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송사리 떼 속 상어들
(182/323)
182화: 송사리 떼 속 상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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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송사리 떼 속 상어들
2022.06.27.
궁내성 주류관. 황실이 주관하는 크고 작은 행사를 도맡는 중대한 지위.
그만큼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발탁되는 자리였고, 심지어 그 자리를 약 10년이나 보전한 이라면 탁월한 업무 능력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여 웬만한 비상사태에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궁내성 주류관이 드물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세로로 제법 긴 양피지가 툭, 테이블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이게 제대로 된 명단이 맞나.”
“예. 맞습니다.”
“아무래도 참전 명단과 혼동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서신이라도 돌려서 다시 확인하도록.”
“그, 주류관님. 심지어 직접 찾아뵙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목록에 오류가 없다는 말이다. 이 정도의 면면들이 장난으로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리도 없고. 으아악. 주류관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해서 최종 정리된 명단이 이거라고.”
“예, 주류관님.”
“허어.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사냥제란 여태 눈에 띄지 않았던 영식들의 데뷔 절차로 이용되는 행사.
그마저도 최근 균열 토벌 건으로 제법 오랜 기간 개최되지 못하였기에 이를 벼르고 있는 영식들도 다수.
즉, 무위가 뛰어난 이들은 진짜 토벌 또는 전쟁에 출정하지, 크게 위험하지 않은 마물들이 모여 있는, 범위가 한정된 사냥제에 참여하진 않는 게 암묵적인 관례였다.
그야말로 상어가 송사리 떼 사이에서 헤엄치는 꼴이요, 호랑이 잡는 칼로 닭 잡는 모양이니까.
그런 면에서 이 명단…….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대체 왜 이 정도 분들께서 대거 사냥제에!’
혹시 내가 만성피로로 인해 명단을 잘못 본 것인가. 합리적인 의심에 궁내성 주류관은 명단을 위에서부터 다시 한번 훑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대체 왜…….’
더 밑으로 시선을 내리니.
‘아르티나는 공녀님 빼고 전원 참가라니. 맙소사 끔찍해라.’
아니, 심지어 이건 또 뭐야.
‘루페르트 후작까지……!’
대악마가 올망졸망한 인간들 사이에 끼면 반칙이지!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부터 아카데미 수석을 거쳐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해결하지 못한 업무란 없는 궁내성 주류관은 영민한 머리를 굴렸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실마리가 보인다. 이 사달의 실마리가. 주류관이 짝, 손뼉을 마주쳤다.
“아!”
“뭔가 아셨습니까, 주류관님.”
“분명하다. 이번 사냥제에 아주 강한 마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첩보를 미리 입수하신 게지.”
그것이 아니라면 이 정도 되시는 분들께서 어린이용 풀장에서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실 리가 없지!
“그래! 이번 사냥제에 배치할 기사의 수를 두 배로 늘려라!”
나름대로 원인을 찾아낸 주류관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높으신 분들의 성심을 척척 이해해야 바야흐로 엘리트라 할 수 있지. 그런 면에서 나는 부족함 없는 엘리트다.”
역시 유능하신 우리 상사. 곁에 서 있던 행정관들은 경탄 어린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
주류관이 거하게 헛발질하고 있을 무렵.
렐리안과 이벨리아는 아르티나 공작저의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가을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통에 이벨리아의 응접실에서 놀기로 했었으나, 렐리안이 굳이 밖에서 차를 마시고 싶은 눈치기에 커다란 파라솔을 펴두고 나름 운치 있는 시간을 즐기는 중이었다.
“이브. 들었어요?”
“뭘?”
“사냥제요. 온 수도가 난리래요.”
이벨리아는 사냥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최근 몇 년간 개최된 적이 없기도 했고, 그 이전에도 아르티나는 참가는 물론이거니와 관전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공사다망한 대귀족 가문으로서는 취지는 바람직하나 굳이 힘쓸 이유 없는 행사에 귀한 걸음 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난리일 이유가 있어? 토벌 이전엔 제법 정기적으로 개최됐다며.”
“마지막으로 개최된 지 벌써 4년이 지났으니 적령기 영식과 영애의 세대도 한차례 바뀌었고, 그들은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거기서 눈 맞는 사람들이 많은가 봐?”
“눈 맞…… 그런 저잣거리 용어는 또 어디서, 아니, 분명 아르티나 기사단일 텐데 괜한 걸 물었네요. 하여튼 맞아요. 재야의 별을 발견할 수 있는 행사라나.”
그래서 영애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화두라고 말하던 렐리안이 제 발 저려 손을 내저었다.
“물론 저는 관심 없어요!”
