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우승을 위한 두 지배자의 고군분투!
이벨리아의 소원권을 탐하는 참가자들이 록센(Loxen) 산맥을 자비 없이 뒤지고 다닐 무렵.
아르티나 가문에 배정된 대기실에서는 렐리안과 이벨리아가 여유롭게 다과를 들고 있었다.
“왠지 산맥이 엉엉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대악마가 산맥을 뒤엎고 있을 텐데, 웃고 있으면 미친 산맥이겠네요.”
하긴 그렇다. 산맥이 언제 대악마 발에 밟혀 보겠는가.
“걱정이야. 우리 토끼는 뭐만 했다 하면 항상 힘 조절에 실패하거든.”
잘하고 있으려나. 어떤 게 마족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애먼 것들을 죄다 때려잡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누가 우승할까요? 저는 왠지 아르칸 오라버니일 것 같은데.”
“난 우리 토끼에 한 표!”
지극히 감정에 치우친 우승 후보 점치기.
두 소녀가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벌써 몇 개째 입에 털어 넣고 있는 동그란 초콜릿에 다시 손을 뻗던 이벨리아는 문득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근데 렐리안. 저것이 아까부터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저도 느끼고 있었어요. 얼려버릴까요?”
“날 보면서 웃는 것도 기분 탓이 아닌 걸까?”
“기분 탓이 아니에요. 웃는 입을 집중적으로 얼려버릴까요?”
기분 탓이 아니란 말이지…….
다시 세레스의 천막 쪽으로 시선을 두니 여전히 이곳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마치 인자한 국모처럼.
‘왜 저러는지는 뻔하네.’
평판 관리임과 동시에 인사하러 오라는 압박이겠지.
이벨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무시했다.
기실 기분 더러운 것 외에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자애로운 황자비로 연기 노선을 잡아봤자 사람 본성 어디 가지 않는 법.
또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엄연히 이벨리아의 지위가 더 높았다.
‘무슨 얘기를 하나 운디네를 풀어볼까?’
잠시 고민하는데, 마침 세레스의 천막 근처를 알짱거리던 카밀라가 슬쩍 다가왔다.
“공녀님. 들어가도 될까요?”
“내 끄나풀! 아니, 카밀라! 어서 와!”
망설임 없는 환대. 카밀라는 왠지 콧대가 으쓱 올라간 기분을 느꼈다.
천막에 발 들이며 뒤를 돌아보니, 제법 많은 영애가 질투 어린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고작 자작 영애가 어떻게 공녀님의 옆자리를 차지했지?’
‘곁에 아무나 두지 않으신다던데…….’
앳된 영애 하나가 다급히 카밀라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아마 공녀님께 전해달라는 뜻일 터.
카밀라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렐리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분이 오늘만큼 부러웠던 적이 없네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예비 황자비께 인사드리고 왔거든요. 인사하러 오지 않는 가문의 천막을 불태우실 것처럼 바라보셔서요.”
“그동안 세레스가 이미지 관리를 꽤 잘했나 봐. 근처에 몰려 있는 영애들이 예전보단 훨씬 늘어난 것 같은데.”
“뭐…… 거짓된 자애로움과 진실된 협박이 반반 섞인 결과랄까요.”
“델포이 영애는 얌전히 인사만 하고 온 건가요?”
“원랜 그러려고 했었죠.”
카밀라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턱 끝에 닿는 단발이 찰랑 흔들렸다.
“그런데 거기 모인 영애 중 몇 명이 왜 공녀님과 카시스 영애는 문안드리러 안 오냐면서 어이없는 말을 하잖아요.”
“설마 엎은 건 아니지? 참았지?”
“참았죠!”
“잘했네.”
“……사실 그냥 얘기만 조금 했어요. 뒤통수를 후려갈기진 않았으니 이것도 참은 거라고 볼 수 있죠.”
“뭐라고 얘기했는데?”
“데퐁트 영애야말로 성혼하지 않으셨으니 후작 영애의 신분이신데, 오히려 지금 당장 공녀님께 문안 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선전포고를 하고 왔네, 카밀라.”
