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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188화 (188/323)

##  188화: 내 것에게 내가 주는 선물

다음 차례는 5급 마족에 더해 6급 마족 여럿을 잡은 엘리시아.

구울 한 패거리를 야차처럼 때려잡아 사냥감이 가득 채워진 수레를, 엘리시아는 수행원의 도움 없이 한 손으로 끌었다.

‘역시 우리 딸에게 주는 게 좋으려나.’

슬쩍 바라본 엘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딸 곁에는 애달픈 시선으로 아양 떨고 있는 건실한 청년들이 보인다.

‘우리 딸이 벌써 저렇게 자랐구나.’

자식을 언제까지나 싸고돌 수는 없는 법.

엘리시아는 만족스러운 발걸음으로 수레의 방향을 돌렸다.

묵직한 수레가 턱 소리를 내며 내려앉은 곳은…….

“엘. 내게 주는 건가.”

“당신은 일평생 내게 많은 걸 바쳤으니까. 이번엔 내가 주고 싶어서요.”

“그대는 어떻게 말도 이리 아름답게 할까.”

“당신이 사람 만들었죠.”

휴고는 입술을 꾹 깨물고 울컥이는 감정을 삼켰다.

여기서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렸다간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십상이다.

그렇게 단 하나의 사냥감도 잡지 않은 소드마스터, 아르티나 공작은 잘난 부인 덕에 모든 유부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콧대를 높였다.

***

렐리안은 자꾸 떠오르는 앙큼한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이 헛된 망상…….’

도무지 사라지질 않는다.

현실이 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르칸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사냥감을 바치고 데이트를 신청하는 그런 상상이 렐리안을 자꾸 달콤한 시럽 속에 빠뜨렸다.

“아. 오라버니 차례네.”

이벨리아의 혼잣말에 여전히 꿀단지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렐리안이 흡, 숨을 들이켰다.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괜히 실망만 하게 될 거야.’

꼼지락. 렐리안의 얇고 흰 손가락이 아르칸에게 준 것과 똑같이 생긴 손수건을 매만졌다.

한편 조금 전 세드릭이 여동생에게 단호히 거절당하는 것을 본 아르칸은 애초에 다른 곳으로 가자 마음을 먹었다.

아르칸이 수레의 손잡이를 쥐고 좌중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러자 영애들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머리를 매만지며 매혹적인 미소를 띠었다.

진중하게 옮기던 시선이 어느 한 군데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괜히 폐가 되진 않을까.’

매사에 신중한 아르칸에겐 실로 걱정이었다.

영애의 드높은 명예에, 자신의 걸음이 작은 흠이라도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르칸은 슬쩍 여동생을 바라봤다. 괜찮겠냐는 뜻.

그러자 이벨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응원하는 것처럼.

그 단호함에 용기를 낸 아르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사냥감이 바닥에 내려졌다.

그와 동시에, 받았던 손수건을 풀어 건넨다.

“카시스 영애.”

렐리안이 채신도 잊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커다란 보랏빛 눈은 여전히 환상 속을 거니는 것처럼 혼몽했다.

“그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니요! 기뻐요!”

냅다 외친 렐리안이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푹 고개를 숙였다.

화르르 달아오른 목덜미. 여린 손이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떨린다.

옅게 웃은 아르칸이 말을 이었다.

“받아주겠나.”

“네, 네. 그럼요.”

렐리안이 냅다 사냥감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하자, 아르칸이 부드럽게 막았다.

“귀한 손은 아끼셔야지.”

짧게 스치는 온기에 화들짝 놀란 렐리안이 불에라도 덴 듯 손을 원위치했다.

“비록 내 동생에게 가려 우승은 못 했지만-.”

렐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우승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아르칸이 주는 것이라면 떨어진 꽃 한 송이라도 황금보다 무거운 가치인 것을.

“이번 그믐. 나와 함께 나가주겠나.”

“……!”

