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여전히 나는 너를
(179/323)
179화: 여전히 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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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여전히 나는 너를
2022.06.16.
이벨리아는 주스를 쪼로록 빨아들이며 온실에 마주 앉은 렐리안에게 한탄했다.
“그래서 오라버니한테 네 식경은 붙잡혀 있었다니까. 이것이냐, 이것이냐, 한 장씩 넘기면서 물어보는 거 있지!”
“역시 아르칸 오라버니께선 아주 합리적이세요.”
“……렐리안 그거 콩깍지야.”
“합리적이고 현명하시죠.”
“말을 말자. 그나저나 카밀라가 그러는데, 내게 구혼서를 보내면 소공작이 검 들고 찾아온다는 소문이 변방까지 났대.”
“아쉽네요. 카시스 영애가 찾아가서 메테오를 뿌린다는 소문은 안 나서.”
“……렐리안까지 이러기야? 나 이러다 진짜로 연애 못 하면 어떡해.”
“연애요? 이브 연애를 할 생각이었어요?”
“그럼 나는 평생 이렇게 혼자 살다 죽어?”
“제가 있잖아요!”
“그러는 렐리안은 우리 오라버니 연모하면서!”
“아르칸 오라버니만큼 멋있는 사람이 있으면 저도 찬성이에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어중이떠중이에게 우리 이브가 코 꿰는 꼴은 절대 못 봐요!”
소녀들의 대화가 으레 그렇듯,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제국 내에 괜찮은 영식은 누가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던 와중.
하녀 테사가 온실로 들어와 새로운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아가씨. 델포이 자작가의 영애 들었습니다.”
“엉. 들어오라고 해.”
균열이 발발한 이후 카밀라가 아르티나 가문에 출입하는 빈도가 제법 늘어났다.
아무래도 균열이 지방에서 흔히 발생하니, 이벨리아가 변방 소식에 빠삭한 카밀라를 자주 불러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을 지내며 나름대로 신뢰를 쌓은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밀라와 렐리안이 사석에서 함께 모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편하게 기대앉아 있다가 황급히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과하게 치켜든 렐리안이 들어오는 카밀라를 훑으며 거만하게 인사했다.
“델포이 영애. 오랜만이에요.”
평소 부드럽고 나긋한 렐리안의 어투와는 완연히 다른 것.
자신과 똑 닮은 건성인 말투에 이벨리아는 내심 당황했다.
우리 순둥이 렐리안이 텃세를 부려요……!
마찬가지로 가시가 돋친 말에 멈칫하던 카밀라가 고개를 숙였다. 청량한 귤색 머리칼이 앞으로 사르르 쏟아졌다.
“예, 카시스 영애. 제가 먼저 인사드리러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일개 자작 영애가 후작저 문턱을 넘나들기가 여간 어려워야지요.”
“그런 것치곤 공작저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감사히도 공녀님께서 초대를 해주셔서요.”
“지금 자랑하는 건가요? 엄청 부럽게?”
“그저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인데, 불편하셨다면 송구스럽습니다.”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표하는 렐리안.
숨기고 있지만 속으로 가는 칼이 빤히 보이는 카밀라.
‘둘이 안면 좀 트라고 모처럼 자리를 만든 건데.’
이벨리아가 도르륵 눈을 굴렸다.
‘벌꿀오소리랑 살쾡이의 기 싸움을 보는 것 같아.’
도무지 둘이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로 감정 상할 만큼 맞부딪힌 일도 없을 텐데.
‘혹시 연회에서 나도 모르는 일이 있었나? 내가 설마 눈치도 없이 앙숙인 둘을 하하 호호 놀라며 불러 놓은 걸까?’
으르렁거리는 두 소녀 사이에 가만히 끼어 있던 이벨리아가 입술을 쏙 감춰 물고 눈치를 살피던 와중.
쳇, 혀를 차며 과장되게 몸을 돌린 렐리안이 부러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이브. 제 마법 실력 좀 볼래요?”
“여기서? 갑자기?”
그러자 바짝 다가온 카밀라가 쾅, 두꺼운 보고서를 내려두었다.
“공녀님. 균열 토벌 이후의 지방 정세에 대한 정보를 가득 담아 왔어요. 보실래요?”
“지금? 난데없이?”
“자작 영애. 끼어들 때 끼어드세요.”
“카시스 영애께서는 마음이 넓으시다고 들었는데…….”
“공녀님과 관련된 일 한정 마음이 벼룩만 하답니다.”
