨리아는 운다인을 불러 주변에 물웅덩이 몇 개를 생성했다.
그러자 제법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물.
파공음을 내며 쏟아지는 화살들이 촘촘히 짜인 물의 그물에 그대로 걸려 힘을 잃는다.
“물을 다루는 실력이 많이 늘었군, 이브.”
“그럼! 우리 토끼 지켜줘야지!”
자신만만한 선언과 함께 물웅덩이에서 뽑혀져 나온 창이 그대로 허공으로 쏘아 올려진다.
둘. 셋…… 다섯, 열.
물이 고갈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빗발치는 창을 피하지 못한 와이번 몇 마리가 바닥에 떨어져 절명한다.
그럼에도 남은 수는 만만치 않았다.
삐질 식은땀을 흘린 이벨리아가 난감한 듯 턱을 긁적였다.
“우리 오늘 안에 집에 돌아갈 수는 있을까?”
그러자 말랑한 앞발로 열심히 마법을 쏘아대던 엔리르가 파드닥 위로 날아올랐다.
“누나. 누나. 내가 멋있는 거 보여줄게.”
“뭔데?”
“내 권능. 보고 와아 멋있다 해줘.”
아가 용이 보물에 닿지 않게 허공을 조준하면서 입을 크게 벌려 후욱 입김을 뿜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 브레스.
용의 권능이라 일컬어지는 여러 가지 중 가히 최상위의 힘이다.
불을 내재한 용답게 붉은 화염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 멋들어진 브레스가 가디언들의 몸체에 닿기도 전.
보물고를 발 디딜 틈 없이 채우고 있던 가디언들이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덩그러니 남은 보물들 앞에서 이벨리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벅였다.
“엥. 이렇게 빨리…… 이 보물은 모두 제 겁니다……?”
***
이벨리아와 엔리르는 모르는 일이 생기면 늘 그러하듯 습관처럼 대악마를 바라봤다.
“토끼야. 이게 뭐야?”
“무슨 일이래?”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니다.”
“그치만 아스는 알아.”
“어쨌든 악마는 알지.”
“…….”
그 무한한 신뢰가 어린 표정.
용의 신뢰 따위야 알 바 아니나, 소중한 친우의 기대를 배반할 수는 없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아가레스는 나름대로 추측한 바를 꺼내놓았다.
“이곳은 용의 동굴이니, 아무래도 네놈의 브레스에 반응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내 브레스에?”
“고대 용들의 동족애(同族愛)는 익히 알려져 있지. 우리가 침입자인 줄 알고 공격했다가, 네가 용인 걸 알고 거둬들였을 거다.”
그 말에 엔리르가 어딘지 우수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선조들은 참으로 따스한 분들이었구나…….”
그러고선 앞발로 보석 산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럼 따뜻하신 김에 보물 조금 더…….”
“……가 아니라 이 대목에선 동굴 주인이 누군지 궁금증을 가져야 맞는 거 아니냐. 용.”
“알아서 뭐 해. 이미 죽은 용인데.”
“네 동족 멸망의 단서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말엔 제법 혹했는지, 이미 보물 더미를 반쯤 파고 들어간 엔리르의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꼼질꼼질 움직여 보물 밖으로 얼굴을 빼낸 엔리르가 푸르르 몸을 털었다.
“그러면 동굴 주인의 일기를 찾아봐야겠다!”
“세상천지 어떤 용이 일기를 쓰나. 멍청하긴.”
그때.
반대편에서 책장 언저리를 뒤적이고 있던 이벨리아가 낡은 가죽 노트 하나를 번쩍 들었다.
“여기 좀 봐! 동굴 주인의 일기인가 봐!”
“봐. 세상천지 일기를 쓰는 용도 있지. 멍청한 악마.”
“…….”
세 친구가 옹기종기 일기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름 테이블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에 턱 내려놓음과 동시에 뿌연 먼지가 일자, 아가레스가 소매로 이벨리아의 코와 입을 가려주었다.
“두께 봐. 이걸로 내리치면 악마도 잡겠다.”
이벨리아가 무거운 겉표지를 두 손으로 힘껏 열어젖혔다.
“너무 두꺼우니까 전부는 못 읽겠어. 뒤에만 조금 읽어보자.”