“이깟 마물 말고, 그대에게 어울릴 것을 주고 싶어서.”

“……지, 진짜요? 그믐이요?”

아르칸이 끄덕이고는 고개 숙여 렐리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낮과 밤. 모두 내게 허락해줘.”

“밤……?”

“그믐날 밤엔 불꽃놀이를 한다더군. 탑을 빌려두도록 하지.”

“저 아무 생각 안 했어요! 마침 불꽃놀이를 생각했거든요!”

“……?”

“…….”

현명한 금안에 왠지 응큼한 상상이 모두 들켜버린 듯하다.

렐리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사랑스러운 반응에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아르칸은 주먹 쥔 손을 내렸다.

더는 그저 친구의 동생이 아니다.

‘마땅히 존중해야 할 레이디지.’

천천히 몸을 낮춘 아르칸은 한쪽 무릎을 꿇고 렐리안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욕을 담아 조금 오래.

몸을 일으켜 뒤를 돌자 렐리안이 작게 꺅 비명을 질렀다.

그 마음이 다르지 않아, 아르칸의 미소가 짙어졌다.

***

한편 흥미진진한 연극이라도 보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쿠키를 씹어먹던 이벨리아는 쾌재를 불렀다.

‘세상에, 세상에.’

이래서 등을 좀 떠밀어야 한다니까!

벌써 스물셋에 스물하나.

부족함 없이 잘 자란 오라버니들이 남색 또는 고자 소리나 듣고 있게 할 수야 없었다.

‘조금 떠밀어주니 아주 냉큼 받아먹는 것 봐라!’

심지어 상대가 렐리안과 페르세스라니.

“우리 오라버니들 눈이 아주 하늘 꼭대기에 달려 있었어.”

이벨리아가 작은 악마처럼 흐흐 웃는 사이.

우승 후보자로 점쳐졌다가 친우의 난입으로 한순간에 소원권의 꿈을 잃은 루드비히가 수레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아르칸과 세드릭의 품절로 시무룩해졌던 영애들은 어엿한 성인이 된 황태자의 풍채에 이마를 짚으며 여기 좀 보시라는 듯 제각기 부채를 살랑이며 존재를 알렸다.

혹시 선택을 받게 되진 않을까 황금빛 꿈을 꾸는 영애들에겐 시선 한 번 흘리지 않고, 루드비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일한 친우의 앞으로 향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벨리아가 쯧쯧 고개를 저었다.

‘여기 짝 못 찾은 불쌍한 중생 하나가 더 있네.’

마음 같아서야 다른 영애들을 좀 보라 하고 싶지만 루드비히의 사냥감을 거절하는 건 황태자의 명예에 적지 않은 타격이 될 터다.

이벨리아는 안쓰러운 친우가 연모하는 이를 찾을 때까지 마음 넓게 기다려주기로 했다.

“이브, 아니, 공녀.”

작은 발아래. 오래된 호수 또는 깊은 바다 밑바닥에 산다는 거대 문어가 놓였다.

“문어다.”

지닌 마음이야 연모임에도, 오래도록 친구였던 만큼 다짜고짜 관성을 내몰고 위치를 바꾸기엔 쉽지 않다.

하여, 사냥감을 바치는 데 낯간지러운 미사여구 따윈 없었다.

이벨리아 역시 평소처럼 화답했다. 나름대로 공적인 자리라고 말끝은 높인 채였다.

“맛있겠네요, 전하. 집에 데려가서 잘 구워 먹도록 하죠.”

“이렇게 큰 걸 혼자 다 먹으려면 그 작은 배가 빵 터질 텐데.”

그러자 이벨리아가 코를 찡긋하며 작게 속삭였다.

“비밀기지에서 함께 먹으면 되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루드비히가 나른하게 입매를 올렸다.

“모처럼 나쁘지 않은 사냥감을 잡았는데, 공녀에게 우승을 빼앗길 줄이야.”