얘들아. 너희 정말 왜 이러니. 이브 살려.
이 분위기를 구원해줄 용자를 찾고 있는데, 마침 열린 온실 문 바깥으로 저 멀리 지나가는 반짝반짝 황금빛 머리가 보인다.
이벨리아가 손을 번쩍 들고 크게 외쳤다.
“큰 오라버니이익!”
“세상에! 이브, 잠시만요!”
“이리 와서 같이 놀자아!”
“맙소사, 공작저에 계셨을 줄이야!”
온실 내 풍성한 식물에 가려 렐리안이 앉은 각도에서는 아르칸이 보이지 않았으나, 렐리안의 고운 얼굴은 삽시간에 붉어졌다.
거울에 비춰보니 풀어헤치고 온 머리가 지저분해 보여 다급히 정리하려는데, 속절없이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느라 오히려 헝클어져 버렸다.
그러자 당황하여 굳어버린 렐리안을 대신해 카밀라가 삐져나온 머리를 무심히 정리해주었다.
빠른 손길로 머리를 땋고, 자기 장신구를 빼서 렐리안에게 달아주고, 나아가 드리워진 꽃 몇 송이를 따서 꾸며주기까지.
“자. 됐어요.”
“고, 고마워.”
마찬가지로 수목 뒤에 가린 렐리안과 카밀라가 보이지 않았던 아르칸은, 이벨리아가 홀로 온실에서 꽃을 따먹는 줄 알고 의심 없이 다가왔다가.
“…….”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시선은 올곧게 렐리안을 향한 채.
렐리안이 삐걱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실 내 가장 커다란 백일홍 나무. 낭창한 가지가 렐리안의 머리 위에서 흐드러지게 흔들렸다. 아롱지며 떨어지는 붉은 꽃잎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오, 오라버니…… 저 렐리안이에요.”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내가 렐리안인 건 누가 봐도 아는데!
“그게, 제가 이젠 몸도 아프지 않거든요. 건강해진 렐리안이라는 뜻이었어요.”
성큼 다가온 아르칸이 렐리안의 어깨 위에 붙은 꽃잎을 부드럽게 잡아떼어주었다.
훅 끼쳐오는 진한 향기. 렐리안의 얼굴이 꽃잎만큼 붉어졌다.
“소식은 이브를 통해 들었다. 정말 다행이야.”
“그, 오라버니. 제가 차를 우렸는데, 혹시 한 잔 들어보시겠어요?”
달달 떨리는 손 때문에 뜨거운 찻물이 넘쳤다. 렐리안의 손에 닿기 전에, 아르칸이 단단한 손으로 여린 손 위를 막았다.
“조심.”
“으아아! 죄, 죄송해요!”
늘 단정하고 차분하던 열여덟 소녀는 첫사랑 앞에 그대로 빈틈을 내보였고.
항상 단단하고 정갈하던 스물셋의 청년은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감췄다.
붉어진 얼굴. 또 붉어진 귓가.
떨리는 손과 어쩔 줄 모르는 호흡.
‘오호.’
옆에서 쿠키를 오도독 씹으며 관전하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라에게 눈짓하자, 카밀라 역시 마주 찡긋한다.
‘꿀잼!’
‘동의!’
***
그렇게 아르칸 앞에서 목각인형처럼 삐걱대던 렐리안이 다음 날 아침까지 이불을 팡팡 차다가, 애써 정신 차리고 카밀라에게 어젠 미안했고 고마웠다며 짧은 편지를 쓰고 있던 때.
이크리안의 귀환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렐리안은 깃펜을 내던지고 상기된 얼굴로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오라버니!”
황태자 루드비히와 함께 수도로 복귀한 이크리안은 후작 부부와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렐리안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렐리안. 몸은 괜찮아?”
“공녀님께서 황태자 전하 편에 알리셨다며.”
렐리안이 마법에 재능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극소수의 측근들만 아는 비밀이다.
후작 부부조차 모르는 일이기에, 이크리안은 대강 문안 올리고는 렐리안을 방으로 끌어들였다.
여전히 부러질 것처럼 얇은 팔. 꼭 안으니 그저 바스러질 것만 같은 몸.
들었던 소식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이크리안은 더듬더듬 물었다.
“너, 너, 정말…….”
“오라버니. 잘 다녀왔어?”
“너 정말 아픈 거 아니야? 응? 아까처럼 뛰어도 괜찮은 거야?”
