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이브의 뽀뽀를 받았다 (181/323)


181화: 이브의 뽀뽀를 받았다
2022.06.23.


팍.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서로를 밀치며 황급히 떨어졌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보니 어지간히 충격받은 듯한 친구의 표정.

뭔가 아주 대단한 오해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 지워. 이브.”

“대단히 잘못됐다. 땅 도둑.”

변명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이벨리아가 주춤 뒷걸음질 치고선 목걸이를 더듬거렸다.


“하던 거 마저 해! 자, 자리 비켜줄게!”

“뭘 마저 해!”

“오해야! 잠깐……!”

퐁. 끔찍한 생각을 지닌 채로 탈주해버린 이벨리아.

3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두 지배자가 좌절했다. 다 같이 모인 첫날부터 대차게 망해버렸다.


“책임져, 이 자식아.”

“여기선 그 말이 더 이상한데.”

“미쳤냐, 진짜!”

“그러게 왜 눈 돌아가게 만들어선.”

루드비히에게 책임을 전가한 아가레스가 탁탁 손을 털었다.


“이브의 오해를 풀어주러 가봐야겠군.”

“마찬가지다.”

“아. 능력이 일천한 인간은 뛰어와야 하나. 안쓰럽게.”

아가레스가 눈을 아래로 깔아 루드비히를 멸시하듯 바라봤다.

이내 짙은 보랏빛 마기가 악마의 신형을 감싸고.

저런 식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것을 몇 번 봤던 루드비히가 아가레스의 소매를 슬쩍 잡았다.


“……야. 같이 가자.”

“싫은데.”

“이러기냐. 치사하게.”

“몰랐나. 치사한지.”

피식.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아가레스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 휘이잉.

뭐야. 야비하게 진짜로 혼자 가버린 거야?

잠시 멍하니 바람을 맞던 루드비히는 이를 갈며 황궁으로 전력 질주했다.


“저 개자식 진짜……!”

비밀기지에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방으로 뛰어 들어간 황태자가 체통도 잊고 외쳤다.


“시종장, 내 말 가져와!”

 

***

이벨리아는 발코니로 나와 공작저 정원에 선 아가레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스? 루이는 어쩌고?”

“글쎄.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었나 보지.”

그때 날아온 루드비히의 매, 라르고가 이벨리아의 손 위에 쪽지 하나를 톡 떨궜다.

「부끄러워서 숨은 거 아님. 가는 중.」

 


“……루이는 네가 뭐라고 말할지 이미 알고 있었나 봐. 오는 중이라는데?”

“능력이 모자라니 직감이 발달했나 보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루드비히의 준마(駿馬)가 공작저 앞에 흙먼지를 일으켰다.

이내 정원으로 들어온 루드비히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가레스에게 으르렁댔다.


“이 야비한 악마가.”

“능력 없는 본인을 탓해야지.”

“난 능력 빼면 시체다.”

“반갑다. 시체.”

2층 발코니에 턱을 괸 이벨리아는 정원에서 소란 피우는 둘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 봤다.


‘쟤네들은 평생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아.’

한숨 쉰 이벨리아가 두 친구의 머리 위에 물방울 하나씩을 사이좋게 투하했다. 마치 강아지처럼 푸르르 물기를 털며 두 소년이 2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만 싸우고 하델을 따라서 내 응접실로 와!”

과거엔 이벨리아의 방에서 함께 놀곤 했지만, 이젠 엄연히 아이가 아닌 소녀.

서로 사심 없다곤 하나 대귀족의 영애가 외간 남자를 방에 들이는 것은 괜한 소문의 시초가 되기 딱 좋았다.

하여 엘리시아의 강고한 의사에 따라 만들어진 이벨리아 전용 응접실.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서로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린 채 이벨리아의 양옆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로 왔어? 둘이 잘 놀고 있는 줄 알았더니.”

“오해라고. 이브.”

“그래. 나는 저 악마 자식과 입맞춤은커녕 손도 잡기 싫다.”

“매한가지.”

