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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187화 (187/323)

##  187화: 정령계에 부는 봄바람

“쉬잇!”

“어허, 이 사람. 눈이 단단히 잘못되었구먼.”

“입 좀 다물게. 저게 용 뼈가 아니라 그대의 뼈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이 제국 유일한 공녀가 용을 때려잡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넘어 동경에 이른 기사들이 수행원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그러나 황제의 예리한 눈은 이미 그쪽을 향한 뒤였다.

“용이라니. 무슨 말인가.”

“폐하, 이곳에 백골이 된 용의 시체가 있습니다! 이건 대발견입니다, 대발견!”

눈치라곤 밥에 말아먹으려도 없는 수행원이 기사들의 팔을 뿌리치고 환희에 차 외쳤다.

기사들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께서 입을 삐죽 내밀고 계신 것으로 보아 이 상황이 영 언짢으신 모양인데.

“거 참. 눈치 더럽게 없구먼.”

“저 수행원 승진은 망했겠어.”

누구의 분노를 샀는지 상황 파악도 못 하고 해맑은 수행원은 조르르 황제에게 달려가 이리 좀 와보십사 두 손 모아 마족의 뼈를 가리켰다.

그 호들갑에 느리게 일어선 황제가 풀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멸종된 지 제법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젠 뼛조각도 찾기 어려운 용.

수행원이 저리 놀랄 정도로 보존된 사체가 있다면 학계의 큰 발견이요, 가장 단단한 뼈를 벼려 황태자에게 무기나 갑옷을 만들어 주어도 좋을 터였다.

‘물론 살아 있는 용 하나가 있긴 하다만…… 공녀가 끼고도는 이상 성역이나 다름없지.’

공녀의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앉은 붉은 여우.

저걸 잡아서 연구 좀 해보자 했다가는 제국이 물 또는 마기에 뒤덮여 멸망할 것이 뻔했다.

아쉬운 대로 남은 뼈라도 구경하고자 황제가 움직이자, 사냥제를 주관하던 기사 몇이 흘끗 이벨리아의 눈치를 봤다.

이걸 어쩌면 좋냐는 뜻.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다 들킨 마당에 뭘 어쩌겠나.

‘그저 우리 폐하 황공함이 멍청함에까지 닿아서 저게 용 뼈인지 마족 뼈인지 구분 못 하셨으면…….’

그러나 각종 전쟁터를 누비던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다. 풀숲을 손수 뒤적인 황제는 실망한 듯 혀를 찼다.

“진짜 용이 아니로군.”

“예에?”

“용이 아니라 마족이다. 이미 죽은 용을 강대한 지배력을 이용해 억지로 되살린 것에 불과하지. 언데드라고 할까, 아니면 마리오네트라고 할까.”

뭐든 간에 존재 자체가 세계의 균형이나 다름없던 진짜 용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가 준비된 의자에 걸터앉은 황제가 씩 웃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지겠어.”

기민한 시선이 좌중을 빈틈없이 훑었다.

“그래서. 저 1급 마족을 잡아 풀숲에 토닥토닥 숨긴 이는 누구지?”

“…….”

“…….”

이벨리아의 부탁을 받은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땅만 바라보던 그때.

더는 피할 길 없어진 이벨리아가 느리게 손을 들었다.

“……전데욥.”

***

눈을 반짝이며 어찌 된 것인지 묻는 황제에게 이벨리아는 적절히 둘러댔다.

마계의 왕이 나타나 저 마족을 불러내고 튀어버렸다는 건 듣는 귀 많은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저는 그냥 빵을 먹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저게 날아오더니 저와 빵을 함께 잡아먹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때려주었지요.”

“무려 1급 마족인데…… 역시 공녀로다. 정령왕이라도 불렀던 건가.”

“그런 거로 하죠!”

사실 그냥 얍 하니까 꽥 죽었지만.

황제가 기특하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렇다면 이번 사냥제의 우승자는 재고해야겠군.”

“그, 폐하. 저 가짜 용은 지정된 사냥터 밖에서 잡은 거니까 그냥 빼고 순위를 매기심이…….”

“어허, 그 무슨 섭한 말을.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산맥 전체가 사냥터나 다름없다. 산맥을 지나는 이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사냥제였으니.”

