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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190화 (190/323)

v190화: 용의 동굴을 탈탈 털어보자

상정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잔인한 명령.

설령 위험해지더라도 멋대로 앞을 막아서지 말라는 것.

할 수 있는 최고의 존중이면서도.

자칫하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최악의 방관.

“…….”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역으로 그 역시, 이벨리아가 그를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다면 눈이 뒤집힐 것이 뻔했으니까.

다만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란 것은 헌신 이면에 이기를 가지고 있듯, 아가레스 역시 그 간극 속에서 헤매었다.

“…….”

통보처럼 소원을 냅다 던져버린 이벨리아가 이바스 저택을 떠난 뒤에도, 그는 그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마르바스가 슬쩍 말을 얹었다.

“주군.”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듣고 있다는 듯 작은 까닥임만.

“그…… 땅콩 말입니다.”

입에 이브가 오르자 그제야 돌아오는 시선.

마르바스는 여전하시다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주군께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땅콩이 희생을 금한 건 주군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저는 여전히 땅콩이 위험한 곳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면 그 앞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뜻이죠.”

“네가 왜.”

“땅콩이 죽으면 주군께서 슬프실 테니까요.”

“…….”

“그리고 뭐, 저도 조금은 슬플 것 같아서요.”

스스로도 낯간지럽다는 듯 마르바스는 목덜미를 어색하게 긁적였다.

그렇게 부하가 처음으로 먼저 건네는 위로.

과거였다면 그 알량한 관심 치우라며 차갑게 내쳤을 아가레스는, 이젠 안다.

이벨리아에게 배운 따뜻한 행동 한 줌. 감사 한 마디를.

자리에서 일어선 아가레스가 마르바스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고맙다.”

제법 긴 시간 주군을 모시면서도 들은 적 없던 말이다.

마르바스의 동공이 유례없이 커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치 눈발을 처음 만난 강아지처럼, 마르바스는 아가레스의 뒤를 바짝 따르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주, 주군. 제가 지금 뭘 잘못 들었습니까?”

“……저리 가라.”

“한 번만 더 해주십시오, 주군!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듣게!”

“얼굴 치워. 입 냄새 난다.”

“엇. 아까 악마 모가지를 하나 뜯고 와서 그런가 봅니다.”

면박에 후다닥 뒤로 물러나면서도 마냥 신난 마르바스는 두 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오직 아가레스만을 보고 사는 충신에겐 가히 최고의 날이라 할 만했다.

***

황비가 냉궁에 갇히기 전.

황비의 비호로 잠시 황비궁에 머물던 세레스는 에드윈과의 약혼식 이후 데퐁트 후작가로 복귀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혼식을 치르지 않은 세레스는 아직 황자비가 아니었으니까.

하여 데퐁트 후작가.

흡사 가주의 방인 것처럼 화려한 장식물로 가득 찬 세레스의 방.

방 주인은 씩씩대며 발을 굴렀다.

“망할!!”

그 무자비한 발길질을 이기지 못한 조각상이 바닥에 떨어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부드러운 카펫 사이사이로 박혀 들었다.

‘또 시작이시네.’

‘빨리 혼인하시어 황궁으로 가버리셨으면.’

‘황궁 시녀들이 불쌍하게 여겨지는 날이 올 줄이야.’

어린아이일 적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 열여덟이 돼서도 이러니 사용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 마음 따위 알 생각도 없는 세레스는 분이 풀릴 때까지 쾅쾅 발길질하며 사방에 널린 고가의 장식품을 부쉈다.

이렇게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날이면 원인은 불 보듯 뻔했다.

세레스가 유일하게, 그리고 일방적으로만 경쟁자라 생각하는 이.

“또! 공녀가 또!”

벌써 며칠째 같은 일로 눈만 뜨면 성질이다.

“내 썩어빠진 기사들은 이딴 사냥감이나 들고 오고!”

기사들이 나름 열과 성을 다해 바친 사냥감 목록이 두 장으로 쫙 찢겨 나간다.

“심지어 그것이 야비한 눈속임으로 우승까지 해버리질 않나!”

사냥제의 우승자를 알리는 황제의 인장 찍힌 문서가 무도한 발에 짓밟힌다.

불경 중의 불경. 누군가 알게 되면 처벌을 면치 못할 터다.

사용인들은 찢긴 문서를 황급하게 주워 뒤로 숨겼다.

“사사건건 내 앞을…… 감히 황태자비인 내 앞을……!”

심한 어폐가 있는 말이었다.

고양이가 나는 호랑이라며 외치는 수준으로.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지적하지 않았다.

고개 숙인 사용인들은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그때였다.

어린 하녀 하나가 뛰어와서 쭈뼛거리다가 가장 나이 많은 하녀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전했다.

연륜에 따라 주름이 가득 진 하녀는 반색하며 속삭였다.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네. 분명 집사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나마 세레스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는 하녀가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전하.”

“닥쳐! 공녀의 시신을 가져왔다는 정도의 소식이 아니라면 내게 말 걸지 마!”

“리카드 도련님께서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오라버니?”

공녀 목을 베어 왔다는 소식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희소식이긴 하다.

