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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189화 (189/323)

##  189화: 희생을 금한다

아가레스가 멍하니 되물었다.

“내 것……이라고 했어?”

“응. 내 거 한다며.”

얽매는 선언은 폭력적이기보단 달콤하다.

“네가 욕심부려도 된다고 했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탐욕 좀 부려보려고.”

그는 그저 혼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는 단언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소유된다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는 비견할 데 없는 환희라고.

“인간들은 기쁠 때 춤을 추고 싶다는 표현을 사용하던데.”

“응. 그러기도 하지.”

“내가 지금 그래. 너무 좋아서 춤을 추고 싶어.”

“……대악마가 뼈를 받고 신이 나서 춤을 추면 인간들은 세상의 종말이 온 줄 알 거야.”

둘이 있으면 항상 둘만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마주 보며 웃던 둘의 사방에서 아쉬움 섞인 탄식이 날아들었다.

누군가가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비통해하는 것도 들렸다.

흘려들으며, 그는 발아래 놓인 마족의 뼈를 쓸었다.

“이브.”

“응!”

“이거 우리 저택 응접실에 장식해둘까?”

“문 열고 들어가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응. 응접실 벽난로 바로 위에.”

“그러기만 해봐!”

감히 너와 나의 저택을 괴기스러운 뼛조각으로 뒤덮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

아르릉 사납게 경고한 이벨리아가 뒤로 돌았다.

그러자 저 위 상석, 추욱 어깨를 내린 황제가 힘없이 묻는다.

“꼭 그래야만 속이 시원했나, 공녀…….”

“아주 시원합니다!”

“……짐은 마음이 아픈데.”

“네? 안 들립니다!”

아까의 복수다. 황공한 멍멍이.

공녀가 황가를 선택하지 않아 시무룩해진 황제가 토라진 티를 잔뜩 내며 다음 절차를 진행했다.

“소원은 무엇을 빌겠나, 공녀.”

“사적인 거라서 따로 말할래요.”

“우리 공녀 어릴 적엔 참으로 다정했는데…….”

“네? 안 들립니다!”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불경.

어쩌다 공작과 똑같은 것이 하나 더 생겼나 싶어 황제가 이마를 짚었다.

원치 않았으나 어쨌든 거머쥔 우승을 가족들에게 자랑하려던 이벨리아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저쪽에서 바라보는 가족들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우리 오라버니들 울겠네.’

엄마는 지금 당장 인마전쟁을 개전하자고 주창하고 있고.

아빠는 그 옆에서 말없이 손을 우두둑 꺾고 있다.

심지어 식량 도둑마저 검집을 매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사냥감을 토끼한테 바쳐서 다들 단단히 심통이 났구나!’

안 봐도 뻔하다. 저걸 다 어떻게 달래준담.

‘……파국이다.’

그렇게 열다섯의 가을.

제각기 깊이 숨겨뒀던 마음 몇 장이 낙엽처럼 붉게 물든 사냥제의 끝이었다.

***

며칠 뒤.

슬슬 들이닥치는 찬 바람에 발코니 창을 닫으려던 이벨리아는 공작저 중문을 나서는 아르칸을 발견했다.

“오라버니이-!”

쨍한 가을 햇살에, 아르칸이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2층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누구야. 생판 남인 대악마에게 사냥감을 바친 냉정한 아가로군.”

“속 좁긴. 어디 가?”

요 며칠간 서운함을 단단히 표하던 아르칸의 볼이 어울리지 않게 붉어졌다.

‘오호.’

이벨리아가 발코니 난간에 두 팔을 올리고 씩 웃었다.

“렐리안 만나러 가는구나.”

“흠. 흠.”

“손에 든 그건 뭐야?”

“담요.”

“담요는 왜?”

“날이 추워져서”

“오라버니 추위 안 타잖아.”

“……렐리안이 추워할 수도 있으니까.”

이벨리아의 시선이 아르칸의 반대편 손으로 향했다.

누군가에게 선물한다기에는 제법 조잡한 꽃 한 송이.

커다란 손에 모가지를 잡혀 더욱 처량해 보인다.

“그 꽃은 왜 들고 있어?”

“색이 렐리안 눈동자 색과 닮았잖아.”

“그래서 렐리안 주려고?”

“……혹시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뭐야.

우리 집에 난데없는 사랑꾼이 나타났어요.

“누가 아빠 아들 아니랄까 봐!”