그러게 말이에요. 카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당한 일에 수긍하기가 특기요, 불의를 눈 감고 넘기기가 취미였던 자신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공녀님께서 절 버리시면 이제 전 죽은 목숨이에요.”
“네 충심이 계속되는 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구해주지.”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이벨리아가 생긋 웃었다.
역으로 배신하면 가차 없이 내버리겠다는 뜻.
카밀라는 살짝 떨리는 손을 이벨리아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토닥. 카밀라의 어깨를 두드린 이벨리아가 마들렌 하나를 집어 와앙 입에 물었다.
“근데 에드윈과 세레스 말이야.”
“듣기 싫은 이름들이네요, 이브.”
“나도 말하기 싫어. 이따 운디네 불러서 물로 입 헹굴 거야. 하여튼 둘 다 작년에 성년식을 치렀잖아.”
“작년이 열일곱이었으니…… 맞아요.”
이벨리아가 포옥 낮은 한숨을 내쉬며 엔리르의 꼬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둘이 이제 곧 결혼한다고 할 텐데. 진짜 끔찍하다.”
“성혼식에 가는 게 싫으신 거예요? 제가 아픈 척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성혼식이 싫은 것도 싫은 건데, 그보단 둘이 결혼하면 내가 먼지에게 숙여야 하잖아.”
“이브가 왜요?”
“먼지가 황자비가 되니까. 황자비는 엄연히 황실의 일원인걸.”
흐음. 렐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벨리아의 말은 대부분 옳지만, 이번만큼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기실 황후가 아닌 황태자비나 황자비의 지위는 불안정하다.
누가 차기 황제가 될지. 누가 정쟁의 희생양이 될지. 그 모든 변수가 그들의 위치를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즉, 황권에서 멀어진 황자의 비라면 백작 영애만도 못하다는 소리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황위에 오르는 것이 요원한 에드윈의 비와 아르티나 공녀의 실질적인 서열은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글쎄요. 설령 이브가 데퐁트 영애의 뺨을 올려붙인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텐데요.”
“그래도 어쨌든 형식적으로나마 내가 인사를 건네야 할 거 아니야.”
“황자비도 공녀인 이브에게 존칭을 써야 하지요.”
“난 그런 상호 예의 바른 걸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요?”
“걔는 나에게 아주 예의 바르고, 나는 굉장히 난봉꾼 같은 그런 걸 원한다고!”
차라리 루이한테 후딱 황위에 오르라고 해버릴까?
아니면 토끼한테 이 제국 황좌를 날름 집어삼키라고 명령할까?
씨근거리는 이벨리아에게 오렌지 주스를 건네주며 카밀라가 웃었다.
“공녀님. 그럴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마셔요.”
“그럴 리 없다니? 뭐가?”
“그들은 당분간 혼인하지 않아요. 바꿔 말하면, 데퐁트 영애께서 황자비에 오르기까진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답니다.”
“왜? 예전엔 성년식만 치르면 곧바로 결혼할 것처럼 굴었는데.”
“데퐁트 영애는 여전히 그래요. 황자비 지위가 탐나 황자 전하와 약혼한 거니까요.”
이젠 수도와 황궁 소식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는 카밀라가 속삭였다.
“그런데 두 분의 관계는 불균형이 매우 심하죠.”
“하긴. 에드윈은 세레스가 아니더라도 선택권이 많겠지만, 세레스는 에드윈 이상의 혼처를 구할 수 없을 테니까.”
“맞아요. 데퐁트 가문의 가세가 기운 지금은 더요. 그래서 황자 전하의 혼인 의사가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으시다고 들었어요.”
“흐음…….”
소위 말해서 간 보고 있다는 소리다.
에드윈이 데퐁트 후작가와 약혼한 것은 상호 얻을 것이 있었기 때문일 터.
오간 조건이 뭔진 모르겠지만 그것이 제대로 진전되지 않고 있다면 결혼에 뜨뜻미지근한 건 당연하다.
“그리고요, 공녀님.”
카밀라가 눈을 찡긋하며 몸을 기울였다. 비밀 이야기를 하듯.
“이건 비밀인데, 황태자 전하께서 미리 손도 써두셨거든요.”