일기의 끝은 곧 소멸이었을 테니, 죽기 직전의 기록을 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그렇게 가장 뒤에서 몇 장 앞.
굳이 날짜를 특정하지 않은 내용은 직관적이었다.
「연금술사들의 용 사냥이 도를 넘는다.」
연금술사……! 눈을 마주친 세 친구가 다시 일기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얼마 전 전투를 치른 포에부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사용하는 모종의 기술 때문에 힘을 완전하게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연금술사들이 용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다니. 뜻밖의 정보다.
이벨리아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오래된 양피지를 넘겼다.
「금제탑 연금술사들이 내 안식처를 짓밟았다. 그들이 원형의 도구를 땅에 심자 전해 듣던 대로 존재력과 마나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내가 마왕을 만났을 때 자연력을 움직이기 어려웠던 그런 느낌인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엔리르가 다음 장으로 넘겼다.
「벌써 며칠째…….」
아무래도 계속해서 침입을 받은 듯. 불과 두 장 전만 해도 뚜렷했던 글씨는 흘림체로 변해 있었다.
「그들에게서 희미한 존재력이 느껴졌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감히 인간이 용의 힘을……. 아마 지친 탓에 내가 잘못 느낀 것일 터다.」
그리고 다음 장.
이벨리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이 사용한 힘은 존재력이 맞다. 사라진 나의 동족들은 그들의 실험체가 된 듯하다.」
엔리르가 일기장을 부여잡았다.
마지막을 향해 끌려가는 동족의 울부짖음이 느껴진다.
「나는 이곳을 버릴 수 없다.」
왠지 먼 남의 일 같지 않다.
도망쳐. 엔리르가 중얼거렸다.
「내 아가…….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내 아가가 저 안에 있다.」
아가. 이 용에게도 아가가 있었나 봐.
이벨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더는 그 어떤 용의 존재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 포효에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엔리르를 제외하곤 마지막 남은 용이었구나.
아니, 잠깐.
이벨리아가 설마 하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 듯하다.
차마 다음 장으로 향하지 못하자. 아가레스가 손을 뻗어 일기장을 넘겼다.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아물지 않는다. 소멸이 두려운 적은 결단코 없다. 다만, 홀로 남을 아이가 걱정이다. 내 아가…….」
깊은 침묵이 보물고를 감쌌다.
남은 장수는 하나.
이벨리아가 엔리르에게 일기장을 넘겼다.
한참 망설이던 앞발이 과거 이 대륙을 호령했을 용의 종장을 펼친다.
일기라기엔…… 그곳엔 짧은 편지가 있었다.
군데군데 피가 떨어져 일부 글자가 희미하게 번진.
「나의 고유 권능은 예지란다. 늘 바라지 않는 것만 보여주던 눈이, 죽기 직전에야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멀고 먼 훗날 이곳을 찾아올 내 아이야.」
아이. 온기 없는 글씨에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엔리르의 눈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맺혔다.
「엄마가 미처 지어주지 못한 이름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엔리르.」
톡. 톡. 눈물을 떨어뜨린 어린 용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네가 필요로 할 많은 것들을 이곳에 남겨두었으니, 숨결 한 번에 모두 취하기를.」
작은 앞발로 가린 얼굴에서 끅끅 숨죽인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중한 아가. 모든 용은 네 탄생을 축복했단다.」
뿌리도 근원도 없이 부유하여 떠돌던 어린 용.
나는 실험체인가. 실존하는가.
나는 키메라인가. 진실로 용인가.
하루에도 골백번 의심했다. 하여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나는 위대하고 대단한 용이라고.
근원을 찾고 싶었지만, 이리 잔인한 방법으로 알게 되길 원치는 않았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어린 용이 크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동굴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거대한 존재력.
저릿한 감각에 이벨리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금 전에 발한 붉은 화염과는 달리, 가장 뜨겁다는 청염(靑炎)이 보물고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벽 내부에 몸을 숨기고 있던 가디언들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고.
- 쿠웅.
- 쿠웅.
일제히 떨어져 엔리르의 앞에 부복한다.
마치. 새 주인을 맞은 것처럼.
존재조차 느껴본 적 없는 어미의 배려가 낯설다.
어린 용이 허탈하게 웃었다.
“엄…….”
