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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나는 네겐 늘 져 (178/323)


178화: 나는 네겐 늘 져
2022.06.13.



 
대악마. 마계 동쪽의 지배자. 인마전쟁의 종식자.

위명은 자자하나 그 능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인마전쟁 일선에 섰던 자들조차 짐작하기 어려웠으니 오죽할까.

그러다 보니, 무위의 정점에 ‘휴고 아르티나’를 놓고 보는 제국민들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리 강하다는 대악마라면 대략 공작 각하에 준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막상 마주하니 당초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압도적인 무위에 제국민들과 기사들은 물론이요, 이벨리아마저 입을 떡 벌렸다.


‘우리 토끼 저 정도였어……?’

일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힘. 감히 어느 통상 범주에도 끼워 넣을 수 없다.

애용하던 묵빛 검은 꺼내 들지도 않은 채 다만 짧은 손짓. 까닥이자 하늘에서 우레와 같이 내리꽂히는 검은 벼락.

활강하던 발록들이 굉음과 함께 일제히 지상으로 처박히고. 미처 다 떨어지기도 전에 재로 화하여 흔적조차 사라진다.

진한 보랏빛 마기가 하늘을 가로지른 균열을 빈틈없이 덮자, 시야에 닿는 하늘 전체가 본래의 빛을 잃고 보랏빛을 띤다.

삽시간에 부피를 좁히니, 견디지 못한 균열이 꿈틀대다가 빠르게 축소했다.

무려 1급으로 명명된 균열이 허무할 정도로 신속하게 자취를 감춘다.


“이브. 잠시.”

손을 아래로 뻗어 이벨리아의 눈을 가린 아가레스가, 그대로 발을 가볍게 한 번 굴러 장막 내부의 발록과 균열을 일제히 폭사시켰다.

의지를 가진 듯한 균열의 마지막 발악이 끝나자, 검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아가레스는 그제야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라.”

“……나 이제 다 컸는데. 토끼 없는 사이에.”

“지금보다 더 커도 늘 좋은 것만 봤으면 해서.”

3년의 공백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시간에서 한발 비켜난 아가레스는 여전히 십 대 후반의 외형이었고.

시간에 발맞춰 걷는 이벨리아는 부쩍 자라 열다섯이 되어 있었다.

새삼 와닿는다. 너와 내가 걷는 곳이 다르다는 사실이.

시간축을 뜻하는 신물을 부순 걸 후회하진 않는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었기에.

세계에 갇힌 것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벌은 이미 상이 된 지 오래였기에.

다만 아무리 달려도 소중한 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건 조금 아팠다.

이를 세게 악문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눈을 맞췄다.

떠나기 전만 해도 무릎을 꿇어도 시야가 비슷했는데. 이젠 제법 올려다봐야 하는 것이 생경하다.


“착하게 명 받들고 돌아왔는데.”

“…….”

“칭찬받고 싶어.”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주인에게 하는 애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이벨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요망한 토끼가! 감히 나를 홀리고 있어!’

만나면 가장 먼저 하려 했던 말이 있었는데. 하마터면 홀랑 넘어갈 뻔했다.

이벨리아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발을 콩 굴렀다.


“너어, 답장도 할 줄 모르는 바보 토끼!”

“숱한 승전보가 모두 네게 보내는 답이었는데. 명 잘 받들고 있습니다, 하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풍파를 담담히 감내하는 고목처럼 침잠하여 가만히 휘는 금안.


“얼마나 걱정했는데?”

“하늘만큼 땅만큼! 혹시 우리 토끼보다 센 놈이 나온 건 아닌가 싶어서!”

낮게 웃으며,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후드를 다시 덮어씌우고 단정히 묶어주었다.


“나보다 강한 건 단 한 분밖에 없어.”

“토끼보다 강한 거? 누구?”

“너.”

“방금 토끼 싸우는 걸 보니까 나는 한 주먹감인데.”

“힘은 상관없어. 나는 네겐 늘 질 테니까.”

뭐지. 이게 지금 나를 농락하는 건가.

입을 삐죽이던 이벨리아는 여전히 치하해 달라는 것처럼 올려다보는 악마의 머리칼을 살짝 헝클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자신을 걱정에 빠트린 답장 건을 따지고 나서, 그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토끼야.”

“응. 이브야.”

“어서 와. 기다렸어. 많이.”

