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거기서라, 가면 영식
동굴 안으로 진입한 아가레스는 마치 침입자를 꺼리듯 훅 끼쳐오는 방대한 존재력을 짙은 마기로 몰아냈다.
“……역시.”
절벽 한가운데 만들어진 동굴은 누가 봐도 인위적이었고, 제정신인 존재라면 굳이 이런 곳에 안식처를 지어둘 리가 없다.
“이런 짓을 할 제정신 아닌 존재는 단 하나뿐이지.”
바로 용. 다른 말로 드래곤.
그러니까, 소중한 친우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털 뭉치의 동족.
그 붉은 털 뭉치가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용인 건 기정사실이니, 아마 이 동굴은 이미 자연으로 돌아간 용의 안식처일 터다.
아가레스는 얼굴 모를 용의 집이자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을 아무 죄책감 없이 휘저었다.
‘용의 안식처엔 반드시 보물이 있을 텐데.’
그걸 몽땅 가져다가 이브에게 바치면 좋아해 주겠지.
제일의 가문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으면서도 닭꼬치와 바꿔먹을 수 있는 돈이라면 항상 기뻐하니까.
동굴 이곳저곳을 뒤지던 아가레스가 혀를 찼다.
용의 본체가 생활하는 공간이었던 만큼 넓긴 더럽게 넓다.
문지기를 부수고 무단침입한 도굴꾼 주제에 문득 귀찮아진 아가레스는 동굴 내에 방대한 마기를 풀었다.
빈자리가 많아 허한 공동 내부를 휘돌던 마기가 어느 한 곳에 이르러 턱 막힌다.
“저쪽인가.”
다가가니 그저 아무것도 없는 벽이다.
의아해진 아가레스가 벽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드르륵, 동굴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벽 위에 새겨지는 육중한 문.
삽시간에 형체를 갖추었음에도 구옥(九獄)의 관문에 빗대도 부족함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하다.
성체 용의 앞발로 밀어도 밀릴까 의심스러울 수준의 무게와 크기.
살짝 손을 대보았건만 역시 미동조차 없다.
‘이럴 때는 주먹치료가 답이다.’
도덕 없는 대악마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뻗었다.
짧고 간결한 타격. 그리고-.
- 콰아앙!
이 동굴의 주인이 과거 정성 들여 만들었을 문이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
문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지나갈 통로 하나 작게 뚫으려 했던 대악마는 문이 있었던 자리를 황망하게 바라봤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뭐 다 이리 약하게 지어서.”
내 잘못은 없다. 석상도 문도 죄다 부실한 돌로 지어진 것이 잘못이다.
이벨리아와의 관계 밖이라면 자신의 잘못 따위 상정할 줄 모르는 아가레스가 태연히 돌무더기를 발로 밀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보이는 것은 짐작했던 대로 거대한 황금의 산.
수천 년을 사는 용이 평생에 걸쳐 모은 보물들인 만큼 그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족 잡으러 왔다가 용의 안식처를 잡아버렸다.
제대로 횡재한 대악마가 씩 웃으며 속삭였다.
“이브. 우린 이제 부자다.”
***
어느덧 해가 중천에 뜬 시간.
참가자들이 사냥터 관문 내로 들어간 지도 3시간이 지났다.
시중을 맡은 어린 시종들이 뛰어다니면서 아우름(Aurum) 상단이 후원한 점심을 나눠주었다.
받은 도시락을 연 이벨리아가 흡족하게 끄덕였다.
“네피르 일 잘하네!”
살짝 덜 익힌 고기와 작게 만든 여러 가지 꼬치, 오렌지 주스 등.
“누가 봐도 이브의 기호에 맞춘 도시락이네요…….”
“이건 만인의 기호야!”
“저는 야채가 좋은걸요.”
“……히익!”
“괴물 보듯 바라보지 말아요, 이브.”
카밀라가 렐리안의 그릇에 본인 몫의 야채를 덜어주며 웃었다.
“공녀님 덕에 이런 좋은 고기도 다 먹어보는군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카밀라?”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은 풍족하지 않아서. 귀족이라고 모두 다 이런 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후작 영애.”
“……미안해요. 이상한 뜻으로 바라본 건 아니었어요.”
“그 고기 한 덩이만 주시면 사과를 받아드리죠.”
“그, 그래요. 여기!”
처음엔 그렇게 기 싸움을 하더니.
일전에 카밀라가 렐리안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나서, 둘의 관계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구를 대로 구른 카밀라가 순진하고 말랑한 렐리안을 내심 귀여워하며 놀리는 모양새랄까.
두 친구가 제법 가까워진 것 같아 흐뭇하게 웃던 이벨리아는 닭꼬치 하나를 먼저 크게 빼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맑은 날씨를 즐기고자 내려둔 천막의 발을 앞뒤 모두 걷어내던 찰나.
“……!”
대기 장소 바깥쪽 풀숲으로 걸어가고 있는 훤칠한 신형이 낯설지 않다.
귀족답지 않게 가볍게 튀는 걸음걸이.
장소에 맞지 않게 쓰고 있는 가면.