겉으로는 그리 포장하며 황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셋 중 누구를 우승자로 선정할지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아주 잘 되었다.’

황태자와 소공작, 대악마 모두 성격이 소위 말해 지랄맞으니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터였는데.

‘셋 다 공녀라면 아주 껌뻑 죽으니, 공녀를 우승자로 선정하면 뒤탈이 없겠군.’

실제로 공녀가 잡은 것이 월등히 높은 급수의 마족이니, 정당성 또한 부족함 없다.

“들으라.”

황제의 선포에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고.

수행원들은 황제의 명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두루마리 위에 만년필 촉을 가져다 댄 채 촉각을 곤두세웠다.

“금번 사냥제의 우승자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듯 드높은 하늘을 배경으로, 황제가 사냥제의 우승자를 공표했다.

“1급 사룡종을 단독으로 사냥한 이벨리아 아르티나임에 이견이 없으리라!”

“저는 이견이 있는데…….”

“안 들린다. 사냥제의 부상(副賞)은 소원권이지. 공녀는 원하는 소원을 미리 생각해두도록.”

“…….”

- 와아아아아!

귀족들, 특히 대다수의 기사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렸다.

기사들이란 무릇 기사도와 무력에 매혹되는 이들.

거대한 용을 가로막고 서서 압도적인 창술(槍術)을 보여준 공녀에 대한 경배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세레스를 모시는 기사들 중 일부도 크게 손뼉을 치자, 남은 기사들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이벨리아의 소원권이라는 단꿈을 꾸었던 루드비히와 아르칸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허탈하게 입매를 올렸다.

“왠지 이렇게 될 것 같기도 했어.”

“제 동생이 대단하긴 하지요.”

사냥제에서 용을 잡아버린 킹.

아가레스 역시 흑요석 같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픽 웃었다.

“결국 나의 왕께서 우승을 가져가시네.”

***

크게 환호하는 이들과 심히 떨떠름한 이벨리아를 앞에 두고 황제가 사냥의 끝을 알렸다.

“우승자인 공녀를 비롯하여 그대들 모두 수고 많았다.”

그러자 외려 흐르는 긴장감이 높아졌다. 특히 영애들을 위주로.

“이제 사냥제의 진정한 묘미를 시작해보도록 하지.”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사냥제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참가자들은 각자 잡은 사냥감을 바치도록.”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주역들의 러브라인!

황제가 주책맞은 아저씨처럼 몸을 쭉 빼고 눈을 빛냈다.

본디 가장 낮은 급수의 사냥감을 잡은 이들부터 시작하여, 가장 마지막에 우승자가 사냥감을 바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위 마족을 잡은 영식들의 시선이 흘끔 사방으로 향했다.

비록 우승 사냥감은 아니라곤 하나, 이 기회를 통해 마음 표하고 싶은 이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그중 대다수의 시선이…….

루드비히가 바득 이를 갈았다.

‘이브를 향하고 있어?’

마찬가지로 눈치챈 아가레스도 세게 주먹을 쥐었다.

‘저딴 쓰레기를 우리 이브에게 바치겠다고.’

심히 못마땅하다.

다만 사냥감을 많이 받으면 명예가 높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차마 깽판을 치지도 못하고 속으로 분노만 삭이던 와중.

불쾌함을 더 적극적으로 표출한 이가 있었으니-.

“캬릉! 캬르릉!”

바로 엔리르였다.

“어, 어, 이 여우 왜 이래!”

“으르르르릉-!”

대놓고 사람 말은 하지 못하지만, 눈빛만 봐도 의미는 뻔했다.

‘우리 누나한테 징그러운 쓰레기 가지고 오지 마라!’

이 세계 유일한 용이 으르릉 깽깽 싫은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이벨리아가 피식 웃으며 턱을 괬다.

“아무래도 내 여우는 사냥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로군. 내게 바칠 필요는 없다.”

“……!”

참가자들이 모두 입을 벌렸다.

사냥제에서 얼마나 많은 사냥감을 받는지는 곧 위세를 보여주는 것.

더 받고자 안달하는 것이 일반적일진대, 받지 않겠다 거절하다니!

지켜보던 카밀라와 렐리안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웃었다.