렐리안이 고개 들고 해사하게 웃었다.
“응. 공녀님의 용님이 그러셨어. 나 아픈 거 아니래.”
여동생의 건강은 이크리안이 평생 의무로, 숙제로, 짐으로 지고 있었던 것.
용하다는 소문이 도는 의사를 먼 걸음 직접 찾아가 만나고 올 때도.
지식의 보고라는 마탑의 도서관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의학 서적을 뒤적일 때도.
어쩌면 신병(神病)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설원 위 신전에 찾아가 치성을 드릴 때도.
이크리안은 매 순간 빌었었다.
여동생의 병만 낫게 해주신다면, 이깟 고생쯤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숨 끊어질 때까지 하겠다고.
그런데 아픈 게 아니었다니. 병이 아니었다니.
이크리안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손을 짚고 겨우 몸을 가누다가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우는 오라버니를 렐리안이 꽉 껴안았다.
그렇게 격앙된 감정을 한참 억누르던 이크리안이 고개 들고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또 평소와 같이 가볍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투덜댄다.
“제국 최고의 천재, 차기 마탑주, 이런 타이틀은 모두 빼앗기게 생겼군.”
“아니. 그건 다 오라버니 가져.”
“왜?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거 듣기 꽤 괜찮은 수식어인데.”
“난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꼭 하고 싶은 게 따로 있거든.”
“꼭 하고 싶은 거?”
빙그르르, 렐리안의 손 위에서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떠올랐다.
이내 천천히 허공을 한가득 메운다.
대마력을 곁에 둔 채, 렐리안이 씩 웃었다.
“공녀님의 히든카드.”
“그게 마탑주 자리보다 탐난다고?”
“비교할 걸 비교해, 오라버니. 내게 공녀님의 옆자린 황좌보다 가치 높은 자리야.”
“……광신도답다.”
손가락을 튕겨 마력을 거둬들인 렐리안이 이크리안 쪽으로 바짝 몸을 기울였다.
늘 허무로 가득 찼던 보랏빛 눈이 생기로 반짝였다.
“오라버니. 내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있는데 들어봐.”
“벌써 불길한데.”
“언젠가 공녀님께서 내 힘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시면, 내가 바로 냅다 그냥 메테오를 뿌려버리는 거지!”
“그랬다간 수도가 안녕할까, 내 동생?”
“그리고 만일 아르칸 오라버니가 위험에 처하면, 아주 멋있게 달려가서 온통 벼락으로 구워버리고 공주님 안기로 오라버니를 구해서 나오는 거야.”
“걔를 공주님 안기로? 상상하지 않은 뇌 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프러포즈하는 거지!”
“안 들은 귀 삽니다.”
이후로도 재잘재잘.
멋진 포부를 한참이나 떠드는 여동생. 짐짓 타박하면서도, 이크리안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
카시스 후작저에서 렐리안이 포부를 읊고 있을 무렵.
이벨리아는 비밀기지 내의 가장 큰 나무 아래 앉아 내리는 비를 가만히 응시했다.
토독 토독.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져 내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늘 함께 쓰던 비밀기지를 지난 3년간 혼자 사용하려니 티는 내지 않았어도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다.
‘이제 토끼가 돌아왔고, 식량 도둑도 곧 돌아오겠지.’
다시 예전처럼 복작거릴 비밀기지를 생각하니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앗. 차가워.”
조금 전보다 굵어진 빗줄기. 그런데도 왠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이벨리아는 나무 기둥에 좀 더 바짝 붙었다.
풍성한 나뭇잎을 뚫고 떨어지는 비 몇 방울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는데.
문득 뒤에서 지는 그림자와 함께, 규칙적으로 떨어지던 머리 위 빗방울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응?”
이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아주 커다란 나뭇잎.
나뭇잎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위에서 아래로 마주 닿아오는 홍안.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이 제국의 작은 태양이 옅게 웃었다.
“계약서 제6조. 비가 오는 날엔 이브의 머리 위에 나뭇잎을 덮어 줄 것.”
“……루이?”
“제대로 못 지켜서 미안. 조금 늦었어.”
“루이!”
이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루드비히가 들고 있던 나뭇잎에 구멍이 뽕 뚫렸다.
나뭇잎을 마치 목도리도마뱀처럼 목에 끼운 모습.
분명 여기선 웃을 타이밍인데…… 루드비히는 웃지 못했다.
과거 마도구로 변신한 땅 도둑의 모습을 보고 속절없이 얼굴을 붉혔던 적이 있다.