사냥제에는 어울리지 않는…… 흰색 정복.
‘그때 그 영식이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그 가면 영식.
벌떡 일어선 이벨리아가 도시락을 카밀라에게 안겨주었다.
“나 잠시만 다녀올게.”
“이브?”
“그 고기 카밀라 다 먹고.”
“어딜 가시려고요!”
“공녀님!”
대답 없이, 이벨리아가 천막을 뛰쳐나갔다.
***
풀숲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공터 가운데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이.
마치 따라오는 것을 알고 기다렸던 것처럼 태연히 돌아본다.
이벨리아가 탐색하듯 공터 가장자리에 서서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탁탁 털어내는데.
“……!”
눈 한번 깜박인 사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는 흰색 가면.
안쪽으로 요요히 접히는 눈이 야살스럽다.
물러설 새도 없이 뻗어온 커다란 손이 이벨리아의 턱을 느리게 쓸었다.
낮은 목소리가 속삭인다.
“모르는 사람을 이리 따라와도 된다고 배웠나?”
이 광활한 제국. 감히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손을 댈 수 있는 이는 없다.
차게 뿌리치며 이벨리아가 답했다.
“그대는 모르는 사람에게 이리 함부로 손을 대도 된다고 배웠나?”
그 말에 키득 웃는 것이, 비웃음인지 호감인지 알 수 없게 모호하다.
가면을 쓴 이가 이벨리아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이젠 숨결 한 자락마저 닿을 정도의 거리.
지끈.
다시 한번 크게 뛰는 심장에 이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슴께로 가져다 댔다.
잘 알고 있다는 듯, 가면 영식의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왜. 두근거려?”
“…….”
익숙지 않은 감각에 머뭇거리자, 다시 올라온 손이 이벨리아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그게 바로 호감이야, 이벨리아.”
“호감?”
“호감.”
이벨리아가 천천히 고개 들어 가면 영식과 눈을 맞췄다.
가면 영식은 옳지, 잘한다, 응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리아의 붉은 입술이 열리자, 가면 영식의 눈이 옅은 기대를 담았다.
그리고-.
“……개뿔.”
“……?”
“손 떼라. 어디 감히 내 찹쌀떡 같은 볼에 지지를 묻히고 있어.”
팍. 거칠게 떠밀고 뒤로 물러선 이벨리아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겨누었다.
“나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다시 보니 알겠다.
심장이 두근거렸던 게 아니라 지끈거렸던 것임을.
감히 정령왕의 계약자인 내 자연력을 요동치게 할 정도의 지배력.
이벨리아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 마계의 왕이지.”
***
“알아주니 영광인걸.”
마계의 왕.
다른 지칭으로는 게티아(goetia)의 기둥. 혹은, 구옥(九獄)의 주인.
본디 한 세계의 왕은, 특히 마계의 지배자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감히 아랫것들이 기어오를 여지조차 없도록.
감히 다른 것을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그런데 바알에겐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와 최소한 엇비슷한, 아마 더 강한 존재가 마계 내에 있기에.
하여 마계의 유일한 왕으로 서고자 고유 권능을 이용해 다른 차원을 수없이 돌았다.
발 닿은 모든 세계를 무너뜨리고 공포를 받아먹은 후 지배력을 길렀다.
그렇게 망가뜨린 세계가 무려 수백 개.
그가 마계로 귀환하자 충복 밧사고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더는 왕이 아니라고.
신이라 칭해야 마땅하다고.
그럼에도 섣불리 동(東)마계의 지배자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꺼려졌다.
가늠할 수 없는 상대와 맞서자니 패배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이 작은 인간이 탐난 것은.
‘아가레스가 이것의 곁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지.’
그 고고한 이가. 이 인간을 얼마나 아끼면.
‘이것만 있으면 그를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야.’
내 편으로 끌어들이면 최상.
그렇지 않다면 극적인 순간에 죽어 아가레스의 약점이 돼주어야 한다.
바알이 크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벨리아가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또다시 다가섬과 물러섬.
그리고 다시.
물러서던 이벨리아의 등에 나무가 와닿았다.
더는 물러설 길 없자, 어깨를 잡는 커다란 손.
“이벨리아.”
훅 끼쳐오는 낯선 향기가 언짢았다.
“걱정되지 않나? 언제 다시 인마전쟁이 발발할지. 언제 다시 인간들이 네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을지. 언제 네 소중한 이들이 죽어 없어질지.”
“…….”
“난 모든 것들을 보장해줄 수 있어. 네 안위. 네 가족의 안녕. 네가 사랑하는 이들의 영생.”
이벨리아의 침묵에 바알은 득의양양했다. 거의 다 넘어왔다.
어리고 순진한 공주님 하나 잡아먹는 것은, 예로부터 마왕의 특권 아니었던가.
“이벨리아. 가련한 이벨리아. 나와 함께 가자.”
바알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마치 길고양이를 길들이듯.
“어차피 너희는 나를 잡지 못해. 동(東)마계의 지배자 역시 마찬가지.”
나는 다른 차원에 기생할 테니까.