“흐음…….”

세레스가 유리 파편을 짓이겨 가루로 만들며 턱을 쓸었다.

전대 가주(家主)인 루시우스 데퐁트가 전사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이후.

이미 출정해 있던 리카드는 제대로 작위 수여식을 거치지 못하여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오라버니가 수도로 돌아오면 가문도 정상화에 접어들 테고, 추락한 위상도 빠르게 회복되겠지.’

간만에 마음에 드네.

후.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불어 위로 올린 세레스가 물었다.

사나운 안광을 내뿜던 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꽃 같은 미소가 얼굴에 자리했다.

“오라버니께선 언제 도착하신다더냐?”

***

한편. 자신이 세레스의 자존심을 또다시 짓밟았다는 사실엔 관심도 없는 이벨리아는 세상 행복하게 짐을 쌌다.

외출에 필요한 것들을 한군데에 모아두고 넣을 곳을 찾다가…… 순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곰돌이 배낭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열 살을 넘어가면서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잘 들지 않게 된 곰돌이 배낭.

이벨리아가 배낭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들고 싶은데.’

오늘은 토끼랑 엔리르랑 사람들 없는 곳으로 놀러 갈 거니까 들어도 되지 않을까.

다 자란 아이라 하더라도 어릴 적의 애착 인형은 각별하다.

잠시 망설이던 이벨리아는 아주 오랜만에 곰돌이 배낭을 챙겼다.

그러고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은 석상을 선반 위에 소중히 올렸다.

“자. 다녀올 동안 넌 여기 있어, 돌치.”

마침 발코니를 통해 파드닥 방으로 날아 들어온 엔리르가 설마 하며 물었다.

“걔 이름은 돌치야, 누나?”

“웅. 돌이니까 돌치.”

“……내 이름을 용치로 짓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

엔리르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을 푸르르 털었다.

“그런데 어디 가?”

“토끼가 사냥제 때 발견한 용의 동굴! 엔리르도 같이 가자!”

그 말에 어린 용의 털이 삐죽 섰다.

“동굴!”

그것도 무려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족의 동굴이라니!

“용의 동굴은 못 참지!”

흥분으로 인해 허공으로 떠오른 엔리르는 발코니 난간에 앞발을 걸치고 저 아래 자신의 동굴을 내려다봤다.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어 팍팍 땅굴을 판 다음 [용의 동굴] 팻말을 붙여두긴 했지만, 사실 개구멍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비루한 내 동굴.

“…….”

삽시간에 시무룩해진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옷자락을 깨물어 당겼다.

“누나. 누나. 용의 진짜 동굴은 무지 클까?”

“아주 크겠지!”

“보석도 매우 많을까?”

“아주 많겠지!”

역시. 내 땅굴…… 아니, 동굴하고는 비교도 안 되겠네.

곰곰이 생각하던 엔리르는 훌쩍 난간 밖으로 뛰어내려 주방으로 향했다.

“이거다.”

감자가 가득 든 포대기를 보고 눈을 빛낸 엔리르는, 감자를 와르르 쏟아버리고 빈 포대기만 입에 물고 날아올랐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정원.

“이게 좋겠다.”

양 앞발로 쑤욱 뽑아 든 것은 어느 작물을 심었는지 표기하기 위한 표지판.

커다랗게 「상추」라고 적혀 있었으나 어린 용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발코니로 날아 들어온 엔리르를 향해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엔리르? 그 팻말이랑 자루는 다 뭐야?”

“이건 내 동굴이라고 영역을 표시할 팻말. 그리고 이건 보석 담아 올 자루. 누나 것도 가져다줄까?”

“너 똑똑하다. 내 것도 부탁해!”

“에헤. 잠시만 기다려.”

똑똑하다는 말에 홀랑 넘어간 엔리르는 다시 주방으로 내려가 이번엔 거대한 자루에 담긴 고구마를 모두 쏟아내고 빈 자루만 입에 물었다.

주방 바깥까지 사방으로 구르는 감자와 고구마.

그러나 보석에 눈이 멀어버린 어린 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올랐다.

“누나. 여기.”

“좋아! 이 정도 크기면 우리 대륙 제일의 부자가 되겠다!”

서로 바라보며 씩 웃은 두 남매는 허름한 야채 자루를 들고 채비를 마쳤다.

조금 뒤.

둘을 데리러 온 아가레스가 아연하게 물었다.

“……그 자루는 대체 뭐야.”

“보석 털 준비 완료!”

“죄송합니다, 선조님.”

“편히 잠드십시오, 엔리르의 선조님.”

“선조님의 보석은 제가 유용한 곳에 써드리죠.”

“…….”

헤아릴 수 없다는 대악마의 지식으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제국 내 고귀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존재들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원.

***

아가레스는 이벨리아를 에스코트하여 마차에 올라탔다.

한편 주체할 수 없는 설렘에 오늘만큼은 바람을 좀 맞아야겠다는 어린 용은 마차 위 지붕에 볼록한 배를 드러내고 누웠다.

그렇게 몇 시간 달리자, 며칠 전 사냥제의 대기 공간이었던 공터에 도착했다.