와삭. 와삭. 바구니에 찬 열매를 다람쥐처럼 잘도 베어먹으며 두 친구를 번갈아 보던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으음. 사실 언제 나 몰래 사이가 그렇게 좋아졌나 당황하긴 했지만…….”

오해가 풀렸나.


“생각해 보니까 친구끼리 만나서 반가우면 뽀뽀뽀 할 수도 있지 뭘.”

안 풀렸네, 전혀! 루드비히가 손사래를 쳤다.


“내가 돌아와서 너에게 반갑다고 뽀뽀뽀 하지는 않았잖아.”

“이브에게 더러운 단어 뱉지 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라.”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만! 그만!”

뽀뽀뽀가 더럽긴 뭐가 더럽냐. 네 입에서 나오니 더럽다. 이벨리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지배자의 유치한 말싸움이 가열되자.

- 쪽!

- 쪽!

이벨리아가 양옆에 앉은 두 지배자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마치 어린 새가 살짝 부리로 쪼고 지나가듯.


“자! 친구끼리 하는 뽀뽀뽀!”

“……!”

“……!”

“우리 서로 반가워서 뽀뽀한 걸로 치고 그만 싸워! 이게 뭐 대수라고.”

기실 제국에선 친한 친구들끼리 만나면 포옹하거나 볼에 가볍게 입 맞추는 일이 적지 않다.

깊은 친밀감의 표시이니만큼 저 둘이 나눴다는 게 좀 충격이긴 하지만…… 나름 서로 우정이 있다고 가정하면 이상한 일도 아닌걸.

그렇게 좋게 넘어가려 했건만. 둘은 마치 석상처럼 굳은 채 말이 없다.

이벨리아가 두리번거리며 두 친구를 올려다 봤다.


“얘들아?”

“…….”

“…….”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멍하니 자신들의 볼 위로 손을 올렸다.

입술 닿은 곳을 감히 건들지는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마치 데칼코마니 같은 반응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들 이래?”

그때였다.


“깨어나라! 이 사악한 마귀들!”

뒤에 웅크려 매의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어린 용이 날개로 루드비히와 아가레스의 머리를 퍽 내리쳤다.


“못된 생각이 가득한 머리를 정화해야 해!”

퍽퍽퍽. 북 두드리듯 일방적인 구타가 이뤄짐에도 두 지배자는 초점 잃은 채 미동조차 없다. 그러다가.


“누나가 입을 맞춘 곳도 닦아버려야……!”

엔리르의 앞발이 자신들의 볼에 닿으려 하자.

기꺼운 흔적이 지워지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던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어린 용의 날개를 덥석 잡아챘다.


“아야! 용 날개 살려!”

“너희! 아가 용을 그렇게 잡으면 안 돼! 소중하게 대해줘야 한다고!”

이벨리아가 엔리르를 우악스럽게 잡은 두 지배자의 손등을 탁 쳐서 털어냈다.


“아야야…….”

아픈 척하며 앞발로 눈을 가리고 훌쩍이는 어린 용.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저 약아빠진 용을 그냥.”

“네가 더 이상 이브 곁에 붙어 아양이나 떨고 있을 아가는 아닐 텐데?”

“아닌데. 나 아가 용 맞는데.”

“인간으로 변해봐.”

“……까먹었다!”

“말이 되냐.”

“……용은 기억력이 금붕어다!”

세계 유일한 용의 망언이자, 지하에 묻힌 용들이 땅을 치고 가슴을 칠 선언.

순간 드는 합리적인 의심에 아가레스가 가늘게 눈을 좁혔다.

한편 두 지배자의 추궁으로부터 엔리르를 구출해 엉덩이를 툭툭 두드린 이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마치 어미 새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양 황급히 고개 돌리고 삐약대는 두 지배자.


“어디 가, 이브?”

“내가 시끄럽게 했어?”

“가지 마.”

“조용히 할게.”

균열이고 마물이고 죄다 도륙 내다 못해 하늘까지 잘라버리고 돌아온 두 지배자의 순한 표정이 제법 귀엽긴 하다.


“잠깐 방에서 뭐 좀 가져올게. 사이좋게 놀고 있어!”