울컥. 예기치 못한 말에 아가레스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이벨리아가 눈을 여러 번 깜박일 시간 동안. 미동 없이 올려다보던 악마가 느리게 답했다.


“……다녀왔어.”

혼자서나마 돌아올 곳이라 여겼던 곳.

밀어내지 않는다면 언제고 돌아올 것이라 맹세했던 곳.

그곳에 아직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건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을 선사했다.

손 내밀며 신언처럼 내려오는 달콤한 말.


“우리 저택에 갈까?”

“……응. 가자. 우리 저택.”

답하며 손을 마주 뻗자 뿌리치지 않고 잡아 오는 보드라운 손.

아가레스에게는 세계보다 무거운 가치이자, 또 밑바닥까지 내던져도 아깝지 않을 전부였다.

***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에스코트하여 떠나자, 묘한 분위기에 환호성도 내뱉지 못하고 숨을 참고 있던 제국민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일제히 수군댔다.


“공녀님께서 대악마를 길들이셨다고 하더니…….”

“소문이 부풀려진 줄 알았는데.”

“본디 악마라는 게 저리 순한 종족이던가?”

“순하긴! 균열 닫는 거 못 보았는가! 공녀님께서 계셔서 망정이지, 저 악마가 제국을 적대했다고 생각하면…… 어휴, 소름 돋아.”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어른들과는 달리, 소녀들은 얼굴을 붉히고 꺅 소리를 질렀다.


“방금 봤어요? 루페르트 후작께서 공녀님 앞에 무릎 꿇으시는 거?”

“그 소문이 진실이었나 봐요!”

“무슨 소문이요?”

“공녀님께서 후작 각하를 사역하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거든요!”

“세상에, 정말 좋으시겠어요. 황태자 전하와 루페르트 후작 각하가 모두 내게 목을 매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요-!”

“어떤 기분이긴요. 혼절할 것 같은 기분이겠죠!”

제대로 된 출처 없이 짹짹대는 말들이 위험 수위를 간당간당 넘나들었다.

그러자 기사들의 눈치를 보던 주변 어른들이 아이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스읍. 조용히 하거라. 감히 공녀님을 두고 입을 함부로 놀리다니.”

“요 녀석들. 높으신 분들의 일은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명줄이 긴 법이다.”

엄한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들은 눈을 빛내며 서로를 바라봤다.

달콤한 로맨스를 꿈꾸는 아이들이 눈앞에서 대악마의 외모와 능력, 헌신을 목격하였으니 그 열기는 쉬이 가실 것이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뒤. 수도에는 루페르트 후작의 복귀와 전투, 후작이 공녀를 대하는 태도까지 짜하게 퍼져나갔다.

작가들은 대악마를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소설을 우후죽순 발간하기 시작했고, 이 소설들은 불티나게 팔려 평민 소녀들의 책장 한편을 장식했다.

***



“얍! 나 왔다!”

“너 이 못된 밥풀. 이제 열다섯이나 먹었으면 그 버릇 좀…… 헉, 주, 주군!”

어김없이 이바스 저택 문을 쾅 열어젖힌 이벨리아에게 버럭 성을 내던 마르바스는, 뒤따라 들어오는 아가레스를 보고 냅다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없는 사이 이브를 그렇게 대했나.”

“아닙니다! 진정 아닙니다! 그, 그치, 밥풀? 아니, 이벨리아님?”

이벨리아는 삽시간에 찌그러져 버린 잔디 대악마 앞에서 의기양양 팔짱을 꼈다.

그동안 나를 그리 핍박하더니 아주 꼴좋다!


“엣헴. 날 뭐라고 불렀느냐?”

“이벨리아님!”

마르바스가 이벨리아를 향해 울망울망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야. 미운 정도 정이라고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밥풀이라고?”

“하, 작고 하찮은 밥풀을 어디 감히 태산처럼 위대하신 이벨리아님께 가져다 대겠습니까!”

“그렇지?”

“아무렴요!”

3년간 디저트를 빼앗기길 수십 번. 한입에 확 잡아먹어 버리겠다고 위협당하길 수백 번.

이벨리아는 얄밉기 그지없던 잔디를 마음껏 농락했다.


“아, 맞다. 맞다. 전에 잔디가 뭐라고 했더라…… 아스가 더 이상 나를…….”