아르칸은 여동생의 놀리는 듯한 반응을 뒤로하고 후다닥 중문을 열어젖혔다.

이벨리아가 두 손을 모아 입가에 대고 크게 외쳤다.

“오라버니! 렐리안은 흰색 꽃을 좋아해!”

그러자 멈칫.

손에 쥔 보랏빛 꽃을 그대로 땅에 푹 박아 버린 아르칸이 눈에 띄는 흰색 꽃 한 송이를 뿌리째 뽑아들었다.

“고맙다. 동생.”

“앗, 그 뿌리는 좀 떼고…… 이미 가버렸네.”

요즘은 저렇게 흙 묻은 뿌리째 뭘 선물하는 게 유행인가.

얼마 전 받은 산삼을 떠올리며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

한편 연무장에서 돌아오던 세드릭은 그 광경을 부럽다는 듯 바라봤다.

‘아가가 형님의 연애를 도와주고 있잖아!’

일순간도 머뭇거림 없이, 사랑 앞에 애가 닳은 청년은 여동생의 방 발코니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브. 아가야.”

“악! 깜짝이야!”

“미안. 급해서.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러자 이벨리아가 투정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뭐야. 내가 사냥감 안 줬다고 삐져가지고 내 간식 상자를 다 숨기더니?”

“그건 이 오라버니가 아주 어리석었다.”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조력자에게 꼬장 부려서 좋을 게 없다.

세드릭은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며 벌서듯 손을 들었다.

그 과장된 몸짓. 귀여운 잔망스러움에 이벨리아가 픽 웃으며 물었다.

“페르세스 언니 때문에 왔지?”

“어, 그, 혹시 그 이후로 아무런 얘기도 없나 해서.”

“실프를 불러서 물어볼까?”

“……그분이 모르게 살짝 불러서 물어봐.”

글쎄. 정령왕은 하위 정령의 시야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걸.

굳이 알려주지 않은 채, 이벨리아가 작게 실프를 불렀다.

부드러운 소소리바람과 함께 나타난 작은 요정.

[계약자아-! 세상이 돈다- 돌아!]

“엥?”

평소와는 영 다른 모습에 이벨리아가 실프의 날개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실프? 왜 그래? 주정뱅이 같아!”

헤롱헤롱. 비틀비틀.

겨우 중심을 잡은 실프가 툭, 이벨리아의 손바닥 위에 떨어져내렸다.

[……지금 어느 실프를 불러도 마찬가지야.]

“무슨 일인데?”

[바람의 정령은 후각에 예민해.]

“누가 정령계에 방귀를 뀌었어?”

[반대야. 정령계가 온통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찼어. 후각이 마비된 것 같아.]

“이 가을에 웬 달콤한 향기야?”

실프가 비밀이라는 듯 이벨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바람의 왕께서 설탕에 절인 듯한 기분을 느끼고 계시기 때문이야.]

꼭 꿀단지 속에 빠진 기분이라며 물컵에 얼굴을 담그고 푸르르 흔드는 실프.

얇은 날개를 살살 쓰다듬으며 이벨리아가 웃었다.

“오라버니. 언니는 아주 아주 잘 있대.”

“혹시 인간계에 오실 계획은…….”

“글쎄. 바람이 스칠 때 보고 싶다고 말해봐. 들을지도 모르잖아.”

첫사랑에 빠진 청년은 눈에 뵈는 게 없다.

세드릭은 냅다 발코니 문을 열고 외쳤다.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물컵에 빠져 있던 실프가 뒹굴며 코를 쥐었다.

[공기가 더 달아졌어! 실프 살려!]

***

이바스 저택에서 사자의 형상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르바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이내 코가 움찔거리고, 기다란 콧수염이 흔들린다.

자리에서 느리게 기지개를 켠 마르바스가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 쾅.

“집주인은 내 소원을 들어라!”

한 치의 이변 없이 정확한 타이밍에 문을 박차고 들어선 밥풀.

어슬렁 어슬렁 다가선 마르바스가 거대한 앞발로 이벨리아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밥풀. 너 진짜 그 버릇 안 고쳐? 깜짝깜짝 놀라잖아.”

“발 치워! 내가 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잔디가 잘못이야.”

“손이다! 그리고 왜 우리 주군께서 네깟 것의 소원을 들으시냐?”

손은 무슨. 꾸리꾸리한 냄새 나는 발이지.

잉차 힘을 줘서 밀어낸 이벨리아가 가슴을 쭉 펴고 자랑했다.