설마 했었는데.
‘그때랑 완전히 똑같잖아.’
한참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 높게 뻗은 작은 손이 눈앞에 휙휙 휘둘러진다.
퍼뜩 정신 차린 루드비히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우리가 예전엔 대체 어떤 목소리로, 어떤 분위기로, 어떤 대화를 나눴더라.
“……크흠. 많이 컸네. 내가 없는 사이.”
“루이도 많이 컸잖아. 그만큼 나도 컸지!”
전과는 부정할 수 없이 달라진 느낌.
과거 땅 도둑을 마주할 때면 어두웠던 세상이 다채롭게 물들고, 을씨년스럽던 바람이 훈풍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알록달록한 빛으로 시야가 혼몽하고, 세게 부는 돌풍으로 몸을 가누기 힘든 기분이다.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감각을 더 견디지 못한 루드비히가 단단히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사실 알고 있었어.”
“뭐를?”
“이럴 줄.”
네 편지를 보면 하염없이 웃음이 나고. 심상을 발현하는 검기가 널 담은 색이고.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겠어. 그저 외면했던 것뿐이지.
“뭐가 이럴 줄이야?”
“있어. 네게 얘기할 수 없는 것.”
수상쩍게 여긴 이벨리아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너 혹시…….”
끝을 흐리는 말에 루드비히의 심장이 갈급하게 뛰었다.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가도 또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양립할 수 없는 두 감정이 비등하게 속을 채웠다.
“내 간식 몰래 훔쳐먹었어?”
“…….”
“맞구나! 내가 오두막에 둔 타르트 훔쳐먹었지!”
“……너답다, 정말.”
하긴 땅 도둑은 아직 연정 같은 깊은 감정은 모를 만도……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받았던 얼토당토않은 편지가 있었지.
“너. 저번의 심부전증은 치료했어?”
“내 심장엔 아무런 이상도 없대. 주치의를 부르는 바람에 공작저만 발칵 뒤집혔지 뭐야.”
“그럼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사랑은 절대 아니야.”
“루이가 내 사랑에 대해서 뭘 알아!”
루드비히가 목덜미를 붉혔다.
물론 감히 내가 입에 담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가지기엔 엄두가 나지 않고, 빼앗기기엔 마음 아픈 것이라는 건 알겠다.
“그냥. 사랑은 쉬운 게 아니잖아.”
“그건 그래. 토끼가 그러는데, 내 자연력이 너무 커다래서 심장이 눌려서 뭐 그런 방식으로 두근한 거래.”
“지당하군. 그 악마는 아주 현명하니까 분명 맞는 말일 거다.”
나이스 시꺼먼 악마.
루드비히는 첫 대면 이래 늘 원수 같았던 악마를 향해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한편 이벨리아는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루이를 보면 가장 먼저 해줘야 하는 말이 있었는데. 너무 편해서 그런가, 완전히 잊고 티격태격하고 말았다.
목에 낀 나뭇잎을 찢어서 뺀 이벨리아가 루드비히의 머리에 척 손을 가져다 댔다.
삽시간에 얼굴을 붉힌 루드비히가 크게 한 걸음 물러섰다.
“뭐, 뭐, 뭐 해!”
“뭐야. 왜 그렇게 반응이 과해? 이리 와. 해줘야 할 말이 있단 말이야.”
쭈뼛쭈뼛 다가가니 다시금 머리에 다가오는 손.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참 고생 많았다. 우리 루이.”
루드비히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위로.
“전쟁터의 밤은 참 쓸쓸하다던데. 늘 걱정이었어.”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걱정.
“자주 비밀기지에 와서 기다렸어. 루이 언제 오나, 하고.”
누구도 기다리지 않은 귀환.
“어서 와.”
결핍을 오기로 메운 소년의 심장에 따뜻한 말이 소복소복 쌓였다.
그래서인가. 루드비히는 생각했다.
심장이 너무 따뜻해져서. 그래서 볼을 타고 흐르는 이 눈물도 뜨거운 것 같다고.
“이브…….”
“응. 루이.”
이벨리아가 안기라는 듯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전장 한가운데서도 감정 한 톨 드러내지 않았던 지배자가 무너졌다.
와락 안기며, 루드비히가 속삭였다.
“나 다녀왔어…….”
똑. 똑. 뜨거운 눈물이 이벨리아의 어깨를 적셨다.
모른 척, 이벨리아는 울지도 못한 채 자라버린 친구를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