“불안에 떨지 마. 인간을 버려. 내 곁에 서.”
“…….”
“의무는 없이, 권리만 누리며 살게 해줄 테니.”
그 말에 이벨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그 엇비슷한 말을 한 존재가 여럿이거든.”
“실제로 이룰 능력이 있는 건 나뿐이야. 이벨리아.”
“아니.”
날카로운 검날이 서서히 치켜세워졌다.
“그건 오로지 내게 달렸어, 마계의 왕.”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달래듯 혀를 찬 바알이 검날을 검지로 내리눌렀다.
“스읍. 다쳐.”
“닥쳐. 손 치워.”
이벨리아의 사나운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어깨와 검날에 닿아 있는 손.
제대로 열 받은 이벨리아의 자연력이 이를 드러냈다.
바알이 진정 난감하다는 듯 옅게 웃었다.
“그건 정말 다치는데.”
기세를 일으켜 엘라임을 부르려 하자, 동시에 와해되며 흩어져버리는 자연력.
“……윽!”
심장이 뻐근하게 아려온다.
이벨리아가 가슴께를 손으로 짚자, 바알이 빙긋 웃었다.
“봐. 다친다니까. 너보다 격 높은 악마 앞에서 자연력을 함부로 일으켰다간 정령 부르기도 전에 몸이 망가진다는 건 아무도 안 가르쳐줬나 봐?”
“……!”
“그만둬. 널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널 다치게 하는 것도 다 좋지만, 네가 지금 죽어선 곤란하거든.”
이벨리아의 영민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자리에서 아가레스를 부르면 당장에 달려오기야 하겠다만, 싸움 붙는 순간 이곳 인간들은 전멸이다.
무리해서 엘라임을 부른대도 결과는 다를 것 없다.
‘일단은 쫓아내야 해. 쫓아낸 다음에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대비하는 게 옳아.’
저것은 내가 죽길 원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죽기를 원치는 않는다.
‘아마 나 정도는 언제든 죽일 수 있지만, 아스는 나를 미끼로 삼았을 때만 잡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죽어버릴 것처럼 굴면 먼저 두 손 들고 물러날 터다.
난 아직 효용 가치가 있으니까.
이벨리아가 더욱 거센 자연력을 일으켰다.
격 높은 마기와 정면으로 상충되는 바람에 입가에서 옅은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작은 손이 대강 훑자 입술 근처에 핏자국이 번진다.
“……그만두라니까. 이벨리아.”
“난 널 따라갈 생각도, 여기서 얌전히 끌려갈 생각도 없어.”
“곤란한데.”
“……엘라…….”
“잠깐.”
바알이 난감하다는 듯 가면 아래로 턱을 긁적였다.
이 인간 아주 당돌하네. 앞뒤 없고.
가지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고. 동시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거슬린다.
상반되는 감정 속에서 바알이 한 걸음 물러섰다.
“자. 너도 알잖아. 우리가 여기서 부딪히면 이곳 인간들은 모두 죽어.”
“…….”
“그리고 곧바로 인마전쟁이 시작되겠지.”
“…….”
“너와 내가 원하는 건 희생이 적은 승리지 공멸이 아니잖아?”
“그렇다고 나 하나 희생할 수야 없지. 내가 여기서 끌려가면 사흘 밤낮을 울 존재가 한둘이 아니어서.”
바알이 해칠 의사 없다는 듯 짐짓 두 손을 들었다.
“이벨리아.”
“부르지 마. 감히.”
“쉬이. 진정해. 선물만 하나 주고 오늘은 그냥 갈게.”
“그게 뭐든 개박살 날 각오는 하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당돌함에 바알이 허리를 접어 큭큭 웃었다.
아아. 이게 인간인가.
늘 어딘가 꼬인 악마들만 곁에 두던 바알은 간만에 직설적으로 와닿는 날것의 감정이 신선했다.
제법 중독성 있는 것이…….
‘나도 인간 하나 잡아서 키워볼까.’
이딴 생각이나 하게 만들었다.
“빨리 주고 꺼져.”
그 말에 퍼뜩 정신 차린 바알이 탁,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이내 창공에서 들려오는 피막을 찢는 소리. 또 거대한 포효 소리.
“아무래도 다음 전쟁의 수장은 너와 내가 될 것 같은데.”
“……야. 저게 선물이야?”
“곧 다시 만나, 이벨리아.”
“하늘에 저건 저렇게 두고 간다고?”
“듣자 하니 인간들의 사냥제엔 가장 강한 마족을 잡는 이가 우승한다고 해서 준비했어.”
저게 무려 1급짜리거든.
놀리듯 웃던 바알의 신형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화낼 틈도 없이, 하늘을 우레와 같이 울리는 날갯짓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1급 사룡종(死龍種) - 속성 수(水).
피안의 경계에서 억지로 돌아와 백골만 남은 용이 광폭하게 우짖는다.
세계 자연의 정수에 가까운 힘을 검에 두른 채,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뛰쳐나갔다.
“뼈밖에 안 남은 용이 웬 말이람. 우리 아가 용 충격받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