“으아악! 으아악! 이벨리아님!”

슬쩍 손을 비비며 입 모양으로 살려줘라, 하는 꼴이 퍽 우습다.


“흐음. 살려줄까?”

“엉. 제발.”

“어엉?”

“엉엉엉. 물개 흉내였습니다. 감히 제가 반말할 리가 있겠습니까!”

키득 웃은 이벨리아가 토끼의 손을 잡아끌었다. 더 놀렸다간 잔디 악마 정말 울게 생겼다.


“자! 됐어! 이제 잔디 물개는 신경 끄고 우리 올라가서 놀자!”

아가레스는 까닥 턱짓으로 부하를 치워버리고, 순순히 이벨리아의 뒤를 따랐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보아하니 그간 얼마나 티격태격했을지 알만하나, 이브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면 그걸로 됐다. 굳이 그의 기준에 맞추고 싶진 않았다.

마르바스가 신선한 쿠키와 빵 등으로 매일 채워두는 디저트 방.

두 친구는 애용하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친애하는 이들 사이에선 으레 그런 순간이 있다.

짧지 않은 시간의 공백도 마주 짓는 웃음 한 번에 없던 것처럼 메워지는.

아가레스는 슈크림이 가득 든 동그란 모양의 빵을 이벨리아의 앞으로 밀어주며,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래서. 그건 누구야.”

“응? 누구?”

“신년 연회 때 만난 가면.”

“몰라!”

“어떻게 만났는데. 자세히 말해줘.”

“뭐야, 토끼. 우리 그것 말고도 할 얘기가 아주 많지 않아? 예를 들면 균열이라든가, 우리 토끼의 편지 보낼 줄 모르는 얕은 지식이라든가.”

“균열도 편지도 나중에. 지금 이것보다 시급한 주제는 없어.”

내가 연회장에서 영식 하나와 부딪힌 것이 균열도 무식도 제쳐둘 중요한 주제란 말인가.

제법 과한 토끼의 반응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으음. 사람들이 너무 달라붙어서 발코니로 도망쳤는데, 들어가려다가 마침 나오려는 영식과 부딪혔어!”

“외형은.”

“글쎄? 가면 때문에 잘 모르겠는데. 왜?”

“……그냥 궁금해서. 그럼 특징은. 나이라든가, 키라든가.”

“으음. 나보다 두세 살 정도 많아 보였으니까 아마 성년식을 막 치른 것 같았고, 온통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어.”

이벨리아가 오렌지주스를 쪼로록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근데 신기한 게, 아무도 그 영식이 누군지 모른대.”

“……주변 사람들한테 그 영식이 누구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어?”

“궁금하니까. 뭔가 분위기가 독특했거든. 그리고 심장도 쿵 했고.”

“심장 쿵 그거. 사랑 아니고 심장 문제다. 의사에겐 보였어?”

“그렇지 않아도 루이가 똑같은 말을 해서 주치의를 불렀는데, 내 심장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어.”

“당연히 주치의는 알 수가 없지. 네 자연력이 급격히 늘어나서 그래. 네가 강해져서.”

“자연력 때문에 심장이 아프기도 해?”

“네 친구 그 보라 머리를 봐. 마력 때문에 아팠다잖아.”

어린 친구의 사랑 타령을 막아보려는 대악마의 눈물겨운 노력.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도 저 얼굴과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하면 왠지 맞는 말 같다.

홀랑 넘어간 이벨리아는 타당하다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식은 다음에 또 만나면 토끼한테도 알려줄게. 다시 보면 느낌상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뭔가 귀족에겐 어울리지 않는 오묘한 걸음걸이? 그런 게 있었어.”

“꼭 알려줘.”

없애버리게. 아가레스는 뒤이어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감히 부딪혔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기 울타리 안에 가둬둔 사람들 아니면 별 관심도 없던 이벨리아의 관심을 이 정도로 받고 있다는 것도 괘씸했다.

가면 영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이벨리아가 환히 웃으며 아가레스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래서 토끼야. 토벌은 어땠는지 얘기 좀 해봐. 제국신문 속보에 당근은 어떻게 된 건지도.”

제게로 돌아온 관심이 기쁜 듯, 오로지 주인 앞에서만 순종적인 대악마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의 무위를 자랑했다.

아주 오래. 해가 완전히 기운 시간까지.

