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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감격의 뽀뽀뽀? (180/323)


180화: 감격의 뽀뽀뽀?
2022.06.20.



 
때는 청명한 초가을.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공작저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이 쏴아아- 파도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같은 방향으로 흔들렸다.


“세토! 이거 키 크는 밥 맞아?”

“맞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식사에는 단백질을 두 배 더 넣었지요.”

“역시 세토!”

“한데 아침부터 고기를 드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게 뭐가 문제야? 소가 불쌍해서 그래?”

진정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갸웃한 이벨리아가 팔랑팔랑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모처럼 가족 모두 함께하게 된 오찬은 정원에서 먹고 싶다는 이벨리아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음식들이 속속들이 정원 테이블로 옮겨졌다.


“이브 옆에 앉아야지!”

“비켜라, 세드릭.”

“아버지……, 그럼 저는 이브 왼쪽에…….”

“스읍.”

“……어머니.”

낳아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를 되새기며 세드릭이 어쩔 수 없이 이벨리아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들 둘을 가차 없이 밀어내고 원하는 자리를 차지한 휴고가 애써 위엄 있는 표정으로 아르칸에게 물었다.


“아르칸. 그 가면 뭐시기는 찾았느냐.”

“이브가 도통 협조를 안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든 찾아내겠습니다.”

“나 그 영식 마음에 든 거 아니라니까…… 다들 내 얘기를 듣고는 있는 거야?”

분명 아가레스가 내 자연력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걸 전달까지 해줬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다.


‘이번 생에 내 연애가 가능하긴 한 걸까.’

이벨리아가 찻잔을 데구루루 굴리며 맞은편에 앉은 세드릭에게 한탄했다.


“오라버니. 이제 나한텐 구혼서가 안 와.”

“쓰레기가 안 오면 좋은 거 아니야?”

“좋긴 뭐가 좋아! 나한테 말만 걸어도 아빠랑 오라버니들이 저승사자처럼 찾아간다는 괴소문이 돌고 있다고!”

“그게 과연 그냥 괴소문일까?”

“……사실이었어?”

“눈치 챙겨, 세드릭.”

이벨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카밀라가 전해준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니었어!

어쩐지 우연히 영식들을 만나도 살충제 만난 벌레들처럼 사사삭 도망가기 일쑤더라니!

이벨리아가 찌릿 노려보자 고기가 부족한 것으로 오인한 아르칸이 자기 몫의 고기를 잘라 넘겨주었다.


“아버지. 말 나온 김에 말씀드리자면, 이브에게 구혼서를 보냈던 영식들은 제 선에서 잘 정리하였습니다.”

“흐음…… 꼬리치는 것들 중 혹시 이브의 마음에 드는 자가 있을 수도 있지.”

이벨리아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좀 놔둬요!


“그러니 제대로 처리하거라. 애초에 다가오질 못하게.”

그게 아니지!

이러다 진짜로 제국 역사상 연애 한 번 못하고 죽은 공녀라는 오명을 쓰게 생겼다.

‘아빠랑 오라버니들이 영식들을 때려잡는 걸 막아야 해. 근데 우리 가족들의 괴롭힘을 당하고도 멀쩡할 존재는 이 제국에 없…… 아니 있네.’

미안하다. 토끼. 널 좀 팔아야겠다.


“아스!”

“뭐?”

“아스 말이야! 내 토끼!”

“즐거운 식사시간에 그거 얘긴 왜 꺼내.”

“혹시 내가 다른 영식들에게 관심 가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높은 안목에 닿으려면 아스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좋아. 단언컨대 이 제국에 토끼보다 잘난 영식은 없다.

그러니 토끼를 기준으로 두면, 우리 가족들이 그 아래 있는 영식들을 두들겨 팰 이유도 없어진다는 거지!


‘건실한 영식들의 목숨과 사지는 내가 보장한다!’

재빨리 생각해낸 꾀에 흐뭇하게 웃던 이벨리아가 흘끗 가족들의 반응을 살폈다.


‘엥……?’