마치 모이를 주듯 관심 한 자락 건넨 이벨리아가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 타박. 타박.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아가레스가 엔리르의 날개를 휙 잡아 올렸다.


“너. 다 컸지.”

“무, 무슨! 세상 어떤 종족이 몇 년 만에 그렇게 다 크냐? 악마는 바보야?”

엔리르가 자신은 무해하다는 듯 말랑한 앞발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으나, 그 치명적인 귀여움도 아가레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인간으로 변하지 않을 리가 없지.”

“까먹었다고!”

“강제로 변하게 해줘?”

아가레스의 손에서 짙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용의 권능인 존재력마저 흐트러뜨릴 만큼 강대한 지배력.

몸을 떤 엔리르가 아가레스의 손을 뿌리치고 훌쩍 뒤로 뛰었다.


“야만적이야!”

“그게 악마의 습성이지.”

버티다가는 진짜 강제로 인간 모습으로 변하게 생겼다.


‘그럴 바엔 누나가 자리 비운 새에 후딱 변신했다가 돌아오는 게 낫겠어.’

엔리르가 테이블 아래로 휙 뛰어내림과 동시.

나타난 소년이 길고 붉은 머리칼을 나른하게 쓸어올렸다.


“……됐냐.”

용의 모습일 때와는 달리 조금 낮아진 목소리.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보다는 작지만 이벨리아보다는 한참 큰 키.

단정한 크라바트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과 소매 사이로 보이는 도드라진 핏줄.

루드비히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뭐야, 이 자식. 다 컸었네.”

“아직이야. 외형은 이래도 엄연히 아가 용이라고.”

“이브한테서 떨어져, 이제. 역겹게 어디 귀여운 척을 하면서 붙어 있어?”

“우리 종족 사이에서 내 나이면 아가 중의 아가다.”

“근데 네 종족은 멸망했지.”

“……인간 너 말 너무 심해.”

“더는 이브에게 치대지 마. 가소로운 아양도 떨지 말고.”

“아양은 내 용생 유일한 의미야.”

“그렇다면 이브에게 다 말해야겠군. 네놈이 이미 다 큰 용이 되었다고.”

그 말에 엔리르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붉은 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핏빛 머리칼이 살랑 흔들렸다.


“일러라. 일러라. 일름보.”

“……누구한테 배운 말버릇이야.”

“누나한테. 하여튼 내가 이렇게 자란 걸 우리 누나한테 말해봐라.”

“말하면 뭐.”

“누나가 굉장히 슬퍼하겠지.”

“이브가?”

“그렇지 않아도 너희를 만나고 온 다음에 누나가 얼마나 상심에 빠져 있었는데.”

“……왜?”

“황태자가 그렇게 클 동안 누나는 티스푼만큼 자라서.”

“…….”

“그런데 나까지 이렇게 훌쩍 커져 있어 봐. 아마 그 자리에서 오열할걸?”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침묵했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이벨리아가 어릴 적부터 키에 예민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평균으로 보자면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인들 모두가 상당히 장신이다 보니 약간의 콤플렉스로 남은 모양이다.


“어때. 이래도 누나한테 내 인간형 모습을 이를 거야?”

분명 말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을 담은 용의 허세. 루드비히가 쯧 혀를 찼다.

이내 응접실 문밖에서 다다다 하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리 그 누구라도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그들에게 유의미한 단 하나의 발소리.


“나 왔다!”

쾅. 이벨리아가 문을 열어젖히자.

복슬복슬한 붉은 용은 평소와 같이 꼬리를 살랑대며 문가에서 이벨리아를 맞이했다.

그리고 루드비히와 아가레스는…… 어깨를 살짝 안으로 말고 친우의 앞에 섰다.

올려다보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너희 뭔가 키가 약간 준 것 같은데?”

“내 키는 원래 이만해. 생각보다 많이 크진 않았지.”

“나 역시. 너와 별반 차이 나지도 않는다.”

“……?”

“3년 새에 이브의 키가 정말 많이 자랐군.”

“동감이다.”

“그으래? 내가 조금 컸나?”