본 적 없고 불러본 적 없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억지로 막아둔 둑을 무너뜨리는 일이 될까 봐 엔리르는 말을 삼켰다.
다만, 어린 용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대상에게 날아들었다.
“…….”
항상 그렇듯 따스한 품으로.
이벨리아는 엔리르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끄윽. 흑.”
세계에 남은 유일한 용은 비로소 진실을 마주했다.
자신이 왜 정체 모를 실험실에 갇혀 있었는지.
그곳이 어디였는지.
용의 멸종은 자연적으로 이뤄진 균형 따위가 아니었다.
‘……내 동족은 몰살당했다.’
아주 비참하게. 처참하게. 잔혹하게.
현실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항상 예상보다 참혹한 쪽으로.
***
삽시간에 무거워진 분위기.
엔리르와 이벨리아는 분노와 비통함에 입을 열지 못했고.
기실 이벨리아 외 다른 이들의 일은 크게 와닿지 않는 아가레스는 그저 주인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
가만히 감정을 추스르던 엔리르가 비틀 일어나 쭈욱 기지개를 켰다.
“……괜찮아, 엔리르?”
“나는 진짜 용이었어. 실험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응.”
“그리고 나를 동생이라고 불러주는 누나랑 형아들이 있고. 밉살맞은 악마랑 황태자도 있고. 가끔 보석을 던져주는 집주인도 있고.”
“…….”
“그래서 다 괜찮아.”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무릎 위에 찰싹 붙어 앉아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동굴은 나 가져도 돼? 보물은 누나 다 가져. 난 동굴만 있으면 돼.”
“동굴도 보물도 당연히 엔리르 거야.”
“잠깐. 이브 주려고 찾았…… 윽.”
너 사이코패스니?
눈으로 욕 한 이벨리아가 악마의 옆구리를 퍽 쳐서 말을 끊었다.
예상치 못하게 굉장한 일을 겪은 이벨리아가 동굴에 드러눕자, 엔리르와 아가레스도 곁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마 나는 알의 형태로 잡혀갔나 봐.”
“솔직히 놀랐어. 금제탑 연금술사들에 관해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지만, 모든 용을 잡아서…… 그런 짓을 했을 줄이야.”
“마찬가지. 상상외로군.”
“앞으로 우리한테도 위협이 될 만하겠다. 이 일기를 봐도, 심지어 용의 힘도 제약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까.”
“얼마 전 토벌한 균열에서도 연금술이 미약하게 느껴지더군.”
“심지어 악마들하고도 손을 잡았나 보네.”
“충분히 가능성 있지. 이해관계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지 않겠나.”
“하긴. 누가 이 땅을 먹든 일단 초기화는 시켜야 할 테니까.”
각 제국 황가. 아르티나. 카시스. 아가레스.
이 땅의 주역들을 모두 죽인 이후 자기들끼리 각축전을 벌여보겠다는 모양인데.
이벨리아가 쯧 혀를 찼다.
“연금술사들은 대체 발 안 걸친 곳이 어디야?”
문어야 뭐야. 줏대 없이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이벨리아가 탁탁 엉덩이를 털었다.
충격에 빠져 있는 건 이쯤이면 됐다.
알았으니 행동이 뒤따라야지.
자루 속에 담긴 보물이 다시 와르르 쏟아져 제자리를 찾았다.
“누나? 그거 왜 부어?”
“안 가져갈래.”
“왜!”
“예의.”
동굴 밖으로 나간 이벨리아가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그러자 휘도는 가장 순도 높은 물.
유영하듯 부드럽게 흘러 들어가며 동굴 사이사이에 낀 이끼를 깨끗하게 닦아낸다.
이벨리아는 엔리르가 가져온 팻말을 집어 들었다.
「상추」 위에는 짙은 줄이 그어지고.
그 아래 「용의 안식처」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쓰였다.
“어때. 엔리르?”
“……고마워. 누나.”
이벨리아는 낑낑대며 그 팻말을 손수 동굴 앞에 박아 넣었다.
몇 걸음 떨어져서 살피자, 곧 태어날 아이를 기대하던 용의 자취가 느껴지는 듯도 하다.
“편히 쉬어. 동굴 주인.”
엔리르의 엄마이니 내 가족이나 다름없지.
“가족 특혜 개념으로다가, 내가 제대로 갚아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