“루이가? 어떻게?”
“황자 전하의 바람둥이 기질은 궁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어요. 그리고 황가의 첩실 자리를 노리는 시녀들은 적지 않죠.”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이벨리아가 커다란 눈을 슴벅였다.
그러자 카밀라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우리 공녀님. 이렇게 순진하셔서야.”
“……나도 알 건 다 알아. 그래서 루이가 뭘 어쨌다고?”
남녀상열지사에는 문외한이면서 애써 턱을 올린다. 카밀라는 감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늘어지는 입가를 가렸다.
“자원한 시녀들 중 가장 미색 뛰어난 이들을 뽑아 황자궁으로 들여보내셨어요.”
“……!”
“대놓고 눈 돌리라 판을 마련해주신 거랄까요.”
“그걸 세레스가 그냥 놔뒀다고?”
“시중들 이가 늘어난다는 것은 곧 체면이 서는 것이니, 처음엔 오히려 좋아했을 거예요. 제 약혼자가 새로운 시녀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는 걸 안 후에야 속에서 천불이 났겠죠.”
“우웩. 역시 부전자전…… 아, 이 불경은 너무 선을 넘었나. 못 들은 거로 해.”
“세상에. 그럼 황자 전하께선 지금 데퐁트 영애와의 약혼이고 결혼이고 모두 잊을 정도로…….”
“아주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방탕하게.”
으윽. 다시 한번 치미는 토기에 이벨리아가 목을 움켜잡았다.
“근데 루이가 그랬다는 걸 카밀라는 어떻게 알았어?”
“제가 도와드렸거든요. 황자궁에 들일 시녀들 뒷조사를 좀 부탁하셔서요.”
카밀라가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뒷조사라면 자신이 전문이긴 하다.
뒷골목 도박판. 다리 밑 각설이. 지하의 암살자.
밑바닥 소문이 도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카밀라의 눈이, 손길이, 입김이 닿아 있다.
엄지를 치켜들며 칭찬하던 이벨리아가 물었다.
“그럼 루이는 갑자기 왜 둘의 결혼을 방해한 거래?”
“공녀님께서 원치 않으시니까요.”
“난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루이에게 한 적이 없는데?”
“원래 깊은 관심을 가진 상대의 감정은 절로 보이는 법이죠.”
“으음…… 하긴, 루이가 세심하긴 하지. 황태자가 그렇게 말랑말랑해선 안 되는데.”
쟁점을 영 빗나간 말에 렐리안과 카밀라가 슬쩍 눈을 마주쳤다.
‘카밀라. 우리 이브 눈치가 좀 없어요.’
‘많이 없으신데요.’
***
한편 그 시각.
눈치 더럽게 없는 소녀를 위해 부지런히 도플갱어(Doppelganger)를 사냥한 황태자, 루드비히는 절규하고 있었다.
“안 돼!”
무려 4급 환상종인 만큼 이 산맥에서 잡을 수 있는 마족 중에선 상위권에 든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왜 녹아버리냐고!”
본디 특정한 형태를 갖추지 않고 남의 모습을 빌려 살아가는 도플갱어.
숨통을 끊으니 그 자리에서 철퍼덕 무너져내리더니 땅속으로 스며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황망한 표정으로 루드비히는 사냥제 참가자들을 따라다니는 감식반을 불렀다.
“이봐. 봤지, 도플갱어.”
“그, 보기는 보았습니다만…….”
“제대로 표기해라. 내가 잡았다고.”
“하지만 사체를 가져가야 인정이 되는지라…….”
“……그 사체가 사라졌잖아. 지금.”
“……그래서 이건 인정이 어렵겠습니다, 전하.”
뭐야. 뭐가 이렇게 칼 같아.
본래 지위를 내세워 갑질하지 않는 루드비히가 이번만큼은 그 대단한 위세를 스리슬쩍 들이밀었다.
“어떻게 안 되나. 나 황태자인데.”
“폐하께서 세우신 규정인지라…….”
망할! 기껏 잡았더니!
마음이 급해진 루드비히는 곧장 산맥 가장 깊은 곳으로 말을 달렸다.