“내가 사냥제에서 가장 강한 사냥감을 잡아 우승했거든! 그걸 아스에게 바쳤고.”

“네가아?”

“말투가 무진장 깔보는 것 같은데?”

“정확해. 앞에 생략된 말까지 붙여서 하자면, 고작 네가아?”

이게 진짜!

마르바스의 앞발을 콱 밟으려 했으나, 날쌘 악마는 놀리듯 앞발을 들어 이벨리아의 발 위에 올렸다.

“인간들도 참 큰일이로군. 너보다 더 강한 사냥감을 잡은 이가 없다니. 그리 빌빌대서 어디 써먹으려고…….”

“토끼도 참여했는데. 사냥제. 우승 못 했고.”

“……빌빌댄다는 말 취소.”

주군이 언급되자 마르바스는 순식간에 꽁지를 말아버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것 하나.

“야. 혹시 그 뼈다귀가 네가 잡았다는 그거냐?”

“뼈다귀는 아니고 1급 마족인데!”

“뭐든 간에. 주군께서 그 뼈를 잔뜩 들고 오셔서는 집무실에 장식을 해두셨다.”

덕분에 마계 전역에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

동(東) 마계의 지배자는 적의 뼈를 발라 성을 꾸민다는…….

치우시라 간청 드리려 했던 마르바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 땅콩이 준 뼈라면. 설령 마계가 망해 없어져도 그 뼈는 남아 있을 터다.

“야. 땅콩. 넌 앞으로 주군께 뭘 드릴 때 잘 좀 생각해.”

“난 항상 생각해.”

“더 깊이 생각하라고! 네가 뭘 드리면 그게 주군 집무실을 평생 장식한다고 생각하란 말이야! 네가 똥을 드리면 벽에 똥칠이라도 하실 분이라고!”

그때.

“웬일로 맞는 말을 하는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마르바스가 인간형으로 돌아와 곧바로 부복했다.

“주군!”

“아스! 소원 빌러 왔어!”

똥칠 운운하였으니 제대로 혼나리라는 마르바스의 우려와 달리, 아가레스는 그저 꺼지라는 듯 고개만 까닥였다.

잘 되었다 싶어 곧바로 사라지려는 마르바스를 이벨리아가 막았다.

“잠깐만. 잔디도 같이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소원이길래?”

“으음, 일단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둘 다.”

아가레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반면, 마르바스는 물었다.

“그게 소원이냐?”

“잔디는 그 입 좀 다물어.”

“그게 소원이냐?”

“조용히 하라고.”

“오. 그게 소원이냐?”

“토끼야. 네 부하 좀…….”

- 퍽.

이벨리아가 ‘네 부하 좀 조용히 시켜’라는 말을 다 끝맺기도 전.

언짢아진 아가레스가 마르바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합. 단번에 입을 다문 마르바스가 얼른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벨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마왕을 만났어.”

그리고 정확히 동시.

- 화르륵.

- 쿠르르릉.

마르바스의 신형이 지옥을 태우는 것과 흡사한 청염에 휩싸이고.

마찬가지로 아가레스의 진보랏빛 마기가 하늘이라도 뒤덮을 기세로 발산했다.

쨍그랑. 이미 깨어져 나간 테이블, 의자, 도자기, 기타 가구들.

심지어 벽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럴 줄 알았어!’

이벨리아가 두 악마의 머리에 동그란 초콜릿 알을 던졌다.

“내 말 끝까지 들으랬다!”

위협적으로 외쳐봐도 기세가 줄어들질 않는다.

‘엄살이라도 피워야 하나?’

또르르 눈을 굴리던 이벨리아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야! 마기에 짜부돼서 이브 죽네!”

그러자 이바스 저택을 묵직하게 채우던 마기가 농도를 낮추고.

동시에 진보랏빛 마기가 마르바스의 화염을 흩어버렸다.

역시 우리 토끼. 칭찬하려고 고개를 든 이벨리아가 입을 감쳐물었다.

‘이러다 사달 나겠네.’

토끼와 잔디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이벨리아는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그으…… 전에 내가 만났다고 했던 가면 영식 있잖아. 그게 마왕이었어.”

그 말을 시작으로, 이벨리아는 사냥제에 가면 영식이 나타났던 것, 따라갔더니 자신을 회유하려 한 것, 마왕의 앞에서는 정령을 불러낼 수 없었다는 것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설명하는 내내 앞에 놓인 찻잔을 굴리다가 시선을 드니, 아가레스의 표정이 유례없이 차게 굳어 있다.