이곳부터는 급격히 험준해지는 산세로 인해 마차가 진입할 수 없었기에, 아가레스와 이벨리아는 함께 말을 타고 이동했다.

제법 사납게 불어대는 바람에 이벨리아가 몸을 움츠리자, 아가레스 작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춰버린 바람.

엘라임과 계약한 지금, 이벨리아는 알 수 있었다.

‘페르세스 언니의 의지마저도 거스를 마기.’

이벨리아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가레스는 그저 옅게 웃어 보였다.

잠시 뒤, 아가레스가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자. 여기야.”

“……절벽인데?”

“아래로 내려가야 해.”

“이 아래로?”

그 말에 흘끗 아래를 바라보니 실로 까마득하다. 돌을 발로 톡 차서 아래로 굴리자, 떨어지는 소리조차 울리지 않을 정도로 높다.

이벨리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종종 급할 때면 실라페를 타고 날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높은 곳을 그리 즐기진 않는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조심히 손을 뻗었다. 늘 그렇듯 닿기 전에 구하는 허락.

“허락한다면, 안아줄게.”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는 친우가 놀라지 않게 부드럽게 손을 대 안아 올렸다.

이내 땅을 한 번 박차자, 동시에 아래로 펼쳐지는 구름과 오색 빛 산맥.

간간이 보이는 흙. 단풍으로 다채로운 나무. 아직 여전히 푸름을 간직한 잎사귀…….

자신을 믿는 듯, 목을 약하게 껴안고 허공을 둘러보는 이벨리아가 기꺼웠다.

“안 무서워?”

“안 무서워. 토끼가 잡아주고 있잖아.”

아가레스는 조금 더 단단한 손으로 친우를 받쳐 안았다.

마음 같아서야 바람결 스쳐도 다칠 것만 같아 더 세게 안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또 자신의 손에 아파하기라도 할까 조심하면서.

- 탁.

절벽 아래 내려서자 눈앞에 펼쳐진 동굴의 입구.

한껏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도 그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다.

절벽 아래라 해도 기본적으로 고도 높은 산 위.

입구 주변을 마치 상서로운 기운처럼 구름이 에두르고 있어 일견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발 들이는 것이 유린이라 생각될 정도로.

입을 떡 벌리고 동굴 입구를 훑던 이벨리아가 감탄했다.

“우와…… 엄청 크다…….”

우리 토끼가 잡아 온 돌치가 여길 지키는 가디언이었구나.

그 작은 돌치가 어떻게 이 입구를 몽땅 지킨 걸까.

그리고 용의 진짜 동굴을 처음으로 마주한 엔리르는 비틀거렸다.

“내 땅굴은 개구멍이었잖아, 정말로.”

리액션 부자들의 반응에 뿌듯해진 아가레스가 먼저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디디자,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오래 방치된 동굴이니만큼 습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안은 온도가 낮은 것 외엔 상당히 쾌적했다.

아가레스가 마기로 목도리와 망토를 빚어 이벨리아에게 덮어주고, 엔리르는 빛의 구체를 띄워 시야를 밝혀주었다.

그러자 흐릿한 불빛 사이로 보이는 벽면. 의미를 알 수 없는 각종 문양이 늘어서 있다.

아마 고대 용이 즐겨 사용하던 마법진인 듯했다.

시간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해 군데군데 낀 이끼는 스산하기보다는 친자연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우와아…….”

연신 감탄하는 이벨리아를 끌고 아가레스가 향한 곳은 보물이 쌓인 방.

사냥제 때 이미 부숴버린 입구의 잔해가 처참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자. 여기가 보물고.”

그 말에 이벨리아와 엔리르는 자신들도 모르게 비어져 나온 침방울을 츄릅 훑었다.

“좋아. 이 자루에 가득 담아서 나오는 거야.”

“누나. 용의 저주를 받으면 어떡하지?”

“난 그런 미신 따윈 안 믿어!”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어선 이벨리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

시야에 담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쌓인 황금의 산.

그리고 가치를 짐작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고서(古書).

“……여기는 천국인 걸까.”

황홀해진 이벨리아가 슬슬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이를 따라 아가레스와 엔리르 역시 중심부로 진입하던 순간.

- 쿠르르르르릉.

난데없는 굉음과 함께.

“어어?”

등졌던 입구 쪽의 보물고 석문(石門)이 새로이 생성되더니.

“잠깐!”

- 쿠우우우웅.

……손쓸 새도 없이 갇혀버렸다.

“…….”

“…….”

시선을 마주하던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동시에 소리를 꽥 질렀다.

“으아아아아! 용의 저주다!”

“으아아아악! 선조님 죄송합니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재빨리 움직이는 손.

착실하게 자루 속에 쌓여가는 보물.

“으아아! 엔리르, 거기 옆에 왕관 좀 집어줘!”

“으아악! 누나, 거기 그 마법구 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마법구 넣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왕관도 넣었다!”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이마를 짚었다.

“무서운 건지 탐나는 건지 하나만 해라, 좀.”

그래야 나도 맞춰서 움직일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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