***

이바스 저택에서 느지막이 돌아온 다음 날 오후.

- 부우우우우.

공작저에 주인 일가의 귀환을 알리는 뿔피리가 길고 낮게 울려 퍼졌다.


“핫! 이 방귀 비슷한 소리는!”

방에서 엔리르를 껴안고 뒹굴뒹굴하던 이벨리아가 벌떡 일어섰다.

도도도 달려가 발코니를 휙 열어젖히니 저 멀리 보이는 것은 역시나 아르티나의 깃발.

가주와 직계만 사용할 수 있는 대장기(大將旗)가 세 개인 것을 보아하니, 수도 인근에 있던 휴고와 며칠 전 잠시 출정한 세드릭, 그리고 지방에서 돌아오던 아르칸이 오는 길에 만난 모양이다.

이벨리아는 깃발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얼른! 얼른!”

그렇게 잠시 뒤. 세 부자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공작저 중문(中門)을 지나 저택 앞까지 도달했다.

세 명 모두 마치 습관처럼 가장 먼저 시선 둔 곳은 이벨리아의 방 발코니.

몸을 쭉 빼고 있다가 눈 마주친 이벨리아가 환히 웃으며 휙 뛰어내렸다.


“아빠! 오라버니들! 와아! 내가 간다!”

“이브!”

“아가!”

“그렇게 오면 안 되지!”

탈것으로 애용하는 바람의 정령을 부르려나 했는데 부르지 않는다.

의도를 눈치챈 휴고가 곧바로 발코니 아래로 달려와 어린 딸을 받아 들었다.


“오자마자 심장이 쫄깃해지게 하는구나. 아가.”

“받아줄 줄 알고 있었지!”

몸을 바르작 움직여 휴고의 품에서 내려온 이벨리아가 아르칸의 앞에서 환히 웃었다.


“오라버니이- 아주 보고 싶었어-.”

몸을 흔들며 끝을 흐리는 말투.

어릴 적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아르칸이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토벌 중 간간이 공작저에 들른 휴고와 대부분 공작저에 머문 세드릭과 달리, 아르칸은 일절 귀환한 적이 없었다.

그간 술잔에 비친 달을 봐도 여동생 생각, 쨍하게 뜬 해를 봐도 여동생 생각.

그렇게 지낸 3년이다.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얼굴, 팔, 다리, 손을 찬찬히 훑었다.

출정하던 날보다 제법 성숙해져 있었다.

제국의 안위와 귀족의 의무를 위해 출정한 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여동생의 성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그 마음을 눈치챈 듯, 이벨리아가 대뜸 아르칸에게 두 팔을 쭉 뻗었다.


“오라버니. 번쩍 안아줘.”

안아들며,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가. 언제 이렇게 컸어.”

“오라버니 없는 새에 공작저를 지키면서 이렇게 컸지!”

“이젠 아가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네.”

“난 오라버니한테는 평생 아가야.”

가만 내려다보며 마주 웃던 아르칸이 집사 하델에게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작은 주인님.”

“이브 앞으로 구혼서가 꽤 왔을 텐데.”

“예, 산더미처럼 쌓여서 처리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전부 가져오도록.”

“예.”

아르칸의 품에 안긴 이벨리아가 눈짓과 손짓으로 하델에게 명했다.


‘하델. 가면 영식에 대한 건 비밀이야.’

‘예, 아가씨?’

‘그걸 말했다간 이 제국 영식들 씨가 마를 거야.’

‘아하. 알겠습니다. 아가씨.’

끄덕인 하델이 냉큼 아르칸에게 전했다.


“도련님. 아가씨께서 마음에 드는 영식이 생기셨다고 하십니다.”

“하델! 말하지 말라고!”

“아, 손을 파닥파닥 하시길래 말하라 명하신 줄 알았습니다.”

집사 분명 일부러 그랬다.

그 가면 영식 마음에 안 들어 하더니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랬다!

아르칸의 부드럽던 금안이 마치 야차의 것처럼 살기를 띠었다.


“누구야. 그게.”

“몰라! 얼굴 못 봤어! 그리고 딱히 마음에 든 것도 아니었어!”

“……집사. 다 가져와. 명단.”

“구혼서를 보낸 영식들의 명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이 제국 영식들의 명단. 전부.”

아르칸이 손을 꺾자, 두둑,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전쟁 2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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