“물론 그렇겠지. 렐리안은 우리 오라버니를 좋아하니까.”
발그레. 은애하는 감정을 가진 지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르칸의 이야기만 나오면 렐리안의 얼굴은 속절없이 붉어졌다.
굳이 이 비 오는 날. 굳이 온실도 아닌 정원에서. 연무장 쪽을 흘끔거리는 이유를 알 법도 했다.
기대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친구가 마냥 귀여워 보여 이벨리아가 픽 웃었다.
“그런데 아르칸 오라버니께서도 이번에 참여하신다죠? 오라버니한테 들었어요.”
“그렇대. 별 얼토당토않은 이유지만.”
“그으, 사냥감은 당연히 이브에게 바치시겠죠?”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모르는 일이다.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우승을 막는다는 아르칸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가장 강한 마물을 사냥하면 그만.
이후에 사냥감을 누구에게 바칠지는 본인이 결정할 몫이다.
‘내가 아닌 렐리안에게 바치면 좋을 텐데.’
어제 렐리안의 이야기를 꺼내자 오라버니가 실수로 전시용 갑옷을 부숴버린 거로 봐선 분명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오라버니랑 렐리안이 결혼해서 아가를 낳으면 이름은 뭘로 짓지. 이브치는 어떨까.’
흐흐. 설레발 한 사발을 들이켠 이벨리아가 어울리지 않는 음흉한 표정으로 웃자, 놀리는 것으로 오인한 렐리안이 붉어진 얼굴을 손부채질했다.
“아. 이브. 황태자 전하와 루페르트 후작님도 참가하시죠?”
“응! 어떻게 알았어?”
“그럴 것 같았어요.”
“난 걔네가 절대 참가 안 할 줄 알았는데.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하면서 왜 갑자기 참가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렐리안이 빙긋 웃으며 보랏빛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았다.
“흐음…… 저는 알 것 같은데요?”
“뭔데?”
“비밀이에요. 아직은.”
이벨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인 렐리안이 작게 속삭였다.
“아마 우리 이브도 머지않아 알게 될 테니까요.”
다른 이의 소중한 마음을 남이 먼저 내뱉는 건 예의가 아니죠.
자신이 소중히 간직하다가 이제 막 피운 꽃봉오리.
천천히 뒤따르는 친우들의 것도 흠집 없이, 아픔 없이, 그저 순탄히 자라 결실을 맺길.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모두 행복하길 바라면 욕심일까.’
많은 것을 짐작한 렐리안이 고요하게 웃었다.
***
날씨를 고려하고 고른 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차례 가을비가 지난 뒤의 맑은 날씨와 선선하게 부는 바람은 사냥제에 부족함 없이 맞아떨어졌다.
사냥제 장소로 통하는 산맥, 관문 앞.
광활한 공터를 빙 둘러싼, 천막 형태의 대기실.
각 가문별로 하나씩 배정된 천막 안에서, 귀족들은 제각기 사교를 나누거나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대외활동이 흔치 않은 이벨리아에게는 여러 시선이 모였고, 못마땅했던 아가레스는 자신의 천막을 손짓 한 번으로 부숴버리고는 아르티나의 천막에 눌러앉아 버렸다.
걷어둔 입구에 양반다리로 앉아 검을 옆에 꽂아두고 마치 야차처럼 지키는 모양새.
함부로 눈길 뒀다가는 그 자리에서 명 끊길 것 같아 영식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흘끗대던 시선을 거뒀다.
“토끼? 토끼 천막은 어디 가고 여기 있어?”
“부서졌다.”
“그 큰 천막이? 왜?”
“……강풍에.”
그렇다기엔 부드럽게 살랑살랑 흩날리는 머리칼.
‘머리카락도 못 날리는 바람이 천막을 날렸다고.’
둘러대는 말일 터지만 이벨리아는 모른 척 수긍했다.
‘아무래도 인간들의 행사다 보니 우리 토끼가 많이 외로운가 보지.’
나중에 잔디랑 언니 악마를 모아서 악마들의 행사도 열어야겠네.
이벨리아가 마르바스 속 뒤집어질 계획을 세우던 무렵.
몇 개의 커다란 수레가 산길을 따라 덜컹대며 올라왔다.
“오라버니. 저게 뭐야?”
이벨리아가 묻는 말에 옆에서 활시위를 걸던 아르칸이 답했다.
“상단. 사냥제에 필요한 무기, 음식, 구호 물품 등은 상단을 지정해서 후원을 받거든.”
“후원 맞아? 강탈 아니야?”