“아주.”

“굉장히 놀랄 만큼.”

실망했었다던 친구를 위한 혼신의 부둥부둥.


“그 정도야? 세토의 키 크는 밥이 정말 효과가 있나 봐!”

홀랑 넘어간 이벨리아가 샐샐 웃음 지었다.

여전히 불면 날아갈 병아리 바라보듯 내려다보며 두 지배자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

기분이 좋아진 이벨리아가 엔리르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놓고 등을 쓰다듬었다.


“끼야앙.”

“오구. 좋아, 엔리르?”

“우응.”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마치 고양이처럼 골골대는 엔리르를 똥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들을 흘끗 일별한 엔리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벨리아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자 참다못한 아가레스가 엔리르의 꼬리를 확 잡아채 자신의 무릎 위에 철푸덕 내려놓았다.


“너 이리 와.”

“으악! 놔라! 악마!”

“토끼야! 살살!”

“알아. 그냥 나도…… 크흠. 나도 쓰다듬고 싶어서. 복슬복슬…….”

이딴 실뭉치 같은 촉감엔 관심도 없는 악마가 애써 거짓말을 지어냈다. 지금만큼은 뜻을 같이하는 루드비히가 즉각 원호했다.


“그래. 악마도 좀 쓰다듬게 해줘. 본디 털 뭉치를 쓰다듬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런 게 있어?”

“그래. 저 먼 왕국의 어느 아카데미의 어느 학자의 논문에서 봤다. 그보다 아까 방에 가서 가져온 건 뭐야?”

세상에 없는 허위 연구결과에 수긍한 이벨리아가 아, 하며 두루마리를 펼쳤다.


“짠! 이거 봐!”

“이게 뭐야? 사냥제?”

“엥? 루이도 몰랐어? 황실이 주관하는 행사인데?”

“황실 이름만 달고 실질적으로는 궁내부에서 담당하는 거라. 그러고 보니 일전에 보고서를 대충 보고 던져뒀던 기억이 나는군.”

첫 번째 두루마리에는 대략 사냥제의 취지 등이 적혀 있었다. 대충 훑어본 아가레스가 물었다.


“왜. 이브도 참여하려고?”

“아니! 난 안 해. 근데 구경은 갈 거야! 록센 산맥에서 하는 거래!”

모처럼의 여행이란 소리지. 이벨리아가 기대된다는 듯 다리를 흔들었다.


“아스랑 루이는 혹시 참가할 생각 있어?”

“인간들의 이깟 행사엔 관심 없다. 다만 네가 간다면 따르지.”

“마찬가지. 신하들의 행사에 군주가 초를 칠 이유는 없다. 네가 가면 구경이나 갈래.”

“하긴. 너희 둘 다 사냥제 상품이 탐날 그런 지위들은 아니니까!”

그 말에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일제히 코웃음 쳤다.


“증오스러운 동생의 목을 줄 게 아니라면 상품은 내게 의미가 없지.”

“인간들의 상품 따위 뭘 걸어도 하잘것없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이벨리아가 사냥제의 장소와 시간, 상품이 기재되어 있는 다음 두루마리를 펼쳤다.

곁눈질로 내용을 훑어 내려가던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모이고.

두 지배자가 뭐에라도 홀린 듯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잠깐.”

“그거 이리 내봐.”

“응? 왜?”

둘의 시선이 붙박인 곳은 우승 상품이 적힌 란.

황제 폐하 어쩌구는 집어치우고, 괄호 속에 적힌…….


“우승하면 사냥감을 바친 이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고?”

“이게 상품이야?”

“그렇대! 루이도 몰랐어?”

“그간 폐하에게 소원 비는 이들밖에 못 봐서. 이런 특전이 있는 줄은 몰랐군.”

번뜩. 황태자와 악마의 눈이 갈망으로 불타올랐다.


“며칠. 몇 시랬지.”

“장소가 록센 산맥이라고?”

갑자기 돌변하여 참으로 적극적이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조금 전까진 관심 없다며?”

두 지배자가 동시에 답했다.


“생겼다. 아주 지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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