다들 그렇다면 안심이구나. 그 악마만 견제하면 되겠구나. 정도의 반응을 보이리라고 여겼는데. 생각과는 달리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콰악. 애피타이저를 나이프로 으깨버린 휴고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가. 아직도 그 악마가 동화 속 왕자처럼 보이느냐.”

“응. 아스 왕자님 같지!”

“다시 만나도 여전히?”

“여전히!”

휴고의 표정이 한층 짙은 고뇌를 담았다.

어릴 적부터 딸이 주구장창 외치던 평이기는 하나, 그때와는 말의 무게가 다르다.

과거, 악마에게 에스코트를 맡길 거라거나, 왕자님 같다거나, 그런 이야기들은 기실 막연했다.

친애인지. 동경인지. 동정인지. 어린아이가 으레 그렇듯 그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본능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러나 성년식과 사교계 데뷔를 수년 내로 앞둔, 심지어 귀족 사회에선 약혼 적령기에 있는 소녀가 하는 이야기는 더 이상 뜬구름 잡는 소리로 치부할 순 없다.


‘지금은 친구라 하더라도, 기저에 매력적인 이성이라는 평이 혼재되어 있는 이상 더 자라면 다른 감정을 깨닫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겠군.’

극히 분노하여 입술을 깨문 휴고를 대신하여, 엘리시아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저 소중한 친구인지. 언젠가 더 깊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감정인지를 떠보기 위해.


“아가. 그 악마를 뭐라고 생각하니?”

“가장 소중한 친구.”

“얼마나 소중한지 물어봐도 될까?”

“으음…… 아주 소중한데. 굳이 정도를 재자면 내 영혼을 쪼개서 나눠줘도 아깝지 않은 정도?”

“…….”

“…….”

휴고와 엘리시아가 시선을 마주했다.

아르칸이 눈가를 덮고. 세드릭이 들고 있던 물잔을 쾅 소리 나게 내려두었다.

그들은 대악마와 이벨리아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다.

딸은 악마에게 우정을. 악마는 딸에게 경배를.

지금은 서로 그 외의 마음은 없다고 하더라도 감정이란 건 시간이 지나며 변화하고, 합쳐지게 마련.

딸이 악마에게 가진 감정이 우정이라면, 악마가 딸에게 가진 감정은 맹목적인 경배라는 것도.


‘혹시나 혹시나 했었는데. 이러다가 정말…….’

‘우리 아가의 짝이 그 악마가 되는 건…….’

 

***

어렴풋하게나마 가시적으로 다가온 이벨리아의 인연.

생경한 충격에 가족들 모두가 음식을 들지 못하고 있던 와중, 오로지 이벨리아만이 태연하게 으깬 감자를 숟가락으로 떴다.

그와 동시에 입과 숟가락 사이로 팔랑팔랑 나타난 샛노란 날벌레. 벌레라면 질색하는 이벨리아가 경기를 일으켰다.


“흐악! 벌레! 나방! 엘라…… 읍!”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여동생의 입을 막은 세드릭이 벌레의 날개를 부드럽게 잡아챘다.


“이건 나비야. 그리고 너 설마 나비 잡는 데 정령왕 부르려고 했어?”

“나비도 벌레! 벌레는 무서워. 엘라임이 무서우면 부르랬어.”

“……세상천지에 벌레 잡는 정령왕이라니.”

“이렇게 무서워할 거면 왜 정원에서 먹자고 했어?”

“벌레가 내 입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할 줄은 몰랐지. 실프!”

부르자 의지를 받은 실프가 바람으로 만들어진 촘촘한 그물을 테이블 주변에 둘렀다.


“……세상천지에 방충망으로 사용되는 정령술이라니.”

“우리 아가. 오라버니 없는 새에 아주 하찮고 대단한 정령사가 되었구나.”

이벨리아가 가슴을 펴고 뿌듯하게 웃었다.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 같아 다리와 어깨가 쉴 새 없이 들썩였다.


“자. 아가. 이것도 먹어.”

“나는 사양하지 않지!”

픽 웃은 아르칸이 아예 본인 몫의 접시를 밀어주었다.