“후원이라 쓰고 강탈이라 부르지. 대놓고 뺏는 건 아니지만 상단들로서는 금전적 대가 없이 이 사냥제에 후원하고자 앞다툴 수밖에 없는 구조거든.”
“금전적 대가가 없는데도 왜 후원하고 싶어 해?”
“황가와 귀족들에게 찍을 수 있는 눈도장.”
그래서 중소 상단들은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유수의 대상단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고.
아르칸이 설명하는 사이.
귀족들은 수레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각종 다과와 귀한 찻잎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 이번 해엔 유독 물자가 풍족하네요.”
“우리 제국에선 볼 수 없는 다과도 제법 보이고요.”
“역시 이세르나 백작가의 상단이겠죠?”
그러나 흘끗 이세르나 백작 쪽의 천막을 바라보니, 백작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마치 물자를 가져온 상단을 원수 노려보듯 노려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원 경쟁에서 탈락했군요.”
“상단 문양이 눈에 익진 않은데요.”
“설마 신생 상단인가요?”
“저 정도의 물자를 대가 없이 내놓을 수 있는 상단이 달리 있다고요?”
수도를 주름잡는 상단이 어디인지는 유행을 좌우하는 척도가 된다.
귀족들의 관심이 일제히 새로 발탁된 후원 상단으로 쏠렸다.
행렬의 가장 앞에 있던 이가 말에서 내려 공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우룸(Aurum) 상단 상단주.”
대놓고 ‘황금’이라는 뜻의 고대어를 가져다 붙인 당돌한 상단의 주인.
후드를 내리며, 성년식을 갓 치른 소녀가 유려하게 허리를 숙였다.
“네피르라 합니다.”
***
“네피르?”
카시스 가문의 천막으론 갈 생각도 없이 아르티나 가문의 대기실에 눌러앉은 렐리안이 화들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빠르네. 이게 다 내가 준 금 주머니 덕택인 거지!”
“이브. 네피르에게 금 주머니를 줬어요?”
“응. 나 먹고 싶은 게 많아서, 좀 가져다 달라고 미리 돈을 줬지! 나도 이제 호강 좀 해보는 건가!”
네피르의 시선이 정확히 렐리안을 향했다.
자매의 저 표정을 원했다. 저 증명을 갈구했다.
‘어때, 렐리안. 나도 잘해나가고 있어. 네가 이렇게 놀랄 만큼.’
성취는 생각보다 달콤했다. 상단을 키우고자 몇 년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온 대륙을 뛰어다닌 보람이 있다.
네피르는 수행원에게 상자 두 개를 건네며 아르티나 천막 쪽으로 작게 턱짓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천막 뒤쪽으로 돌아온 수행원이 상자 두 개를 각각 이벨리아와 렐리안에게 건넸다.
“상단주님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네피르가?”
뚜껑이 제법 무거운 상자를 천천히 열어본 이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찹쌀에 꽃을 넣은 떡이다!”
안에 든 것은 화전. 온갖 색상의 아름다운 꽃이 지진 찹쌀 안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역시 투자한 보람이 있어!”
냉큼 손으로 집어 입에 넣은 이벨리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너무 맛있다!
뚜껑 한가운데 붙은 쪽지를 떼 열어보니 적힌 글귀는 간결했다.
「큰 은혜의 일부를 먼저 갚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렐리안도 이벨리아가 입에 넣어준 화전 하나를 우물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끼이익. 렐리안의 마음처럼 무겁게 열리는 상자 속. 들어 있는 것은 커다란 옐로우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
“아…….”
과거 카시스 후작이 네피르에게만 선물했던 그것.
렐리안이 떨리는 손으로 동봉된 쪽지를 펼쳤다.
「이깟 보석. 이젠 내 발밑에 굴러다니는 것들이라.」
고운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쪽지는 구겨지지 않았다. 고개 숙인 렐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렇게 멋있게 나타나선.”
벌떡 일어나 말이라도 건네려는 렐리안을 이벨리아가 붙잡았다.
“가지 마. 네피르에게 좋지 않을 거야.”
“네?”
“자칫 아르티나와 카시스를 뒷배로 뒀다고 오해받으면 곤란해. 그렇지 않아도 어린 상단주는 평판과 수완에 신경 써야 할 테니까.”
홀로 이룬 것은 오로지 혼자만의 공으로 넘겨주라는 뜻.
깨달은 렐리안이 자리에 앉고, 네피르는 배려에 감사하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
과거 홀로 걷던 그 새벽과는 다르다.
이젠 긴 행렬을 뒤에 줄 세우고 떠나는 홀가분한 발걸음.