“저야말로 폐하의 눈치 없는 수행원이 다 불어버릴 줄은 몰랐죠. 근데 이 문어는 어디서 잡았어요?”

“호수에서.”

“여기 호수도 있어요?”

“정상에.”

“거기 가니까 이 문어가 와악 튀어나왔나요?”

“……그건 아니다만. 그대에게 문어를 주고 싶어서 호수에 돌 수십 개를 던졌다.”

“도올?”

“그래야 머리에 돌을 맞은 문어가 화를 내며 나오지 않겠나.”

루드비히가 이 커다란 손으로 자갈을 하나하나 모아 호수에 퐁퐁 던졌을 상상을 하니 제법 귀엽다.

픽 입꼬리를 올리던 이벨리아가 이내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

꽃봉오리 터지듯 만개하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우승 사냥감을 바치지 못해 아쉬울 줄 알았는데…….”

소원권을 얻는 것보다 이 웃음 한 번 보는 게 더 기꺼울 줄이야.

과거엔 네가 내게 주는 웃음으로 살았는데.

이젠 내가 네게 주고 싶어 살아간다.

시작과 끝 모두 가없이 얽매여도 마냥 기꺼울 따름.

“…….”

억눌러도 자꾸 날카롭게 존재를 알리는 감정에, 청년은 칼같이 돌아섰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면 저 맑은 웃음 조각에 감히 손이라도 뻗을까 하여.

***

우승자인 이벨리아를 제외하면 마지막 순서.

본래였으면 우승자로 호명되었을 대악마.

그는 수레 따위 던져버리고 사냥감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다른 이들의 사냥감이 급수에 맞게 제법 거대한 것에 비해, 아가레스의 사냥감은 지나치게 작고 귀여웠다.

아직도 4급 마족임을 의심케 하는 산삼과 꿀밤으로 부숴버리는 바람에 미니미가 되어버린 석상.

‘……폼이 영 안 사는군.’

그의 길은 늘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어김없이 그쪽으로 향하며, 아가레스는 끝에 앉은 이의 표정을 흘끗 살폈다.

좋아해 줄까.

그래도 네게 주고 싶어서 열심히 잡았다고 하면 기특하게 여겨줄까.

귀한 네 앞에 바칠 보석 동굴 하나도 찾아두었다고 하면 예뻐해 줄까.

맨드레이크와 골렘이 이벨리아의 발치에 놓였다.

다른 이들이 사냥감을 바칠 때 살짝 허리 숙여 놓았던 것과 달리, 마치 주군에게 진상하는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채였다.

“이브.”

“응.”

“네게 바칠 사냥감인데…….”

“응.”

“……너무 작지?”

이벨리아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슬금 눈치 보는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서는 바닥에 놓인 산삼 비슷한 것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움찔거리다가 눈을 뜨려던 산삼이 아가레스의 주먹질 한 번에 다시 끼악 기절했다.

이벨리아가 키득 웃었다.

“마음에 들어.”

“산삼이랑 돌 인형인데도?”

“토끼가 나한테 주고 싶어서 잡은 거잖아.”

항상 그렇다. 저 다정함은, 늘 염원하던 말을 해준다.

원하는 것만 보여주는 환각처럼 속절없이 빠져들게.

아가레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애로운 군주처럼 내려다보는 푸른빛 눈에는 친애가 가득 담겨 있다.

“아주 멋진 산삼과 귀여운 돌 인형이야. 고마워.”

“받아줘서 영광이야. 이브.”

이벨리아가 검지로 아가레스의 턱을 살짝 들어올리고, 고개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있잖아. 사실 토끼가 나 말고 다른 영애한테 사냥감을 주면 어쩌나 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 없는데도. 상상하니까 아주 싫더라.”

“……왜?”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내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오라버니들이 페르세스와 렐리안에게 사냥감을 바친다고 할 때는 외려 기뻤고.