‘그래. 악마와 아가의 관계는 천천히 생각하자. 괜히 분위기 싸하게 만들지 말고.’

아르칸이 주제를 바꿔 휴고에게 물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고 보니 사냥제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아버지께서도 참여하십니까?”

“생각 없다.”

“사냥제? 동물을 잡아?”

“그런 학살은 야만적이지. 동물이 아닌 마물을 잡는 거란다.”

“마물을요?”

“우연히 인간계로 올라오거나 균열에서 새어 나온 마물들은 몸을 숨기기 좋은 험준한 산으로 숨어들거든.”

“오가는 상인들과 제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토벌하는 취지의 사냥제야.”

“그럼 가장 커다란 마물을 잡으면 우승이야?”

“가장 강한 마물을 잡으면 우승이야.”

“우승하면 뭘 줘?”

“부상(副賞)은 매해 다르기는 한데…… 기본적인 상이라면 역시 소원을 빌 수 있다는 거?”

“누구한테?”

“황제 폐하나, 또는 자신이 사냥감을 바친 파트너에게.”

흐음. 이벨리아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별로 탐나는 상품이 아니다.

이미 이 제국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으며, 주변 존재들은 이벨리아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줬으니까.


“아빠랑 엄마는 참가 안 해요?”

“보통 사냥제는 아르칸과 세드릭 정도의 청년들이 참여하지. 노련한 가주들이 참여했다가는 사냥감 뺏는다고 눈총이나 받는단다.”

“오라버니들은?”

“물론 참여하지. 우리 아가 앞에 가장 대단한 사냥감을 바칠게.”

“나도 참여한다.”

“큰 오라버니는 렐리안에게 사냥감을 바치려고?”

“아니. 누군가 네게 소원 비는 꼴은 못 보겠어서. 그걸 막으려고.”

누군가.

누굴 의미하는지 너무 뻔하다.

엘리시아와 휴고, 세드릭의 인상도 일제히 찌푸려졌다.


“이런. 생각해보니 그렇네.”

“그 시커먼 악마나 황공한 멍멍이가 사냥제 우승 특전을 알았다가는.”

“눈이 뒤집혀서 산맥의 모든 마물을 잡아오겠죠.”

“산맥 자체를 끌고 오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그럴 순 없지. 그것들이 우리 아가에게 무슨 발칙한 소원을 빌 줄 알고.”

우승자는 무조건 아르티나 가문에서 나와야 한다.

두 아들이 장성하나, 그 대악마에 대자면 아직 부족한 것이 사실.


“나도 참가한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그렇게 휴고와 엘리시아, 무려 두 가주(家主)급의 참가 선언.

다른 말로, 초식동물의 판을 깨버리는 포식자들의 횡포 시작이었다.

***

공유자들의 귀환으로 다시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 비밀기지.

하늘을 올려다보면 흰 뭉게구름이 선명히 떠다니고, 루드비히의 매 라르고가 거대한 날개를 펴고 창공을 휘돈다.

그리고.

나무 아래 기대어 책을 읽던 아가레스와 막 비밀기지로 올라온 루드비히가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타이밍을 제대로 잘못 맞췄군.’

‘이브 없을 때 이 자식과 둘만 있게 되다니.’

과거에도 종종 이런 대참사가 벌어지는 날이면 한 명은 오두막에, 한 명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아가레스가 언짢은 티를 아낌없이 내며 탁, 거칠게 책을 덮었다.

마찬가지로 루드비히도 불편한 심기를 표하듯 걸음에 힘을 주었다.


‘저건 이벨리아와 같은 시간을 함께 걷는단 말이지.’

‘저게 그동안 그렇게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고.’

지난 3년간 마주친 적 없던 두 앙숙의 눈이 짙은 탐색의 빛을 담았다.


‘많이 컸군.’

‘여전히 봐줄 만한 낯짝이야.’

‘혹시 저게 이브에게 선을 넘는 감정을 갖진 않았겠지.’

‘혹시 이브가 저 악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진 않겠지.’

과거엔 이벨리아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를 탐한 것에서 기인한 경쟁의식이었는데.