‘공녀님께 남이 주는 명예는 필요 없지.’

‘스스로가 곧 명예고 권위이신 분인걸.’

단호한 거절에 민망해진 참가자들은 다음으로 마음에 두었던 영애들에게 쭈뼛쭈뼛 사냥감을 가져다 바쳤다.

그렇게 하위 마족을 잡은 이들의 절차가 모두 끝나자, 다음은 5급 마족 하나를 잡은 세드릭.

일견 멧돼지처럼 생긴 마물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 올린 세드릭은 당연하다는 듯 여동생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사냥감을 바칠 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여동생을 위해 참가한 사냥제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왜, 왜?’

이벨리아가 받지 않겠다는 듯 손바닥을 앞으로 쭉 내밀고 고개를 젓는 것 아닌가.

가까이 다가간 세드릭이 속삭였다.

“왜! 아가 아니면 줄 사람도 없어!”

“나 오늘은 엄마랑 오라버니들 건 안 받을 거야. 다들 이제 독립할 나이도 됐잖아.”

“무슨! 나는 평생 우리 이브에게 기생할 건데!”

“……그래서 문제야. 다른 영애한테 줘! 여기 영애들 많잖아!”

“누구한테 줘도 귀찮게 할 게 뻔해. 그냥 받아줘라, 응?”

“안 돼. 오라버니 벌써 스물하나야.”

“그게 뭐!”

“제국 내에 오라버니가 혹시 남색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어.”

“……뭐어?”

“책임자로서 더는 방치할 수 없어. 이제 나 말고 다른 영애들한테 눈 좀 돌려봐!”

세드릭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환장하겠네.

확실히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은 뒤집어엎을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사냥감을 바쳐서 괜한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진 않은데.’

천성이 배려심 깊은 세드릭은 애꿎은 영애 하나를 소문의 온상지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시작도 하면 안 되지.’

이뤄지지 않을지언정, 마음에 거짓은 없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세드릭이 이벨리아의 옷소매를 슬쩍 당겼다.

“그럼, 이브.”

“응. 오라버니.”

“그, 그분 좀 불러줄 수 있어?”

“누구?”

그러자 귓가가 살짝 발개진 세드릭이 흠흠 헛기침하며 낮게 속삭였다.

“바람의 왕…….”

“페르세스 언니?”

이벨리아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오라버니 진심이었어?”

“……응.”

세상에 맙소사!

예전에 그 우당탕탕 소풍 날 언니에게 화환을 건넬 때부터 의심하긴 했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감정이란 말이야?

반색한 이벨리아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임! 엘라임! 대박 소식이에요! 얼른 나와봐요!”

“……나의 계약자. 용이 아가리를 벌릴 때는 부르지 않더니.”

“페르세스 좀 불러줘요!”

“고작 소식 전하는 부엉이 용도로 나를 써먹는군요.”

“어서! 우리 오라버니가 페르세스 언니한테 저 사냥감을 바치고 싶대요!”

그 말에 엘라임의 눈이 번뜩 빛을 뿜었다.

“호오…… 그래요?”

“응! 응!”

“이거 아주 재밌겠군요. 잠시만 기다려요, 계약자.”

곧바로 물로 화하여 사라진 엘라임.

눈을 여섯 번 정도 깜박이고 나니, 바로 앞에 휘도는 돌풍.

헤치고 나타난 페르세스가 와락 이벨리아를 끌어안았다.

“우리 아가가 나를 불렀다고?”

“언니! 바쁜데 방해한 건 아니에요?”

“바쁘긴 무슨! 얌전히 책 읽고 있었지!”

사실 이프리트의 영역에 광풍을 일으키며 깔깔 웃고 있었던 페르세스는 애써 얌전한 척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달을 찢어 놓은 듯한 은빛 머리칼이 사르르 휘날렸다. 동시에 곱게 접히는 눈가.

곁눈질하던 세드릭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드디어 나와도 계약할 마음이 생긴 거야?”

“아니요. 제 평온한 일상은 절대 지켜야 해서요. 그, 우리 오라버니가 언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대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느리게 고개 돌린 페르세스가 세드릭을 바라보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야? 그때 나한테 화환 줬던 걔 아니야?”

“맞습니다.”