언덕을 넘기 전. 네피르는 마지막으로 렐리안을 돌아봤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치는 진한 보랏빛 눈.
네피르가 당차게 웃었다.
‘조금 더 기다려. 난 훨씬 대단해질 테니까.’
네가 질투 나도록.
네가 부러워하도록.
네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도록.
끝내 네가 날 대등한 경쟁자로. 또 자매로 인정하도록.
***
세레스는 방금 상단에서 들어온 것 중에 가장 화려한 깃털로 만든 부채를 냉큼 챙겨 팔락팔락 흔들었다.
마찬가지로 상단이 가져온 시원한 수박화채를 우아하게 떠먹으면서.
“신생 상단이랬나? 물건은 나쁘지 않군.”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아가씨.”
데퐁트 후작가에서 데려온 오래된 하녀가 척척 장단을 맞췄다.
“카시스 후작가의 사생아가 상단주가 되어 있을 줄이야. 나중에 내가 황후가 되면 저 상단을 곁에 둬도 나쁘지 않겠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세레스가 자신의 천막 앞에 도열한 황실 기사들을 향해 생긋 눈웃음을 날렸다.
근 3년간. 세레스는 오로지 본인의 이미지 관리에 전념했다.
약혼식 당일 공녀를 망신 주려다가 되레 창피를 당하고 나서 바닥까지 떨어진 평판.
반성한다는 명목으로 굳이 사람들이 다 지나다니는 황궁 정원에서 신의 말씀을 필사하고, 때론 꽃들 사이에서 흑흑 눈물 흘리기도 하고, 에드윈의 기사들과 시종들에게 아낌없이 재물을 뿌리길 3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예비 황자비라는 평을 얻은 세레스는 득의양양했다.
세레스가 가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물론 조금 크게.
“아아. 우승한 사냥감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 한마디에 예비 황자비에게 배속된 에드윈의 기사들이 부복했다.
황자를 모시듯 세레스를 모시라는 명이 있었던 탓에, 또 세레스가 그동안 들인 공 덕에, 최소한 이 기사들의 충정은 진심이었다.
“반드시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예비 황자비 전하.”
“으음…… 하지만 사냥제 우승은 정말 어렵다고 들었는데.”
“저희는 황자 전하를 모시는 황실 기사단. 실력이라면 이 제국 그 어느 기사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사실 아르티나 기사단에 대자면 심히 뒤지는 실력.
그러나 아르티나 가문은 어차피 이깟 사냥제에 참가하진 않을 것이기에, 기사들은 마음 놓고 허세를 부렸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세레스가 예의 자애로운 표정으로 웃었다.
“믿네, 경. 부디 내게 우승을 안겨주길.”
치열했던 토벌 직후. 오래간만에 개최된 것이라 많은 관심이 집중된 사냥제.
‘이런 자리에선 황실의 유일한 여인인 내가 영예를 얻어야 면이 살지.’
뒤돌아선 세레스가 부채 뒤로 악에 받친 얼굴을 숨겼다.
‘약혼자란 것은 다른 영애들에게 집적대기나 하고 있으니.’
만일 사냥감조차 받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자신의 명예는 진창에 처박혀 가십거리나 되기 딱 좋았다.
‘어차피 토벌에서 막 귀환한 이들은 참가하지 않으니, 내 기사들이 우승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야.’
여유롭게 웃으며 홀짝 포도주를 들이켜던 찰나.
- 파아앙!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다채로운 빛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참가자들과 관람자들의 환호가 축포를 뒤덮을 만큼 크게 공터를 울렸다.
“자. 다녀오렴. 나의 기사들.”
마치 황후라도 된 듯 황자의 기사를 부리는 세레스.
“아빠! 엄마! 오라버니들! 토끼! 다들 잘 다녀와! 그리고 제발 살살 좀 하고!”
마물이 아닌 이 산맥의 자연경관을 걱정하는 이벨리아.
“저기, 오라버니, 이거…….”
아르칸의 검에 손수건을 매어 주는 렐리안.
관람하는 이들의 응원이 끝나자, 각 가문의 참가자들이 배급받은 무기를 들고 관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은애하는 여인에게 우승을 안겨주겠다는, 황제 폐하의 눈에 들겠다는, 좋은 혼처를 찾겠다는, 온갖 장밋빛 꿈을 안고 관문 앞으로 걸어 나온 청년들이 일제히 눈을 비볐다.
관문 바로 앞에. 있어선 안 될 불순분자들이 섞여 있다.
‘아르티나가 하나, 둘, 셋, 넷……?’
‘루페르트 후작?’
‘황태자 전하?’
선을 세게 넘는 참가자들에 한 기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분들이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