‘그 악마 자식이 우승하면 안 되는데……!’
***
그리고 루드비히의 짙은 경계를 한 몸에 받는 그 대악마.
아가레스는 막대기에 대롱대롱 매단 산삼이 꿈틀대며 깨어날 기미를 보이자 뒤통수를 한 대 더 후려갈겼다.
- 퍽.
- 끼악!
일격에 다시 축 늘어진, 무려 4급 지하종(地下種) 맨드레이크(Mandrake).
아가레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와서 잡은 것이 고작 이깟 산삼이라니.”
이브에게 가장 좋은 사냥감을 바쳐야 하는데.
기운을 파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약한 것들만 바글바글 몰려 있다 보니, 대체 무엇이 나무이고 돌이고 마물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신경질적으로 풀숲을 건드리던 아가레스가 문득 드는 좋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제가 끝날 때까지 괜찮은 마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마르바스의 시체를 가져가면 되겠군.”
그것도 나름대로 악마이니, 죽여서 가져가면 우승은 떼 놓은 당상일 터다.
보루를 만들어두니 마음이 편안하다.
목적지를 두지 않은 걸음은 어느새 산맥의 가장 안쪽에 가닿았다.
“……절벽인가.”
슬쩍 훑고 돌아서려던 아가레스가 걸음을 멈췄다.
울퉁불퉁하게 깎아지른 절벽 한가운데. 누가 봐도 수상한 동굴 하나가 뻥 뚫려 있다.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 아가레스는 동굴 앞 제법 넓은 공터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마치 동굴을 지키듯 서 있는 거대한 석상.
커다란 창을 쥐고 송곳니를 드러낸 석상의 어깨는 작은 산봉우리까지 닿을 정도로 우람했다.
몸체에는 짙은 이끼가 끼어 있으나, 자세히 보면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에 복잡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혹시나 싶었던 아가레스가 희망에 차서 물었다.
“이봐.”
- …….
“너 마물이냐.”
- …….
“쯧. 내가 돌덩이한테 무슨…….”
민망함에 혀를 찬 아가레스가 동굴 내부로 진입하려 발을 내디딘 찰나.
끼기기긱. 기름칠하지 않은 뭔가가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 콰앙!
묵묵히 서 있던 석상이 아가레스의 신형 위로 발을 굴렀다.
침입자가 당연히 납작 찌그러졌을 것으로 여겨 발을 천천히 들어 올린 석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아래로 굴렸다.
풍압에 의한 흙먼지가 걷히자 보이는 건…… 거대한 석상의 발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막아낸 대악마.
“이건 마물이 확실하겠군. 급이 높으면 좋겠는데.”
아가레스가 가볍게 땅을 박차고 단번에 골렘의 어깨 위로 올라섰다.
이내 머리를 딛고 뛰어오름과 동시에 마기를 두른 주먹을 내뻗었다.
- 콰르르르릉!
가볍게 한 대 맞은 거대한 석상이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조각조각 분해됐다.
심지어 다리 쪽은 하중을 받아 가루나 다름없이 흩어진 채였다.
“…….”
하급 마족을 잡아본 전례가 없어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한 대악마가 당황했다.
원래 마족이란 게 꿀밤 한 대에 이렇게 와르르 무너지는 거였나.
“……모처럼 잡은 마족이 가루가 되어 버렸군.”
이러면 감식반이 이게 마족인지 자갈인지 알 수가 없을 텐데.
아가레스가 자신이 만든 돌무덤 앞에서 천천히 턱을 쓸었다.
“흐음. 그러면 되겠군.”
나름의 방도를 생각해낸 대악마가 부서진 석상을 마치 퍼즐 맞추듯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그나마 남은 잔해들을 열심히 그러모은 결과-.
머리와 팔, 그리고 아주 짧은 몸통과 반 토막 난 다리가 붙은 이등신 미니 석상이 완성되었다.
“……됐다.”
삽시간에 아기자기해져 버린 석상 위에 붙은 루페르트 후작의 표식.
아가레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굴 내부에 진입했다.
무려 3급 석상종(石像種) 골렘(Golem)을 꿀밤 한 대로 부숴버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