“그 귀엽던 도토리가 이렇게 자랐어?”

“……벌써 성인입니다.”

“역시 인간의 성장이란! 그래서 무슨 할 말이 있는데?”

여전히 붉은 얼굴로, 세드릭이 잡은 마물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페르세스가 영문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뭐? 나더러 처리하라고? 이미 죽은 것 같은데?”

아차. 정령은 이 문화를 모를 법도 하다.

당황한 오라버니를 위해 이벨리아가 나서 황급히 설명했다.

인간계에는 사냥제란 문화가 있고, 잡은 사냥감으로 마음을 표한다고.

“마음?”

페르세스가 또르르 눈을 굴려 세드릭이 앞에 놓은 마족을 내려다보았다.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바람의 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인간. 너 나 좋아해?”

마찬가지로 빼는 법을 모르는 세드릭이 진중하게 답했다.

“네. 좋아합니다.”

이벨리아와 함께 나갔던 첫 축복제 때부터-.

그러니까 10년 이상을.

인간과 정령이라서 어찌할 바 모르고 묻어뒀던 마음이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외면할 수 없도록 깨달았다.

스치는 새풍이 왠지 누군가의 손길 같아 홀로 얼굴 붉히기 다반사일 정도로, 그는 바람을 연모했다.

진실에 민감한 정령이니만큼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챈 페르세스의 얼굴이 역으로 붉어졌다.

“뭐, 뭐, 뭐야…….”

로맨스 소설 애독자답게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이건 그러니까, 남녀 주인공이 로맨스를 시작할 때 나오는 클리셰다.

감정은 철저히 배제된 정령들의 삶.

하여 페르세스는 열렬히 사랑하고 이별하는 인간들의 생을 동경했다.

늘 책과 상상으로 접하던 그것.

고백, 좋아함, 연모, 그런 실체 없는 것들.

막상 슬쩍 건드려보니 생각보다 더 뜨겁다.

“……뭐야, 뭐야, 뭐야.”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면역 없는 일에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안절부절못하던 페르세스는 세드릭이 바친 멧돼지 형상 마물을 안아 들고 뒷걸음질 치다가 바람으로 화해 사라져버렸다.

“…….”

옅게 남은 바람에 손을 대며, 세드릭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거절인가.”

그러자 엘라임이 대신 답했다.

“부끄러워서 그런다. 정령들에게 마음을 주고받는 건 아주 드문 일이라.”

아마 페르세스는 몇 날 며칠을 바람의 영역에 틀어박혀 데굴데굴 구를 터다.

엘라임이 픽 웃었다.

“정령계에 춘풍이 몰아치겠군.”

***

페르세스가 관장하는 바람의 영역.

휘하 정령들을 죄다 불러 모은 페르세스는 무릎에 턱을 괴고 웅크린 채 종알거렸다.

“얘들아, 들어봐.”

[네, 왕이시여.]

“인간 하나가 나한테 이 사냥감을 바쳤는데, 이게 인간들 사이에서는 연모하는 여인에게 하는 그런 거래. 그러니까 이걸 나한테 준 이는 나를 여인으로 본다 뭐 그런 뜻이지. 하, 참. 인간 주제에 당돌해서는……!”

[건방지군요. 없앨까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이 바보들아!”

[그러면 결혼식을 준비할까요?]

“흠. 흠. 그런 뜻도 아니긴 한데…… 그거에 조금 더 가까울 수도 있겠고…….”

페르세스는 마른 입술을 살짝 혀로 축이면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네, 좋아합니다’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나 이렇게 쉬운 왕이었어? 좋아한다는 말 한 번 들었다고 이렇게 홀랑 넘어갈 만큼?’

안 되지, 안 돼. 왕 체면이 있지.

넘어갈 때 넘어가더라도 새침한 척은 좀 하면서 애를 태워야…….

그때였다.

작은 요정 형상의 실프 하나가 황급히 날아들었다.

[왕님, 왕님!]

“응.”

[병아리의 오라버니가 전해달랍니다!]

“뭐, 라고……?”

[진심이라고, 다시 만나러 와달라고요.]

펑.

속에서 뭔가 터지는 기분이다.

페르세스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온 정령계. 달콤한 꽃향기를 흩뿌리는 봄바람이 살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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