이젠 상대방이 이벨리아에게 친구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기인한 견제의식이다.

길지 않았던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가고.

영역싸움을 하는 수컷들이 으레 그렇듯 있는 대로 기세를 피워올린 두 청년이 지척에서 마주했다.

과거 한참 차이가 났던 시야. 이젠 같은 선에서 부딪힌다.


“승격했다고.”

“내 전공이 오죽 대단했어야지. 들었을 텐데.”

“후작이라…… 그래봤자 내 신하로군.”

“망국의 폐태자가 되고 싶은가 봐?”

“그러기엔 내 무위가 제법 대단해져서. 들었을 텐데.”

“아. 검에서 빛 좀 뿜을 수 있게 됐다고 했나.”

“그걸 검의 끝을 봤다고 하지. 달리 말하면 소드마스터라 하고.”

“어두운 산책길의 끝을 보는 등불 용도로는 쓸만하겠군.”

“네놈의 끝을 보는 용도로도 쓸만할 텐데.”

“고작 그 정도 무위론 내 시작조차 보지 못하지.”

휘이잉. 시원한 바람이 가열하게 공방하는 두 지배자를 훑고 지나갔다.

에둘러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가레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돌아와서 이브를 만났던가.”

“며칠 전. 비밀기지에서.”

“어땠나.”

“아주 예…….”

“예?”

“……예고 없이 만났다.”

수상하게 굴리는 눈동자. 아가레스의 금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 혹시 이브에게 해괴한 감정을 품진 않았겠지.”

“그대가 알 바 아니야.”

회피성 대답. 그러나 그 뜻이 긍정임은 명백하다.


“이 개자식이.”

삽시간에 다가선 아가레스가 루드비히의 멱살을 잡아 뒤로 밀었다. 쾅. 단단한 나무에 세게 등을 부딪쳤으나 루드비히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마치 주인을 위협하는 적을 대하듯, 으르렁거리는 충견처럼 대악마가 경고했다.


“만일 이브가 네놈에게 자의적으로 연정을 품는다면…… 그마저 나는 이브의 의사를 경배한다.”

“…….”

“다만. 네 같잖은 지위. 어수선한 주변. 그 어느 하나라도 이브의 감정을 강요한다면, 황태자.”

“…….”

“맹세컨대 넌 내 손에 죽어.”

그러니 명심해.

이브 곁을 맴도는 그 한 걸음 한 걸음, 얕은 얼음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신중하라고.

그 고고한 자리에서 연정을 표하는 게 아니라. 개처럼 납작 엎드려 관심을 갈구하라고.

루드비히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실 그 자신도 가장 걱정하고 있던 것.


‘내가 이브를 향한 연정을 드러내는 순간. 물고 뜯을 이리떼가 한둘이 아니다.’

귀족들은 당장 약혼을 외쳐댈 테고. 이브의 사생활은 탈탈 털려 대서특필되겠지.

통상 높은 이들의 연애사가, 특히 황실 구성원의 연애사가 그렇듯 사교계부터 시장 거리에서까지 재밌는 가십거리로 소비될 터다.

아가레스를 뿌리치지 않은 채,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겐 안 둬.”

그러려고 그 많은 밤 학문을 익히고, 정사를 배우고, 검을 휘두르고, 마물을 베었으니까.


“그대가 짐작하는 것보다 나는 더 성장했다.”

그렇게 두 지배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던 찰나.

꽃밭 한가운데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느 상황이더라도 두 지배자의 고삐를 잡아챌 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가.


“어? 토끼! 식량 도둑!”

돌아오자마자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

화들짝 놀란 루드비히가 손을 뿌리침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멱살을 놓은 아가레스가 민망한 손으로 루드비히가 기대 있는 나무를 짚었다.

아차.

일명 벽치기 자세.

지척에서 더러운 숨결이 느껴진다.

루드비히 역시 피차 마찬가지였다.


“떨어져라 이 개자식아…….”

“……하. 망할.”

꽃밭에서 주춤 굳어버린 이벨리아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 어, 오랜만에 만나서 감격의 뽀뽀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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