루이가 다른 영애에게 사냥감을 바쳤더라도 드디어 식량 도둑에게 연모하는 여인이 생겼다며 흐뭇하게 웃었을 터인데.

‘아주 어릴 때부터 토끼랑 함께 놀고 얘기하고 고민을 털어놔서 그런가.’

계속 곁에, 늘 이렇게.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중력에 이끌리듯 네가 있어 주면 좋겠다.

‘널 내 소유처럼 생각하나 봐.’

마치 소중한 사탕을 빼앗기기 싫어 꽉 쥐고 우는 아이처럼.

그 어두운 마음을 갈무리하며 이벨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내 욕심이 얼마나 큰지 넌 몰라.”

애끓게 올려다보며, 아가레스는 생각했다.

‘모르는 건 너야, 나의 주인.’

내 세계이자 신. 네게 닿는 내 마음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그 탐욕이 만에 하나라도 널 집어삼킬까, 나는 매일 바닥 없는 구름 위를 걷듯 네 곁을 맴돌고 있다는 것도.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아가레스는 그저 이벨리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네게 갖는 모든 염원은 욕심이나…….

“네가 내게 갖는 모든 바람은 욕심이 아니야. 이브.”

“…….”

“몇 번이고 말했는데. 네가 원하는 한, 나는 네 것이라고.”

네가 네 것을 탐함에야 감히 누가 욕심이라 부르겠어.

***

‘이 요망한 토끼!’

혀에 꿀이라도 발랐나. 어쩌면 매번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지.

언젠가 혀를 쭉 빼서 제대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이벨리아는 아가레스를 마련된 자리로 훠이훠이 쫓았다.

사냥제도 진정한 의미에서 막바지에 다다랐다.

우승자가 사냥감을 바치고 소원을 비는 것으로 끝.

마땅히 사냥제의 하이라이트다.

심지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우승자의 등장이었으니, 모든 이들의 눈은 흥미로 반짝였다.

황제는 냅다 뛰어 내려가 우리 공녀 사냥감 누구에게 줄 거니 짤짤 털어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숨기고 물었다.

“우승자는 내게 소원을 빌 수도, 사냥감을 바칠 이에게 소원을 빌 수도 있다. 공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사냥감을 바칠 이에게 소원을 빌도록 하겠습니다.”

이벨리아를 바라보던 가족들은 저마다 가슴을 쭉 폈다.

“우리 아가는 아마 내게 줄 텐데.”

“기대하지 말아요. 나일 테니까.”

“죄송하지만, 이브를 업어 키운 건 접니다.”

“형님이 무슨? 내가 안아 키웠지!”

서로를 경쟁적으로 노려본 네 가족의 눈이 무섭게 번쩍거렸다.

마찬가지로 오매불망 이벨리아를 바라보던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시선이 부딪혔다.

“악마.”

“꿈 깨라.”

“……그렇지? 아마 공작이나 공작부인에게 주겠지?”

“당연한 말을.”

인간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가족이지 않나.

‘황금색 머리통들이 저렇게 바글바글 몰려 있으니 내게 줄 리가 없지.’

익히 짐작하면서도 자꾸 주체할 수 없는 욕심이 난다. 아가레스는 차라리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벨리아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쭉 훑고선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난감하네.’

마음 같아서야 모두에게 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이 행사의 의미 자체를 퇴색시킬 터다.

‘그렇다면…….’

잠시 고민하던 이벨리아는 실프를 불러 마물의 뼈가 담긴 수레를 들어 올렸다.

타박. 타박.

작은 보폭의 귀추가 주목되고.

모두가 자신에게 향하길 간절히 바라던 발걸음이 멈췄다.

- 툭.

수레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간결한 수여식.

“여기.”

이벨리아는 믿기 힘들다는 듯 크게 눈을 뜬 이를 올려다보며 씩 웃음 지었다.

“내 것에게 내가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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