‘히익. 이브 살려.’

“왜 날 안 불렀어.”

“……토끼가 오면 거기서 마왕이랑 싸울 거 아니야.”

“내가 못 미덥나?”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너 혼자 해결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어?”

“그것도 아니구…….”

처음 들어보는 다그치는 말투.

평소와 다르게 끝에 선명히 묻어나는 감정.

‘진짜 화가 났구나.’

슬금 눈치를 보던 이벨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최선의 결정을 한 거라구.

“멍청한 토끼. 거기서 네가 오면 뭐.”

“그걸 잡아 죽였겠지.”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우리 인간들은 다 죽었겠고.”

“…….”

“그럼 거기서 인마전쟁 발발하고, 나는 전쟁터에 떠밀리고, 우리 아빠랑 엄마랑 오라버니들도 마찬가지고.”

진짜 서러워서 정말.

“그래서 나름대로 잘 생각해서 일단 돌려보낸 다음에 토끼랑 상의하려고 한 건데.”

나쁜 토끼. 내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렇지 않아도 평안한 일상에 냅다 돌을 던진 마왕 때문에 심란한데.

“토끼는 막 나한테 뭐라고 하고…… 히잉.”

고작 이게 뭐라고. 서운함에 둑이 터지듯 퐁퐁 샘솟는 눈물.

당황한 아가레스가 벌떡 일어서 이벨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브.”

“히끅. 토끼 미어-.”

“우, 울지 마. 응? 내가 잘못했어.”

“흐어엉-.”

“이브, 나 좀 봐.”

“안 봐아-.”

아가레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안절부절못하고 갈 곳을 잃은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어, 어쩌지? 어떻게 해야 울음을 그치지?

사과. 사과부터 하자.

“이브. 혹시 네가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걱정돼서 그랬어. 그래서 말이 못되게 나갔어. 미안해. 잘못했어.”

“……훌쩍.”

발개진 코끝. 많이 서러운지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눈물.

아가레스는 자신이 영생을 갇혀도 충분치 않은 극악의 범죄자처럼 느껴졌다.

“네가 날 부르기 싫다면 안 불러도 돼. 뭐든 네 의사가 우선이야.”

“…….”

“그냥 서운해서 그랬어. 뚝. 미안해.”

말 그대로 손이 발이 되게 비는 악마.

아가레스에게는 지금 이 눈물보다 더 무서운 건 세상에 없었다.

“네가 가진 그 소원권으로 평생 소원 들어줄게. 응?”

“……지짜?”

“진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친구의 눈물에 간이고 쓸개고 다 내다 바쳐버린 아가레스.

마르바스는 곁에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주군 제대로 호구 잡히시네.’

마음이 조금 풀린 이벨리아가 슥슥 눈물을 닦았다.

혹시 목이 마르진 않을까.

혹시 눈이 따갑진 않을까.

전전긍긍 살피던 아가레스가 한시름 놓고 다정히 요청했다.

“자. 그럼 첫 번째 소원부터 말해줘.”

이벨리아가 아가레스가 건넨 물컵을 두 손으로 쥐며 말했다.

“마왕 있잖아.”

“응.”

“강했어.”

“내가 더 강해.”

“알아. 근데 마왕은 다른 차원에 가서 지배력을 빨아먹고 온댔어.”

앞뒤 자른 그 설명에도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아가레스와 마르바스는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토끼는 아주 강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이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가 내 소원이야. 잘 들어.”

“응.”

“절대로. 절대로 나 대신 희생 같은 건 하지 마.”

“…….”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날 존중해 줘.”

곧 전쟁이 시작되겠지. 아주 큰 전쟁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직감이다.

내가 다치고 깨지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다만, 혹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소중한 이들이 다칠까 봐.

혹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친애하는 이들이 날 위해 몸을 던질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웠다.

“내가 다치거나 죽으면 토끼가 슬퍼할 걸 알아.”

와닿지 않는 가정만으로도 속내 깊은 곳이 무너져내리는 대악마. 쓰다듬으며 이벨리아가 선언했다.

“그래서 난 최선을 다해 살아남을 거야.”

언제라도, 어떤 상황이라도.

“그러니까 너도 그래야 해.”

이기적이게 내 앞을 막아서지 말라고. 그저 등 맞대고 힘껏 싸우자고.

희생을 금하는 잔인한 명령.

“…….”

아가레스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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